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겨자씨 한 알로 이루어지는 큰 나무 (막 4:30-34)

  • 잡초 잡초
  • 324
  • 0

첨부 1


러시아의 대 문호인 도스토예프스키의 아버지는 전직 육군 군의관으로 빈민 병원에서 일했다고 합니다. 난폭했고 알콜 중독자였다고 합니다. 돈을 조금 벌자 툴라라는 지방에 작은 농토를 구입하였는데 농노들을 너무 심하게 다루었다고 합니다. 결국 도스토예프스키가 열여섯살 때 아버지는 그가 보는 앞에서 농노들에 의해 살해되고 말았답니다. 이 때 충격으로 그는 간질병에 걸렸고 이 간질병이 일생동안 도스토예프스키를 괴롭혔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에게는 문학적 재질이 있었습니다. 스물네 살 때 첫 소설 《가난한 사람들》을 발표하였습니다. 그 작품이 단번에 러시아 문단을 뒤흔들면서 사교계의 총아가 되었답니다. 그러나 갑작스러운 성공은 그에게 공허감을 가져다주었답니다. 그는 방황하다가 미하일 페트라셰프스키라는 사회주의자가 구심점이 된 급진주의 정치조직에 가담했답니다. 자신의 아버지가 농노들에 의해 피살되었지만 농노해방을 열렬히 지지하는 혁명의 물결에 동참했다가 조직원 스물네 명과 함께 체포되어 반역죄의 판결을 받고 슬픈 사형수로 전락되어 버렸습니다. 그는 법정에서 총살형을 언도받게 되었답니다. 사형수가 되어 열차에 실려 시베리아의 움츠크로 이송될 때 열차가 잠시 토볼스크라는 이름의 시골 역에 멈추었답니다. 사형수들을 위로하기 위해 장교의 부인들이 그들에게 음료수를 나누어주었답니다. 도스토예프스키에게도 한 장교의 아내가 더운 차를 내밀었고 그는 눈앞에 다가온 죽음의 공포 때문에 그것을 거절했답니다. 그러자 장교의 아내는 가슴속에서 작은 책 한 권을 꺼내 그의 손에 쥐어 주었는데 이 책은 작은 신약성경이었답니다.

움츠크 감옥 속에서 죽음을 기다리며 도스토예프스키는 이 신약성경을 읽었고 그 속에서 예수님을 만났답니다. 소망의 빛을 맛보고 믿음이 생긴 그는 형 미하일에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고 합니다. "형, 난 다시 태어나 최고에 이를 겁니다." 그에게 자란 소망의 믿음대로 하나님께서 그의 인생에 기적을 주셨습니다. 영하 50도의 추위 속에서 스물 여덟 살의 나이로 그는 사형장에 끌려갔습니다. 병사들이 줄지어 있었고, 그들 뒤로 수많은 구경꾼들 있었습니다. 죄수들은 검은 천에 싸인 교수대가 놓인 광장 한가운데로 끌려갔고 그곳에는 관도 놓여 있었습니다. 남은 시간은 5분 그는 28년 삶에 대한 후회의 눈물을 흘렸다고 합니다. 둥둥 북소리가 울려 퍼지고 장교 한 명이 판결문을 낭독했습니다.

"피고인 모두는 국가질서를 전복하려는 혐의에 대해 유죄가 인정되므로 총살형에 처한다." 이 때 도스토예프스키는 이런 생각을 했다고 합니다. '만약 내가 죽음을 당하지 않는다면 인생의 단 1초도 허비하지 않으리라.' 마침내 병사들이 소총을 들어 조준할 때 마차 한 대가 질주하며 광장에 들어서 황제의 특사로 극적으로 목숨을 건지게 되었답니다.

