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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남전도회헌신예배] 행복한 헌신 자 (딤전 1: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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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가 아는 분 중에, 대기업, 중견 간부를, 오랫동안 근무하다가, 3년 전에, 퇴직한 분이 계십니다.
자녀들도 다 키우고, 웬만큼 안정된 재산도 있고, 또 건강도, 아직은 괜찮습니다.
부부의 금실도, 좋습니다.
누가 봐도, 행복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분이, 요즘, 우울증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원인은, 몰두할 일이 없는데서 오는, 허탈감이라는 것입니다.
이분 말에 의하면, 퇴직하기 전, 평생을, 일에만 몰두하여 보내느라, 아내나 가족들과 함께 하는 시간을, 보내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늘 마음에 부담이 되어, 퇴직하면, 가족들에게 못다 한 것을, 다 해주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퇴직을 하니, 자식들은 이미 장성해서, 각자의 생활이 있어, 오히려 자기에게 시간을 할애할 여유가, 없어졌습니다.
그러니, 아내하고 둘이서, 그 동안 미뤄왔던 여행도 하며, 둘만의 시간을, 보내왔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지, 한 1년여 그렇게 보내고 나니, 정작 할 일이 없더라는 것입니다.
아침에 일어나, 산에 올라갔다가 와선, 하루 종일 서재에서, 이 책 저책 읽으며 보냅니다.
남들은, 팔자 좋은 사람이라고 하지만, 정말 자신은, 얼마나 따분하고 곤혹스런 날들인지, 모른다고 합니다.
제일 부러운 것이, 아침 일찍 서두르며, 출근하는 사람들입니다.
어디고, 자신의 능력을, 인정해 주는 곳이 있다면, 그저 밥만 먹여주어도, 가서 마음껏 일하고 싶은 것이, 요즘, 자신의 간절한, 유일한 소원이라는 것입니다.

일할 수 있고, 자신의 역할이 있음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깨닫게 하는 일화입니다.

일생의 일을 두고, 두 종류의 사람이 있습니다.
일하면서, 불평하는 사람과, 일하면서, 행복해 하는 사람입니다.
불평하는 사람은, 이래서 불평하고, 저래서 짜증입니다.
이런 사람은, 사는 것이, 얼마나 소중하고, 자신의 역할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복인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반면, 행복한 사람은, 이것 때문에 기쁘고, 저것 때문에 감사합니다.
살아있음과,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아는데서, 오는 것입니다.
지금 우리는, 어떤 태도로, 교회의 일, 맡은 일에, 헌신하고 있습니까?
여러분은, 행복한 헌신자입니까?
아니면, 불평과 억지로 하는, 헌신자입니까?
하나님은, 여러분에게, 어떤 헌신을, 기대하시겠습니까?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자신의 직분과 역할에 대해, 말할 수 없는, 감격의 고백을, 쏟아내고 있습니다.
이 짧은 구절 안에, 바울은, 자신이, 얼마나 행복한 헌신자인지를 나타내는, 모든 고백을, 담고 있습니다.

부름을 받고 난 후, 바울의 생애를 살펴보면, 하나님을 향해서, 오직, 감사와 기쁨과 감격의 고백으로, 넘쳐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이 행복의 고백이, 우리 가슴을 파고드는 것은, 그가 살아온 사명의 세월이, 얼마나 험난한 역경의 과정이었는지를, 알기 때문입니다.
바울이, 헌신자로서, 행복을 고백하는 것은, 결코, 환경이나 여건, 상황에서 오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이 행복한 헌신의 비밀은, 바울 개인의, 성격적 특성 때문에 오는 것이 아님을, 우리는, 빌립보 교회에 보낸, 그의 편지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봉사 위에, 내가 나를 관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빌2:17-18)

바울이, 자신을 관제로 드릴지라도, 기뻐할 수 있는, 헌신의 기쁨을, 너희도, 누릴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이같이, 모든 조건을 초월하여, 행복으로 헌신케 하는 것은, 바로, 신앙의 비밀이요, 복음의 능력입니다.
이러한, 초월적인 행복의 비밀을, 내면 안에 간직할 수 있어야, 행복한 헌신 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 행복한 헌자의 비결을 알아봄으로, 스스로도, 기쁨 속에 헌신하며, 하나님을 기쁘게 해드리는, 헌신 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1. 행복한 헌신의 비결은, 자신의, 정체성을 파악하는 것입니다.

