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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누가 너를 남달리 구별하였느냐 (출 8:22~24, 고전 4: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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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비 도슨이란 청년이 있습니다. 3세 때 미국으로 입양된 한국인입니다. 한국 입양아 출신인 그는 미국의 스키스타로서 세계 챔피언입니다. 스키 월드컵에서 우승을 휩쓸었으며 2006년 토리노 동계올림픽 프리스타일 스키 남자 모굴에서 동메달을 땄습니다. 동계올림픽 당시 그는 한국인 친부모를 찾고 싶다고 하여 화제가 되었습니다. 그 때 토비 도슨의 모습을 보고 부산에 사는 김재수씨는 한눈에 “내 아들이다”라고 하였습니다. 그 당시 TV에 비치는 아버지의 모습은 누가 봐도 붕어빵이었습니다. 한국 이름이 김수철인 토비 도슨의 아버지는 원래 이름이 봉석인데 부산 중앙시장과 자유시장 사이 골목에서 잃어버린 아들이라고 하였습니다. 그 때 토비 도슨의 아버지라고 자청하는 사람이 여럿이 있어서 DNA검사를 하였고 그 결과 김재수씨가 아버지로 확인되었습니다. 이 사실을 안 아버지는 “내 그럴 줄 알았어요. 내 아들 맞다고 했잖아요. 내가 친아버지니까 검사는 받으나 마나입니다”라고 자신 있게 말하였습니다. 26년을 헤어져 있었지만 아버지는 아들을 한눈에 알아보고 일년을 기다린 것입니다. 아버지는 아들을 눈으로 알아보는 것이 아니라 피로 알아봅니다.

  아기들을 보세요. 낯선 사람을 보면 울며 낯을 가리던 아기들도 할아버지나 할머니에게는 덥석 안깁니다. 그래서 “피는 못 속여”라고 합니다. 이게 혈육이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와 피를 나눈 관계입니다. 혈육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를 한 눈에 알아보십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알아보시는 본능이 있습니다. 이사야 43:1에는 “내가 너를 지명하여 불렀나니 너는 내 것이라”고 합니다. 출애굽기 33:12에는 “나는 이름으로도 너를 알고 너도 내 앞에 은총을 입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것으로 하나님은 우리를 너무나 자세히 아시고 다른 사람과 구별한 사람입니다.

  성도는 가장 아름다운 이름입니다. 구약에 27번, 신약에 62번 등장하는 단어입니다. 이 말은 다분히 신약적 용어입니다. ‘거룩한 무리’라는 뜻입니다. 거룩이란 말은 ‘잘라서 떼어놓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 말의 어원은 ‘베어내다’란 말입니다. 거룩해진다는 것은 표준적인 것들로부터 따로 떨어져 구별되는 것입니다. 일반적인 것에서 베어내어 따로 구별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베어 따로 떼어 놓는 것이 하나님의 작업입니다.

  저의 신학교 동기생 가운데 한 분은 신학교에 다닐 때 다른 날은 캐주얼한 복장을 하고 있다가 야외에 가는 날에는 넥타이를 매고 나오곤 했습니다. 한번은 제가 물어봤습니다. “아니, 산에 갈 건데 넥타이는 왜 매고 나오냐?” 그의 대답이 걸작입니다. “사진 찍잖아”. 야외 단체사진을 보면 항상 뒤에서 손가락으로 V자를 그리며 서 있는 사람이 한둘씩 있습니다. 자기를 잘 보이게 하려고 그럽니다. 많은 사람이 함께 단체사진을 찍지만 사람들은 용케 자기를 찾습니다. 대개 사진을 보자마자 자기부터 찾습니다. 이것이 자신을 찾으려는 인간의 본능입니다.

  많은 사람들 중에 하나님의 백성이 함께 살지만 하나님은 자기 사람, 자기 백성, 자기 자녀를 찾으시고 금방 알아보십니다. 하나님의 자녀를 구별하는 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남달리 우리를 구별하신 하나님의 마음을 헤아리기 바랍니다. 모든 것을 구별하여 공급하시는 하나님을 알 수 있기를 바랍니다.

첫째, 하나님은 우리를 구별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누가 너를 구별하였느뇨”라고 물으십니다. 대답이 무엇이지요? 한번 생각해 보세요. 첫째, 아무도 없다, 둘째, 조상님이다. 셋째, 하나님이시다. 넷째, 세상이다. 몇 번입니까? 대개 객관식 문제는 삼 번입니다. 셋째가 정답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별하셨습니다. 때로는 반대로 가고, 때로는 모르고 해를 끼쳤지만 그러나 훗날 알고 보니 “모태에서 나를 택정했다”는 고백이 나올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이미 선택하시고 구별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선택은 과거를 통하여 지금 느끼는 것입니다.