이날 이후 미쳐버린 사람들도 있었지만 도스토예프스키는 완전히 변화된 사람이 되었답니다. 죽음을 뼛속까지 느낀 그의 인생은 완전히 달라졌답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변해 있었습니다. "나는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인간의 삶을 상상할 수조차 없다. 아무리 훌륭한 진리와 부귀가 있더라도 그것이 신앙에 위배되면 나는 그리스도의 편에 설 것이다"라고 말했답니다. 4년 간의 시베리아 강제 노동과 군대 복무가 지겨운 것이 아니라 새로운 기회가 되었습니다. 4년 동안 5킬로그램에 가까운 쇠고랑을 팔과 다리에 매단 채 나락 같은 감옥 생활을 해야 했지만 그 기간 동안 머릿속으로 수많은 신앙적 소설을 쓰고 또 썼습니다. 남은 군복무 동안 이를 글로 옮겼습니다. 그리고 생을 마감할 때까지 미친 듯한 속도로 집필하여 《죄와 벌》, 《악령》, 《카라마조프의 형제들》 등과 같은 불후의 명작들을 탄생시켰습니다. 사회주의 사상이 그의 마음에 떨어졌을 때는 결국 사형수로 그의 인생이 전락되었지만 복음이 그의 마음에 떨어지니까 그의 생각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주는 큰 나무로 자라 그 책을 읽은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주고 있습니다.

사람의 마음을 무엇이 지배하느냐에 따라 인생은 달라집니다. 죽음이 지배하는 사람은 죽음으로 달려나가고 생명이 지배하는 사람은 삶으로 달려나가는 것입니다. 쾌락이 지배하는 사람은 평생 불나방처럼 쾌락이 있는 곳을 좇아 다니며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지배하는 사람은 그리스도를 따라 살아갑니다. 마음속을 지배한 것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는 엄청난 차이가 납니다.

