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사순절] 주께서 쓰신다고 하실 때 (마 21:1-5)

  • 잡초 잡초
  • 473
  • 0

첨부 1



유명한 사람들이 쓰던 물건들은 파격적인 가격으로 거래됩니다. 십년 전에 팝 가수 엘비스 프레슬리가 타고 다니던 자동차의 번호판이 40 만 달러에 팔렸습니다. 우리나라 돈으로 3억 8천 만원이나 됩니다. 작은 양철 조각인 번호판이 그만한 가치가 있겠습니까? 단지 유명한 이의 손길이 닿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리 된 것입니다.

제가 15 년 동안 타고 다니던 자동차가 있습니다. 상태는 아주 양호합니다. 번호판뿐만 아니라 자동차 통체로 드리겠습니다. 4 억 원이 아닌 단돈 4 만원에도 드리겠습니다. 필요한 분이 쓰시면 좋겠습니다. 또 압니까? 나중에 황금성목사 유품이라고 굉장한 값어치를 할지?

이 세상에서 누가 쓰던 물건이 가장 값어치가 많이 나갈까요? 만약 예수님이 쓰시던 유품이 남아 있다면 그것은 값을 따질 수 없을 것입니다. 현재 토리노 성당에 예수님의 수의라는 것이 보관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신 후 장례를 치르면서 시신을 쌌던 천입니다. 아직 진짜다 가짜다 논란이 많습니다. 과학적 방법을 동원해서 연대 측정도 하고 성분 분석도 했습니다. 그러나 연대가 예수님 당시로 나왔어도 그것이 십자가형을 당한 다른 사람의 것일 가능성이 충분합니다.

예수님도 이 세상에 빈손으로 오셨습니다. 역시 빈손으로 하늘에 올라가셨습니다. 그러나 이 땅에서 많은 생활필수품들을 사용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손길이 닿은 물건들은 정말 귀하게 쓰임을 받은 것들입니다.
예전에 제가 성탄절에 어린이극을 하나 쓴 것이 있습니다. 주인공은 들풀입니다. 나름대로 꿈을 꾸며 자라던 들풀이 어느 날 갑자기 농부에 의해 베어집니다. 말이 먹을 여물 신세가 되고 만 것입니다. 다른 풀과 쌓여 있다가 드디어 차례가 되어 구유에 담겨졌습니다. 들풀은 예쁜 척하며 자랐지만 결국 말 먹이가 되어 사라지게 된 것을 안타깝게 여겼습니다. 그런데 그 날 밤 놀랍게도 한 부부가 마굿간에서 아이를 낳았습니다. 그리고 그 아기를 누일 곳으로 포근한 들풀이 깔린 구유가 선택되었습니다. 들풀은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안식을 취한 첫 번째 자리가 되었습니다. 들풀은 구세주를 경배하러 온 목자들을 통해서 그 사실을 알았습니다. 하찮은 들풀이 가장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주님의 도구가 된 것입니다. 그날 들풀은 온 정성을 다해서 주님을 포근히 모셨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그렇게 영광스럽게 주님의 도구로 쓰임 받은 나귀새끼가 등장합니다. 이 나귀새끼는 주님이 예루살렘 성에 들어가실 때 주님을 등에 태우는 영광을 누렸습니다. 구약성경에는 메시아가 나귀새끼를 타고 예루살렘에 입성할 것이 예언되어 있습니다. 스가랴 9:9입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공의로우며 구원을 베풀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

또 창세기 49;11에도 메시아가 그의 나귀를 포도나무에 멜 것이 예언되어 있습니다. 또 랍비들의 말 가운데 “꿈에 나귀를 본 사람은 메시아의 구원을 희망하라”는 말이 있습니다.
나귀는 이스라엘의 토종동물로 평화를 상징합니다. 로마는 말을 군마로 사용합니다. 그래서 말은 군대의 드높은 기상과 용맹을 나타냅니다. 장군이 말을 타고 성에 들어서는 것은 곧 전쟁의 승리를 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평화의 왕으로 예루살렘 성에 들어서기 위해서 말이 아닌 나귀를 선택하셨습니다. 그것도 한 번도 짐을 매본 적이 없는 나귀 새끼를 타셨습니다.

