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눈을 열어 주를 보게 하소서! (요 5:30-47)

  • 잡초 잡초
  • 513
  • 0

첨부 1



  오랫동안 제 마음 깊은 곳에 자리잡고 있던 영적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성경을 읽어 보니 예수님 당시 많은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믿지 않았고 심지어 신성모독죄로 몰아 십자가에 죽인 것을 보았습니다. 나라면 어떻게 했을까? 하는 걱정이 생긴 것입니다. 지금 예수님이 태어나셨다면 나는 예수님을 제대로 알아보았을까? 예수님이 정규 신학교를 다니시지도 않으셨고, 죄인들의 친구라는 소문도 들리고, "내가 하나님이다!“ 하고 나설 때, 나는 예수님인지 이단자인지 제대로 알아 볼 수 있을까? 제가 목사인 것이 더 부담이 되었습니다. 예수님 당시 유대교 지도자처럼 되어 있는 것은 아닌가?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은 참 답답해 하셨습니다. 당시 유대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알아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너무나 안타까우셔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증거를 말씀하셨는데, [증언]이라는 단어를 열두 번이나 반복하여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만큼 분명히 알 수 있는 일이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이 세 가지를 드셨는데 하나는 33절에서 세례 요한의 증거를 드셨습니다. 세례 요한이 분명히 예수님을 가리켜 메시아라고 증언했습니다. 
두 번째는 36절에서 “예수님께서 행하신 표적”을 증거로 드셨습니다. 물로 포도주를 만드시고, 38년 된 병자를 고치신 일은 하나님이 아니시면 할 수 없는 일이라는 것입니다.
세 번째로 예수님께서 또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로 제시하셨습니다.
(39절) “ ...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예수님에 대하여 이미 성경에 무수히 예언되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정말 정직한 마음으로 성경을 살펴 보았다면 얼마든지 예수님이 그리스도인 것을 알 수 있었을 것입니다.
사도행전 17장 11-12절에 보면 바울과 실라가 베뢰아에 가서 예수의 복음을 전하였을 때, 베뢰아 사람들이 신사적이라 “간절한 마음으로 말씀을 받고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므로 그 중에 믿는 사람이 많았다” 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누구든지 정직한 마음으로 성경을 읽으면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알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정말 이상한 것입니다. 유대교 지도자들은 당시 누구보다 성경을 많이 알았고 하나님을 가장 잘 믿는다고 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예수님을 보고도 그리스도인 것을 알아보지 못했느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이유를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 대단히 중요합니다. 왜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을까? 그들이 성경을 잘 알고 잘 지킨다고 자부하지만 겉으로만 “말씀! 말씀!”하는 것이지, 실제로는 말씀을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38절) “그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지 아니하니”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을 머리로는 알지 마음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말씀을 안다고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만약 유대인들이 정말 말씀을 믿고 말씀을 품고 기다렸다면 예수님을 메시야로 알아보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말씀도 형식적으로 보고, 하나님도 형식적으로 믿었습니다. 그들 마음에 하나님 사랑하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전혀 그리스도로 보지 않은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것을 정확하게 지적하셨습니다,
(42절)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안에 없음을 알았도다” 

예수님은 유대인들이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알아주기 원하셨습니다. 그것은 사람으로부터 영광을 얻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그래야 우리가 구원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34절) “나는 사람에게서 증언을 취하지 아니하노라 다만 이 말을 하는 것은 너희로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
만약에 유대인들이 영생을 알았고 영생을 사모하는 마음이 있었다면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신 것을 알고 당연히 믿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사실상 영생에 대한 관심이 없었습니다. 말씀을 읽고 연구한다고 하지만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께 순종하기 위함이 아니었습니다. 자신들의 종교적인 신분을 유지하고 세상 영광을 얻는 도구로 여긴 것입니다.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사는 것 이상은 아무 것도 그들이 원하는 것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추구하는 마음이 없었습니다. 오직 세상 영광만 추구하는 마음 뿐이었습니다,

