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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고전 1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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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 고전13:4-7

(4)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5)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6)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7)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오늘 말씀은 자랑하지 않는 사랑입니다. 현대인들에게 자랑하지 않는 사랑은 별 매력 없는 사랑처럼 보입니다. 옛날에는 자기를 감추는 것이 미덕이고 겸손한 사람이라 생각했지만 현대는 자기 PR 시대입니다. 자기를 자랑하고 자기 능력을 보여주어야 잘 팔리는 시대입니다. 내 성격은 이렇다. 나는 이런 면에서 잘한다. 나는 당신에 대해서 이렇게 생각한다 등 자신을 솔직하게 오픈 하면 우리는 그 정보를 공유함으로 서로 유익한 만남을 가질 수 있습니다.

매 학년초가 되면 초등학교마다 학급 회장 선거가 있습니다. 옛날에는 서로 회장 하지 않으려 하였고 자기 손으로 자기를 뽑아달라고 요청하는 것을 쑥스럽게 여겼습니다. 그런데 요즘 아이들은 서로 회장을 하지 못해 안달입니다. 우리 둘째 아이가 이번에 3학년에 올라갔는데 회장 선거가 있었습니다. 그 학급의 반절 넘는 숫자가 출마를 했는데 우리 둘째도 그 중 하나였습니다. 그 반 전체 남자가 18명인데 남자 회장 선거에 9명이 출마했고, 여자는 19명인데 그중 12명이 여자 회장 선거에 출마했다고 합니다.

자랑한다는 것은 자기표현 욕구의 하나입니다. 내가 살아 있다, 내가 가치 있다는 것을 보이는 것입니다. 아이들의 행동동기의 주요 원인은 이 자기 자랑에 있습니다. 상을 타거나 회장이 되어 사람들로부터 칭찬받고, 부모 형제로부터 인정받기 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어쩌면 타고난 생존본능이라 할 것입니다. 자연계를 보면 수컷들이 아름답습니다. 수컷들이 아름다운 이유는 암컷을 유혹하기 위해서입니다. 공작의 부채살 꼬리는 얼마나 아름답습니까? 공작의 꼬리가 이렇게 아름다운 이유는 단순한 자기 과시 요구가 아니라 짝짓기 위한 생존본능에서 나온 것입니다. 이 아름다운 꼬리로 암컷 공작을 유혹합니다. 암컷은 그 꼬리가 크고 아름다운 것을 짝으로 선택합니다.

그래서 자기 자랑은 거의 본능에 가까운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성경말씀은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는 것이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 사랑에 대한 정의가 제대로 된 정의라 할 수 있겠습니까? 네 맞습니다. 제대로 된 정의입니다. 우리 경험과 성경 말씀이 충돌할 때 우리는 먼저 우리 경험을 의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선택해야 합니다. 하나님 말씀이 옳고 또 영원히 변치 않는 진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신앙 연륜이 깊어가면서 이제 내 생각은 없어지고 하나님 생각으로 가득해져야 합니다. 우리 생각이라고 할 때 그 생각은 타락하고 부패한 본성일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명품

어린 시절엔 본능을 따라서 살지만 어른이 된 이후에는 이제 어린 아이의 일을 버려야 합니다. 자랑이 바로 그렇습니다. 우리는 자랑하는 행위를 통해 자기를 확인하고 표현하는 법을 배웁니다. 내가 얼마나 존귀한 존재인지 배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어린 아이들은 마음껏 뽐내고 또 사람들로부터 칭찬과 인정을 받는 것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이런 과정들을 통해 자기의 존엄함에 대한 확인을 한 후에는 자랑을 그만두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자랑이란 것은 결국 다른 사람의 눈과 입을 통해서 자신을 확증하려는 노력입니다. 이런 류의 인정은 불안합니다. 세상엔 뛰어난 사람도 많고, 또 사람들이 자기만을 칭찬해 주는 경우가 많지 않기 때문입니다. 지난 시간에 시기하지 않는 사랑에 대해서 나누었는데 이 시기와 자랑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습니다. 자기보다 더 많은 자랑거리를 가지고 있을 때 우리는 시기하게 됩니다. 내 자신이 자랑거리가 없다고 생각할 때는 불만이 생기거나 열등감에 빠지고 맙니다. 속이 가득 차 있거나 자부심이 강한 사람은 다른 사람이 알아주건 알아주지 않건 상관없이 자기 길을 갑니다. 그러나 자기에 대한 확신이 없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생각과 판단 때문에 쉽게 흔들립니다.