사람은 마치 자동차와 같습니다. 누가 운전하느냐에 따라 부산으로 갈 수도 있고 서울로 갈 수도 있습니다. 자동차는 제 맘대로 가는 것이 아니라 운전하는 사람의 마음대로 갑니다. 존 고든은 이런 것을 [에너지 버스]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의 책 [에너지 버스]에서 "우리 모두는 우리가 모는 버스의 운전사이고, 때로는 다른 사람의 버스에 올라타야 할 때도 있고, 때로는 내 버스에 다른 사람을 태워야 할 때도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숨쉬며 살아가는 이 순간 순간들은 결코 돌이킬 수 없는 것이며, 그 순간을 온통 불쾌하고 부정적인 에너지로 도배할 것인지, 행복하고 긍정적인 에너지로 가득 채울 것인지는 결국 자기 자신이 선택하게 됩니다."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책에 보면 '조지'라는 한 회사의 '팀장'이 등장합니다. 아내와 갈등으로 가정은 불행합니다. '세상은 내게 의무와 책임만을 강요한다'고 여기며 하루하루 버티듯 살아갑니다. 그런데 어느날 출근하는데 타이어가 펑크가 납니다. 할 수 없이 버스를 타고 출근하는데 '조이'라는 이름의 여성 버스 운전사를 만나게 됩니다. 알츠하이머 병으로 알고 있는 아버지를 돌보면서도 신나고 즐겁게 일하는 그녀를 통해 자신의 인생이라는 '버스'를 에너지로 가득 채울 10가지 룰을 배우는 이야기입니다. 스스로 버스를 어디로 모느냐에 따라 디즈니랜드로도 북극으로도 가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 책의 내용을 잠깐 소개하면 생각에는 에너지가 있다는 것입니다. 생각은 자석과 같기 때문에, 우리가 생각을 할 때마다, 생각은 그 생각한 대상을 자석처럼 끌어당긴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원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원하는 것'을 생각하라고 합니다. 삶에서 일어나는 사건(Event)은 받아들이는 태도(Perception)에 따라 결과(Outcome)가 달라지기 때문에 긍정 에너지로 연료를 가득 채우라고 말합니다. 긍정 에너지는 옥탄가가 높은 휘발유와 같아서 차를 힘차게 달리게 해주지만, 부정 에너지는 싸구려 가짜연료처럼 엔진에 찌꺼기가 끼게 만들고 결국엔 차까지 망가뜨린다는 것입니다. 부정적인 에너지는 회의적인 생각, 두려움, 절망 같은 형상을 하고는 사람들 안에 똬리를 틀고, 그들의 내면을 고갈시켜 버린다는 것입니다. 에너지를 갈가 먹는 에너지 뱀파이어와 같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붓다 이야기를 합니다. 한 제자가 붓다에게 물었습니다. "제 안에는 마치 두 마리 개가 살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한 마리는 매사에 긍정적이고 사랑스러우며 온순한 놈이고, 다른 한 마리는 아주 사납고 성질이 나쁘며 매사에 부정적인 놈입니다. 이 두 마리가 항상 제 안에서 싸우고 있습니다. 어떤 녀석이 이기게 될까요?" 붓다는 짤막하게 대답했다. "네가 먹이를 주는 놈이 이길 것이다." 부정적인 에너지에 자꾸 먹이를 주면 인생은 형편없게 되지만 긍정적인 에너지에 자꾸 먹이를 주면 버스는 더 강력한 에너지를 뿜어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성취심리]에서 브라이언 트레이시는 믿음이 인생의 방향을 결정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생각의 가장 밑바닥은 믿음이 자리잡고 있다는 것입니다. 부정적인 믿음을 가지면 부정적 생각을 갖게 되고 부정적 생각은 부정적 행동을 만들어 내고 결국 부정적 행동은 부정적 인생을 만들어 냅니다. 기본적으로 잘못된 믿음을 가지면 잘못된 프로그램에 의해 인생은 잘못된 길로 간다고 말합니다. 그는 말합니다. "우리에게 일어나는 모든 것, 되고 싶어하는 모든 것, 성취하고 싶은 모든 것은 생각하는 방식, 마음을 사용하는 방식에 의해 결정된다. 마음을 바꾸기 시작했다는 것은 인생을 바꾸기 시작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자아 개념이란 자신과 삶의 모든 영역과 세계에 관한 믿음의 덩어리다."라고 말하며 "자아는 잠재의식이라는 컴퓨터를 움직이는 마스터 프로그램이다."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항상 믿음체계에 의해 형성되는 선입견이라는 스크린을 통해 세상을 보는데 우리의 세계를 결정하는 것은 믿음이라고 할 수 있다."라고 말합니다. 그는 말합니다. "지금 우리의 모습과 행동은 스스로에 대한 믿음의 산물이다. 삶의 특정 영역에서 믿음을 바꾸면 그 영역은 즉시 바뀌기 시작한다. 기대와 태도, 결과 등 모든 것이 변한다."라고 말합니다. 일리 있는 진단입니다. 그는 자아 개념을 3가지 요소로 설명합니다. 첫 번째 요소는 자아 이상(self-ideal)입니다. 자신이 원하는 모습입니다. 두 번째 요소는 자아 이미지(self-image)입니다. 이것은 하루하루 살아가면서 자신을 관찰하고 자신에 대해 생각하는 방식입니다. 세 번째 요소는 자부심(self-esteem)입니다. 자기 자신에 대한 느낌이자 평가입니다. 자신이 얼마나 가치 있는 존재이며 유능한 사람이라는 것을 아는 것입니다.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존경할 수도 없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잘못되면 자아 이상, 자아 이미지, 자부심이 잘못되는데 행복한 인생을 살려면 잘못된 마음속 프로그램을 바꾸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예수님은 일찍이 이런 것들을 겨자씨 비유로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 믿은 사람이면 너무 많이 들어 제가 설명하지 않아도 잘 아시는 말씀입니다. 여기 나오는 작은 겨자씨는 예수님, 말씀, 복음을 상징하는 말씀입니다. 당시 로마가 이스라엘을 지배하고 있을 때 예수님, 말씀, 복음이 그 거대한 권력 앞에 아무 미미하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이 마가복음을 받을 당시 네로의 압제 하에서 핍박을 받고 있는 성도들은 그 거대한 권력 앞에서 기독교란 금방 사라질 것 같은 겨자씨 같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나라는 그렇게 나약하고 초라한 나라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1. 작은 겨자씨 하나지만 큰 나무를 이루는 것이 하나님의 나라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소망과 꿈을 가지라는 말씀입니다. 복음이 로마의 권력과 네로 앞에서 지극히 작은 것으로 보이지 않은 것같지만 작은 겨자씨가 자라 3, 4M의 나무처럼 되듯이 하나님의 나라는 그렇게 성장하고 확장된다는 것입니다. 결코 그 생명력을 무너뜨릴 수 없고 그 어떤 것도 그 성장을 방해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로마제국과 같은 엄청난 군사력과 경제력도 복음을 삼키지 못했습니다. 겨자씨는 아주 작습니다. 밭이 심겨지면 보이지 않습니다. 미미합니다. 밭에 심긴 겨자씨 "한 알"은 정말로 시시하고 미미한 양일 수 있습니다. 바다의 물 한 방울과 같을 수 있습니다. 심으나 마나 전혀 달라질 것이 없을 것 같은 양입니다. 그러나 천국은 이 작고 미미한 것으로부터 시작이 됩니다. 예수님은 초라한 말구유에서 탄생하였습니다. 목수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지구의 한 모퉁이 갈릴리에서 사역을 하였습니다. 주님이 하시는 일을 보고 사람들은 밭에 심겨진 겨자씨 한 알처럼 초라하게 보았을 것입니다. 메시아로서 오셨다면 혁명을 일으켜 로마를 무찌르고 해방을 시켜야 할텐데 예수님이 하시는 일은 메시아로서 하시는 일이라고 말하기에는 미미하고 시시하게 보였을 것입니다. 가난한 자, 병든 자를 돌보고 창기와 세리를 만나 가르치고 갈릴리의 어부들 제자로 삼은 정도이니 왕으로서 하시는 일이라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초라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을 통하여 역사는 AD와 BC로 가라졌습니다. 로마의 권력이 무너졌습니다. 세계의 문화와 정신이 바뀌었습니다.