(43-44절)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매 너희가 영접지 아니하나 만일 다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오면 영접하리라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신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영광은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알지 못한 이유는 예수님이 제사장도 아니고 바리새인도 아니고 서기관도 아니고, 무식한 나사렛 출신에다가 목수의 아들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 안에 분명히 하나님의 신성이 드러났지만 그들의 눈에는 제사장이 보낸 유력한 사람만큼도 못하게 보였습니다. 그들은 철저히 사람의 영광 밖에 알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을 사모하는 마음이 없고 오직 세상만 추구하고 사람의 영광을 더 추구하는 사람은 예수님 당시나 지금이나 예수님을 만나도 알아보지 못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2천년 전에 예수님이 오셨을 때 성경도 많이 알고 하나님을 잘 섬긴다던 유대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신 것을 알아보지 못한 이유는 단 한 가지입니다. 그들의 마음 속에 하나님이 주인이 아니고 세상이 주인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도무지 알아볼 수 없었던 것입니다. 지금도 똑같습니다. 여러분,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와 함께 계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나와 같이 계신 지 안 계신 지를 아는 눈이 뜨이려면 마음의 주인이 바뀌어져야 합니다. 여러분이 세상을 주인 삼아서 살면 예수님이 여러분과 함께 계신 것을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오히려 유대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서 죽이려고 했던 것처럼 함께 계신 예수님을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우리가 정말 예수님을 예수님으로 알아보려면 우리 마음의 주인이 바뀌어야 합니다. 세상이 주인 노릇을 하지 못하게 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정말 예수님을 주님으로 여기고 하나님의 영광만을 구하는 사람인지 한번 돌아보아야 하는데 우선은 말씀이 여러분 속에 들어오는지를 한번 보셔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것을 지적하셨습니다.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지 않는다고.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말씀을 마음으로 받으셨습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여러분 안에 거하고 있습니까? 한번 몇 가지 말씀만 예를 들어보겠습니다.
“원수를 용서하고 사랑하라”는 말씀이 여러분 안에 있습니까?
“범사에 감사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항상 기뻐하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는 말씀이 여러분 안에 있습니까?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르라”는 말씀은 여러분 안에 있습니까?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는 말씀은 여러분 안에 있습니까? 말씀을 아는 것과 말씀이 내 마음 안에 들어오는 것은 다른데 내 마음의 주인이 누구냐에 따라 다릅니다. 내 마음의 주인이 하나님이시면 내가 하나님을 구합니다. 하나님만이 내가 사랑하는 대상입니다.
정말 예수님을 사모하고 사랑하고 원하는 사람은 말씀이 그 사람 안에 들어오게 됩니다. 그 말씀으로 살게 됩니다. 그러나 마음에 다른 주인이 있는 사람, 세상 영광을 추구하는 사람은 따르기 부담스러운 말씀은 마음에 품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을 때 내가 할 수 있는 것만 받아들입니다. 하기 싫거나 부담되면 거절합니다. 이 기가 막힌 현실이 유대교 지도자들의 문제였습니다. 그들은 눈이 세상 영광으로 다 가리워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안에 하나님의 신성이 나타남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전혀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것을 하나님을 모독하는 죄라고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박아 죽인 것입니다.

  김동호 목사님께서 [생사를 건 교회 개혁]이라는 책을 내셨습니다. 그 책의 부제목이 “목숨걸고 쓴 교회 개혁 일지” 입니다. 교회 개혁은 주님께서 교회를 사랑하셔서 끊임없이 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당연하고도 좋은 일을 위해서 왜 “생사를 걸어야” 합니까? 교인들이 다 원하는 것이 아닙니까? 우리가 모순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모두 다 교회 개혁을 원하는 것 같아도, 막상 교회를 새롭게 하려고 하면 반대가 만만치 않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고집스럽고 자기 중심적이고 변화를 싫어하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교회를 변화시키려는 사람은 목숨을 걸어야 하는 것입니다.

서울 기쁨의교회 김원태 목사님께서 온누리교회 청년 담당이었을 때, 어느 장로님들의 모임에서 설교하면서 물었답니다. “장로님들은 왜 사십니까?” 그 때 한 장로님께서 대답하시더랍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지요.” 목사님께서 그 장로님을 향하여 정색을 하고 물었답니다. “장로님, 정말 하나님 영광을 위하여 사십니까?” 그랬더니 대답을 못하시더랍니다. 이것이 우리 자신의 모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는데 우리는 얼마나 외모를 꾸미는 일에 연연합니까? ‘다른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볼까?’ 하며 하나님께 예배드리러 오면서도 많은 시간을 거울 앞에서 보냅니다. 하나님 앞에 나오면서도 사람에게 잘 보이는 것만 생각하지 내면의 더러움을 보지 못합니다. 영적인 무지는 부끄러워하지 않고, 세상의 학력과 경력을 자랑하려고 합니다. 우리는 그처럼 세상 영광에 관심이 많습니다. 다른 사람이 나를 사랑해 주기를 원하지만 나는 진심으로 누군가를 사랑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철저하게 자기 중심이 되고, 자존심과 열등감의 종이 됩니다.

