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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내려놓음 (창 22: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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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 가운데 만약 부모의 실수로 사랑하는 자식을 잃어버리게 되다면, 어떻하시겠습니까? 아마 그 고통 속에 일어나는 마음의 상처는 쉽게 잊혀지지 않을 것입니다. 몇해 전 시문에는 세 살 때 잃어버린 딸을 스무 살이 넘어서야 다시 만나게 된 엄마의 이야기가 실렸습니다. 안양천의 판자촌에서 살고 있던 그 부부는 살림이 너무 가난해서 두 사람 모두 직장 생활을 해야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잠깐 볼일이 있어서 큰 아이에게 애를 맡기고 나갔다가 돌아와 보니 아이는 없어지고 큰 아이는 울고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 후 미친 듯이 고아원이란 고아원은 다 뒤지고 잃어버린 아이들을 보호하는 곳에도 가보았지만 아이는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동안에 이 아이는 이틸리아에 입양되었고, 그곳에서 시인이자 화가가 되어 부모를 찾기 위해 다시 한국을 찾아 왔습니다.

그 엄마는 아이를 잃고 나서 웃음을 잃어버렸어요. 딸을 다시 만났는데도 자꾸 눈물만 나오지 웃음은 쉽게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이 어머니는 선거 때마다 통장이나 반장이 와서 왜 아이의 사망 신고를 하지 않느냐고 말에 가장 가슴아팠다고 합니다. 그러나 끝끝내 "내가 우리 아이 죽은 것을 눈으로 보지 않았는데 어떻게 사망신고를 어떻게 사망신고를 할 수 있겠어요? 라고 버텨서, 호적에는 이 아이가 계속 살아있는 것으로 되어있었습니다. 이처럼 아이를 잃어버린다거나 아이가 먼저 죽는 것을 보는 것은 부모에게는 영원히 없어지지 않는 마음의 상처로 남습니다. 그것은 다른 사람은 절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상처입니다. 오늘 우리는 아브라함에게서 똑같은 고통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오늘 본문은 "그 일 후에"라는 말씀으로 시작되고 있습니다. 아브라함 가정에 "그 일" 이 무엇입니까? 21장에 보면 이스마엘과 그 어미 하갈이 빈들로 쫓겨나 통곡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여종에게서 얻은 아들이지만 이스마엘도 아브라함의 피를 타고난 아들이 아닙니까? 아들과 그 어미를 빈들로 쫓아낸 아브라함의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아브라함이 심히 고민합니다. 인간적으로는 포기할 수 없는 아들입니다. 어쩌면 이제 태어나 막 정을 붙이는 이삭보다도 온갖 정과 사연이 있는 이스마엘이었을 것입니다.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나타나셔서 이삭이 약속의 자식임을 다시 한번 일깨워 주십니다. 우선순위를 세우는데 있어서 주님이 말씀하셨을 때 아브라함은 고통스럽고 힘들었지만, 육정을 꺾고 이스마엘과 하갈을 내어쫓습니다. 바로 "이 사건 이후에" 그 말입니다. 아브라함이 겨우 정신을 차리는 순간 이번엔 독자 이삭까지 바치랍니다. 아브라함에게 독생자 이삭을 재물로 드리라는 명령은 곧 이삭을 죽이라는 말입니다. 하나님 말씀을 중히 여기지 않았다면 명령에 순종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아브라함이 쉽게 포기하고 순종할 수 있는 내용도 아니었습니다. 이삭은 100세에 얻은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의 자녀였습니다. 사라에게는 자식이 없었기에 받았던 수치와 탄식을 웃음으로 바꾸어준 아들이었고, 아브라함에게는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많은 후손이 날 약속의 아들이었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에, 이삭을 드려야함은 곧 미래와 희망을 함께 죽이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느 날 아브라함을 잔인하리만큼 높은 벼랑에 세웠습니다. 그리고 2절에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때문에 성경학자들은 신약 최대의 사건이 갈보리 십자가 사건이었다면 구약 최대의 사건은 모리아산 아브라함의 이삭 번제 사건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십시오. 왜 하나님께서 어떻게 보면 잔인하리만큼 이 엄청난 요구를 하셨습니까? 여러분, 지금 아들을 번제물로 바치라는 것입니다. 도대체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1절을 다시 보면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했습니다. '시험하시려고'

