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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그가 행하시는 대로 (요일 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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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개 높은 '진주기생' 이야기>
아마 7-80년대에 대학 생활을 하신 분들은 리영희 교수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군사 독재 정권하에 반체제 운동으로 유명하신 분이시지요.
『전환시대의 논리』, 『우상과 이성』, 『8억인과의 대화』등의 책들을 써서
이른바 운동권 출신 학생들의 사상적 대부로서 큰 영향을 끼친 분이었습니다.
이 분의 생애와 사상에 대해서 대담한 내용을 엮은
『대화』라는 책에서 나오는 이야기 한 토막입니다.

진주기생과 얽힌 개인적인 체험이 자기 인생에 큰 깨달음을 주었다는 것입니다.
리영희 교수가 젊은 날 통역 장교로 있었을 때 장교들끼리의 회식이 있었습니다.
진주 시내의 허름한 술집에서 각자 색시들을 옆에 끼고 술자리를 했는데,
리영희씨가 한참 동안 술을 마시다가 보니 순간적으로 정신을 잃었습니다.
술에 깬 리씨가 옆을 보니 자기 파트너였던 술집 여성이 사라져버렸습니다.
2차까지 갈 줄로 생각했던 터라 화가 머리끝까지 난 리씨는
즉각 지프차를 타고 그 여성이 사는 집을 물어 물어 직접 찾아갔습니다.

마침내 초라하기 짝이 없는 초가집에 사는 그 여성이 리영희씨 앞에 나타났습니다.
리씨는 자신이 산천초목도 떤다는 지리산 토벌대의 장교요, 그 여자는 화류계의
여성이라는 이유 하나 때문에 막 대해도 된다고 생각해서 버럭 고함부터 질러댔습니다.
그런데 그 여성은 아주 위엄이 가득찬 모습으로 오히려 리씨를 훈계하는 것이었습니다.
화가 난 리씨는 권총을 잡아 빼 마당 밖으로 한 발을 쏜 채
당장 내려오라고 버럭 소리를 지르며 협박을 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버선발로 달려 내려와 무릎을 꿇고 살려달라고 빌 줄 알았던
그 여성은 조금도 흐트러지지 않고 오히려 당당한 태도를 보이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사람을 총으로 겁을 줘서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젊은 장교님은 나중에 큰 분이 되겠지만 사람을 그렇게 다루는 것이 아닙니다.
진주기생은 강요당해 아무데나 막 따라가지 않습니다."

너무도 당당하게 거꾸로 자기를 훈계하는 진주기생 앞에
리영희씨는 순간적으로 무릎을 꿇고 큰절을 올렸다고 합니다.
술집 여자라고 자기 맘대로 막 해도 된다고 생각했던
자신의 오만이 너무도 부끄러웠으며, 역으로 왜소한 자기와 달리
그 여성의 인간적인 크기가 너무도 위대해 보였기 때문이지요.
이 때부터 리영희씨는 인간의 값을 직업이나 신분, 재산과
학벌로 따져서는 안 된다는 중요한 교훈을 얻었다고 합니다.

지식인들이 흔히 빠지기 쉬운 것이 관념론입니다.
알기는 참 잘 아는데 그 아는 것을 제대로 실천하지 못한다는 말이지요.
리영희씨도 이런 경험을 하기 전까지는 인간을 외모로 대하면 안 된다는 사실을
지식적으로 알기는 너무도 잘 알았지만 막상 행동은 그렇게 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러다가 그 기백 있는 진주기생을 만난 다음에 큰 깨달음을 얻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고민은 알고 있는 바를 제대로 실천하지 못한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특별히 예수 믿는 우리는 거의 매일 설교를 통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얼마나 많이 알고 있습니까?
게다가 방송 설교에다 인터넷 설교에다 유명한 목사님들의 설교들을
수없이 듣고 있기 때문에 우리의 귀는 보통 고급이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더욱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또한 말을 얼마나 잘 합니까?
그래서 요즈음에 그리스도인들이 천국에 가면 귀와 입만 둥둥 떠다닌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의 대언자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오늘 우리 기독교의 가장 큰 고민은 알고 있는 지식을
제대로 실천하지 못한다는 지행불일치(知行不一致)에 있습니다.
이런 맥락에서 본문 말씀을 읽으면 큰 은혜가 됩니다.
요한 일서 기자는 신학과 윤리의 일치, 혹은 지식과 실천의 일치를 강조합니다.

본문의 요점은 너무나 간단합니다.
하나님을 참으로 아는 사람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알고 있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거짓말쟁이요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은 위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아래로 이웃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제 본문 말씀을 하나 둘 자세히 살펴보겠습니다.
지금까지 살펴본 것처럼 요일서 기자가 글을 쓰는 전형적인 패턴이 있습니다.
먼저 그리스도 예수께서 하신 사역으로 말문을 연 뒤, 윤리적 권면으로 끝을 맺습니다.
본문 말씀도 마찬가지입니다.