우리 마음밭에 뿌려진 복음, 말씀, 그리고 그 말씀으로 싻이 난 믿음이 미미한 것같고 보이지 않은 것같지만 그것이 우리의 인생을 바꾸어 버립니다. 미미하지만 큰 나무로 자라나게 됩니다. 작다고 보이지 않는 것같다고 열등감 가질 필요가 없습니다. 교회가 작다고 집이 작다고 회사가 작다고 움추릴 필요가 없습니다. 한 방울의 물방울이 바다를 이룹니다. 설탕을 조금 가지고도 음식 맛이 달게 하고 조금의 소금이 음식의 맛을 냅니다. 조금의 비누로 몸을 깨끗하게 하는 것이고 조금의 햇빛으로 새싹을 자라게 하는 것입니다. 작은 것이 초라하고 부끄러운 것이 아닙니다. 모든 음악은 8도 음정의 옥타브로부터 나오는 것입니다. 아무리 위대한 작품일지라도 영문학은 26자 알파벳 위에 구성되는 것이고 우리 문학은 자음과 모음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믿음을 가진 우리는 신앙적인 자아 이상(self-ideal)을 가져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통하여 이루실 겨자 나무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가정을 통하여 이루실 큰 나무 하나님께서 우리 교회를 통해 이루실 큰 나무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왕같은 제사장이라는 자아 이미지(self-image)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 딸이라는 자부심(self-esteem)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작지만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우리 속에 무한한 가능성이 있고 대단한 위력이 있습니다. 생명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생명은 크기로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느냐 없느냐가 문제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가라사대 너희 믿음이 적은 연고니라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도 옮길 것이요 또 너희가 못할 것이 없으리라 (마 17:20)" 아주 작은 믿음이지만 이 믿음은 난공 불락의 로마제국이라는 산을 역사의 그늘 속으로 옮겨 버렸습니다. 이 겨자씨 만한 믿음은 공산주의라는 괴상하게 생긴 산을 인간사조의 폐기물 처리장으로 옮겨 버렸습니다. 복음은 위력이 있습니다. 복음의 생명력입니다. 강퍅한 유대인도, 합리적인 헬라인도 복음이 바꾸어 버렸습니다. 주님이 하시는 일 미미하고 시시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엄청난 영향력으로 사람과 세상을 바꾸어 버렸습니다.

