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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남전도회헌신예배] 십자가 아래서 멈추고 바라본 내 인생 (눅 23: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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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말씀하셨다. (34절)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가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다.” “자기가 무슨 짓을 하는지도 모르고 메시야를 저주하고 욕하고 죽이는 저들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우리는 이 기도를 예수님 자신을 십자가에 내 몬 대제사장, 서기관, 바리새인들, 빌라도, 로마 군인들을 향한 용서의 눈물과 간구라고만 생각한다. 그리고 내 자신은 그 사이에서 빠지려고 한다. 정말 그럴까? 나와는 상관이 없나?

  (요한복음 11:45-53) 예수님이 죽었던 나사로를 살린 이후에 사람들 사이에 예수님에 대한 소문이 파다하게 퍼진다. 이제 그 예수라는 사람에 대해서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하는 논쟁이 벌어진다. 그 때 대제사장 가야바가 군중 가운데 서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50절) “한 사람이 백성을 위하여 죽어서 온 민족이 망하지 않게 되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한 줄을 생각하지 아니하는도다.” 대제사장 가야바는 민족을 구하기 위해서는 주님을 제거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는 통찰력 있고 지혜로운 지도자였다. 많은 병자들을 고치고 죽었던 나사로까지 살리게 된 예수님을 많은 사람들이 믿고 따르면 주님을 메시아로 생각할 것이 뻔했다. 이 사태를 그대로 두면 사람들은 메시아를 앞세워서 잃었던 나라를 되찾기 위해서 로마정부를 향해 폭동을 일으킬 것이고, 그러면 로마정부는 무자비한 진압작전을 통해서 결국 유대민족전체를 향한 처참한 살육을 시작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유대민족은 이 땅에서 사라지고 말 것이다. 이 모든 것을 가야바는 미리 예상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부터 주님을 고발하여 처형하는 것은 이 재앙의 뿌리를 미연에 제거하는 것이요, 그것은 지혜로운 대책이라고 생각했다. 대제사장 가야바는 그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요, 백성을 위하는 일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성경은 오늘 이렇게 증언한다. (51-52) “이 말은 스스로 함이 아니요 그 해의 대제사장이므로 예수께서 그 민족을 위하시고 또 그 민족만 위할 뿐 아니라 흩어진 하나님의 자녀를 모아 하나가 되게 하기 위하여 죽으실 것을 미리 말함 이러라. 이 날부터는 그들이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 하니라.”

  가야바가 그렇게 말했던 것은 스스로 함이 아니었다. 가야바는 오해하는 가운데 자기도 잘 모르는 말을 했다. “이 한 사람을 죽이는 것이 온 민족을 살리는 것”이라고 했는데 바로 그것은 온 세상을 위해서 죽으시는 십자가의 죽음을 미리 예언한 것이 되었다. 가야바는 오해 중에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예언을 한 셈이 되었다. 그리고 그 날부터 사람들은 예수님을 죽이려고 모의했다. 그리고 예수님은 오늘 골고다 십자가에서 죽음을 맞이하셨다.

  변화산에서 예수님이 영광스런 모습으로 변모했던 일이 있었다. 예수님은 모세와 엘리야와 함께 예루살렘에서 죽으실 것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신다. 잠시 후에 베드로는 그 때 주님께 이렇게 말한다. “주님! 여기에 초막 셋을 지읍시다.” 그런데 성경은 이렇게 말한다. “베드로가 이렇게 말한 것은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한 말이었다.” 그는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르고 했다.

  “주는 그리스도시오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입니다.”라고 고백했던 그 순간 베드로는 주님이 죽으신다는 말씀을 듣고 절대로 죽지 말라고 한다. 주님을 말씀하셨다. “사탄아. 네 뒤로 물러나라.” 베드로는 예수님이 죽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사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했다. 그는 하나님의 뜻을 오해하고 있었다.

  오늘 예수님은 이렇게 기도하신다. “아버지 저들을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가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다.” 자기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자기가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모르면서,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을 용서해 달라고 주님은 기도하셨다. 이 기도 속에는 모든 사람이 포함된다. 무슨 말을 하는 지도 모르고 했던 베드로.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지도 모르고 거칠게 행동했던 베드로. 한 사람을 죽이고 민족을 살리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다가 메시야를 죽인 대제사장 가야바. 예수님을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던 유대사람들. 죄 없다고 손만 씻으면 된다고 생각했던 빌라도. 재미삼아 제비뽑기를 했지만 성경의 예언을 이루게 한 로마병정들. 그리고 내 자신....