마태복음에는 나귀와 나귀새끼 즉 두 마리가 등장합니다. 예수님은 어떤 나귀를 타셨을까요? 어미 나귀와 새끼 나귀를 번갈아 타셨다고 보는 견해가 있습니다. 그것은 7 절에 타셨다는 동사가 복수로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견해는 가능성이 희박합니다. 마가복음이나 누가복음에는 나귀새끼만 등장합니다. 특히 마가복음에는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심부름을 보내면서 아직 아무 사람도 타보지 않은 나귀새끼를 끌고 오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나귀 새끼를 타신 것이 분명합니다.

마태복음은 더자세하게 어미 나귀와 새끼 나귀가 함께 등장한 장면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즉 예수님은 나귀 새끼를 타셨고, 어미 나귀는 그 뒤를 따르도록 하신 것입니다. 이것은 끌려가는 새끼를 걱정할 어미 나귀를 배려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왜 어미 나귀를 타지 않으셨을까요? 경험이 없는 나귀 새끼를 타는 것이 훨씬 불편했을 것입니다. 우선 구약성경에 그리 예언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행동은 구약성경의 예언과 연결되어 있을 때가 많습니다. 어떤 때는 메시아이심을 나타내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구약성경의 예언에 맞추는 경우가 있습니다.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 장면을 연출하는 본문이 그런 경우입니다.

그리고 본문 5 절에 있는 대로 공의로우며 겸손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상황을 현대 문명에 적용하면 리무진 같은 의전용 차량을 타신 것이 아니라, 마티즈 같은 소형차를 타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서울시 용산구청에서 5300 만 원짜리 고급 승용차를 의전용으로 구입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2005 년부터 지금까지 딱 세 번밖에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국민의 세금으로 그렇게 낭비하는 공무원들을 보면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고급 아파트에서 살면서 월세 수백만 원을 내는 이들도 많습니다. 빚을 지고 살면서 수천만 원짜리 보호동물 가죽옷에 목을 매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런 옷 입고 다니면 동물보호자들 눈총을 받습니다. 크리스천은 자연과 동물을 보호해야 합니다.
허세를 부리기 위해 분에 지나치게 사치스러운 생활을 해서는 안 됩니다. 남에게 잘 보이기 위해서 겉치레하는 것은 어리석은 짓입니다. 오늘 겸손하게 나귀새끼를 타신 주님을 본받아야 합니다. 분수껏 사는 것이 좋습니다. 부자가 돈을 쓸 때는 생각이 많아야 합니다.

주님이 나귀 새끼를 타신 또 하나의 이유는 순결함에 있습니다. 짐을 져보지 않은 나귀새끼는 순결이 상징입니다. 나귀새끼는 주님께 처음을 바치는 영광을 누린 것입니다. 주님께 드릴 때는 처음 것으로 순결하게 드려야 합니다. 맏물은 언제나 하나님께 드리도록 되어 있습니다. 무엇이든지 처음 것을 주님께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나귀 주인의 헌신이 있습니다. 제자들이 나귀를 구할 때 선뜻 나귀를 내어 준 주인이 있습니다. 제자들이 허락도 없이 길에 매어 있는 나귀를 끌고 온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을 보내실 때 누가 무슨 말을 할지 아셨습니다. 그 때 주가 쓰시겠다고 대답하라고 일러 주셨습니다. 그러면 즉시 나귀를 보내 줄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이 예수님과 나귀 주인이 미리 약속이 되어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또는 예수님의 예지 능력으로 주인이 헌신할 것을 미리 아셨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어떤 경우이든지 분명한 것은 나귀 주인이 주님이 쓰신다는 말에 전적으로 나귀 두 마리를 내어 놓았다는 것입니다. 이 나귀 주인은 이름도 모릅니다.