복음을 품은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육체적 정신적 영적으로 한계를 가진 지극히 미미한 겨자씨와 같이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안에는 큰 나무가 있습니다. 아무리 우리의 조건이 나쁘고 보 잘 것 없는 사람처럼 보이지만 우리는 큰 나무로 자랄 가능성을 가진 씨앗들입니다. 결코 작다고 위축될 필요가 없습니다. 생명이 있으면 아무리 작아도 무한한 가능성이 있는 것입니다. 비록 작은 겨자씨이지만 자라서 큰 나무가 될 만한 무한한 가능성이 있는 것입니다. 시인의 머리 속에 아름다운 시집이 들어 있고 건축가의 마음 속에 위대한 건물이 들어 있는 것처럼 살아 있는 씨앗 속에는 나무와 그 나무에 깃들 새가 들어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3년 동안 돌아다니시면서 뿌린 씨앗이 겨자씨처럼 미미했지만 어떤 결과가 일어났습니다. 세상이 변하였습니다. 인류의 역사가 바뀌었습니다. 예수님은 작은 숫자 12명이 로마의 권력이 하지 못한 일을, 세상의 그 어떤 힘도 하지 못한 일들을 해 냈습니다. 마음을 변화시켰습니다. 시대를 변화시켰습니다. 작다고 무시하지 말고 작다고 움츠리지 말고 작다고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2. 작은 씨앗이 큰 나무가 되기 위해서는 땅 속에 심겨져야 합니다.

씨앗이 씨앗으로 남지 않고 씨앗이 나무가 되려면 그 씨앗이 땅 속에 심겨져야 합니다. 그리고 그 땅 속에서 썩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심겨지기 전과 후를 구분하여 설명하고 있습니다. 겨자씨가 생명력이 있어도 심겨지지 않으면 그저 먹는 재료 끝나버리고 맙니다. 그러나 심겨지면 달라집니다. 심겨지기 전은 작은 겨자씨입니다. 심겨진 후에는 어떻게 됩니까? '자라서,' '모든 나물보다 커지며,' '큰 가지를 내니'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놀랄만한 성장을 나타내는 동사들입니다. 이렇게 되는데는 한 가지 조건이 있습니다. 옥토에 떨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나의 구원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복음을 말씀을 진리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또 다른 의미는 씨가 심겨져 희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님 말씀하시기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 12:24) 심겨지면 새순이 솟고 나무가 되고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씨앗이 가야 할 곳은 죄악에 물든 삶의 현장에 들어가 썩어야 합니다. 척박한 곳도 들어가야 합니다. 어둡고 컴컴한 땅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가시밭길에도 떨어져 들어가야 합니다. 모든 사람들이 밝고 빛나는 곳, 화려하고 영광스러운 곳을 갈 때 모두가 가기 싫은 땅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밭은 두 말할 것 없이 세상입니다. 인간의 마음입니다. 우리가 세상에 들어가 적극적으로 변화를 시켜야 합니다. 사람의 마음에 뿌려야 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 중에선 세상에 대하여 수도원적 생각을 하시는 분이 있습니다. 세상은 죄악된 것이기 때문에 떠나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세상은 우리에게 주신 선물입니다. 세상에 심겨져 큰 나무가 되어 영향력을 미쳐야 합니다. 예수님 말씀처럼 비둘기 같이 순결하고 뱀처럼 지혜로워야 합니다. 신앙의 순수성과 전문성이 있어야 합니다. 순수성이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 믿음의 사람들이 순수성만 있고 전문성이 떨어지면 안됩니다. 세상은 도피하고 즐기는 곳이 아니라 우리가 나아가 자라고 열매를 맺어 하나님의 나라로 만들어야 할 곳입니다.

