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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주 되시는 표징을 내게 보이소서(2) (삿 6:33 ~ 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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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때가 되어 이스라엘과의 바른 관계 회복을 위해 요아스의 아들 기드온을 선택하였습니다. 그는 나와 말씀하신 이가 주 되시는 표징을 보여 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하나님의 사자를 만난 후에 제일 먼저 여호와 샬롬의 표징을 받았습니다.
두 번째로 기드온은 여호와의 말씀대로 그날 밤에 아비 집에 있는 바알의 단을 헐고 단 곁에 아세라 상을 찍으므로 여룹바알이 되는 표징을 받았습니다.
이때에 미디안 사람과 아말렉 사람과 동방사람들이 다 모여 요단을 건너와서 이스라엘 골짜기에 진을 치고 있었습니다(6:33).

저들의 이러한 행동은 이스라엘을 약탈하려는 행동이었습니다. 이러한 위기 상황에서 기드온은 다시 한번 하나님의 표징을 구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소명에 대하여 자기 확신의 긍지를 얻기 위함입니다.
히스기야도 자신의 생명이 연장되었음을 확인하기 위해서 하나님께 표징을 구했습니다. 하나님이 기꺼이 히스기야에게 표징을 보여 주었습니다.

열왕기하 20장 8-11절에 『히스기야가 이사야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나를 낫게 하시고 삼일 만에 여호와의 전에 올라가게 하실 무슨 징조가 있나이까 이사야가 가로되 여호와의 하신 말씀을 응하게 하실 일에 대하여 여호와께로서 왕에게 한 징조가 임하리이다 해 그림자가 십도를 나아갈 것이니이까 혹 십도를 물러갈 것이니이까 히스기야가 대답하되 그림자가 십도를 나아가기는 쉬우니 그리할 것이 아니라 십도가 물러갈 것이니이다 선지자 이사야가 여호와께 간구하매 아하스의 일영표(日影表) 위에 나아갔던 해 그림자로 십도를 물러가게 하셨더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인간들이 하나님의 약속을 믿지 못하고 표징을 구하는 것은 인간들의 한계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연약성이라고 일축하기에는 아쉬운 점이 많습니다. 다만 자기 확신을 구하기 위함이라는 평가가 정당합니다. 기드온의 요구에 하나님께서 기드온에게 다시 한번 또 주 되신 표징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Ⅰ. 여호와의 신이 기드온에게 임하신 표징입니다.

본문 6장 34절에 『여호와의 신이 기드온에게 강림하시니 기드온이 나팔을 불매 아비에셀 족속이 다 모여서 그를 좇고』라고 했습니다.
『여호와의 신이 강림하시니』에서 라마쉬( )는 ① '옷을 입히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이 말은 하나님이 기드온을 옷 입히시듯이 하나님의 신으로 무장시켰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신으로 무장을 한 기드온은 싸움에서 승리할 수 있었습니다.
② 하나님의 영이 기드온을 점령했다는 뜻이 있습니다.
기드온이 하나님의 영에 의해 정복을 당했다는 말입니다. 기드온이 미디안에게 정복당하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영에 정복당했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영이 기드온을 점령하여 마치 든든한 끈으로 묶듯이 기드온을 꼼짝 못하도록 만들었다는 말입니다.

여호와의 신은 능력 있는 신입니다.
이사야 11장 2절에 『여호와의 신 곧 지혜와 총명의 신이요 모략과 재능의 신이요…』라고 했습니다.
이처럼 우리가 하나님을 붙잡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우리를 붙잡아 주어야만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주님을 붙잡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주님께 붙잡혀야 됩니다.
구약에서 『여호와이 신이 임했다』는 말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창세기 41장 38절에 『바로가 그 신하들에게 이르되 이와 같이 하나님의 신이 감동한 사람을 우리가 어찌 얻을 수 있으리요 하고』라고 했습니다.
민수기 11장 25절에 『여호와께서 구름 가운데 강림하사 모세에게 말씀하시고 그에게 임한 신을 칠십 장로에게도 임하게 하시니 신이 임하신 때에 그들이 예언을 하다가 다시는 아니하였더라』고 했습니다.
'여호와의 신이 임했다'는 말에 대한 신약적 의미는 보혜사 성령이 함께 하신다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5장 26절에 『내가 아버지께로서 너희에게 보낼 보혜사 곧 아버지께로서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이 오실 때에 그가 나를 증거하실 것이요』라고 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우리 속에 내주 하시는 성령을 근심되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에베소서 4장 30절에 『하나님의 성령을 근심하게 하지 말라 그 안에서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인치심을 받았느니라』고 했습니다.
에베소서 5장 18절에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고 했습니다.
여호와의 신이 기드온에게 임하시므로 그는 이스라엘을 구원할 위대한 지도자로 나타날 수 있었습니다.
여호와의 신이 임하기 전에 포도주 틀에 올라 밀 타작을 하던 겁쟁이 기드온이 아닙니다(6:11).
이제는 자신이 작고 약하다고 탄식하던 기드온이 아닙니다(6:15).
그는 이제 여호와의 사자가 말한 대로 큰 용사였습니다(6:12). 여호와 샬롬의 표징과 여룹바알의 표징이 소명에 대한 확신의 표징이라면 여호와의 신이 강림한 표징은 기드온이 능력을 덧입는 표징입니다.