우리 한국사회는 외모와 명품에 대한 자랑이 심합니다. 여자들 중에 성형수술하지 않은 사람이 없을 정도이고, 심지어 남자들까지 예뻐지고 싶어 성형 수술을 하는 실정입니다. 요즘 남자들 성형 트렌드는 ‘동안’, 즉 어린 티가 나는 것이라고 합니다. 청소년들의 최대 관심사도 아마 외모일 것입니다. 화장실에 들어가면 도무지 나오질 않습니다. 우리 집도 아침마다 아이들 옷 선택 때문에 한바탕 난리를 칩니다. 물론 자기 신체를 아름답게 하는 것은 좋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다른 사람이 자기를 어떻게 보느냐에 지나치게 민감하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이목에 따라서 행복과 불행 만족과 불만족이 결정되는 인생은 불행한 인생입니다.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아야 하는 인생이 됩니다.

명품이나 값비싼 것을 과시하는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루비똥, 구찌, 샤넬 등 한국은 명품의 천국이고, 이 명품을 구입하기 어려운 사람들은 짝퉁 명품이라도 들고 다니려 합니다. 저희 때는 나이키 신발이 유행이었습니다. 여러분 혹시 나이키 고무신 아십니까? 우리 때는 나이키 신발이 유행이어서 나이키 신발을 신은 친구를 모두가 부러워했습니다. 그때 어떤 짓궂은 친구들은 하얀 고무신이나 운동화에 물감으로 물결 모양의 나이키 표시를 그리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명품은 바로 우리가 명품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명품입니다. 우리라는 작품이 너무나 완벽해서 구지 이 위에 다른 것을 걸칠 필요가 없습니다. 성경에서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주께 감사하옴은 나를 지으심이 신묘막측하심이라 주의 행사가 기이함을 내 영혼이 잘 아나이다”(시139:14) 자기 모습을 바라보며 정말 잘생겼다, 정말 신묘막측하게 생겼다고 감탄해 본 적이 있습니까?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그런 명품으로 만드셨습니다. 물론 이 위에 다른 명품이나 아름다움 것으로 치장하는 것은 좋습니다. 그러나 그 근본 동기가 명품으로 자기를 과시하려는 것, 자기를 자랑하려는 것은 그 동기가 건전하지 못합니다. 옷이나 명품이 자기를 대신하지 못합니다. 명품에 목내는 현상은 결국 자기에 대한 확신이 부족하다는 증거입니다. 

제가 좋아하는 모습 중 하나가 맹자가 말한 대장부 상입니다. 맹자는 모름지기 대장부가 어떠한지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천하라는 넓은 거처에 살며, 천하의 올바른 자리에 서며, 천하의 큰 도리를 행하며, 지지를 얻으면 사람들과 함께 그 도리를 행하고, 지지를 얻지 못하면 홀로 그 도리를 행한다. 부귀의 유혹도 그 마음을 더럽게 할 수 없으며, 가난의 어려움도 그의 마음을 바꾸어 놓지 못하며, 위세나 무력도 그 마음을 굽히지 못하는 사람, 이런 사람을 일컬어 대장부라고 한다.”

자기 주관과 철학이 분명한 사람입니다. 요즘 말로 하면 당당한 사람이라 할 것입니다. 비바람이 불어도 흔들리지 않는 반석 위에 선 인생이라 할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스스로 자기를 자랑하지 않아도 남이 인정해 줍니다. 내 몸에서 나는 향기는 구지 자랑하지 않아도 사람들이 느끼게 되어 있습니다. 이것이 진짜 자기를 자랑하는 법입니다. 우리를 명품으로 치장하고 물질이나 지위를 자랑하면 사람들이 부러워할지는 모르지만 존경하지는 않습니다.

우리들이 자신에 대한 자부심이 없고 이렇게 과시와 자랑을 통해서 자기 인정을 받고자 하는 불안과 결핍 현상은 심리적으로는 어린 시절의 신뢰와 사랑의 부족에서 기인하기도 합니다. 인간의 발달 과정을 연구한 에릭슨이라는 심리학자가 있습니다. 에릭슨은 인간이 성장하면서 우리 자아도 성장하는데 그 단계에 따라 성취해야 할 자아의 과제가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는 태어나서 만 한 살 사이에 형성해야 할 가장 중요한 과제는 신뢰감이라 하였습니다. 신뢰감이라는 것은 엄마와 아기 사이에서 형성됩니다. 배고프거나, 쉬를 했거나 불편할 때 아기는 싸인을 보냅니다. 이 싸인에 대해서 엄마가 사랑으로 응대해주면 신뢰감이 형성됩니다. 세상은 믿을만하다는 감정이 곧 신뢰감입니다. 만약 이 단계에서 엄마의 정성어린 사랑을 받지 못하게 되면 아기는 세상에 대해서 불안감을 갖게 됩니다. 이 불안을 채우기 위해서 자꾸 확인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사람의 인정을 받으려고 할 때 그것은 어린 시절 받지 못했던 사랑을 갈구하는 것이라 판단할 수 있습니다. 저는 그래서 자기를 자랑하는 사람들을 보면 이런 생각이 듭니다. “아 이 사람이 지금 사랑받고 싶어하는구나!” 그러므로 여러분 어린 시절엔 우리 자녀들이 무조건 행복하고 만족하도록 충분히 사랑해 주십시오.

