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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신앙 같은 불신앙 (삼상 15:1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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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같은 불신앙
사무엘 상15:17-23

사회가 불안정하고 소위 먹고 살기 힘든 세상이 될 수록 여러 가지 사회 현상들이 생겨납니다. 어린아이들을 유괴하여 살해하는 악질 범죄가 생기기도하고 사회에 불만을 품은 소수들이 남의 재산에 해악을 끼치고자 방화를 저지르기도 하는 막무가내 식의 일들이 생겨나곤 합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최근까지도 볼 수 있는 가슴 아픈 일들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드러나는 일들도 있는 반면에 현대 사회의 어두운 기류 중에 하나가 보이지 않는 곳에서 양심에 거리끼는 일들도 서슴없이 저지르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이 사실은 더 무서운 일입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이미테이션(Imitation)>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말은 가짜라는 뜻입니다. 진짜 같은 가짜를 모방하는 것을 이미테이션이라고 합니다. 양심의 범죄이지요.

언젠가 프랑스에서 재미있는 전시회가 열린 적이 있습니다. 이름 하여<가짜 상품 박람회>입니다. 다른 나라들이 프랑스의 유명한 상품들의 상표를 도용해서 마치 프랑스 제품처럼 만들어 놓은 것을 전시해 놓은 것입니다. 진짜 같은 가짜를 가장 많이 그리고 잘 만들어 놓은 나라가 어디냐 하는 것인데 태국과 중국, 대만 그리고 한국이 세계최고의 가짜상품 왕국으로 소개 되었습니다. 실제로 우리나라에 보면 가짜가 정말 많습니다. 가짜보석, 가짜그림, 가짜도자기, 가짜의약품, 가짜유명의류, 심지어는 먹는 식품까지 거의 모든 상품에 가짜가 있습니다. 이뿐이면 다행입니다. 가짜의사, 가짜변호사, 가짜청와대원, 가짜박사, 가짜목사까지 가짜투성입니다.

그래서 이 사회는 더욱 더 불신이 벽이 높아만 갑니다. 믿을 수가 없습니다. 물건도 사람도 믿을 수가 없으니 어떻게 합니까? 그런데 문제는 어느 시점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갈수록 진짜와 가짜를 구별하기 힘 든다는 것입니다. 진짜 같은 가짜들이 진짜보다 더 그럴듯하게 나돌고 인정받고 있으니 보통문제가 아닙니다.

그래서 상점에 들어가서 물건을 사더라도 미국 사람은“돈을 얼마나 내야 그 물건을 살 수 있느냐?”를 묻습니다. 그리고 영국 사람은“그 물건이 얼마나 질기냐?”를 묻고, 프랑스 사람은“최신 유행이냐, 아니냐?”를 묻고, 일본 사람은“이 물건 갖다 팔면 얼마의 이익이 남느냐?”를 묻습니다. 그런데 한국 사람은“이 물건 가짜냐, 진짜냐?”를 먼저 묻고 난 다음 값을 흥정한다는 것입니다. 이게 무슨 망신입니까? 진짜 같은 가짜가 판을 치는 세상에 살다보니 우리의 정신이라는 것이 노이로제에 걸릴 지경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이처럼 진짜 같은 가짜가 판을 치는 세상에 살아가는 신앙들의 모습을 어떨까요? 신앙세계에도 진짜 같은 가짜 신앙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슬픈 일입니다. 진리 같은 비 진리가 있고, 진실 같은 거짓이 있고, 겸손 같은 교만, 헌신 같은 자기욕심 특히 순종 같은 불순종 등 가지각색의 가짜 신앙들이 우리 가운데 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얼마나 슬픈 일입니까? 오늘 우리가 심각하게 생각해 봐야 할 문제는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 하는 것 같은데 실상으로는 불순종하는 그야말로 신앙 같은 불신앙의 모습들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 가운데 자리 잡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었던 본문이 바로 이러한 신앙을 교훈해 주는 부분이라 할 수 있습니다. 본문의 주인공은 우리가 잘 아는 사울 왕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느 날 사울에게 한 가지 명령을 하셨고 결과적으로 그 명령을 사울이 이행했습니다만 그 일로 인해서 사울이 하나님께 칭찬을 받은 것이 아이라 책망을 받았습니다. 아니 책망이라기보다는 무서운 심판을 받았다고 해야 옳을 것입니다. 얼마나 큰 사건이었으면 이 사건 다음에 선지자 사무엘이 죽는 날까지 사울을 보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다음 장인 16장에 가면 하나님이 사울 대신 다윗을 왕으로 세우는 장면이 나옵니다.