1) 그는 나팔을 불 수 있었습니다.
본문 6장 34절에 『…기드온이 나팔을 불매…』라고 했습니다. 이것은 전쟁을 알리는 신호입니다. 나팔 소리로 이스라엘 백성들을 통솔한 일은 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나안 행군을 시작하는 백성들을 효율적으로 통솔하기 위해 은나팔 제작을 지시했습니다(민 10:1-2). 그리고 나팔을 부는 신호를 규정했습니다(민 10:3-10). 200만 명에 달하는 무리를 모세와 아론이 통솔하기 위해 나팔소리를 이용하도록 했습니다. 따라서 나팔소리는 이스라엘을 주권적으로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육성과도 같았습니다.

2) 백성들이 기드온 앞으로 모였습니다.
본문 6장 34절에 『…기드온이 나팔을 불매 아비에셀 족속이 다 모여서…』라고 했습니다. 나팔소리를 듣고 기드온 앞으로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3) 백성들이 기드온을 좇았습니다.
본문 6장 34절에 『…그를 좇고』라고 했습니다.
본문 6장 35절에 『…기드온이 또 사자를 온 므낫세에 두루 보내매 그들도 모여서 그를 좇고…』라고 했습니다.
기드온의 씨족과 바알 신을 섬기는 자들이 전쟁에 참여하기 위하여 기드온을 따랐습니다. 이것은 일대 종교적 혁명입니다. 기드온은 므낫세 지파의 아비에셀 출신입니다. 따라서 므낫세 지파가 제일 먼저 합류했습니다.

4) 백성들이 기드온을 영접했습니다.
본문 6장 35절에 『… 또 사자를 아셀과 스불론과 납달리에 보내매 그 무리도 올라와서 그를 영접하더라』고 했습니다.
아셀과 스불론과 납달리 지역에 있는 사람들이 기드온을 영접했습니다. 주변에 사는 족속들까지 합류함으로 기드온은 예기치 못한 지원군을 얻은 셈입니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주 되시는 표징은 그의 약속대로 우리에게 성령을 보내신 것입니다(요 15:26; 16:7-11; 행 1:8). 성령 받은 주의 제자들은 성령강림 이전의 제자들의 모습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부인하지 아니했습니다. 성령은 곧 주의 제자들의 능력이었습니다.

주의 교회는 복음의 나팔을 불었습니다. 예수를 따랐습니다. 예수를 우리의 구주로, 우리의 목자장으로, 왕으로 영접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고난의 길을 가는 것을 오히려 즐거워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성령 받은 자의 능력입니다.
성령의 충만을 받은 자는 겁쟁이가 아닙니다. 소신 없이 눈치를 보는 기회주의자가 아닙니다. 자신이 받은 사명에 대해 도망치는 비열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래서 사도행전 19장 2절에 『가로되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가로되 아니라 우리는 성령이 있음도 듣지 못하였노라』고 했습니다.

스데반은 성령이 충만하여 순교할 수 있었습니다. 사도행전 7장 55절에 『스데반이 성령이 충만하여 하늘을 우러러 주목하여 하나님의 영광과 및 예수께서 하나님 우편에 서신 것을 보고』라고 했습니다.
성령이 아니고는 예수를 주로 고백할 수 없습니다. 고린도전서 12장 3절에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성령의 감동을 입은 사람이 아니고는 하나님의 뜻을 받을 수 없습니다.
베드로후서 1장 21절에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니라』고 했습니다.
어떤 표징입니까?

Ⅱ. 이슬의 표징입니다.

본문 6장 36-37절에 『기드온이 하나님께 여짜오되 주께서 이미 말씀하심같이 내 손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려 하시거든 보소서 내가 양털 한 뭉치를 타작 마당에 두리니 이슬이 양털에만 있고 사면 땅은 마르면 주께서 이미 말씀하심 같이 내 손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줄 내가 알겠나이다 하였더니』라고 했습니다.
미디안과 접전을 앞둔 기드온은 하나님께 한 번 더 주 되신 표징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타작마당에 둔 양털 뭉치에만 이슬이 있게 하고 사면 땅은 마르게 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해 주시면 주께서 이미 말씀하심같이 기드온 자신의 손으로 이스라엘을 구원하실 줄 알겠다고 했습니다(6:37).
그대로 되었다고 했습니다. 이튿날 기드온이 아침 일찍 일어나서 양털을 취하고 이슬을 짜니 물이 그릇에 가득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기드온의 요구대로 해 주었습니다. 기드온은 하나님께 이번에는 그 반대로 양털만 마르고 사면 땅에는 이슬이 있게 해달라고 조심스럽게 요구했습니다.
일차적으로 그의 요구가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다시 표징을 요구하는 것을 보면 미디안과의 전쟁을 앞두고 불안한 그의 심정을 넉넉히 짐작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상대가 미디안 군대이기 때문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군대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전투였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약속을 거듭 확인하고 싶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미디안 군대로 인하여 아직까지 불안해하고 있는 기드온에게 그의 요구대로 임마누엘의 표징을 다시 한번 보여주었습니다.