내가 누구냐?
자신이 무엇이냐? 하는 겁니다.
특별히,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내가 누구냐 하는 것입니다.
나의 존재에 대한 정체성이, 확실해지고, 이것이, 크게 느껴지면, 그 다음에 하는 일이라는 것은, 그리 중요한 게 아닙니다.
이것이 시원치 않기 때문에, 별로, 크지도 못한 역할을 하면서, 휘청거립니다.
조금 뭘 했다고 해서, 교만했다가, 좀 안된다고 해서, 열등감에 빠지고 야단입니다.
왜요?
정체성이, 없기 때문이예요.
하나님 앞에서, ‘내가 누구냐’하는 것이, 아직도, 확실치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확고하게, 고백합니다.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 자 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우리 주의 은혜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과 함께, 넘치도록 풍성하였도다.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13-15)

그리스도인으로서, 나는 누구인가?
‘하나님의, 전적인 사랑과, 긍휼함으로, 은혜를 입은 존재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바울의 정체성입니다.
‘이 은혜가 없었다면, 자신은,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었다.’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었다면, 자신은, 어떤 존재인가?’
바울은, 그리스도인이 되기 이전의, 자신의 삶을 가리켜, 오늘 본문에서, 한마디로 말합니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하나님이, 은혜를 베풀어, 자신을, 그리스도인으로 불러 주지 않았다면, 자신은, 죄인의 괴수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할 수밖에 없는, 존재였다는 것입니다.
만일, 하나님의 이 은혜가 없었다면, 자신이, 지금, 어떤 위치에 있던, 무엇을 하던, 무서운 진노의 심판에서, 벗어날 수 없는, 죄인일 뿐이라는, 절대적 구원의 감격을, 노래하게 한 것입니다.
주님의 은혜로, 구원을 받았기에, 배고파도, 고난을 받아도, 나는, 행복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만일, 이 구원을 얻지 못했다면, 자신은, 제일의 부자가 되었을 지라도, 자신은, 불행한 자였을 것이라는, 고백입니다.
여러분에게, 오늘, 절대적 구원 의식에서 오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이, 있습니까?
이것이 있어야,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이, 기쁨과 행복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상황이나, 조건의 문제가, 아닙니다.
자신의 내면, 깊은 곳에서,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에서 오는, 신앙의, 비밀입니다.

바울은, 이런 절대 구원의식을, 어디에서 발견했습니까?
바로, 사도행전 9장에 나오는, 다메섹도상에서의, 체험에서입니다.

다메섹 도상 이전의 바울은, 어떤 사람입니까?
그는, 베냐민 지파의, 정통 가문에서 태어난, 유대인 중의 유대인입니다.
혈통과 가문이, 대단합니다.
또한, 나면서, 로마의 시민권을 가진, 신분적 특권층입니다.
가말리엘 문하의 수석 제자이니, 지식 또한 대단합니다.
뿐만 아니라, 바리새파에 속한 사람으로, 산헤드린 공회원 중, 한 사람입니다.
명예를 가졌습니다.
그리고, 당시, 세계적 공용어인, 헬라어에 능통한 사람이니, 능력 또한 뛰어났습니다.

