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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광야에서 고통을 당한 사람(다윗의 영성시리즈3) (삼상 24: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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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야기 속으로

  광야를 지나는 다윗의 눈에 광야의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엔게디. 소금바다로 불리는 사해에서 서쪽으로 조금만 걸어가면 높이가 600m에 이르는 깎아지른 절벽이 있고 그 위에 넓은 고원이 펼쳐진다. 그 고원과 절벽은 심한 침식으로 골이 파여서 복잡한 협곡과 동굴들이 형성되었다. 바로 이곳이 엔게디 광야이다.

  그 황량하고 험한 엔게디 광야에 다다를 때까지 다윗은 계속 지난날들을 떠올렸다. 사무엘 선지자가 어느 날 다가와 뿔에 가득 담긴 기름을 자신의 머리에 부었다. 아직도 사무엘 선지자의 음성이 그의 귀에 또렷하다. “너를 이스라엘의 왕으로 삼을 것이다.” 엘라 골짜기에서 골리앗을 물리쳤을 때 사람들의 함성이 들리는 듯했다. 그 후에 사울왕의 눈에 들어서 왕궁을 드나들기 시작했다. 사울 왕이 악령에 시달릴 때 다윗은 하프를 연주하며 그의 영혼을 위해서 기도했다. 다윗이 노래하며 기도할 때 그의 영혼은 이내 평안을 되찾았다.

  그러나 어느 순간에서부터인지 그의 발작과 병은 더 깊어졌다. 사울은 미친 사람처럼 노래하는 다윗을 향해 큰 창을 던졌다. 그리고 마침내 요나단을 통해서 사울의 마음속에는 다윗을 죽이려는 분노의 마음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알았다. 다윗은 아무런 준비도 없이 맨 몸으로 광야로 내 달렸다.
  다윗은 머리를 들어 하늘을 바라보았다. 가끔씩 지나가는 작은 구름들... 바람에 이리저리 흩어지는 그 모습을 보는 순간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처럼 느껴져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내가 왕이 된다고? 그런데 지금 내 모습은 무엇인가? 이 광야에 나는 왜 있는가? 나는 사울 왕을 진심으로 위했는데 그는 왜 나를 죽이려고 하는가? 내가 무엇을 잘못했다는 말인가? 하나님 도대체 언제까지입니까? 이 도망자의 신세가 언제 끝나게 됩니까?’

  광야에 살게 된 시간이 길어지면서 다윗은 친구들을 만났다. 자기와 같이 마음속에 아픔과 고통과 억울함을 가득안고 울분을 토할 길이 없어서 광야로 뛰쳐나온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다행히 다윗을 믿어주고 따른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진실로 다윗을 사랑해주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다사모(다윗을 사랑하는 모임)였다.

  광야의 뜨거운 햇빛과 사울에 대한 두려움은 그들을 엔게디 광야의 동굴 속으로 내 몰았다. 그들은 동굴 속에서 잠시 동안의 휴식에 빠져들었다. 고단한 몸을 누이려고 하는 순간 동굴 입구 쪽에 사람의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그 사람은 바로 사울이었다. 이렇게까지 가까이 다윗을 따라 잡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는데 사울은 다윗의 눈앞에까지 다가온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 사울은 다윗의 일행을 알아보지 못했다. 동굴 밖 사막의 작렬하는 태양에서 오래 있다가 캄캄한 동굴 속으로 들어온 까닭에 아직 그의 눈은 주변의 환경에 적응하지 못하는 듯했다. 사울은 컴컴한 동굴을 더듬거리며 발을 헛디디지나 않을까 조심조심 한 발짝을 내딛었다. 다윗과 그의 친구들은 순간 긴장하며 허리에 찬칼을 움켜잡았다. 그런데 사울은 동굴의 한 쪽에 주저 않더니 칼을 옆에 내려놓고 옷을 급히 내렸다. ‘무엇을 하려고 저러는 것일까?’ 다 긴장하고 있는데 옆에서 누군가 ‘픽’하고 웃는 소리가 들렸다. 사울은 그 곳에서 도망자들의 눈앞에서 대변을 보고 있었다. 볼 일을 본 후 그는 잠시 동굴 입구 쪽으로 걸어가다가 그 자리에 누웠다. 사울은 동굴의 바닥에 앉으면서 깊은 한숨을 쉬었다. 사울도 이미 많이 지쳐있는 듯했다. 그리고 사울은 이내 깊은 낮잠에 빠져들었다.

  한 쪽에서 숨죽이며 낮게 엎드려 있던 다윗의 젊은 친구 하나가 갑자기 손에 칼을 빼어들고 용수철처럼 뛰쳐나가려고 했다. 다윗은 그의 어깨를 붙잡았다. “이것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기회입니다. 저 사람은 당신을 죽이려고 합니다. 그러나 오늘은 그의 목숨이 우리 앞에 있습니다. 이제 저 원수를 죽이십시오. 그러면 당신의 그 지긋지긋한 도망과 망명생활도 여기에서 끝납니다.”