우리가 지금 우리와 함께 하시는 예수님을 보려면 이 점을 점검해야 합니다.
마음 속의 주인이 바뀌어야 합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예수님을 구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자신에게 말씀하시지 않으신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를 큰 소리로 부르고 계십니다. 그런데도 예수님을 음성을 듣지 못하는 것은 자신의 마음이 하나님께로 향하여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사람만큼도 섬기지 못합니다. 예수님을 돈 만큼도 믿지 못합니다.

  어려운 미자립 교회를 담임하시는 목사님을 만났습니다. 힘들고 어려운 목회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러면서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제게는 역사하지 않으시는 지 모르겠습니다. 함께 하시는 예수님을 볼 수만 있어도 견뎌나갈 수 있을텐데요!” 마찬가지로 이것은 많은 성도들의 안타까움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안타까움은 더 크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만일 여러분이 옆에 있는데, 여러분의 자녀가 여러분을 보지도 못하고 여러분의 말을 듣지도 못한 채, 두려워하고 외로와하거나 잘못된 길을 간다면 얼마나 답답하겠습니까? 너무나 많은 성도들이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고 답답한 마음으로 신앙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모습을 보는 주님의 안타까움에 비교할 수 있겠습니까?

코스타에서 어느 목사님이 우리가 천국에 가서 예수님을 만나면 어떤 말로 인사를 할까 생각해 보았더니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하고 인사할 것 같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없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와 함께 하시는 예수님을 모른다면 2천년 전에도 예수님을 몰랐을 것이고 다시 오실 예수님도 맞이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것은 이상한 일도 두려워할 일도 아닙니다.

  한번은 교역자 퇴수회를 갔다가 저녁 기도회 때 부목사 한 분이 베드로전서 1장 15-16절 말씀을 읽고 우리가 거룩하기를 위하여 기도하자고 했습니다. “오직 너희를 부르신 거룩한 자처럼 너희도 모든 행실에 거룩한 자가 되라 기록하였으되 내가 거룩하니 너희도 거룩할찌어다 하셨느니라”
  저는 주님께 물었습니다. “주님 저는 어떻게 하는 것이 더 거룩해지는 것입니까?” 저는 그 때까지만 해도 기도를 몇 시간하느냐, 성경을 얼마나 읽느냐 하는 것으로 거룩을 평가했습니다. 그런 그 때 주님께서 마음에 주시는 말씀이 있었습니다. ‘혼자 있을 때 나를 바라보는 것이다.’ 예수님이 항상 함께 계심을 아는 것이 거룩인 것입니다.

  최근 깊은 은혜를 받으며 읽는 책이 있습니다. 쟌느귀용 부인이 쓴 [순전한 사랑]이라는 책입니다. 쟌느귀용 부인은 17세기 사람으로서 성직자도 신학자도 아니었지만 앤드류머레이, 워치만니, 허드슨테일러 등과 같은 위대한 기독교인들에게 많은 영향력을 끼쳤던 정말 경건한 예수님의 사람이었습니다. 귀용 부인은 예수님을 만나기 전 몸부림치며 주님을 갈망하였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거룩하지 못하여 예수님을 만나지 못하는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얼마나 나아지고 있는지 철저히 자기를 점검하고 또 살폈습니다. 그러나 헛되고 피곤할 뿐이었습니다. 그것은 자기 노력으로 거룩해지려고 애를 썼기 때문입니다. 행복은 노력에 달려있지 않습니다. 무거운 삶을 짊어진 채 주님을 찾으면서 동분서주하였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쟌느귀용 부인이 프란시스코 수도회 수사 한 분을 만나 자신의 심정을 고백하며 상담을 하였습니다. 그가 귀용 부인에게 답해 주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당신 안에서 역사하고 계십니다.” 그 말에 귀용 부인의 영적인 눈이 뜨였습니다. 뜨거운 사모함, 열망, 안타까움이 다 주님의 역사였습니다. 그녀는 그 수사에게 대답했습니다. “이제 알겠어요.” 그리고 그녀는 완전히 변했습니다. 경건하고자 하는 열망과 노력이 그녀를 변화시킨 것이 아니라 자신과 늘 함께 하시는 예수님을 만난 것이 그녀를 변화시킨 것입니다. 그녀는 말했습니다. “주님이 영혼 안에서 일하고 계시다는 사실을 전에는 몰랐습니다.”