시험은 테스트입니다. 우리가 학교 다닐 때 우리는 모두 자주 시험을 친 기억들이 있습니다.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여러분 중에 혹시 과거에 시험일자가 다가오면 시험이 너무 너무 좋아서 가슴이 설레이고 시험이 기다려진 그런 분들이 계십니까? 계시다면 한번 손을 들어 보시겠습니까? 그러면 질문을 하나 더 드리기로 하겠습니다. 여러분 중에 혹시 이 별로 즐겁지 않은 시험 아니 우리를 고통스럽게 하는 시험 곧 테스트는 우리의 교육 시스템에서 영원히 없어져야 한다고 확신하는 분들이 계신지요? 있다면 손을 들어 보시겠습니까? 두 가지 질문에 다 손을 들지 않으셨다면 여러분은 두 가지 중요한 사실에 대하여 동의하신 것입니다. 첫째는 아무도 시험을 좋아하거나 즐거워 할 수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둘째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험은 반드시 필요하다는 사실입니다.

시험은 왜 필요합니까? 우리는 시험을 치고 나서야 객관적으로 자신의 실력을 파악하게 됩니다. 그리고 시험 후에 모자라는 부분을 보충하는 학생들은 실력의 향상을 가져오게 됩니다. 인생의 시험도 마찬가지인 것입니다. 인생의 고난의 시험을 통과하면서 자신의 부족함을 발견하고 자신을 성숙시키는 사람은 인생의 질을 업그레이드시키는 놀라운 자리에 서게 된다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생의 위기와 고난은 인간을 겸허하게 합니다.

한 학생이 유명한 옥스퍼드 대학의 지성인 C.S.루이스 교수에게 "하나님이 계시다면 왜 이렇게도 인생에는 설명하기 어려운 고난이 많습니까?"라는 질문을 던졌습니다. 여기에 교수는 "그러지 않아도 인생들은 교만하기 짝이 없는데 만일 고난마저 없다면 인생은 얼마나 더 교만하였겠소"

그래서 성경은 약1:2-4에서 우리에게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당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 그래서 우리는 위기를 시험으로 수용할 줄 알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주님의 말씀 앞에 어떻게 반응합니까? 3절에 보면 "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찍이 일어나..." 그는 즉시 순종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내일 가라, 모레 가라고 시한을 정해주시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이 군대 갔다가 휴가를 나오기라도 해보십시오. 부모는 그 아이하고 한 시간이라도 더 같이 있고 싶어하며 떠나보낼 때, 어떤 때는 단 몇 분이라도, 아니 몇 초라도 더 손을 붙잡고 싶어하는 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내일 가라, 모레 가라는 시간에 대해 아무런 코멘트를 달지 않았는데도 그는 다음 날 일찍이 일어났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그는 즉시 순종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았습니다. 그렇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순종에 실패하는 가장 큰 이유는 분명히 내 삶 속에 하나님의 뜻이 드러났는데도 불구하고 질질 끌고 그 때 즉시 순종하지 않습니다. 그렇게 영원히 순종할 기회를 놓쳐버리고 후회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똑같은 명령이 떨어졌는데도 순종을 실패했던 롯을 보면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그 망하고 있는 도성, 하늘의 유황불이 내릴 소돔과 고모라를 빨리 떠나라고 명령합니다. 그런데 롯은 성경에 '지체하더니' 라고 했습니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사랑하는 아들을 죽여야되는 아비의 마음이 오죽했겠습니까? 그 밤에 잠이라도 제대로 잤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의 뜻인 줄 알아서 하나님 앞에 온전한 순종을 드리기 위해 즉시 다음 날 아침 일찍 일어나는 하나님의 사람을 봅니다. 그런가하면 그는 나귀에 싣고 갈 물건들을 준비합니다. 장작을 쪼개는 노족장의 모습을 봅니다.