18세기에 영국 국회의원이 된 윌리암 윌 버포스(W. Wilberforce)라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는 독실한 신앙인이었다고 합니다. 예수님을 잘 믿다 보니 세상이 싫어졌습니다. 국회의원이 되어 존 뉴톤 목사님을 찾아가 사임하고 싶다고 했답니다. 이 때 뉴톤 목사님을 국회에서 반드시 할 일이 있다고 그 일을 하라고 했답니다. 그는 영국에서 노예제도를 폐지하는 법안을 만들었답니다. 결국 그의 독실한 친구였던 당시의 수상 피트(Pitt), 그리고 그의 친구 그렌 빌(G. Grenville)로 말미암아 산더미 같은 노예 매매제도 법안을 폐지하는데 성공했던 것입니다. 무려 18년 만에 이루었다고 합니다. 세상을 기피하지 말아야 합니다. 세상을 우리가 피할 곳이 아닙니다. 우리가 사명을 이루어야 할 곳입니다. 전문가가 되어 영향력을 미쳐야 할 곳입니다. 우리가 심기어 성장하여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야 할 곳입니다. 세상은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선물, 그곳에 들어가 우리가 심기워져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맺어야 합니다. 교회 안의 신앙 생활을 전부로 생각해서는 아니 됩니다. 교회는 교회를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위해 존재하는 것입니다. 내 한 사람 작은 겨자씨 같지만 내가 그곳에 심기어 내가 성장하면 세상은 하나님의 나라가 되는 것입니다.

씨앗이 자라 큰 나무가 되기 위한 방법은 단순합니다. 썩어 죽는 것입니다. 진정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복음의 가치에 따라 사는 것입니다. 내 한 사람이 신앙안에서 거목이 되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나를 보며 예수님을 믿게 되겠습니까? 어떤 일이 있어도 자존심을 죽이고 아집을 죽이는 것입니다. 의심을 죽이는 것입니다. 죽으면 큰 나무가 되는 것입니다. 내가 죽고 예수님이 내 안에 사시면 가정이 살아납니다. 내가 죽고 예수님이 내 인생에 사시면 내가 성장합니다. 남 핑계 할 것 없습니다. 환경을 탓할 것 없습니다. 파도 타는 사람들이 파도를 잘 타려면 힘을 빼야 합니다. 힘주기 중후군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물에 빠진 사람들도 힘을 빼야 살아날 수 있습니다. 힘을 빼야 물에서 뜰 수 있습니다. 내가 할 수 없다고 인정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사용하시면 내가 상상할 수 없는 일들이 일어납니다. 내가 내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고 인정하고 하나님께 진정 의지할 때 가정에 행복의 싹이 솟아나고 직장과 사회에 꽃이 피고 열매가 맺히게 됩니다.

3. 작은 씨앗은 나무가 되면 작은 새들이 와서 그 가지에 깃들게 됩니다.

작은 겨자씨는 밭에 심기어 어떤 결과를 가져오게 됩니까? "큰 가지를 내니 공중의 새들이 그 그늘에 깃들일 만큼 되느니라." 큰 가지를 내어 그늘을 만들어 새들의 안식처가 됩니다.축복의 보금자리가 되는 것입니다. 미미한 겨자씨 하나가 결국은 새들이 깃들일 만큼 넉넉한 가지와 그늘을 만들어 냅니다. 아무 작은 겨자씨이지만 그 씨는 씨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나무가 됩니다. 씨앗은 나무가 되는 것으로 끝이 나는 것이 아닙니다. 꽃을 피고 또 다른 열매를 맺으며 그 가지에 새들이 깃들게 됩니다. 겨자씨 한 알을 심은 것은 비 바람을 견디며 큰 나무가 되기를 위함이지만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으로 혜택을 보는 것들이 있는 것입니다. 나무는 그늘을 만들어 주고 새들이 와서 깃들도록 자리를 만들어 줍니다. 많은 사람들이 혜택을 보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구주로 모시고 예수님께 나아갈 때 참된 안식과 평강을 누리는 것입니다. 예수 안에서 참 평안과 안식의 축복을 누리게 됩니다. 하나님의 나라, 교회가 바로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힘이 지배하는 나라가 아니라 평강의 왕이 다스리는 나라가 되어 누구든지 와서 참 안식과 평화를 누릴 수 있는 나라가 됩니다. 힘이 지배하는 나라는 늘 긴장과 갈등, 전쟁이 있습니다. 그러나 사랑과 은혜가 지배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평강과 안식이 있는 것입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 11:28)"