  당신은 여기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고 생각하는가? 우리도 주님의 뜻을 찾고 행하기 위해서 힘을 쓴다. 이웃을 위하는 일이 과연 무엇일까 찾고 행하기 위해서 노력한다. 그 동안에는 하나님 뜻대로 살지 못하는 것이 주님 앞에서 죄송했는데 이제는 이 말씀 앞에서 두려워진다. 그 동안 주님을 위한다고 했던 말들과 행동들이 진실로 주님을 위한 것이었는지..... 우리는 가야바처럼 주님을 위한다는 명분으로 실제로는 주님을 해치고, 주님을 욕되게 하는 일을 한 것은 아니었는지.... 이웃을 위한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내 자신의 이익을 머릿속에 그리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는지... 나는 목사로서 이 말씀 앞에서 부끄러워진다. 나는 이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라고,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라고 하면서 진정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에는 무지하고 어두운 사람은 아니었는지....

  우리는 십자가 아래서 우리가 살아왔던 지난날들을 돌아보아야 한다. 특히 오늘 헌신예배를 드리는 3-40대 남선교회 여러분! 이제 인생의 반을 사신 여러분이기에 그것은 참 중요하다. 내 삶은 그렇게 산다고 자부했던 주님 뜻대로의 삶이었는지를... 아니면 주님을 위한다는 명분하에 내 욕심과 세상에 눈이 어두워 내 자신을 위한 삶이었는지를... 하나님과 다른 사람을 위한다고 하면서 사실은 하나님과 다른 사람들을 가슴 아프게 한 세월은 아니었는지를...

  저는 이 십자가의 기도가 나와는 상관없는 용서의 기도로만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생각해보니 주님의 이 기도는 나의 무지와 착각과 오만에서 깨어나기를 원하시는 나를 향한 눈물의 기도였음을 알게 되었다. 누군가가 이렇게 말했다. “이미 저질러진 잘못에는 용서가 필요하지만, 앞으로 살아갈 날들에는 각성이 필요하다.”  우리가 지금까지 잘못된 삶을 살았다면 주님께 용서를 구하자. 그리고 이제 앞으로 살아갈 우리들의 날들에는 각성(깨어있음)이 필요하다. 하나님의 뜻을 잘 분별하도록... 내 욕심과 사탄의 유혹에 속아 넘어 가지 않도록 깨어있기로 하자.

2. 예수님과 함께 두 강도가 십자가에 달렸다. 한 강도는 끝까지 주님을 비방했지만 다른 한 강도는 자신을 불쌍히 여겨달라고 했다.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 나를 기억해 달라”고 간구했다. 예수님은 그 강도에게 말씀하셨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예수님은 마지막 죽음의 자리에서 낙원에 대해서 말씀하셨다. 사람은 죽음에 처하면 가장 소중한 것을 생각한다. 사람이 죽음에 다다르면 중요하지 않은 것, 비본질적인 것, 부차적인 것은 버리고 가장 중요한 것, 가장 본질적인 것을 붙잡는다. 예수님은 이 죽음의 순간에 낙원(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품)에 대해서 말씀하셨다. 만약 우리의 삶에서 돈이 가장 중요한 것이었다면 우리 주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을 것이다. “한 푼이라도 더 벌어라.” 우리의 삶에서 레저가 소중한 것이라면 그 마지막 순간에 “레저를 위해서 너의 삶을 저축하고 레저를 통해 참된 행복을 누려라.” 만약 우리의 삶에 명예와 권력이 소중한 것이었다면 가장 소중한 것을 말씀해야 하는 이 순간에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을 것이다. “명예와 권력은 무슨 일이 있어도 붙잡아라.”
  그러나 우리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계셨던 주님은 그 마지막 순간에 “낙원”이 중요하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들에게 우리 삶의 마지막이 “낙원”에 이른다고 말씀하신다.

  그러나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눈에 보이고, 손에 만져지는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한다. 이 세상이 전부이고, 이 세상이 끝나면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한다. 인간은 단지 최고로 진화한 생물이며, 하나님은 인간의 상상이 만들어낸 허구일 뿐이라고 여긴다. 포스트모던 시대정신은 내가 따르고 추구해야할 궁극적 권위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면서 고개를 쳐든다. 이 땅 너머의 생명을 넘어서는 무엇이 있음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한다. 그러나 주님은 낙원에 대해서 말씀하셨다. 가장 소중한 것을 말하는 그 순간에 주님은 분명히 낙원이 존재한다고 말씀하셨다.
 
우리는 십자가 아래서 멈추어서 나의 인생을 되돌아보아야 한다. 나는 지금까지 무엇을 위해서 살아왔는지를... 나는 지금까지 낙원을 생각하며 사는 삶이었는지를... 이 세상에서의 삶이 다 끝나면 내게는 낙원, 그 하나님의 나라만 내게 남는다는 것을 기억하고 살아온 삶이었는지를....