스펄젼 목사님은 이렇게 말씀했습니다. "사환과 노족장이 도끼를 휘두를 때마다 장작은 여러 갈래로 찢기었다. 그러나 사랑하는 자식을 죽여야되는 아비의 마음보다는 더 갈라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나귀 외에 쓸 것을 준비해서 떠납니다. 떠나면서 하지 않은 것이 하나 있습니다. 사랑하는 아내, 사라와는 의논하지 않습니다. 그는 감성적인 어머니의 사랑이 도저히 그 사건을 용납할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것은 모정으로는 안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아마 의논했으면 소프라노가 아니라 뽀쁘라노가 터져 나왔을 것입니다. 그리고 "나 죽이고 데려가라!"고 소리 지르지 않았겠습니까?

그 아들을 얼마나 소중하게 얻었는데요. 유대 전승에 의하면 이삭이 모리아 산정을 갔다가 내려와서 자기 어머니 사라에게 모리아 산정에서 되어진 일을 다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그 이야기에 사라가 충격을 받고 여섯 마디 큰 소리를 지르다가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엄마의 사랑은, 여인의 모성은 그것을 용납할 수 없는 줄 아브라함은 알았습니다. 저 같으면 제 아내하고 의논하고 그래서 못 가게 되면 "하나님! 나야 순종하려고 했는데, 그런데 당신께서 짝지어주신 저 여자가..."라고 변명했을 것입니다. 어디서 들어본 소리지요? 제가 아담의 후예거든요. 저 같으면 그랬을 것 같아요. 그러나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할 때 방해될 것은 하나 하나 제거하면서 나아갑니다.

아브라함이 집을 떠나 모리아산으로 가는 그 사흘길은 자신이 지금까지 살아왔던 그 숱한 여정길보다 더 힘들었을 것입니다. 그 길 가는데 왜 고통이 없었겠습니까? 왜 갈등이 없었겠습니까? '정말 이것이 하나님의 뜻일까? 아니 내가 다른 아들을 통해서 이 땅에 하나님의 자손을 펼치겠다고 말했을 때 하나님께서 아니라고 그러셨다. 그런데 그렇게 해서 얻은 아들을 하나님께서 죽이라고 하는 말이 사실인가? 족제비도 독수리가 새끼를 덥치려고 들면 자기 몸을 날려서 새끼를 구하거든 만물의 영장이 어떻게 자식을 죽일 수 있단 말인가? 이것은 아닐 것이다. 왜냐하면 이 아이를 통해서 하늘의 별처럼 바다의 모래처럼 하나님의 자손을 편만케 해주신다고 약속했는데 이 아들 죽으면 그 약속이 깨지지 않겠는가? 하는 별별 생각이 다 들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그때마다 아브라함은 '아니다, 하나님 말씀을 순종해야 된다. 이삭을 죽여서 번제로 드려야 된다.'고 마음먹었을 것입니다.

여기에 대해 광야 길가는 아브라함을 스펄젼 목사님은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헤브론 광야길은 쓸쓸했다, 적막했다, 황량했다. 그러나 사랑하는 자식을 죽여야 하는 아비의 마음보다는 적막하지 않았을 것이다. 쓸쓸하지 않았을 것이다."

사랑하는 여러분! 순종하여 떠나는 길에 인내력이 부족하여 도중에 돌아선 불순종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인류역사상 정상에 오르기 바로 직전에 돌아선 못난 발걸음들이 얼마나 많이 있습니까? 순종은 인내와 끈기로 완성이 됩니다. 순종은 변덕이 없어야 순종입니다. 믿음은 끝까지 마무리되어야 믿음입니다. 신앙생활은 곧 순종의 생활입니다. 자기 논리에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요. 자기 생각과 느낌에 순종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사흘 길을 마치고 모리아산 아래 도착하자 하인들을 떼어놓습니다.

아브라함은 걸림돌이 될만한 모든 장애물을 다 제거하고 사흘 길까지 무사히 마쳐 모리아산을 오르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 순간 지금까지 그 고통 속에서 이루어진 결심을 한 순간에 수포로 돌릴 수 있는 한 펀치가 날아옵니다. 바로 이삭의 이 한마디였습니다. "내 아버지여,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지금까지 참고 참아 왔던 아버지의 심정의 뇌관을 폭발시킬 수 있는 말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뭐라고 말합니까? "아들아, 번제 할 어린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우리말 성경에는 "자기를 위하여"라고 했습니다만 원문에는 "위하여"라는 말이 없습니다. 정확히 번역하면 "여호와께서 자신을 준비하시리라"입니다. 이 말은 위대한 예언이 되었습니다. 이삭이 장작더미를 짊어지고 모리아 산에 오르듯이 - 하나님의 아들이 등에 나무를 지고 모리아산, 골고다 언덕을 오르고 있습니다. 여기 아브라함의 마음은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었습니다. 여기 죽으러 가는 이삭은 예수님의 그림자였습니다. 물론 아브라함은 자기 아들을 제물로 바쳐야 할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아브라함이 하나님께서 자기와 아들에게 피할 길을 예비하실 것을 믿었다고 믿습니다.