복음은 미미한 것같지만 복음이야 말로 참된 만족과 행복을 주는 것입니다. 믿는 자들에게 능력이 됩니다. 작은 것같지만 수많은 사람들에게 영향력을 주고 혜택을 줍니다. 복음이 들어가면 가정에 평강이 찾아옵니다. 복음이 들어가면 기업 문화가 바뀌고 나라의 목표가 달라집니다. 복음이 들어가면 인생의 가치관이 바뀌고 지친 새들에게 안식을 주듯이 복음이 들어가는 곳에 참된 안식이 있습니다. 평강의 나라 의의 나라가 확장되는 것입니다.

금방 뚜렷하게 나타나지 않는다고 낙심할 필요는 없습니다. 복음의 위력은 점진적으로 나타나게 됩니다. 씨앗은 서서히 자라는 것입니다. 아이들 매일 보면 안 큰 것 같지만 어느날 보면 자신보다 커있는 아이들을 봅니다. 말씀을 듣다 보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믿음이 성장되고 속으로 아멘 소리가 나오고 저절로 아멘이 입 밖으로 나옵니다. 12제자는 3년 동안 전혀 성장이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베드로는 배신하고 저주까지 했습니다. 다들 십자가에서 도망을 갔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이 승천한 후 얼마나 담대하게 하나님의 나라를 전하였습니까? 어디에서 그런 힘이 나왔겠습니까? 복음의 신비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신비입니다. 예수를 믿었는데도 우리 집에 안식이 없고 평강이 없다고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아직 내 남편, 내 아내, 내 아이들이 변하지 않았다고 실망할 필요는 없습니다. 시간이 지나면 싹이 나고 가지가 자라며 잎이 무성해지고 꽃이 피고 새들이 깃들 것입니다. 자신만 행복을 누리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사막의 오아시스처럼 마른 영혼을 축여주는 샘물이 되고 요셉처럼 축복의 창고가 될 것입니다. 겨자씨 같은 우리 한 사람을 통해 가정에 안식이 임하고 기업이 흥황되는 일이 일어날 것입니다.

이 땅에 복음이 들어오기 전 우리나라는 미개의 땅이었습니다. 헐벗고 굶주리고 문둥이들이 흔했고 온몸에 이가 득실거렸습니다. 그러나 겨자씨같은 몇 사람을 통해 이 땅에 복음이 들어오니까 곳곳에 병원이 생기고 학교가 생겼습니다. 인권이 신장되고 아이들과 여성의 권리가 향상되었습니다. 작은 불꽃 하나가 큰 불을 일으킵니다.