  영국과 백년 전쟁에서 조국 프랑스를 구한 오를레앙의 처녀 쟌다크가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곳은 저녁 종소리를 들으며 늘상 밭갈던 들녘이었습니다.
  무디 목사님이 주님을 만난 자리도 그가 늘 일하던 보스톤의 한 구두 가게였습니다.
  사도 바울이 예수님을 만난 것은 모든 사람들이 다메섹을 향하여 늘상 다니던 길 위에서였습니다.
  모세는 양 떼를 몰고 늘상 다니던 길목에서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그곳은 무의미하게 세월만 반복되던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기대할 것도, 소망할 것도, 바라볼 것도, 뭔가 신날 것도 없는 그런 삶의 일상 한 가운데였습니다. 바로 그 곳에 하나님이 나타나셨습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우리 매일의 일상적인 삶의 길목에 서계심을 뜻합니다.
  예수님께서 우리 안에 계십니다. 그러므로 침실에서 주방에서 사무실에서 출퇴근 길에서 어디서나 우리는 예수님을 만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는 조건이 있다면 오직 하나입니다. 진심으로 “예수님만 원합니다.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하소서!” 하고 구하는 것입니다. 진심이어야 합니다!

제게는 예수님을 더욱 알고자 하는 갈망이 있습니다. 얼마 전 간절히 그 기도를 했었습니다. 길거리를 걸으면서도 기도 했습니다. “예수님을 더 알기 원합니다. 제가 예수님을 따라가고 있음을 더욱 분명하게 보여 주소서.” 그 때 주님께서 마음에 물으셨습니다. ‘네가 그것을 감당할 수 있겠느냐?’ 한참을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을 더욱 체험하면 제가 교만해질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고백했습니다. “지금보다 예수님을 더 체험한다면 교만을 이길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만약 제가 교만할 것이기에 예수님을 더 보여 주시지 않으신 것이라면 지금 이 은혜로 충분합니다.” 아무리 은혜를 사모한다 하여도 욕심으로 구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순간, 예수님의 임재가 충만하게 느껴졌습니다. 모든 두려움과 안타까움이 사라지고 염려가 없고 그저 좋았습니다. “주님이면 충분합니다.”

여러분, 어떤 환난과 핍박과 시련 속에서도 예수님이 함께 하심을 분명히 안다면 그것으로 충분합니다. 

  저는 군에 가거나 유학을 가는 청년들을 위하여 기도할 때, “언제나 함께 계시는 주님을 보게 하소서!” 축복합니다. 제 딸에게도 그렇게 축복하였습니다. 이보다 더 큰 축복이 없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오늘 그 은혜를 누리시기 바랍니다. 이미 하나님은 부어주시고 계십니다. 여러분이 누리시면 됩니다. 여러분 마음에 정말 “예수님 한분이면 충분합니다. 하나님을 사랑합니다. 제게는 더 이상 세상 사랑이 없습니다. 주님이 이렇게 하시던 저렇게 하시던 주님이 함께 계시면 충분합니다.” 여러분이 그 기도를 할 수 있으면 됩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어떤 시험도 문제도 십자가도 이길 힘이 생깁니다. 무거운 짐은 다 주님께 맡길 수 있습니다.
가정 핍박, 중병, 사람들의 비판, 경제적인 어려움, 어떤 시험도 다 이길 수 있습니다. “넉넉히 이기느니라!”
무엇이 여러분의 눈을 가리어 예수님을 보지 못하게 합니까?
세상과 사람의 영광으로 가리워진 눈을 가지고 있음을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 다같이 기도합시다.
“주의 영광을 보게 하소서.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보게 하소서.”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