성경에는 이렇게 값진 것을 선뜻 내어놓은 헌신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주님이 쓰신다고 하실 때 기꺼이 나의 값진 것들을 내놓을 수 있는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최후의 만찬을 나눈 곳은 다락방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과 유월절 음식을 먹기 위해 방을 구하셨을 때 선뜻 방을 내
준 사람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형을 당하시자 도망친 제자들이 숨어 지낸 곳이 이 다락방입니다. 이 다락방은 제자들이 부활의 주님을 만난 곳입니다. 약속한 성령님을 기도하며 기다린 곳입니다. 이곳에 성령이 임하시고 그 장소가 최초의 교회가 되었습니다. 다락방 주인은 위험을 무릅쓰고 방을 내주었습니다. 사도행전을 통해서 우리는 그 다락방의 주인이 마가의 부모인 것을 알게 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후 시신을 거둔 두 사람이 있습니다. 한 명은 아리마대 요셉입니다. 그는 형을 집행한 빌라도를 찾아가 예수님의 시신을 거두겠다고 청을 했습니다. 그러다 예수님의 한 패로 몰려 어떤 불이익을 당할지 모릅니다. 그래도 그는 담대했습니다. 그는 자기가 쓰려고 미리 만들어 둔 돌무덤에 예수님을 장례 지냈습니다. 그 무덤 역시 아직 사람을 장사지낸 적이 없는 새무덤이었습니다.

또 한 명은 예수님의 시신에 향품을 바르고 세마포를 싼 사람입니다. 그는 니고데모입니다. 니고데모는 몰약과 침향 섞은 것을 백근쯤 가지고 왔습니다. 니고데모는 산헤드린 의원입니다. 산헤드린 의회가 예수님의 체포를 결의할 때 유일하게 부당함을 지적하고 반대한 사람입니다. 이 니고데모가 가지고 온 몰약은 나무의 진을 뽑아 모은 것입니다. 예수님 태어나셨을 때 동방박사가 드린 보물 중에 몰약이 있었습니다. 이 몰약은 아주 쓴 맛이 납니다. 그래서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을 때 몰약을 탄 포도주를 적셔서 드렸으나 받지 않으셨습니다. 이 몰약이 고통을 덜어주는 진통제 역할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시신에 발라 방부제로 쓰였습니다. 최근에는 부작용이 없는 항암성분이 들어있어 연구되고 있습니다. 이 몰약은 아프리카 쪽에서 수입한 값진 것입니다.

침향 역시 식물에서 얻은 기름입니다. 침향을 태운 연기는 마음을 가라앉히는 효과가 있습니다. 방부제 역할도 합니다. 침향은 물량이 없어 구하기가 어렵고 값이 비쌉니다. 이 침향이 1g에 30 불 정도 한다니 한 근을 600 g으로 치면 백근이면 일억 팔천불, 우리나라 돈으로 1,710 억 원입니다.
니고데모가 예수님의 장례를 위해서 몰약과 침향을 섞은 것을 백근 가져왔습니다. 액체 몰약은 말린 것보다 훨씬 비쌉니다. 그러니 지금 계산한 금액보다 훨씬 값이 나갔을 것입니다. 니고데모는 주님을 위해서 정말 아낌없이 내놓았습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 두 사람은 주님이 쓰자고 하지도 않았다는 것입니다. 자발적으로 그렇게 헌신했습니다. 정작 장례를 치러야 할 제자들은 다내뺐습니다. 아리마대 요셉이나 니고데모는 그럴 의무도 없었습니다. 주님의 장례를 치르겠다고 나서는 것 자체가 이후 많은 불이익을 당하게 될 것입니다.
이들 외에도 주님이 쓰시도록 자기의 모든 것을 내놓은 사람들은 얼마든지 있습니다. 예수님께 향유를 부은 여인이 있습니다. 그녀는 나드 한 근을 담은 옥합을 깨뜨려 주님의 발에 부었습니다. 이것도 가룟 유다가 재빨리 계산했습니다. 300 데나리온의 값어치가 있다고 했습니다. 그러니 이것도 3 천만 원이나 합니다.
어쩌다보니 아주 값진 것을 드린 예를 들었습니다. 주님께 드리는 데는 값어치보다 드리는 헌신의 마음이 더중요합니다. 오병이어 기적 때에는 어린 아이가 물고기 두 마리와 빵 다섯 덩이를 드렸습니다. 주님은 그것으로 놀라운 기적을 베푸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연보궤에 넣는 과부의 엽전 두 푼을 칭찬하셨습니다. 그것은 양보다 드린 이의 마음을 받으셨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것은 어떤 보상을 바라는 것이 아닙니다. 성경은 이들이 주님께 귀한 것을 드린 후에 어떤 복이나 상을 받았다는 이야기가 없습니다. 기껏해야 칭찬을 받은 정도입니다.