[버티지 못할 시련은 없다]라는 책을 쓴 텔레 비디오의 황규빈 회장이 있습니다. 단돈 50달러로 미국 27위의 부자가 된 사람입니다. 전 세계인을 대상으로 그 해 자신의 분야에서 가장 뛰어난 업적을 남긴 인물 50인에게 미국 정부가 주는 아메리카 성취상(AAA상)을 받은 사람입니다. 이민자로서 미국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부분에 지대한 공헌을 한 자에게 1백 년에 한 번 주어지는 앨리스 아일랜드상을 받은 사람입니다. 한국인의 이민 100년 사에 처음으로 기업을 세워, 나스닥에 상장한 그의 주식의 가치는 12억 달러, 회사의 가치는 20억 달러라고 합니다. 그는 한국 전쟁을 거치면서 미군의 하우스보이 생활을 하였으며 야간 고등학교를 다녔다고 합니다. 학비를 마련하기 위해 구두닦이를 하였지만 절망하지 않고 도전하였다고 합니다. 그는 대학 시험 때 배고픔에 못 이겨 그대로 고사장에서 기절을 해버릴 정도로 가난하였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겨자씨 만한 믿음이 있었답니다. 피난시절 한 천막교회에서 우연히 만난 군목을 통해 신약 성경을 알게 되었고 '구하라 그러면 얻을 것이오, 찾으라 그러면 찾을 것이요, 두드리라 그러면 열릴 것이다.'라는 말씀을 접하는 순간 뭔가 서늘한 줄기가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등골을 타고 내려오는 느낌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 말씀이 그의 겨자씨가 된 것입니다.

그는 신앙을 통해 세 가지 선물을 받았다고 합니다. 첫째는 리더십입니다. 십대 후반부터 주일학교 선생님을 하며 다른 사람을 가르치고 이끄는 법을 배우다 보니 아무리 많은 수의 사람들 앞에서도 주눅이 들지 않았다고 합니다. 둘째로는 경영주로서 회사 직원들과의 화합을 이끌어내는 자질입니다. 매일 아침을 기도로 시작하다보니 가정을 위해, 나라를 위해, 교회를 위해, 직원들을 위해 기도하게 되고 자연스럽게 직원들과의 거리감이 좁혀지고 그들을 이해하려는 마음이 생기게 되었다고 합니다. 셋째로는 기도 중에 얻는 영감에 관한 것입니다. 기도 시간 동안 머리를 스치는 번득이는 영감은, 경험해 보지 못한 사람에게는 쉽게 설명할 수 없는 일이라고 합니다. 그는 큰 나무가 되어 수많은 사람에게 혜택을 주고 있습니다. 그의 회사는 처음 나스닥에 상장할 때 1센트짜리 주식이었지만 50달러를 훌쩍 넘었고, 자본금 9천 달러의 회사는 2조 5천억 원 규모로 거대해졌으며 직원도 1천 2백명 까지 늘어났다고 합니다.

문익점이 원나라에서 붓통 속에 감춰 가지고 온 목화 세알이 조선을 목화밭으로 만들지 않았습니까?
중국 약 13억 인구 중에 1억 정도가 기독교인라고 합니다. 이들에게 복음을 전한 중국 개신교 선교의 시조인 Robert Morrison입니다. 그는 중국 마카오에 들어가 선교하였지만, 7년 만에 겨우 한사람 밖에 세례를 주지 못했고, 25년 선교사역 기간 동안 10 여명 정도만 개종시켰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 씨앗은 지금 1억 명이라는 사람이 주님께 돌아온 나라로 만들었습니다.

미국 근대 선교의 시작이 되었던 사무엘 밀즈(S. J. Mills)는 대학에 다닐 때 네 친구들과 함께 나무 그늘 아래 모여 기도한곤 했답니다. 그것은 어머니의 서원 때문이었습니다. 아들을 낳으면 선교사로 드리겠다는 한 작은 여인의 서원은 아들을 변화시켜 선교회를 조직하게 하였고 그 아들은 미국에서 근대 선교의 운동을 일으켜 세계의 영혼을 먹여주는 복된 곡간을 만들었습니다. 역사학자 토인비는 "역사를 발전시키는 중추세력은 창조적 소수"라고 말했습니다. 우리의 하는 일이 겨자씨 같다고 낙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생명이 있으면 자라게 되고 언젠가 나무가 됩니다. 그리고 새들이 깃들게 됩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네 나중은 심히 창대하리라』(욥기 8:5)
오늘 말씀을 다시 한 번 읽어보겠습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