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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구원 받은 삭개오 (눅 19: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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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께서 여리고 성에 들어가실 때 삭개오라고 하는 세리장으로 부자였던 사람이 주님을 만나게 됩니다. 삭개오는 키가 작았고 사람들은 많아서 주님을 볼 수 없었습니다. 그는 주님을 보기 위하여 돌무화과나무 위에 올라갔습니다.
여기서 나오는 돌무화과나무는 일명 [애굽 무화과]라고도 하는데 개역성경에서는 뽕나무로 번역했었습니다. 이 나무는 우리나라의 뽕나무와는 좀 다른 나무입니다. 우리나라 뽕나무처럼 키가 작은 나무는 아닙니다. 이스라엘을 여행하다가 여리고에 가게 되면 [삭개오 뽕나무]라는 이름을 가진 나무 한 그루를 볼 수 있는데 굵기는 두 아름 정도 되고 높이는 족히 10여m는 될 것입니다. 개역 성경에는 주님이 지나가시다가 “우러러보셨다”고 되어 있는 것을 보면 우리나라 뽕나무처럼 작은 나무는 아닌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는 돌무화과나무 위에 올라가 있는 삭개오를 보시고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을 들은 삭개오는 급히 나무에서 내려왔고 즐거워하며 주님을 영접했습니다.
집으로 주님을 영접한 삭개오는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 말을 들은 주님은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는 주님의 대답을 통해서 삭개오가 주님을 만나 변화된 이 사건에서 우리들에게 주시는 핵심적인 진리는 [잃어버린 사람의 구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교회 생활을 하다 보면 우리들이 생각할 때 은혜 받을만한 사람이 아닌데 큰 은혜를 받는 경우가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성경에도 당시 사람들의 생각으로는 은혜 받을만한 사람이 아닌데 은혜를 받아 구원에 이르는 경우가 있습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초대교회 시대의 사울일 것입니다. 그는 예수를 믿을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사울과 구원은 너무나 거리가 먼 이야기입니다. 오히려 그는  믿는 자를 핍박하는 정도로는 양이 차지 않아서 잡아서 감옥에 가두고 심지어 믿는 사람들을 죽이던 사람입니다. 스데반 집사가 돌에 맞아 순교할 때는 가장 선두에 섰던 사람입니다. 그가 구원을 받은 후에 교회 안에 들어가려고 했지만 사람들이 믿지 못했던 것을 보면 그 당시 상식으로는 구원을 받을 만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은혜로 핍박자 사울도 구원을 얻게 복음 전도자가 되었습니다.

본문에서 주인공의 역할을 하고 있는 삭개오도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볼 때 은혜 받고 구원을 얻을만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은 잃어버린 자와 같은 삭개오를 부르셨고 그의 집에 들어가셨고 삭개오의 인생을 송두리째 변화시켜주셨습니다. 심지어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고 하신 말씀처럼 삭개오만이 아니라 그의 집까지 구원에 이르는 복을 허락하셨습니다.

오늘 이 설교를 듣는 여러분에게 삭개오에게 임한 은혜가 부어지기를 축원합니다. 구원의 확신이 없는 분들에게는 구원의 확신과 감격을 체험하시고, 구원의 확신이 있는 분들에게는 삭개오의 집에 구원이 이른 것처럼 여러분의 집과 여러분의 생활에까지 구원의 역사가 있기를 축원합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 속에서 구원과 관련된 두 가지 큰 주제를 다루려고 합니다. 첫째, [어떤 사람이 구원을 받는가?]입니다. 둘째, [구원을 받으면 어떤 변화가 일어나는가?]입니다.

1. 어떤 사람이 구원을 받았습니까?

삭개오의 모습을 통해서 어떤 사람이 구원을 얻을 수 있는가를 살펴보겠습니다.

  1) 이름 값 못하던 삭개오가 구원을 받았습니다.
이스라엘에서는 이름이 참 중요합니다. 성경에 나오는 사람들은 이름대로 사는 예가 대부분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종종 사람의 인생을 변화시킬 때 이름을 바꾸시기도 했습니다. 아브람을 열국의 아비로 만들기 전에 아브라함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주셨고, 야곱이라는 계산적이고 육신 중심적인 사람을 신령한 사람으로 변화시키시기 전에 이스라엘 이라는 이름을 주셨습니다. 교만했던 사울의 이름의 뜻은 ‘큰 자’인데, 그가 주님을 만나고 겸손한 사람으로 변화되었는데 그의 이름 역시 작은 자라는 뜻을 가진 ‘바울’로 바꿨습니다.