  성별(consecration)이란 말은 ‘함께’(con), ‘거룩한’(sacer)이란 말입니다. 하나님과 함께 거룩한 것이 성별입니다. 우리의 거룩함, 우리의 성별은 그 근원이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니면 구별이 없습니다. 거룩함도 없습니다. 성별은 매우 고독한 것입니다. 사회인들이 우리에 대해 가지는 기대로부터 멀어지게 합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구별되지 못하고 우리는 구별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우리에 대하여 온갖 질투, 시기, 반목, 비난이 끊이지 않습니다. 구별되지 못한 자의 반항입니다.

  출애굽기 8:22에는 “그 날에 나는 내 백성이 거주하는 고센 땅을 구별하여 그 곳에는 파리가 없게 하리니”라고 합니다. 8:23에는 “내가 내 백성과 네 백성 사이를 구별하리니”라고 합니다. “내 백성이 거주하는 고센 땅을 구별하여”의 ‘구별’이란 말은 ‘페두트’란 단어입니다. 이 말은 본래 구속 혹은 구원을 의미하는 말입니다. 그 땅을 구별하였다는 말은 그 땅을 구속하였다는 말입니다.

  토마스 왓슨은 그의 책 ‘묵상’에서 왜 하필이면 핍박인가 라고 묻습니다. 첫째로, 핍박은 하나님이 내리신 법령입니다. 둘째로, 핍박은 하나님의 성도들에게 시련을 주시는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핍박은 위선자들과 참 성도들을 구별해냅니다. 위선자들은 감람산까지는 그리스도를 따라가겠지만 갈보리 산까지는 따르지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고난을 하나님의 백성을 구별하시기 위한 한 수단입니다.

  고센 땅은 애굽의 삼각주입니다. 나일 강에 더 많은 영향을 받아야 함에도 불구하고 해 받지 않았습니다. 나일 강에 영향을 받아야 하는 고센은 하나님이 구속하셔서 아무 재앙이 미치지 못합니다. 이스라엘은 애굽에 살아도 애굽 사람이 아닙니다. 이스라엘은 애굽에 살아도 해를 당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사람은 세상에 살아도 세상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는 세상에 살아도 세상이 당하는 해를 당하지 않습니다. 레위기 20:26에는 “너희는 나에게 거룩할지어다. 이는 나 여호와가 거룩하고 내가 또 너희를 나의 소유를 삼으려고 너희를 만민 중에서 구별하였음이니라”고 합니다. 에스겔 44:23에는 “내 백성에게 거룩한 것과 속된 것의 구별을 가르치며 부정한 것과 정한 것을 분별하게 할 것이며”라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거룩하라고 하신 것은 구별되게 살라고 하신 말씀입니다.

  ‘진실 게임’이란 텔레비전 프로그램이 있습니다. 아닌 사람을 골라내는 게 여간 어렵지 않습니다. 어떤 때는 진짜 여자를 찾아내는 데 한눈에 봐도 남자인 게 금방 표 나는 사람이 꼭 한 사람이 있습니다. 일부러 그렇게 하는 것 같아요. 그래야 재미가 있지요? 남자 같은 여자 속에 여자 같은 남자를 섞어놓으니 찾아내기가 힘듭니다. 어려운 게임을 하고 있습니다. “진실의 종아 울려라”고 외치지만 진실의 종이 울리지 않습니다. 가짜를 구별하는 것이 이렇게 어렵습니다.
  뭔가를 구별하는 직업들이 있습니다. 제작 과정에서 결함이 있는 제품을 구별하는 직업도 있고, 땅콩이나 식품에 상한 것들을 골라내는 직업도 있고, 닭 같은 식품을 부위별로 분류하는 직업도 있습니다. 제가 잘 아는 어떤 분은 미국에 이민 와서 닭고기를 부위별로 분류하는 작업을 2년을 했습니다. 그 분은 아침에 출근하면 벨트 위에 지나가는 닭만 쳐다보고 부위별로 골라내는 작업을 했습니다. 저를 만나자 그 분은 자기는 죽을 때까지 닭고기는 안 먹는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숙련된 작업을 하는데도 실수할 때가 있습니다. 어떤 일에 흔히 달인이라 불리는 이도 있습니다. 그러나 달인도 실수하지만 하나님은 한번도 실수 없이, 한 번도 잘못 구별하신 적이 없이, 정확하게 구별하십니다.
  오늘 우리의 모습은 우리가 어제 내렸던 선택의 결과입니다. 내일은 오늘 우리가 선택한 결과가 될 것입니다. 모든 날, 특히 죽음 이후의 우리의 모습은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한 결과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를 구별하여 거룩한 백성이라고 하시고, 우리 땅을 구별하여 재앙이 미치지 못하게 하십니다.