그 분명한 증거는 다시 창22:5에 나타나 있습니다. "이에 아브라함이 종들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예배하고 우리가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여기 '우리'라는 표현을 주목해 보십시오. 아브라함은 자기와 아들 이삭이 (우리가)다시 집으로 돌아올 것을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잔인해 보이는 명령 배후에 여전히 사랑이신 하나님의 자비한 섭리를 믿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는 하늘과 하나님을 원망할 수 있는 위기의 순간을 오히려 믿음으로 직면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언덕 정상에 오른 아브라함은 장성한 아들을 들어 장작더미 위에 눕힙니다. 스펄전 목사님은 이 장면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늙은 아비가 장성한 아들을 들어 올릴 때 몹시도 무겁게 느껴졌을 것이다. 그러나 자식을 죽여 바치기 위해 그 자식을 들어야 하는 아비의 심정만큼 무겁지는 않았을 것이다." 드디어 아브라함이 아들 이삭을 죽이려는 순간 황급히 하나님의 음성이 들렸습니다. 11절-12절을 보십시요. "아브라함아 아브라함아! 그 아이에게 네 손을 대지 말라 네가 네 아들 네 독자라도 내게 아끼지 아니하였으니 이제야 네가 하나님을 경외하는 줄 아노라" 아브라함이 모리아 산 정상의 제단에 이르러 아들 이삭을 결박하고 칼을 빼는 순간 하나님의 천사가 "그 아이에게 손을 대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리고 본문 13-14절에 보면 하나님이 준비하신 어린 숫양으로 대신 제물을 드리게 하시지 않습니까? 그래서 그 제단은 하나님이 예비하신 여호와 이레의 제단이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관심은 이삭을 빼앗는데 있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관심은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이삭이 이삭 되게 하는데 있었습니다. 즉 아브라함의 자식으로써의 이삭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축복을 이어 계승하고 그리스도가 날 가문을 잇는 자로써의 이삭이 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칼을 높이 들었을 때, 하나님은 이미 아브라함의 포기의 제사를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나서 하나님은 가리고 계셨던 준비하신 것을 보이셨습니다. 이삭을 대신할 희생이 준비되어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이 칼을 높이 들기 전까지는 볼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내려놓으라고 하시는 이유는 우리가 내려놓을 때 그것이 진정한 우리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모리아산은 '내려놓음'의 절정의 현장입니다. 결코 내려놓지 않고는 얻을 수 없는 현장입니다. 우리는 아브라함을 믿음의 조상이라고 합니다. 도대체 믿음이 무엇입니까? 사실 우리는 처음부터 큰 것을 버리게 되지 않지 않습니까? 작은 것을 내려놓는 단계적인 훈련을 겪고 나서야 우리는 큰 것을 내려놓을 수 있게 되어있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께서 광야에서 아브라함을 훈련시키셨던 방법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을 신뢰하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하나님을 알아 가는 시간 가운데 그에게는 여러 번 실수가 있었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함에서 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실수의 과정 가운데서 하나님을 다시 만나갔고 결국 이삭을 바치라는 최후의 시험을 통과할 수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은 인생의 궤도를 크게 두 번 수정했던 사람입니다. 첫 번째는 평범하게 살아가던 어느 날 갈대아 우르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남으로 수정합니다. 두 번째는 100세에 얻은 아들 이삭을 하나님께 재물로 바치라는 명령 앞에서 순종하느냐 마느냐 하는 중요한 순간에서였습니다.