이쯤 되고 보니, 자기에 대한 의가, 대단할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사람에게,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의식이, 있을 수가 있겠습니까?
늘, 자기 의가, 앞섭니다.
그러니, 감사가 있을 수 없습니다.
자신이, 이렇게 된 것이, 자신의 가문과, 자기 노력과, 능력 때문이라고 생각하니, 무슨 감사가, 있겠습니까?
자기가 잘나서 살고, 자기가 잘나서 신앙도 갖고, 자기가 잘나서, 이런 위치와 성공을 이뤘다고, 생각하는 것이지요.
그러니, 남을, 선뜻, 정죄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의의 기준에서 벗어난 것은, 용납하지 못하고, 힐난합니다.
그러니,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하는 일에, 앞장 설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이런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을 만났습니다.
정오의, 태양 빛 사이로 비춰오는, 하나님의, 영광의 빛줄기 앞에, 그는, 고꾸라졌습니다.
그 영광의 빛 앞에서, 그는, 움직일 수도 없었고, 숨도 제대로 쉴 수 없었고, 제대로, 볼 수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한줄기 영광의 빛 앞에서,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무기력한 존재임을, 발견한 것입니다.
당장, 앞을 보지 못하여, 다른 사람의 손에 이끌려, 걸어가야 하는 신세가, 되지 않았습니까? 하나님의 뜻하시기만 하면, 언제든지, 먼지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하찮은 존재임을, 자신은, 온 몸으로, 확인한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지금까지, 하나님을 향해, 대항해온 것입니다.
그러니, 자신은, 죄인 중에 죄인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럼에도, 하나님은, 자신을, 살려두셨습니다.
이것은, 자기가, 그만한 가능성이나, 이유가 있어서가 아닙니다.
오직, 길이 참아주시는, 하나님의 긍휼하심으로 인해, 이제까지, 자기가 살 수, 있었던 것뿐입니다.

더구나, 그 하나님이, 자신을, 그리스도 안에 불러 주심으로, 하나님의 사도로, 삼아 주셨으니, 이것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불가항력적인, 은혜일 수밖에 없습니다.
자신이 살고, 하나님의 영광에 참여하는, 그리스도인이 된 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이, 절대적 구원의식과, 은혜 의식이, 바울의 바울 됨을, 이루게 한 것입니다.

여러분, 그리스도인으로서, 진정한 삶은, 어디에서 시작됩니까?
또, 그리스도인으로서의 행복은, 어디에 있습니까?

자신을 내세우며 살았던, 자기 의의 모든 삶이 깨어지고, 하나님의 은혜 안에 있는, 자기를 발견하는, 그 자리에서, 행복한 그리스도인의 삶은, 확인됩니다.
갈릴리 호수에서, 예수님을 만나, 어부 베드로에서, 사도 베드로로, 삶이 전환된 것이, 바로, 그 자리였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그리스도인으로 사는 것이, 불만족합니까?
헌신하면서도, 기쁨이 없습니까?
무엇이 문제입니까?
조건이, 문제가, 아닙니다.
부자와, 가난의 문제가, 아닙니다.
내면에서, 자신이, 누구인지를, 잃어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행복한,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고 싶습니까?
하나님의, 절대적 긍휼과, 사랑의 은혜 앞에서, 자신의 정체성을, 다시 한 번, 확인하실 수 있기, 바랍니다.
사는 것이, 행복해집니다.
헌신이, 기뻐집니다.
행복한 헌신 자가, 될 것입니다.

2. 행복한 헌신자의 비결은, 헌신의 사명을, 깨닫는데서 옵니다.

오늘, 내가 하는 일의 성격이, 어떤 것이냐를, 아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내가 하는 헌신이, 어떤 성격의 일이냐 하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이, 나의 일이냐, 아니면, 하나님의 일이냐, 나의 만족을 위한 것이냐,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냐, 하는 것입니다.

지금, 어떤 자세로, 헌신하십니까?
마지못해서 입니까?
기쁨으로 하십니까?
대수롭지 않게 여깁니까?
아주, 중요성을 가지고, 하십니까?

그러한 태도를, 결정하는 요소는, 자신 안에서, 일을 바라보는 가치관에, 달려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에게 맡겨진 일, 헌신의 성격을 안다면, 그 태도는, 달라집니다.