둘째, 하나님은 우리에게 모든 것을 주셨습니다.

  왜 하나님은 우리를 구별하셨습니까? 성경은 무엇이든 다 주시기 위하여 구별하셨다고 합니다.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뇨 네가 받았은즉 어찌하여 받지 아니한 것같이 자랑하느뇨”라고 하십니다. 구별하여놓고 많은 것을 주시려는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과 함께 있으면서 우리만 많이 주시기가 안 되었기 때문입니다.

  제가 헌병 교육 받을 때입니다. 오래 전에는 헌병학교가 따로 있었습니다. 그러나 육군종합행정학교가 신설되면서 헌병학부가 되어 이사를 했습니다. 육군종합행정학교는 새로 신축되어 그 때까지 만해도 손 볼 때가 많았습니다. 자연히 사역 시간이 많아졌습니다. 길도 다듬고, 산도 깎았습니다. 학과 시간 외에 틈난 나면 사역을 하고 식사하러 가곤 했습니다. 그런데 중대장이 어떻게 저를 잘 봤는지 아니면 일을 못하게 생겨서 그런지 “이성희 열외, 옆으로 빠져”하는 것입니다. 다는 중대원들이 땀을 흘리고, 비를 맞으면서 사역할 때 저는 중대장실 청소하고, 바지 다림질하고, 구두 닦곤 했습니다. 흔히 이런 걸 특과라고 합니다. 그래서 지금도 다림질이나 구두 닦는 걸 잘 합니다. 구별된다는 것은 큰 혜택입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구별하신 것은 혜택을 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신앙의 삶에 혜택 없는 구별은 없습니다. 무언가를 주시지 않는 거룩은 없습니다. 모든 것이 다 하나님이 내게 주신 것입니다. 스스로 얻은 것처럼 생각하는 것은 가장 어리석은 일입니다. 재물이 내가 스스로 얻은 것입니까? 지식이 내가 스스로 얻은 것입니까? 미모가 스스로 내가 얻은 것입니까? 이건 정말 스스로 얻은 것이 아닙니다. 약간 고친 것 외에 전부 내게 주신 것입니다. 우리의 지위나 명예, 모든 것이 스스로 얻은 것이 아니라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자랑할 것이 아무 것도 없습니다.

  예레미야 9:23에는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지혜로운 자는 그의 지혜를 자랑하지 말라 용사는 그의 용맹을 자랑하지 말라 부자는 그의 부함을 자랑하지 말라”고 하십니다. 에베소서 2:9에는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함이라”고 하십니다. 우리가 가진 모든 것은 하나님이 우리를 선택하신 대가로 주신 선물들입니다.

  우리가 아무 것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이 예물을 드릴 때의 고백을 들어보세요. 역대상 29:14에는 “나와 나의 백성이 무엇이기에 이처럼 즐거운 마음으로 드릴 힘이 있었나이까 모든 것이 주께로 말미암았사오니 우리가 주의 손에서 받은 것으로 주께 드렸을 뿐이니이다”라고 합니다.
  탈무드에는 재미있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학식이나 자신의 능력이라고 하는 것은 값비싼 시계와 비슷하다고 합니다. 남에게 자랑하려고 몸에 지니고 다니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이 시간을 물을 때에 비로소 시계를 꺼내야 한다고 합니다. 우리의 모든 것이 자랑하기 위하여 꺼내는 것이 아니라 남에게 유익을 주기 위한 도구여야 합니다. 이것이 주신 분의 뜻입니다.

  주시는 것은 하나님의 본성입니다. 하나님은 복을 쌓을 곳이 없도록 주십니다. 퍼내도 퍼내도 마르지 않는 우물과 같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하나님의 모든 백성에게 끝이 없이 주셔도 모자라지 않는 것입니다.

  제가 어릴 때에 기억입니다. 그 때는 참 먹을 것도 없고 가난할 때입니다. 할머니께서 잔치집이나 어딜 다녀오시면 할머니 손수건에 떡과 과자 등을 싸가지고 오셨습니다. 깨끗지도 않은 수건에 떡이 묻어 손으로 떼서 주셨습니다. 손수건이 더러워 보여 안 먹겠다고 해도 할머니는 그래도 먹으라고 하셔서 도망치곤 했습니다. 그 때 먹을 걸 그랬습니다. 그걸 먹어도 안 죽었을 텐데, 그래야 할머니께서 기뻐하셨을 텐데 말입니다. 손자에게 주고자 하는 것은 할머니의 본능적 사랑이 발동했기 때문입니다.