1-2절을 보면 우리가 죄를 지을 때 그리스도 예수께서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우리를 변호해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하시는 사역 중에 가장 큰 사역은 죄를 용서해주시는 사역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면서 죄를 짓지 말아야 하는데 그 비결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행하신 대로 하면 된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어둠 속에 거하지 않으시고 빛 안에서 걸으셨던 것처럼
우리 역시 어둠을 떠나 빛 안에 걸어갈 때 우리는 죄로부터 벗어날 수 있습니다. 

본문 1절은 우리가 죄를 짓지 않도록 하려는 것이 이 글의 목적이라고 했습니다.
할 수 있으면 죄를 짓지 않고 사는 것이 좋은데 연약한 인간은 죄를 피할 수 없습니다.
정말로 알고도 죄를 짓지만 모르고서도 죄를 지을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죄를 짖지 않을 수 있는 능력은 우리가 신령한 몸으로 변형되어 천국에 들어갔을
때에나 가능하지 이 땅위에 사는 한 아무도 죄를 떠나 살 수 없습니다. 
이렇게 예수를 믿으면서도 죄를 짓고 사는 것이 우리의 고민이지요.
행동으로는 못하지만 마음 속으로 얼마나 많은 죄를 짓습니까?

그런데 우리가 죄를 지어도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의 죄를 대신 떠맡아 용서해주시는 대언자, 즉 변호인이 계시기 때문이지요.
의로우신 우리 구주 예수께서 우리가 죄를 지을 때마다
우리의 모든 죄를 떠맡아 변호해주신다는 것입니다.
법정 소송이 있을 때, 우리가 선임한 변호사는 우리의
모든 문제를 대신 떠맡아 우리를 적극 변호해줍니다.
마찬가지로 한 점 흠이 없고 의로우신 우리 구주 예수께서 우리의 죄를 변호해주십니다.

그런데 우리 믿는 사람들만 위한 것이 아니고 온 세상의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십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 위에서 보배로운 피를 흘리신 다음 우리 믿는 이들뿐만
아니라 온 인류가 다함께 죄를 용서받고 구원받을 길이 활짝 열리게 된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그리스도인들만 위한 구주가 아니십니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온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한 만인의 구세주이십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 옆에 계시는 것보다
더 큰 위로가 세상에 또 어디에 있겠습니까?

우리는 알고도 죄를 짓고 모르고도 죄를 짓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마음 속으로 숱한 죄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그 때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하나님 아버지 앞에 우리의
모든 죄를 대신 변호해주신다는 사실, 얼마나 큰 위로가 됩니까?

오늘 여러분이 죄를 지었습니까?
그리스도 예수께서 여러분의 변호자가 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 예수께서 변호 못할 죄는 하나도 없습니다.
아무리 우리의 죄가 주홍같이 진홍같이 붉을지라도, 양털같이 흰눈같이 희게 해주실 것입니다!

자, 이와 같이 우리가 죄를 지어도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의 대언자,
즉 변호자가 되시기에 조금도 걱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마음놓고 죄를 지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어렸을 때 어떤 실수를 저질러서 어렵게 될 때
우리 아버지가 대신 그 모든 문제를 해결해줍니다. 
실수할 때마다 아버지가 뒤에 있기 때문에 크게 염려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밥먹듯이 실수를 되풀이한다면
결국 아버지로부터 심한 꾸중을 듣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인격이 성숙해져감으로서 우리는 점점 실수를 줄이게 됩니다.

그리스도인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큰 죄를 저질러도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중보자가 되시고 대언자,
변호자가 되시는 그리스도 예수께서 계시기 때문에 크게 염려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좀 더 성숙하고 좋은 그리스도인이라면 죄를 짓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서 본문 1절에서도 이 편지를 쓰는 목적이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할 수 있으면 죄를 짓지 말아야 하는데 그 비결이 어디에 있을까요?
6절을 보세요.
"저 안에 거한다 하는 자는 그의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
하나님 안에 있다고 하는 사람은 자기도 그리스도 예수께서
사신 것과 같이 마땅히 그렇게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연약하기 짝이 없는 우리는 매일 죄를 짓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만일 그리스도 예수께서 사신 그대로 살아가면 죄를 피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본받아'라는 말도 있듯이 우리가
그리스도를 본받아 살면 죄는 저절로 피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 =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
자, 그런데, 3-5절이 참 중요합니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윤리적 실천 행위가 동전의 양면처럼 함께 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신학과 윤리가 접목되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지행일치(知行一致), 즉 아는 것과 행하는 것이 일치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3-4절 말씀을 보세요.
"우리가 그의 계명을 지키면 이로써 우리가 저를 아는 줄로
알 것이요 저를 아노라 하고 그의 계명을 지키지 아니하는 자는
거짓말하는 자요 진리가 그 속에 있지 아니하되."

오늘 우리가 하나님을 안다는 확신을 어떻게 가질 수 있을까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때 우리는 하나님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에는 십계명을 비롯한 수많은 계명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잘 지키는 사람은 하나님을 아는 사람이요,
계명을 알고서도 지키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을 안다고 하면서도 하나님이 주신 계명을 지키지 않으면
그 사람은 거짓말쟁이요 하나님의 진리가 그 속에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가르침에 순종하지 않으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안다고 주장하는 이도 실상은 허울좋은 주장이요 거짓말쟁이일 뿐입니다.
예수께서 행하신 그대로 따라 살지 않으면서 예수님을 안다고 주장하면 그것은 거짓입니다.