삭개오는 '깨끗한 사람', '의로운 사람'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이름입니다. 아마도 삭개오의 부모는 삭개오를 낳고 깨끗한 사람 의로운 사람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름을 지어주었을 것입니다. 삭개오가 자신을 소개할 때 "나는 삭개오입니다", "나는 깨끗한 사람입니다", "나는 의로운 사람입니다"라고 했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들도 삭개오의 이름을 부를 때 ‘삭개오’, ‘깨끗한 사람’, ‘의로운 사람’이라고 불렀습니다. 그런데 그의 삶을 보면 그는 결코 의롭거나 깨끗한 삶을 살지는 못했습니다. 삭개오는 자신의 이름값을 하지 못했습니다. 이름 값 못하는 삭개오에게 주의 구원이 임한 것입니다.

사람은 어떤 존재입니까? 생명 있는 존재들 가운데 사람은 특별한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을 받았으며, 만물을 다스리는 특별한 사명을 받은 존재입니다. '사람'이라는 말의 뜻 가운데 '위를 바라보는 존재'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 인간의 모습이 어떤 모습이 되었습니까? 죄의 결과로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렸고, 만물을 다스리기보다는 오히려 지배당하는 부분도 많습니다. 위를 바라보는 존재가 아니라 땅만 바라보는 존재로 바뀌고 말았습니다.
삭개오가 자신의 이름값을 못하던 사람이지만 주의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처럼 하나님의 형상을 잃어버린 인간, 만물을 지배해야 하지만 늘 물질에 지배당하는 인간, 위를 바라보고 하늘의 소망을 두고 살아야 하지만 언제나 땅의 것만을 생각하는 인간들에게 하나님의 구원이 필요한 것입니다.

  2) 불의한 삭개오가 구원을 받았습니다(2절).
삭개오의 직업은 세리장입니다. 세리는 세금을 거두는 세무공무원입니다. 그런데 그 당시 세리는 세금을 많이 거두어들이고 그 중에서 일부를 착복했습니다. 그들은 할 수만 있으면 더 많은 세금을 거둬드리려고 힘썼습니다. 유대인들은 그들을 매국노로 봤습니다. 그런데 삭개오는 보통 세리가 아니라 세리장이었습니다. 그리고 2절에서 그를 부자라고 했으니 백성들을 등골 빼는 세리였음이 분명합니다. 그런 불의한 삭개오에게도 하나님의 구원이 임했습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하나님의 구원을 받는 사람은 어느 정도 도덕적이고 어느 정도 선량한 생활을 하는 사람들 이라고 생각을 합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 중에도 이런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 믿으라고 권면하면 자기 생활이 좀 변화가 된 다음에 믿겠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술도 좀 끊고, 담배도 끊고 그 다음에 교회에 나오겠다고 합니다. 지기의 생활이 하나님 보시기에 합당하지 못하니 교회에 나올 수 없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심지어 기독교인들 가운데도 기도 하라고 하면 자기의 생활이 어느 정도 깨끗해 진 후에 기도하겠다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지금은 하나님께 면목이 없어서 기도할 수 없다고 말합니다.
이런 분들의 논리는 그럴듯하지만 사실은 잘못된 논리입니다. 죄인이기에 하나님을 찾아야 하는 것입니다. 물속에 빠진 사람에게 구원이 필요한 것이지 물 밖에 있는 사람에게 구원이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생활이 깨끗하지 못하니 하나님 앞에 기도하고 그분을 만나야 하고 죄 사함이 필요한 것입니다.
구원은 구원을 받을 자격을 갖춘 사람이 받는 것이 아닙니다. 구원을 받을 자격을 갖추지 못했지만 자신의 불의함을 인정하고 하나님이 내민 손을 붙잡는 사람은 누구든지 구원을 얻을 수 있습니다.

  3) 적극적인 삭개오가 구원을 받습니다(3-4절).
예수님이 지나가실 때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사람들이 장사진을 치고 있었기 때문에 키가 작은 사람은 예수님을 볼 수가 없었습니다. 3절에 보면 "그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라고 말씀합니다.
삭개오의 약점은 키가 작다는 것이었습니다. 보통 사람 같으면 그런 상황에서 물러서고 말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삭개오는 자신의 작은 키라는 약점 앞에서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사방을 둘러본 후 돌무화과나무를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돌무화과나무를 향해서 달려갔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보기 위해서 돌무화과나무 위에 올라갔습니다. 그는 적극적인 행동으로 예수님을 봤습니다. 지나가시던 예수님도 돌무화과나무 위의 삭개오를 보셨습니다.