  제가 미국에 있을 때 제가 섬기던 교회에 어느 할머니가 출석하셨습니다. 그 할머니는 당뇨를 심하게 앓고 계셨는데 늘 손에 피가 잘 통하지 않으셔서 여름에도 흰 목장갑을 끼고 계셨습니다. 멘소레담 같은 약을 늘 바르고 다니셨기 때문에 가까이만 가도 약 냄새가 났습니다. 그런데 주일에 교회에 오시면 늘 가방에서 사탕이나 과자를 꺼내 아이들에게 주시는 겁니다. 당뇨 환자들이 비상용으로 가지고 다니시던 사탕인데 우리 아이들이 어릴 때 그 할머니가 주시는 사탕이나 과자를 먹을 리가 없지 않습니까? 미국에 얼마나 사탕이나 과자가 흔한데 약 냄새 나는 걸 먹겠습니까? 아이들은 “엄마, 그 할머니 주는 거 싫어”하지만 매 주일 할머니는 아이들에게 찾아다니며 주십니다. 그 재미로 교회 나오시는데 안 받으면 섭섭하지요? 주는 것은 할머니의 본성입니다. 우리 하나님의 본성적 사랑을 여기에 비하겠습니까? 하나님은 받지 않겠다고 해도 받으라고 하시는 저항할 수 없는 은혜를 베푸시는 사랑과 은혜의 하나님이십니다.
  마태복음 7:11에는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고 하십니다.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선물로 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아들까지 주시는데 뭘 더 아끼겠습니까? “다 주마, 더 주마, 다 가지고 가라”고 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좋은 선물을 뜻하는 라틴어 ‘보나 보나’(bona bona)를 저작에 많이 사용했습니다. 그는 하나님을 ‘라지토’(largitor) 즉 ‘선물을 아낌없이 주시는 분’이라 불렀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모든 것은 선물입니다. 아낌없이 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은 좋은 것들입니다. 사랑하는 자에게 주시는 아버지의 선물입니다.

결론

  순교자 손양원 목사님은 순교자란 말로 부족한 분이라고 봅니다. 저는 그분을 족히 순교성자라 칭할 수 있는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목사님의 두 아들, 동인이와 동신이가 공산주의자들에게 순교하였습니다. 두 아들이 순교한 다음에 목사님은 교회에 감사봉헌을 드렸습니다. “두 아들을 순교자로 주심을 감사합니다”라고 봉헌 봉투에 썼습니다. 그리고 당시에 1만원을 봉헌하셨습니다. 당시에 일반인들의 봉급이 한달에 80원이었습니다. 큰 아들 동인이는 미국 유학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유학비로 모아 놓았던 돈을 모두 봉헌하였던 것입니다. 지금도 여수 애양원에 가면 그 때 봉헌봉투가 진열되어 있습니다. 손목사님은 두 아들을 함께 잃고도 얻었다고 하셨습니다. 잃은 것이 하나도 없고 얻은 것만 있다고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가장 좋은 길을 주셨습니다. 왜 하나님이 성도에게 나쁜 것을 주시겠습니까? 우리도 잃은 것 같지만 모든 것이 얻은 것입니다. 우리를 살펴도 잃은 것이 없을 것입니다.

  ‘saint’ 즉 성도, 성자라는 말과 ‘sanctified’, 거룩하게 구별된 이란 이 두 말은 같은 어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거룩하게 구별되었다’는 말은 ‘특별한 목적에 의해 따로 구분된’ 또는 ‘특별한 목적을 위해 예비해 두었다’는 뜻입니다. 성도는 하나님께서 특별한 목적 때문에 따로 구분하시고 예비하신 사람들입니다.

  여러분은 특별한 목적으로 구별되신 것을 아시지요? 특별한 목적이 무엇인지 아시지요? 세상을 구원하는 것입니다. 세상을 구원하라고 주신 것들이 우리가 가진 것들입니다. 우리의 모든 보이는 소유, 보이지 않는 소유들이 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구원하라고 주신 선물들임을 인정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구별하신 목적에 어긋나지 않는 삶을 사세요. 가진 것을 자랑하지 말고, 하나님의 선하신 목적을 이루는데 쓰는 것들이 되게 하세요.

  하나님의 구별하신 사람으로 빛나는 보석처럼 세상을 사시는 여러분 되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이성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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