이 때뿐만 아니고 우리는 청소년기를 거치면서 자기를 사랑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 아이들이 좋아하는 책이 있는데 『내 이름은 나답게』입니다. 성이 나씨고 이름이 답게 입니다. 엄마 없이 한 아이가 자라고 세상을 경험해 가는 과정입니다. 저는 이 책 이름이 참 좋습니다. 우리는 ‘나답게’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한 사람 한 사람을 소중하게 만드셨습니다. 이 소중함을 인식하는 것 바로 이것이 나답게 사는 것입니다. 나답게 살면 구지 다른 사람의 인정을 구하거나 자기를 자랑할 필요가 없습니다.

고린도 교회의 자기자랑

사도 바울이 고린도전서 13장의 사랑장을 기록한 이유는 무슨 지고지순한 사랑에 대해서 논하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고린도교회가 자기 자랑과 또 시기로 가득차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특히 이들은 지혜에 대한 자랑, 은사에 대한 자랑이 심했습니다. 얼마나 자랑이 심했는지 제가 고린도 전후서에서 ‘자랑’이라는 단어를 찾아보니까 무려 40번이나 등장하고 있습니다.

고린도는 당시 60만에 이르는 대도시였고 헬라 철학이 발달된 곳입니다. 그들은 지혜를 자랑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도시에서 헬라인들이 꺼려하는 십자가의 미련한 복음만 전했습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2:1-2) 이들이 복음을 또 하나의 지혜 정도로 취급하는 것을 바울은 견딜 수 없었습니다. 고린도전서 2장에서도 바울의 이런 태도는 지속되고 있습니다.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4절),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5절), “이 세상의 지혜가 아니요”(6절)라고 하며 2장에서 계속 반복하고 있습니다.

지혜를 자랑하던 고린도 교회는 그래서 누구 파냐는 문제로 다투기도 했습니다. 누구는 아볼로 파다, 누구는 게바 파다, 누구는 바울파다, 심지어 그리스도 파까지 등장할 지경이었습니다. 인간의 지혜를 자랑하는 사람들은 출신을 중요시합니다. 내가 어느 출신이라는 것이 중요한 자랑거리가 되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지혜를 자랑하는 사람들은 반드시 분열하게 되어 있습니다. 서로 잘났다고 하기 때문입니다.

고린도교회는 또한 은사를 자랑하던 교회였습니다. 고린도교회에는 성령의 은사가 활발했던 곳이었습니다. 그중 최고의 은사는 방언의 은사였습니다. 방언의 은사를 받은 자들은 그렇지 않은 자들을 업신여기고 스스로 교만해졌습니다. 그래서 이들을 의식하여 바울은 고린도전서 12장에서 성령의 은사를 언급할 때 일부러 방언을 가장 마지막에 놓습니다. 12장 28절입니다. “하나님이 교회 중에 몇을 세우셨으니 첫째는 사도요 둘째는 선지자요 셋째는 교사요 그 다음은 능력이요 그 다음은 병 고치는 은사와 서로 돕는 것과 다스리는 것과 각종 방언을 하는 것이라” 14장에서는 한 장에 걸쳐 방언에 대한 교훈을 전합니다. ‘방언은 교회의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덕을 세우는 것이다. 방언은 방언 통역하는 자가 있을 때 같이 하라. 분명히 알아들을 수 있는 말씀 다섯 마디가 다른 사람들이 도무지 알아들을 수 없는 일만 마디 방언보다 낫다’고까지 말씀합니다. 고린도교회가 방언을 자랑했던 이유는 사랑을 따라서 행한 일이 아니었습니다. 오직 자기의 유익과 자기 자랑을 위하여 했던 것이며 바울은 이것은 사랑이 아니라 말씀합니다.