오늘 본문의 나귀를 드린 주인이 그 후 무엇을 받았습니까? 다락방을 드린 마가의 부모가 부자가 되었다는 이야기는 없습니다. 아리마대요셉이 새무덤을 드린 후 별다른 복을 받았다는 보고도 없습니다. 그것은 니고데모도 마찬가지입니다. 옥합을 깨뜨린 여인도 그렇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시작한 어린아이도, 엽전 두 푼을 드린 과부도 그 후 어떤 보상을 받았다는 보고가 없습니다.
그러면 이들이 왜 이토록 헌신했을까요? 주님께로부터 은혜를 받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 은혜를 헤아릴 줄 안 것입니다. 조금이나마 그 은혜에 보답하려는 정성을 보인 것입니다.
보통 목사님들 설교는 하나님께 드리면 하나님이 더놀랍게 채워주신다고 합니다. 하나를 드리면 삼십 배, 육십 배, 백 배까지 불어난다고 합니다. 틀린 말씀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거저 받으시는 분은 아니십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주님께 드릴 때 그 결과로 어떤 복이나 상을 바라는 것은 잘못된 신앙이라는 것입니다. 주님께 드릴 때는 순수한 헌신 그 자체로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주님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드리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식에게 베풀 때 보상을 바라지 않습니다. 이 녀석이 나중에 커서 용돈을 많이 주겠지 하는 기대로 자식에게 베풀지 않습니다. 혹시 효성스러워 그리 할 수도 있겠지만 부모는 그런 계산을 하지 않습니다. 오직 사랑하는 마음으로 모든 것을 베풀 뿐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에게 주는 선물도 마찬가지입니다. 선물을 주면서 무언가 더큰 것을 기대한다면 그것은 뇌물입니다. 받는 사람이 그런 속내를 눈치 챈다면 아주 기분이 상할 것입니다.
여러분이 하나님께 헌금을 드리면 저는 축복기도를 합니다. 그것은 교인들이 정성으로 드린 것을 헌신으로 보고 기뻐하실 하나님께 목회자의 사랑으로 복을 비는 것입니다. 그러나 드리는 사람은 바라는 것 없이 그저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것이 헌금을 드리는 자세입니다.

헌금 외에도 주님께 드릴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주님은 기꺼이 헌신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일하십니다. 주님이 쓰신다고 할 때 망설이지 말고 즉시 내어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내게 돌아오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고 해도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오히려 불이익과 손해가 되돌아온다고 해도 주님이 쓰신 것 자체로 감격과 기쁨을 누릴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 인생의 목적은 주님이 주시는 사명에 있어야 합니다. 주님은 우리 인생의 한 부분이 아니라 전체를 쓰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주님의 선택을 받아 쓰임을 받는 인생이 가장 복된 것입니다. 주께서 쓰신다고 하실 때 드리십시오. 어떤 대가를 바라지 마십시오. 주시는 것은 하나님이 알아서 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그저 순결한 마음으로 주님께 쓰임 받는 그 자체를 기뻐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이것이 우리가 기복신앙에서 벗어나 순결한 헌신을 하는 비결입니다.
여러분은 주님이 쓰신다고 하실 때 무엇을 내놓을 수 있겠습니까? 시간과 재물을 주님께 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연약한 이들을 위해 찬물 한 대접이라도 대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지구 환경이 파괴되어 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환경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인권이 억압되고 있는 현장을 찾아 안전장치를 만들어 줘야 합니다. 기아와 난민문제에 도움의 손길이 필요합니다. 질병으로 신음하는 이들에게 위로가 필요합니다. 이 땅에 주님이 부르시는 현장이 너무 많습니다. 할 일 많은 세상은 모두 이 땅을 하나님 나라로 세워 가려는 것입니다. 교회에서 봉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세상에 하나님 나라의 일꾼으로 나섭시다. (황금성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