  그러나 다윗은 조용히 속삭인다. “그는 하나님이 기름 부어 세우신 왕이요. 나는 그 사람을 해칠 수가 없소. 사울이 두려워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두렵기 때문이요. 나는 나의 모든 억울함에 대한 판결을 하나님께 맡겼소.” 그 말을 마치고 다윗은 잠들어 있는 사울의 곁으로 가더니 사울의 겉 옷자락을 움켜잡고 소리 없이 조금만 잘라낸다. 얼마나 지났을까? 사울은 긴 기지개를 켜고 일어나 동굴을 한 번 휙 하고 둘러보더니 눈부신 사막의 햇빛 속으로 다시 빠져 나갔다.

  다윗이 사울의 목숨을 살린 것은 이번만이 아니었다. 얼마 후 십 광야의 하길라 산에서 다윗은 한 밤중에 사울의 진영에 잠입한다. 그 곳에서 다윗은 무방비 상태로 곯아떨어진 사울을 발견하지만 그 곳에서도 다윗은 사울의 목숨을 살려준다.

2. 다윗의 마음을 읽으며

  왜 그랬을까? 손 만 뻗으면 이제 고통의 원인이 제거된다. 나는 그를 선대했다. 나는 그를 위해 기도해 주었다. 나는 그를 위해 아름다운 연주로 그를 치료해 주었다. 그런데 그는 나를 죽이려고 온 광야를 뒤진다. 나를 잡기 위해 독기어린 맘을 품었다. 그는 이미 나의 원수가 되어 있었다.

  사울은 저항할 수 없는 무방비 상태이다. 원수가 바로 내 앞에 있다. 다윗에게 있어서 사울은 더 이상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왕이 아니라 원수일 뿐이었다. 원수 갚는 일이 너무나 쉽다. 사울을 죽이기만 하면 이제 이 지긋지긋한 도망자의 시간에 종지부를 찍는다. 다윗은 사울에게 쫓기면서 자신의 목숨 하나 살리자고 가드 왕 아기스 앞에서 했던 일이 생각났다. 입을 헤 벌리고 침을 수염에 흘리면서 대문을 손톱으로 그적거리며 미친 체했던 그 비참했던 생활. 그를 제거하면 그 비참하고 부끄러운 과거도 보상받을 수 있다. 내가 왕이 된다는 사무엘 선지자의 예언이 맞다면  내 손 안에 들어 온 사울을 여기에서 끝장내면 그 예언은 좀 더 빨리 성취될 수도 있다. 그러나 다윗은 그 일을 하지 않았다. 내 생각대로 하면 너무나 쉽게, 너무나 빨리 내 목적을 이룰 것 같은데 다윗은 그 일을 하지 않았다. 왜 그랬을까?

  그의 마음속에 가득했던 하나님 때문이었다. 하나님과 관계를 맺으며 살아간 광야생활을 통해서 다윗은 신성함을 알아보는 감각이 크게 자라났다. 모든 것과 모든 사람 안에서 하나님의 아름다움과 임재와 거룩을 알아보는 그의 인식은 광야생활 가운데 놀랄 만큼 자라났다.

  그는 모든 것을 하나님의 거룩과 임재 속에서 바라보기를 원했다. 그래서 그 광활하고 메마른 광야에서도 그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찬양할 수 있었다. 모든 것을 하나님의 거룩과 임재 속에서 생각했기에 그는 아프고, 괴롭고, 고통스럽고, 메마르고, 눈물 나고, 끝이 보이지 않는 고통의 시간 속에서도 기도할 수 있었다.
  다윗의 친구들은 사울을 “원수”라고 불렀다. 그러나 오늘 다윗의 고백을 들어보라. 다윗은 사울을 향해 이렇게 말하고 있다. “여호와의 기름 부음을 받은 자.”

  다윗은 그를 죽이려고 혈안이 되어 있는 사울을 향해서 뭐라고 말하고 있는가? 다윗은 사울을 향해 누구라고 부르고 있는가? 다윗은 끝까지 사울을 향해 “왕”이라고 부른다. 다윗은 그 광야에서 적을 보지 못했다. 다윗은 자신을 광야의 고통 가운데 내 몬 그 사람을 향해 “하나님의 택하심을 입은 장엄한 왕”이라고 했다. 그는 사울을 향해 경의를 표했다. ‘왕의 보좌’에 앉아있어야 할 왕이 동굴 속에서 쪼그려 앉아 대변을 누고 있다. 얼마나 보기 흉한 장면인가? 그런데 놀랍게도 다윗은 그 장면에서도 가장 경이로운 모습으로 왕을 바라보았다. 자기를 죽이려는 가장 더러운 사람이 똥 누는 가장 추한 모습에서도 다윗은 “하나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거룩함”을 보았다. 아무도 없는 그 광야에서 홀로 침묵하면서 살던 다윗은 사울에게서, 다른 누구도 바라보지 못했던 하나님의 영광을 알아볼 수 있었던 것이다.