헌신이란, 사명입니다.
여기에서, 헌신의 의미와, 중요성이 있습니다.
사명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이, 내게 맡겨준 일입니다.
‘하나님은, 왜 나를, 세상에서 불러주셨으며,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내 남은 생애를 통해서, 무엇을 이루기를, 원하시는가?
사명, 그러면서도, 특별히, 개인적인 사명, 이것을 알아야, 생명을 바칠만한. 목숨을 바쳐도, 아깝지 않은, 그런, 확실한 헌신의 행복이, 나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행복한 사람이, 누구입니까? 일을 두고, 세 가지가 있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첫째는, 하고 싶은 일을, 하는 사람이어야, 행복합니다.

***** 원로급에 속하는, 목사님이, 젊은 후배 목사님들에게, 질문을, 받았습니다.
“목사님, 대단히 건강하시네요. 비결이 뭡니까? 또 보니까, 여러 가지 일을 행하시는데, 그것 다, 감당해 낼 수 있는, 그 능력의 비결이, 무엇입니까?” 그 때, 그 선배 목사님이, 대답을 하십니다. “즐거운 마음으로 하라고, 억지로 하는 일은, 피곤해서 못쓴다고, 자기 능력을, 극대화 할 수 있는 길은, 기쁨으로, 감사한 마음으로 하는 것이라고, 감사와 기쁨, 그것이, 건강과 능력의, 근본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일하면서, 스트레스 받고, 일로 인해, 건강을 해치는 사람들을 보세요.
대개가, 자기가 원하지 않는데, 마지못해, 일하는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예술에, 종사하는 사람들을 보세요.
대개가, 행복해 합니다.
왜입니까?
하고 싶은 일을, 하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해야 할 일을, 하는 사람입니다.

해서는 안 될 일을, 즐겨서는 안 됩니다.
해야 할 일을, 즐기는 겁니다.
마땅히, 내가 해야 할 일, 당연히, 해야 할 일을 할 때, 후회가 없습니다.
피곤도, 없습니다.

유명한, [임마누엘 칸트]는, 일을 두고, 이런 말을 했습니다.
“You can do it because you should do it"
"너는, 그것을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마땅히, 해야 할 일이기 때문이다.”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하게 되면, 할 수 있게 됩니다.
그걸, 알아야 합니다.

셋째는, 마지막 일을 하는 자가, 행복합니다.

준비하는 것도 많고, 이제, 앞으로, 무슨 일을 하게 될지, 잘 모르겠죠.
그러나, 이제는, 확실히, 정해졌습니다.
이 일을 위해서, 일하다가, 여기서 끝낼 겁니다.
이 마지막 일, 이 종말론적인 일을 하면서, 이제, 마지막 길을, 밀어붙이는, 바로, 그 일은, 절대로, 피곤하질 않습니다.
그가, 행복합니다.
후회가 없으니까, 여기까지 달려왔습니다.
이제, 마지막 코스를, 뛰고 있습니다.
그가, 행복한 겁니다.

*****저는, 교회에 와서, 지금까지, 최선을 다하여 뛴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제 능력이 부족하고, 여러 가지로, 미약한 부분들이 많지만, 저 나름대로,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저를 아는 후배목사님들이, ‘어떻게 그렇게 열심히 일할 수 있느냐’고 합니다.
어제도, 어느 목사님과, 우리 교회의 비전을 이야기 하는데, 절보고, ‘어떻게 그렇게, 자신만만합니까?’라고, 하더라구요.