자, 이제 5절을 보세요.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케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저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

요일서 기자의 논리는 너무나 분명합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사람이 하나님을 아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계명을 지킨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마 22장에 보면 한 율법사가 예수님께 율법 중에 어느 계명이 가장 크냐고 물었습니다.
그 때 예수님은 이렇게 대답하셨습니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것이 크고 첫째 되는 계명이요
둘째는 그와 같으니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셨으니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

그렇습니다.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 최고가는 계명입니다.
이제 예수님 역시 우리에게 새로운 계명을 주셨습니다.
요 13: 34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또한 같은 맥락에서 요 15: 12절도 말씀합니다.
"내 계명은 곧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하는 이것이니라."
'서로 사랑하는 것', 이것이 주께서 주신 새 계명입니다.

위로 하나님을 사랑하고 아래로 이웃을 사랑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입니다.
바로 이 때문에 본문 5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누구든지 그의 말씀을 지키는 자는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그 속에서 온전케 되었나니 이로써 우리가 저 안에 있는 줄을 아노라."

<헌병대 대령에게 혼쭐난 중위 이야기>
이제 목욕탕에서 일어난 이야기 하나를 말씀드리며 제 설교를 마치고자 합니다.
모두 다 벌거벗고 목욕을 하니 서로 얼굴을 알기 전에는
사회적인 신분을 전혀 알 수 없는 곳이 대중 목욕탕입니다. 
한 노인이 구석에서 바가지를 갖다 놓고 때를 씻고 있었습니다.
그 때 새파란 젊은이가 들어왔는데 목욕탕 안이 만원인지라 바가지가 모자랐습니다.
젊은이는 이리저리 둘러보다가 제일 만만해 보이는 노인의 바가지를 슬쩍 들고 가버렸습니다.
노인이 항의를 했으나 그 청년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습니다.

손님 중에 40대 후반쯤 되어 보이는 중년 신사가 이 젊은이가
하도 어이없는 짓을 하니까 점잖게 타일렀습니다.
그랬더니 그 청년이 "당신이 뭔데 건방지게 남의 일에 참견이냐"며 오히려 큰 소리를 쳤습니다.
중년 신사가 그래도 아버지 같은 노인한테 너무
심한 것이 아니냐며 바가지를 돌려주라고 했습니다.

아, 그랬더니 그 청년이 중년 남자의 뺨을 후려치면서 왜 남의 일에
간섭하느냐며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소란을 피웠습니다.
사람들은 그 청년의 기세에 짓눌려 힐끔힐끔 눈치만 살필 뿐,
아무도 말 한 마디 하지 못하고 자기 몸 닦기에만 바빴습니다.
드디어 목욕을 다 마치고 세 사람이 밖으로 나왔습니다.

제일 먼저 청년부터 의기양양하게 콧노래까지 부르면서 옷을 입었습니다.
알고 보니 그 청년은 중위 계급장을 단 해병대 장교였습니다.
노인은 점점 기가 죽기 시작했습니다.
그 때까지만 해도 전쟁통이라서 군인이라면 최고인데
그것도 귀신 잡는 해병대 장교였으니 기가 팍 죽었습니다.

이제 중년 신사가 옷을 입기 시작하는데 보니까 역시 군인이었습니다.
아, 그런데 계급장을 보니까 대령이었습니다.
자기가 뺨을 후려갈긴 중년 신사가 대령이란 사실을
알아챈 젊은이는 새파랗게 질린 채 떨고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그냥 대령정도가 아니라 그 지역의 해병대 헌병 사령관이었습니다.

그 광경을 쳐다본 노인의 기쁨은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대령은 목욕탕 밖으로 나와 노인에게 그 못된 중위의 버릇을
단단히 주겠으니 걱정하시지 말라며 자기를 기다리던 상사에게
중위를 지프차 뒤에 태우라고 하고서는 어디론가 사라져버렸습니다.

오늘 우리 뒤에는 막강한 힘을 가진 예수님이 계십니다.
그러므로 기죽지 마십시오.
목욕탕에서 기가 팍 죽었던 노인에게 해병대 대령의
모습은 얼마나 큰 위로와 든든한 빽이 되었겠습니까? 

그런데 우리 뒤에는 그 해병대 헌병대장과는 비교도
안 되는 만왕의 왕이요 만유의 주가 되시는 예수님이 계십니다.
우리의 대언자, 즉 변호자가 되시는 예수님을 믿고 가슴을 펴십시오!
그리고 그 예수님이 행하신 그대로 여러분도 그렇게 행하십시오!
예수님께서 일러 주신 계명, 즉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계명을 지키십시오!
그리하면 여러분은 하나님을 알 뿐 아니라 하나님의 사랑이 참으로 완성될 줄로 믿습니다! 
(김흥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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