광야는 다윗에게 모든 곳에서 아름다움을 알아보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광야는 다윗에게 생명의 고귀함을 가르쳐주는 학교였다. 다윗은 광야생활을 통해서 전에는 전혀 기대하지 못했던 장소와 사물 안에서도 하나님을 알아보는 법을 배웠다. 광야를 통해서, 보잘것없는 돌멩이 하나 속에서도 하나님의 임재를 알아보는 법을 다윗은 배웠다. 그래서 다윗은 어떤 사물도, 어떤 사람도 감히 함부로 대하거나 업신여길 수 없었다. 광야의 거룩이, 광야에서 경험한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가 다윗의 영혼 속으로 스며들었고, 이제 그는 어디에서나, 누구에게서나, 심지어는 자기를 죽이려는 사울 속에서도 하나님의 거룩을 알아 볼 수 있게 되었다.

  그의 맘속에는 하나님으로 가득했다. 목마르고 메마르고 고통스런 광야에서도 하나님을 생각했다. 그는 사울을 피해서 숨을 수밖에 없었다. 그는 자신을 숨길 수 있는 피난처를 절실히 필요로 했다. 그의 맘속에 하나님이 계셨기에, 그의 맘을 하나님의 임재로 가득 채웠기에 그는 그 피난처를 하나님으로 삼았다. 다윗의 시편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말은 ‘피난처’라는 말이다. 그 말은 하나님일 때가 대부분이다. 

  여러분은 지금까지 어떤 광야를 지나왔는가? 그리고 지금은 어떤 광야 길을 걸어가고 있는가?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으로 살 희망을 잃어버렸는가? 질병으로 인해 영혼마저 견디기 힘든가? 질병의 고통을 겪는 가족을 지켜보아야 하는 고통이 있는가? 늘 방탕 하는 자녀로 인해 괴로운가? 불합격과 해고 통지서가 내 삶의 일상이 되어 버렸는가? 이 작은 물질로 견디는 삶을 몇 년이나 더 해야 한다는 말인가 하고 두려움에 휩싸여 있는가? 아니면 누군가를 죽도록 미워하여 스스로 메마른 광야로 들어가고 있는가?

  켄 가이어의 책 <고통의 은혜>라는 책이 있다. 이 책은 켄 가이어의 친구의 아들이 자살하고, 그의 아내가 암을 선고 받고, 그 역시 허리의 통증을 겪으면서 펜을 꺾고 싶을 만큼의 고통 가운데 집필한 책이다. 그는 이 책에서 고통을 이렇게 표현했다. "The Weathering Grace of God". (직역하면 풍화작용 시키는 하나님의 은혜 이런 말이다) 그는 고통을 Weathering(풍화작용)에 비유했다. 바위가 비바람에 깎이고, 떨어져 나가고, 단련되고, 아름다운 바위의 모습으로 바뀌어 가는 과정이 고통이라고 생각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그는 고통을 하나님의 은혜라고 생각했다.

  당신이 무슨 광야 길에 놓여 있든지 한 가지만은 분명하다. 당신은 광야에 놓여있는 하나의 바위와 같다. 당신은 지금 비바람을 맞고 있는 중이다. 그래서 아프고, 그래서 눈물이 난다. 그래서 영혼은 깨어질 듯 힘들다. 그러나 그 비바람을 몰고 오신 분은 하나님이다. 하나님은 그 비바람을 통해서 당신을 빚으신다.

  김종화 전도사님이 미국을 다녀오신 다음에 교역자들에게 선물을 했다. 그랜드 케년의 사진이 있는 달력이다. 얼마 전 김광석 전도사님은 컴퓨터 메인화면을 그랜드 케년으로 바꾸었다. 광활하고 아름다운 그 정경. 그러나 그랜드 케년이 만들어지기 시작했을 때 지진이 일어나고, 화산이 폭발하고, 비바람이 몰아칠 때는 아무도 그런 멋진 모습이 나올지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풍화작용을 통해서 깎고 다듬어서 모든 사람들이 경탄하는 아름다운 바위가 되었다.

  다윗은 광야에서 하나님을 생각했다. 그 메마르고 거칠고 황량하고 위험한 광야에서도 그는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보았다. 하나님의 거룩을 보았다. 하나님의 임재를 보았다. 다윗은 피할 곳 없는 광야에서 하나님을 피난처로 삼고 그 분께로 피하였다. 그래서 그는 시편 57편에서 이렇게 노래한다. 이 시는 ‘다윗이 사울을 피하여 굴에 있던 때에 지은 시’라고 되어 있다. (시편 57:1-11) 을 한 절씩 교독하자.

  다윗은 광야에서 노래 불렀다. “내가 주님께 피합니다. 주님은 나의 피난처가 되십니다. 나는 날카로운 창과 칼 같은 자리에 앉아 있지만 나는 주님을 높이고 찬양하겠습니다. 나는 내 영혼의 거문고와 내 영혼의 수금을 깨워 주님을 노래하겠습니다. 주님 저는 이렇게 힘들어도 한 가지 소원이 있습니다. 주님의 이름이 높이 들리며 주님의 영광이 높아지기를 원합니다.” 그는 광야에서 고통당했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그렇게 하나님을 바라보고 기도하고 찬양하는 사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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