삭게오는 보통 세리가 아니고 세리장입니다. 그의 나이를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세리장을 할 정도라면 상당한 나이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삭개오는 나이와 세리장의 체면도 던져버리고 나무 위에 올라가는 적극성이 있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적극성은 주님을 찾는 적극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스스로 구원에 이르려고 적극적으로 노력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실 세상에서도 성공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은 적극적인 사람들입니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라는 소설 아시지요. 이 소설은 지금까지 2천 만부 이상이 팔렸습니다. 그러데 이 작품이 우리에게 알려지기까지 작가 마거릿 미첼의 눈물겨운 노력이 있었음을 아는 사람은 별로 없습니다. 그녀는 작품을 완성한 후 3년 동안 여러 출판사를 찾아다녔습니다. 그러나 무명작가의 작품을 받아주는 곳은 한 군데도 없었습니다. 어느 날 그녀는 맥밀란출판사의 레이슨 편집장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이때다 싶어 그를 붙잡고 여행길에 원고를 꼭 한번만 읽어달라고 간청했습니다. 그리고 10여일의 장거리 여행 동안 세 차례나 전보를 보냈습니다. “원고를 읽어보셨습니까? 꼭 한번만 읽어봐 주십시오. 부탁합니다.”라는 전보를 세 번이나 보낸 것입니다. 편집장은 첫 번째 전보와 두 번째 전보를 받고 나서도 원고에 별 관심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세 번째 전보를 받고는 그녀의 적극성 때문에 원고를 펼쳐보기 시작했습니다. 그녀의 이런 노력이 편집장의 마음을 감동시켰습니다. 그는 드디어 원고를 읽기 시작했고 남북전쟁의 한복판에 서 있는 듯한 착각마저 들게 하는 생생한 묘사에 매료돼 목적지에 도착한 것도 모를 정도였다. 그리하여 1936년 드디어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는 세상에 태어났다. 세상의 모든 성취는 도전과 적극성의 산물이다.

기도도 적극적으로 합시다. 문제가 있으면 응답이 있을 때까지 기도의 끈을 놓지 말고 계속 부르짖읍시다. “구라하 찾으라 두드리라”를 어떤 번역에서는 “계속해서 구하라 계속해서 찾으라 계속해서 두드리라”로 번역되어있습니다.
제가 전에 어느 목사님이 어릴 때 용돈 타쓰던 방법을 말씀드렸습니다. 용돈 타쓰는 것이 왜 그리 어려운지? 그래서 작전을 짜야 합니다. 오늘은 용돈을 타야겠다 싶어면 아침 먹고 어머니가 부엌에 설거지 하러 들어가면 부엌문 옆에 붙어 서서 [ 엄마 돈 십환 어~ ] 하며 장기전을 펼칩니다. 한 시간 이고 두 시간 이고 따라 다니면 주시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개척교회 하면서 많이 써먹었다고 하시더군요. “하나님 형편은 안 되지만 하나님이 역사하시면 될 줄 믿습니다. 주실 줄 믿습니다. 하나님 어~” 그러면 주시더라는 것입니다.

  4)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삭개오가 구원을 받았습니다(5절).
삭개오가 구원 받은 일을 생각할 때 자칫 잘못하면 그의 적극성에 포커스를 맞출 수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정말로 포커스를 맞춰야 할 부분은 삭개오의 열심보다 예수님의 부르심입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이 진짜 구원의 원인입니다. 삭개오가 나무 위에 올라가서 예수님이 지나가시는 것을 보고 있는데 예수님께서 삭개오를 부르셨습니다. 예수님이 그의 이름을 부르셨다는 말은 예수님께서 이미 그를 알고 있었다는 말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미 그를 선택하셨다는 말입니다.

지금까지 세상에는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찾았던 사람들이 많습니다. 어떤 사람은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 산속으로 들어갔고, 어떤 사람들은 광야로 나갔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을 만나고 구원에 이르기 위하여 자기 몸에 상처를 내면서 육체를 학대하기도 했습니다. 만약 그런 방법들로 구원에 이를 수 있다면 구원을 받을 사람들은 별로 없을 것입니다.