결국 아브라함은 이삭을 드림으로 하나님께로부터 인정을 받았고 궤도를 무사히 수정하여 축복의 문을 여는 믿음의 조상으로 다가오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믿음은 내가 익히 아는 익숙한 길을 가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신뢰함으로 인도하심을 따라 한 치 앞을 볼 수 없는 그런 길을 선택해 나아가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런데 이 모리아의 제단에서 어린양을 준비하시던 동일하신 하나님께서 지금으로부터 2000년 전 유대 땅 예루살렘 성밖 갈보리 언덕에 또 하나의 제단을 준비하신 것을 아십니까? 그것은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심판을 피할 수 없었던 인류를 위해 하나님 자신이 속죄의 제물을 친히 준비하신 것입니다. 그 제물은 바로 하나님 자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이셨습니다. 바로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 보혈을 터뜨려 셨던 갈보리 언덕입니다. 바로 그 현장이 당신의 핏 값으로 세우신 이 자리, 교회입니다.

우리는 내일부터 "하나님의 어린양을 보라!!"라는 주제로 고난 주간 집회를 가지려고 합니다. 이제 이곳에서 모든 것을 내려놓으십시다. 고난 주간은 하나님의 내려놓으심에 우리 역시 내 삶을 내려놓는 현장입니다. 내려놓아야 합니다. 내려놓지 않고는 여호와 이레의 은혜를 누릴 수가 없습니다. 남의 자식이 죽을 때는 마지막 순간에 붙잡아주신 하나님, 아브라함의 쳐든 손을 붙잡고 스톱시키신 그 하나님께서 우리 죄를 지고 골고다 언덕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는 아들 예수는 마지막 순간까지 가도록 내버려두셨습니다. 이 사랑, 이 은혜를 아십니까?

생각해 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왜 나 같은 것을 창세 전에 아시고 끝까지 간섭을 하는지 우리는 잘 모릅니다. 하나님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으시고 그 대신 나를 끌어않으셨다는 것이 이해가 됩니까? 무엇이 아쉬워서 그렇게 하셨겠습니까? 우리는 도저히 이해하지 못합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의 엄청난 구원 계획 앞에서 나를 보면 나 자신이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가를 깨달을 수 있습니다. 십자가의 놀라운 진리는 한 번 들었다고 다 깨달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예수를 오래 믿었다고 해서 다 아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므로 예수를 믿는 우리에게는 갈증이 있어야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십자가를 더 알고 싶은 갈증입니다. 십자가에 죽으신 예수님께 좀더 가까이 다가가서 그를 만나고 싶은 갈증입니다.

여러분, 십자가 앞으로 나오십시오. 성령 앞에 기도하십시오. 답답한 마음을 열어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십자가에 있는 하나님의 놀라운 비밀과 은혜를 하루하루 알 수 있도록 계시의 영을 주시고 마음의 눈을 열어 달라고 기도하십시오. 사도 요한이 피를 토하듯 외쳤던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보라!" 에 주목하십시오.

나는 이번 고난주간 집회가 하나님의 뜻이 세워지고 우리는 철저히 내려놓는 시간이 되는 집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 교회가 "비전의 각을 세우고 믿음의 날개를 펴서 지경을 넓히는 공동체"란 다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뜻 안에서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하기 위해 지어주신 하나님의 영역입니다. 야베스의 기도처럼 양적인 땅의 확장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넓혀주시고자 하는 지경입니다. 복음의 영향력이 커지고 감사와 찬양, 축복의 영향력이 넓혀질 때에 저와 여러분을 통해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은 놀랍고 귀한 것입니다. 이는 아브라함처럼 자신의 모든 것을 십자가 앞에 내려놓을 때 가능한 것이었습니다. 이제 갈보리로 올라갑시다. 예수님이 핏자국을 남기면서 걸어 가셨던 그 길을 따라갑시다. 그리고 마지막 숨을 거두시던 그 십자가 옆에 조용히 서서 그분의 피 묻은 입술에서 흘러나오는 음성을 한번 들어 봅시다. 결코 나를 내려놓지 않고는 그 풍부한 사랑과 그 은혜를 결코 얻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십자가를 향합시다. 십자가를 향합시다. 십자가로 달려갑시다. 십자가 앞에서 오래오래 머물도록 노력합시다. 그리고 십자가의 주님을 바라보면서 우리의 가슴에 있는 사랑을 그분에게 드립시다. 여기에 진정한 하나님의 나라의 은혜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이와 같은 축복이 우리의 평생을 통해서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기도하십시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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