왜 사울에게 이런 비극이 일어 난 것입니까? 이유는 간단하지만 큰 문제였습니다. 바로 사울의 잘못된 신앙 때문이었습니다. 순종 같은 불순종의 모습을 보인 사울이 스스로 망하게 되는 모습을 봅니다. 그런데 우리가 잘 보아야합니다. 겉으로 볼 때는 사울이 그토록 잘못했나 싶을 정도로 분간이 안갑니다. 여기에 우리가 빠지는 함정이 있습니다. 잘 순종한 것 같지만 절대적으로 불순종했던 사울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그것을 잘 보아야 합니다. 먼저 하나님께서 사울에게 무엇을 원하셨는지를 삼상15:3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무엘 선지자를 통해서 아말렉족속을 진멸하라는 명령을 내립니다. 그 명령을 전달하는 사무엘선지자는 혹시 사울이 잘못 알아들을까봐 그랬는지 아주 자세하게 설명까지 합니다. 그들을 진멸하되 남녀, 젖 먹는 아이, 우양, 약대, 나귀 등 아말렉족속에게 속한 모든 것들을 다 멸하라고 합니다. 좀 무자비하게 들릴지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그 명령을 하신 데는 그 만한 이유가 분명히 있습니다. 아멜렉족속은 이스라엘의 역사가 시작될 때부터 이스라엘을 괴롭혀 왔던 원수 중의 원수였습니다. 출애굽한 이스라엘에게 가장 먼저 싸움을 걸어 온 족속일 뿐만 아니라 광야 40년 동안 따라 다니면서 뒤에 처지는 나약한 사람들, 병약자들, 노약자들만 골라서 죽였던 아주 악랄한 족속들이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오래전에 이미 아말렉을 심판하실 것을 약속하셨는데 출17:14에 그 말씀이 기록 되어져 있습니다.“여호와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이것을 책에 기록하여 기념하게 하고 여호수아의 귀에 외워 들리라 내가 아말렉을 도말하여 천하에서 기억함이 없게 하리라.”이제 바로 그 심판의 날이 온 것입니다. 그리고 사울은 그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 왜 그러시냐고 묻지도 않았습니다. 21만 명의 병력을 총동원해서 아말렉 전 지역을 휩쓸며 하나님의 명령을 준행하는 듯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사울이 하는 그 행동 가운데 담겨 있는 진상이 하나님을 향한 신앙에 의한 순종이 아니라 순종을 가장한 불순종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8,9절을 보면 나타납니다.“아말렉 사람의 왕 아각을 사로잡고 칼날로 그 모든 백성을 진멸하였으되 사울과 백성이 아각과 그 양과 소의 가장 좋은 것 또는 기름 진 것과 어린 양의 모든 좋은 것을 남기고 진멸키를 즐겨아니하고 가치 없고 낮은 것은 진멸 하니라.”이것이 사울의 순종 같은 불순종 즉, 신앙 같은 불신앙의 모습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말씀을 새겨들어야 합니다. 사울과 같은 삶을 살아가면서 신앙도 사울처럼 그렇게 가짜 신앙을 가지고 자랑아 살아가고 있지는 않는지, 여태껏 불순종을 하면서도 순종이라고 여기며 뻔뻔하게 살아오지는 않았는지, 정말 신앙 없는 사람인데 신앙인인척하며 살아가고 있지나 않는지를 살펴보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 속에 숨겨진 신앙 같은 불신앙의 모습이 깨달아지면 즉시 회개하고 새로이 하나님 앞에 설 수 있기를 바랍니다.

먼저 사울의 불신앙은 자신의 뜻에 맞춰 하나님의 뜻을 수정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명령하시기를 분명히 아말렉을 진멸하라고 하셨는데 사울은 아각왕을 죽이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왜 그랬는지 성경은 우리에게 밝혀주지 않습니다만 당시의 관행에 의하면 전쟁에서 승리하면 적장을 잡아다가 궁중에 노예로 삼아서 자기의 승전업적을 기념한다는 것입니다. 어쩌면 사울에게도 이런 자기 업적을 나타내기위해 관행을 따르고 하는 마음이 있었고 그래서 그랬는지 모릅니다.