실상 구원은 자신의 무능함을 인정하고 주님이 자신을 붙잡아 주실 때 자기를 전적으로 주님에게 의탁해야 가능한 것입니다. 구조대원은 물에 빠진 사람을 구원할 때 상대의 힘이 완전히 빠질 때까지 기다린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상대가 힘이 있는 상태에서 구조하려다가 그가 구조대원을 붙잡게 되면 두 사람 다 죽을 수 있습니다. 물에 빠진 사람은 살기 위해서 젖 먹던 힘까지 다해서 구조대원을 붙잡기 때문에 그 힘을 구조대원이 감당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구조대원은 물에 빠진 사람이 힘이 다 빠질 때까지 기다리는 것입니다.

하나님도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우리의 힘으로만 무엇을 하려고 하면 기다리십니다. 우리의 힘이 다 빠져서 우리의 능력으로는 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할 때까지 기다리십니다. 그리고는 우리가 우리의 힘으로 구원에 이를 수 없음을 인정하고 정말 하나님의 은혜만이 필요하다고 할 때까지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구원은 주님의 부르심으로 받는 것입니다. 그분이 손을 내밀 때 구원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5) 예수님을 영접한 삭개오가 구원을 받았습니다(5-6절).
주님이 삭개오를 보시고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랬더니 6절에 보면 삭개오가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주님을 영접했습니다. 그가 주님을 영접하지 않았다면 그에게 구원은 없었을 것입니다. 주님을 영접했기에 구원을 받게 된 것입니다.

계 3:20에 보면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주님이 사람들의 마음의 문을 두드리실 때 마음의 문을 열고 주님을 영접하면 주님과 먹고 마시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요 1:12에서는 "영접하는 자...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라고 말씀합니다. 영접하지 않으면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영접해야만 하나님의 은혜를 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쉽게 설명하면 이렇습니다. 밥상을 차려놔도 먹지 않으면 소용없듯이, 선물을 줘도 받지 않으면 소용없듯이, 하나님의 구원도 그렇고 은혜도 그렇습니다. 어떤 사람은 은혜를 못 받았다고 투덜거립니다. 그런데 실상 은혜 받을 기회가 와도 스스로 거절하기 때문에 은혜를 받을 수 없는 것입니다.

  6) 구원 받은 삭개오의 가족들이 구원을 받았습니다(9절).
삭개오가 주님을 영접하여 구원을 얻었는데 주님은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 속에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주님의 뜻은 구원 받은 사람의 가족들이 그 사람으로 인하여 구원에 이르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삭개오 때문에 삭개오의 가족이 구원을 받은 것처럼 말입니다.
행 16:31에 보면 사도 바울이 빌립보 감옥에서 바울에게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수 있습니까?”라고 묻는 간수에게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받으리라”고 말하므로 구원에 진리에 대해서 몇 가지를 가르쳐줍니다. 첫째는 무엇을 해서 구원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요1:12 말씀에 근거하면 믿는 다는 말은 주님을 영접한다는 말입니다. 둘째는 한 사람이 구원을 받으면 그 가정에 구원의 역사가 일어난다는 것입니다. 셋째는 구원의 도리를 가르쳐주는 전도자가 필요한 것입니다. 간수에게는 바울이 있었던 것처럼 내 주변의 사람들에게는 내가 구원의 도를 전파하는 전도자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는 여기서 구원 받은 사람들의 책임을 생각해봐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은 내가 구원 받고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구원을 받은 것처럼 우리 집이 구원을 받기를 원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 받은 사람들은 가족 구원의 책임이 있는 것입니다. 내 가족의 영혼은 내가 책임져야 한다는 책임의식을 갖고 가족 구원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2. 구원받은 사람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나야 합니까?
구원 받은 삭개오에게는 몇 가지 변화가 있었습니다.
  1) 구원 받으면 영적인 변화가 일어납니다.
10절에 보면 예수님과 삭개오의 만남을 통해서 예수님이 오신 목적을 말씀하십니다. "인자의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여기서 구원이란 말은 총체적인 의미가 있지만 가장 중요한 부분은 역시 영혼의 구원입니다.
사람이 교회에 나와서 많은 것이 변했어도 영혼의 변화가 없다면 그의 변화는 헛된 것입니다. 반대로 아무 것도 변한 것이 없지만 영적인 변화를 경험했다면 가장 귀한 변화를 경험한 것입니다. 영적 변화를 경험한 사람은 시간이 지나면 모든 것의 변화를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방탕한 자식이 있습니다. 그 자식 때문에 부모의 마음이 늘 아픕니다. 그런데 어느 날 그 자식이 새 옷으로 갈아입었습니다. 방탕한 자식이 옷을 갈아입었다고 자식이 변했다고 좋아할 부모는 없습니다. 그 자식은 옷만 갈아입은 것이지 새 사람이 된 것은 아닙니다. 성경에서는 사람의 몸은 영혼의 옷이라고 가르쳐줍니다. 사람들은 육적인 변화가 조금만 있어도 굉장한 변화인 것처럼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변화는 방탕한 자식이 옷을 갈아입은 것에 불과합니다. 영적인 변화가 있어야 진짜 변화입니다. 진짜 구원을 얻은 사람은 영혼의 변화를 경험한 사람입니다.