본문 6장 40절에 『이 밤에 하나님이 그대로 행하시니 곧 양털만 마르고 사면 땅에는 다 이슬이 있었더라』고 했습니다.
특별히 기드온이 이슬의 표징을 요구했던 본문 36절부터 40절까지에 나타난 하나님에 대해서 여호와( )로 나타나지 않고 엘로힘( )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여호와는 ①이방신과 구별된 하나님 그리고 ②언약을 지키시는 하나님과 ③백성을 구속하시는 하나님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출애굽기 6장 7절에 『너희로 내 백성을 삼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니 나는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어 낸 너희 하나님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지라』고 했습니다.
엘로힘(( )은 이방신을 포함한 모든 신 중에 신이신 하나님을 언급할 때 그리고 하나님의 주권과 창조의 능력을 강조할 때(창 1:1; 출 20:1; 신 6:4; 삼하 22:32) 주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렇다면 기드온이 찾은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일 뿐만 아니라 자연 만물까지도 주장하시고 섭리하시는 하나님이심을 보여주는 말입니다.
엘로힘( )은 하나님이 복수형태를 취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다신론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형태는 복수(( )이지만 실질적으로는 단수로 취급되었다는 점에서 오히려 삼위이시나 일체이신 하나님의 존재 양식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창세기 1장 26절에 『하나님이 가라사대 우리의 형상을 따라 우리의 모양대로 우리가 사람을 만들고…』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기드온은 이방의 모든 신들 중에 신이신 능력의 하나님께 표징을 요구했던 것입니다. 구국의 소명자로서 임전태세를 갖추고 마지막 결단을 내리기 위한 최종점검 역시 사람에게 있지 않고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신본주의 자세입니다.

여기 양털에 맺힌 이슬은 이스라엘을 상징하고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미디안을 구별시킨다는 말입니다. 이슬은 하나님의 은총의 표상입니다.
양털이 사면의 이슬을 흡수해 버리는 표징은 이스라엘의 승리를 알려주는 묵시입니다. 양털에 이슬이 내리지 않는 것은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떠날 때 한 방울의 이슬도 내리지 않고 이스라엘은 메마른 광야가 될 것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묵시적 교훈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기드온이 하나님께 표징을 구한 것은 결코 사욕을 위하여 구한 것이 아닙니다.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하여 구했습니다.
말하자면 이스라엘을 미디안의 침략에서 구하기 위하여 하나님께 표징을 구했습니다. 미디안과의 전쟁에서 반드시 승리해야만 한다는 양보할 수 없는 일념에서 구한 것입니다. 결코 하나님을 의심했다든지 하나님을 시험하고자 함이 아니라 전쟁승리의 확증을 얻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임마누엘의 현장 체험의 대망으로 승화되었습니다.
이 말의 신약적 표현은 교회운동을 위하여 표징을 구하는 것입니다. 곧 일하기 위해서 표징을 구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사람은 여호와의 신으로 충만합니다. 바로 하나님의 능력을 덧입어 담대하게 나아갑니다.

약한 자가 강하게 됩니다. 겁쟁이가 큰 용사로 변화됩니다.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사람은 이슬의 표징을 체험합니다. 이 이슬의 표징은 승리의 확증입니다.
우리들의 눈에 흐르는 눈물은 바로 이슬의 표징입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시는 임마누엘의 현장에는 항상 땀과 눈물과 피가 있습니다. 그리스도인들은 주를 위해서만 땀과 눈물과 피를 흘립니다. 땀과 눈물과 피를 아무 때나 흘리지 아니합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지혜이자 성별의식입니다.

우리 눈에 눈물이 있는 동안 승리는 우리의 것입니다. 우리 눈에 한 방울의 눈물도 보이지 않을 때 메마른 광야같이 되고 맙니다. 믿지 않는 골육을 생각할 때 눈에 눈물이 흐릅니다. 선교지역의 영혼들을 생각할 때 눈물과 함께 저들을 돕기 위해 우리 몸에는 신성한 노동의 땀이 흐릅니다.
우리가 받은 교회운동의 사명수행에 방해를 받을 때 순교의 피가 쏟아집니다. 하나님의 영을 받은 사람이 아니고는 흘릴 수 없는 눈물과 땀과 피입니다.
오늘도 주님의 몸 된 교회 운동의 고난의 현장에서 흘리는 눈물과 땀과 피는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이가 우리의 주가 되신다는 확실한 표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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