지난 십여 일간, 여러 목사님들과, 성지순례를 하면서, 제게 묻는 말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렇게 많은 사역들을 해 나가면서, 앞으로, 그런 비전을, 계속 추진해 나가려면, 나이도 있는데, 그럴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분명히, 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구요?
저는, 교회에 부임할 때, 죽으러 왔거든요.
김한수 장로님 글에, 박목사를 데려올 때, 마지막 비장한 무기가 있었다고 했는데, 그 비장한 무기가 무엇인지, 모르겠어요.
분명한 것은, 우리교회, 당회원들께서, 오라고 간청했을 때, 저는, 분명히, 안온다고, 거부했어요.
거부할 만한, 분명한 명분이, 있었거든요.
그러다가, 결국 대답했을 때는, 죽으러 가자고, 결심하고, 응답했습니다.
그러니까, 누가, 오라고 해서 온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부르심인 줄 알고, ‘죽으러 가자’ 하고, 온 것입니다.
최선을 다해서 목회하다가, 맘에 안 들면, 떠나면 된다는 생각은, 한 순간도, 해 본 일이 없습니다.
‘여기서 내 목회 인생은, 끝난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일하는 것이, 두렵지, 않았습니다.
종말론적인 각오로 일하니까, 두려울 것도 없고, 무서울 것도 없고, 힘든 줄도 모르고, 참으로, 행복한 목회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잘 아시잖아요.
마라톤 선수가, 뛰다가, 맨 마지막이, 저만큼 가까웠을 때, 마지막으로, 전력질주를, 하지 않습니까?
그때, 그 시간만은, 아무 생각이, 없습니다.
오직, 앞만 보고, 전력으로, 질주하는 것입니다.
인생을,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이, 행복한 것입니다.

이제, 헌신이라는 일을, 생각해 보세요.
헌신은, 하나님이 맡겨주신 일, 곧 사명입니다.
다른, 어떤 것으로, 대체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누군가, 반드시, 해야 합니다.
꼭 해야 합니다.
내가 아니면, 누군가를 통해서 라도, 이루어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은, 반드시,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일에, 내가 선택받고, 쓰임을, 받은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일은, 내 일생의, 가장 영광스런 일입니다.
그 일을 하다가 끝나면, 미완성으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하늘의 영광으로, 이어집니다.
지금, 이 순간의 헌신이, 영원한 하늘의 영광으로, 이어집니다.
그렇기에, 지상에서 할 수 있는, 최고의 가치 있는 일이, 헌신입니다.

스데반은, 돌에 맞아 죽어가면서, 자신에게 맡겨진 사명, 복음 전파에, 헌신합니다.
그 순간, 하늘 문이 열리고, 예수님이, 보좌에서 일어나, 그를 맞이하는 영광이, 전개됩니다.
이것이, 헌신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행복한 헌신자의 비결을, 이렇게 들려줍니다.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12절)

나의 오늘 일은, 하나님이 맡겨주신 것입니다.
절대적, 사명입니다.
나는, 이 일을 위해, 오늘,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이것을 위해 살지 않는다면, 내 생은, 헛된 것입니다
이, 절대적 사명의식이, 험난한 사명의 길을 가면서도, 바울로, 행복하게, 만든 것입니다.

더구나, 이 일을 위해, 하나님은, 나에게, 감당할 능력도, 주셨습니다.
사명은, 결국, 내 힘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능력으로, 일은, 이루어집니다.
그러니, 헌신하고 나면, 행복할 수밖에, 없습니다.
내 안에 역사하신, 하나님의 능력에 대한, 놀라움을, 스스로, 안에서, 먼저, 발견하기 때문입니다.

인생이란, 끊임없는 사건과, 일을 통해, 움직여 갑니다.
가장 중요한 일을, 추구하지 않으면, 차선의 일에, 끌려가게 되고, 결국은, 후회스러운 인생을, 살 수 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가장 영광스런 일을, 사명으로 맡기시고, 헌신의 기회를, 주셨습니다.
맡겨주심이 감사이고, 쓰임 받는 것이 기쁨이고, 일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음이, 행복임을, 알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남선교회 회원, 그리고, 성도  여러분!
하나님은, 오늘, 우리에게, 성도로서, 헌신의 기회를 주시고, 저와 여러분을, 부르셨습니다.
우리 모두에게는, 각자에게 주어진, 사역들이 있습니다.
오늘, 여러분들에게 주신 사역을 감당하시는 일에, 참으로 행복하십니까?

만일 아니라면, 먼저, 자신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회복하시기길, 바랍니다.
그리고, 맡겨준 헌신에 대한, 사명의식을, 발견하시길 바랍니다.
그리고, 행복한 헌신자로서,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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