  2) 구원 받으면 가치관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삭개오는 예수님의 은혜를 받고 나서 엄청난 일을 저지릅니다. 자신의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토색한 것이 있으면 4배나 갚겠다는 것입니다. 이런 충격적인 결심은 그냥 되어진 것이 아닙니다. 가치관의 변화를 통해서 가능한 것입니다.
지금까지 돈만을 추구하며 살던 삭개오가 갑자기 돈을 나누겠다는 생각을 갖게 된 이유는 무엇입니까? 그 이유는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입니다. 가짜 보석을 두 손 가득히 들고 있던 사람이 진짜 보석을 두 손에 가득히 채워들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손에 있는 것을 놔야 합니다. 삭개오는 영원한 것을 봤기 때문에 유한한 것에 미련을 버릴 수 있었습니다. 그는 진짜를 봤습니다. 그래서 가짜를 버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가치관이 바뀌어야 행동이 바뀌는 것입니다.
내가 진정한 구원을 받은 사람인가를 알고 싶습니까? 그렇다면 내가 정말로 가치 있게 생각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살피십시오. 버려야 할 것을 붙잡고 있다면 변화를 경험해야 합니다.

  3) 구원 받으면 행동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돈만을 추구하던 삭개오가 돈을 버리기 시작합니다. 자신이 추구했던 부에 대한 욕망을 버립니다. 백성을 착취하던 그가 나눠주는 사람이 됩니다. 진짜 변화는 드러나게 됩니다. 구체적인 행동이 없다면 아직 그가 변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운전하는 사람이 길을 잘못 든 것을 깨닫기만 해도 운전대를 돌려 방향을 바꿉니다. 하물며 하나님의 은혜를 입고 자신의 삶의 방향이 잘못되었다고 깨달은 사람이 행동을 바꾸지 않는다면 그가 진짜 변했다고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지난 목요일 양육반 사은회를 식당에서 했습니다. 그 자리에서 김상만 장로님 변화된 삶에 대해서 짧은 간증을 들었습니다. 주님을 만나고 나니 가정생활이 바뀌고, 세상사는 방법이 바뀐 내용입니다. 과거에 추구했던 것들을 마치 전혀 해보지 않은 것처럼 하루아침에 정리가 되더라는 것입니다. 과거에 장로님의 모습을 아는 사람들은 그런 사실 하나만으로도 놀란다는 것입니다.

  4) 구원 받으면 관계의 변화가 일어납니다.
삭개오가 변화되기 전에는 유대인들과 원수지간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구원을 받고 가치관의 변화가 일어나고 그 결과 자신의 재물을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게 되니 유대인들과의 관계에도 변화가 일어납니다. 구원 받은 삭개오에게는 관계의 변화도 일어났습니다.

본래 인간의 타락의 결과로 대신관계, 대인관계, 대물관계 그리고 자신과의 관계가 깨졌습니다. 그런 인간이 하나님의 구원을 받고 자신이 변화되면 다른 모든 관계에 변화가 일어납니다.
마치 자석의 원리와 같습니다. 자석은 같은 극끼리는 서로 밀어냅니다. 그런데 극을 바꾸면 서로 당기게 됩니다. 인간관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바뀌기 전에는 서로 밀어내던 대인관계가 내가 바뀌면 서로 잡아당기는 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아직 구원의 확신이 없는 사람들은 주님을 찾고 그분을 만남으로 변화되어지기를 바랍니다. 구원의 확신이 있는 사람들은 영혼의 구원만이 아닌 생활까지 구원에 이르고 가족들까지 주님 앞으로 인도하기를 축원합니다.
(마경흔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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