남녀간의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저 사람에게 내 부를 자랑하고, 내 학식과 학벌을 자랑하고, 또 내 능력과 외모와 가문 건강을 자랑해야만 하는 사랑이라면 온전한 사랑일까요? 그냥 상대방을 그대로 받아줄 수 있는 사랑이어야 온전한 사랑이 아니겠습니까? 물론 처음에는 이런 자랑거리들을 통해서 사랑이 시작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사랑이 오래된 연후에도, 결혼을 한 연후에도 이것을 자랑하고 이 자랑거리에 의존하는 사랑이라면 그것은 온전한 사랑이 아닙니다. 가지고 있어도 언제 떠날지 모르는 불안한 사랑입니다. 내가 모든 권력을 놓치는 날은 사랑도 떠나가는 날일 것입니다. 이것에 의존하는 사람들은 가졌을 때는 교만하게 되고 또 없었을 때는 열등감에 사로잡히는 사랑이 됩니다. 내가 건강할 때 뿐만 아니라 내가 연약해 침대에 누워 있을 때에도 저 사람은 나와 함께 할 것이라는 확신이 없으면 그게 무슨 사랑이겠습니까?

그리스도를 자랑하라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장 31절에서 “자랑하는 자는 주 안에서 자랑하라”고 명령합니다. 자기를 자랑하기보다는 오히려 그리스도를 자랑하라는 말씀입니다. 사도 바울은 실제 자기 자랑할 것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하도 자랑이 많은 고린도교인들을 향하여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여러 사람이 육체를 따라 자랑하니 나도 자랑하겠노라”(고후11:18).  사도 바울은 팔 일 만에 할례를 받은 정통 이스라엘의 족속입니다. 그중 베냐민의 지파요 히브리인 중의 히브리인이었습니다. 율법으로는 바리새인이요, 열심히 교회를 핍박하고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충성도 대단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수없이 하였고 죽을 뻔한 고비도 여러 번 맞았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사십에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 당하였는데 1주야를 깊음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에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고 고백하였습니다(고후11:23-27).

영적인 능력은 또 얼마나 대단합니까? 사도 바울은 환상 가운데 셋째 하늘까지 올라갔다 왔다고 고백합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바울의 능력이 대단하여 그의 손수건이나 앞치마를 가지고 병든 사람에게 얹으면 병이 낫고 악귀가 떠났다고까지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런 자신을 자랑하지 않습니다. 그 이유는 첫째는 사람을 바꾸는 것은 이런 자랑이 아니라 유대인들은 거리끼는 것이요 헬라인들에게는 미련하게 보이는 십자가의 복음이기 때문입니다. 복음만이 구원의 능력이요 사람을 바꿀 수 있습니다. 사람의 지혜로는 설득할 수는 있으나 사람을 변화하게 하고 구원을 가져다 줄 수는 없습니다. “내 말과 내 전도함이 지혜의 권하는 말로 하지 아니하고 다만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전2:4-5)

둘째는 하나님의 능력은 자기 강함을 통해서가 아니라 약함을 통해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내가 부득불 자랑할진대 나의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고후11:30) 바울은 육체에 ‘가시’라는 질병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학자들은 이 가시에 대해서 육체의 질병인데 아마 ‘간질병’ 일 것이라고 말합니다. 간질병은 갑작스럽게 발작하는 병입니다. 전도자가 이런 병을 가지고 있으면 결정적인 약점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 3번 이 병을 가져가시도록 기도했습니다.

그때 하나님께서 이렇게 응답하셨습니다. “내게 이르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이 응답을 받고 바울은 심히 기뻐했다고 성경은 전합니다. “이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고후12:9) 그렇습니다. 바울은 약하고 자랑할 것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을 붙잡고 기도할 수밖에 없었고 그 결과 하나님의 능력은 그 인생 내내 그에게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자랑할 것이 많고 모든 것을 갖춘 사람은 구지 하나님을 붙잡지 않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아무것도 없는 것이 능력입니다. 오직 기도와 말씀에만 전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셋째는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이렇게 고백합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 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함을 인함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빌3:7-9)

값진 진주를 발견한 자는 자기 모든 소유를 팔아 그 진주를 삽니다. 진주가 소중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를 안 후 사도 바울에게는 더 이상 다른 것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자꾸 방해가 됩니다. 그래서 일부러 배설물처럼 여깁니다.

또한 내 안에 발견한 예수가 너무 소중하기 때문에 더 이상 세상 자랑거리가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열정으로 가득 차서 입에서 나오는 것은 자기에 대한 자랑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자랑뿐입니다. 여러분 자랑하되 그리스도를 자랑하십시오. 그러면 세상 자랑은 멀리 떠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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