하여간 이유야 어찌됐건 하나님의 명령을 스스로 수정하고 변경한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사울 나름대로 뜻이 있었고, 계획이 있었고, 욕심이 있었고 그것에 따라 하나님의 뜻을 변경하는 실수를 저질렀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오늘 우리들의 모습이 아니라고 항변할 수가 없습니다. 바로 하나님의 말씀을 액면 그대로 순종하는 것 아니라 자신의 취향에 맞춰서, 자기 욕심을 이루어가면서 첨가하고 삭제하며 살아가는 우리의 순종 같은 불순종의 신앙이 아닌가 싶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분명히 알면서도 자기의 뜻에 맞지 않는다고 그 명령을 내 기준에 맞추어 수정하는 1%가 바로 불순종이요, 불신앙임을 알아야 합니다.

그리고 사울의 신앙 같은 불신앙의 두 번째 모습은 하나님을 빙자해서 목적과 동기를 합리화하는 것입니다. 사울이 승리에 도취되어 갈멜에 기념비를 세우고 전쟁에서 빼앗은 좋은 소를 끌고 길갈로 내려가는 길에 선지자 사무엘을 만납니다. 이 때 사무엘이 소를 끌고 가는 사울에게 하나님이 진멸하라고 하셨는데 소를 왜 끌고 가느냐고 묻자 그의 대답이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려고 좋은 놈들로 골라서 가져가는 중이라고 뻔뻔한 대답을 합니다. 참으로 인간 그 자체의 모습을 여기에서 보게 됩니다. 자기 욕심 때문에 챙겨 두었던 짐승들이었음에도 하나님이름을 빙자하여 그 동기를 합리화 하고 있는 모습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라는 거룩한 포장을 하고 있지만 그 속에는 자기를 위한 이기적이고 육신적인 이익만을 추구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빙자한 목적과 동기의 합리화 이것이 바로 우리들을 향한 경고의 메시지입니다. 속내는 자기 욕심을 위하여 하는 일이면서 함부로 하나님을 위한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내 욕심을 이루기 위해 겉으로 태연하게 하나님을 빙자하지 말고 표면적인 동기나 부분적인 목적이 아닌 전체 목표가 목적의 전부가 정말 하나님만을 위하여 살아가는지를 한번 생각해보아야할 것입니다. 사울의 변명을 사무엘은 더 이상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16절에 보면“가만히 계십시오!”라는 말을 합니다. stop!하라는 말입니다. 더 이상은 못 들어주겠으니 그만하고 입 다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17-19절까지의 말씀을 합니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이렇습니다.“하나님께서 특별히 총애하여 임금삼고 믿음직스러워하시며 일을 시켰는데 왜 그 말씀대로 하지 않고 자기 욕심만 채웁니까?”라는 책망의 말입니다.

그에 대한 변명이 20,21절에 나오는데 사울의 신앙 같은 불신앙의 세 번째 모습입니다. 바로 책임전가의 모습니다. 이 사건의 책임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아니고 누구라는 겁니까? 21절에 보면 여전히 하나님께 제사하기 위함이었다고 주장하면서 사울이 교묘하게 강조하는 것이“다만 백성이...”라는 말로 이 사건의 책임자가 따로 있는데 바로 백성들이 그렇게 하자고 해서였다는 책임을 회피하는 말로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습니다. 얼마나 유치한 일입니까? 여러분, 무슨 일이 있어도 변명은 하지 말일입니다. 내가 한 일은 내가 책임질 수 있어야하고 나아가 회개해야합니다. 만약에 사울이 자기욕심을 인정하고 회개했더라면 하나님께 버림 받아 왕의 자리에서 쫓겨나는  일은 없었을지도 모릅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진짜 같은 가짜가 아무리 많은 세상에 살아간다고 할지라도 우리의 신앙마저도 진짜 같은 가짜신앙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순종 같은 불순종이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디트리히트 본회퍼(Dietrich Bonhoeffer)]라는 학자는“백번의 설교보다 단 한번의 순종이 낫다.”고 말했습니다. 순종 같은 순종, 진실 같은 진실, 헌신 같은 헌신으로 신앙인다운 신앙인의 삶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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