  우리는 십자가 아래서 발걸음을 멈추고 앞으로 남은 내 인생을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 “주님, 저에게 자비를 베푸셔서 오늘 이 순간에 내 삶을 정성껏 살아가되 거기에 숨어있는 영원을 보게 해 주옵소서. 제가 선 이 땅에서 충실하게 하시되 거기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보게 하소서. 주님 안에서 참된 소망과 가치를 바라보게 하소서. 지금 눈에 보이고 손에 만져지는 것보다 더 큰 것, 더 영원한 것, 더 참된 것이 있다는 소망을 가지게 하소서.” 우리는 이렇게 기도해야 한다.

3. 주님은 낙원에 대해서 말씀하시면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바로 그 사건이 오늘 있을 것이라고 하셨다. 주님의 곁에 있던 한 강도가 주님을 뵙고 깨닫는 즉시 회개하고 믿을 수 있었던 것은 그에게는 더 이상 남은 시간이 없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그에게는 오늘이 전부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우리도 더 이상 시간이 많지 않다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아니 오늘이 우리시간의 전부이고, 오늘이 우리 인생의 마지막 날임을 기억해야 한다. 우리들에게는 오늘만이 내게 남겨진 실재임을 기억해야 한다.

  저는 예수님의 이 말씀을 읽고 또 읽고 묵상해 보았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오늘과 낙원이 한 지점에서 만나고 있었다. 낙원과 오늘은 그리 멀지 않다. 바로 오늘, 여기에서 둘은 만나고 있었다.

  저는 요즘에 병원에 심방 갈 때 한 가지 버릇이 생겼다. 전에는 그냥 심방 가서 병원에 누워있는 그 사람을 보고 기도하고 말씀을 들려주었다. 나는 목사로서 여기에, 그리고 환자는 저 침대에 저기에 있는 것으로만 여겼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인가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 나는 그 순간 그 환자의 자리로 내려가게 되었다. 나는 목사로서, 건강한 사람으로서, 위로하는 사람으로서 서 있지 않고 어느새 그 사람의 자리에 있곤 했다. 물론 내 마음 속으로다.

  나는 그 사람이 누워있는 침대에 내 자신을 가만히 내려놓는다. 나는 연약한 내 육신을 바라본다. 영양주사를 맞고 있는 나의 팔과 산소호흡기가 꼽혀있는 내 코를 만져본다. 내 눈에 사람들이 보인다. 건강하고 생기에 넘쳐있는 문병 오고 심방 오는 그들의 얼굴이 보인다. 나는 사람들의 얼굴을 찬찬히 바라본다. 천정만 바라볼 수 있는 내 눈. 가끔 악몽을 꾸고, 병실의 천정에 새까만 파리 같은 것들이 앉아 있는 모습을 보기도 한다. 나는 그 때 정신을 차리고 생각한다. 나는 과연 그 때 무엇을 할까?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무슨 말을 할까?

  내가 병실에 누워있는 그 순간에 나는 사랑하는 자녀들을 부르고 싶다. 그리고 말하고 싶다. “예은아, 예진아, 예원아! 나를 한 번 안아주렴. 나를 안아주고 나에게 사랑한다고 말해주렴.” 그리고 나도 내 자녀들을 안고 그렇게 속삭일 것이다. “나도 너희들을 사랑한단다.” 나는 내 아내에게도 똑같은 말을 하고 싶다. “여보, 나를 안아 주세요. 나도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리고 나는 그것이 내 삶의 모든 부분이 되고, 일상의 모습이 되기를 원할 것이다. 그렇게 사랑하고 사랑받으며 사는 것이 결코 어느 한 순간이 아니라 내 삶의 모든 부분이 되도록 할 것이다.

  나는 내 인생의 마지막에 서서 돈을 많이 벌어놓지 못한 것, 많이 배우지 못한 것에 대해서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다만 내가 진실로 사랑하며 살았다면 그렇게 오늘 사랑하는 편을 선택한 그것이야말로 내가 낙원에 이르렀을 때 나를 후회 없게 만들어 줄 것임을 나는 믿는다.

4. 나는 십자가 아래에서 멈추고 내 인생을 돌아본다. 주님은 십자가에서 말씀하셨다.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자기가 하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이제는 우리 모두가 이런 삶을 살아야겠다. 내가 무엇을 하는지도 모르고 하는 무지한 인생이 아니라 아버지의 뜻을 분별하고 살기에 깨어있는 삶, 마지막까지 남는 것은 낙원임을 기억하는 삶, 그리고 바로 그 삶은 오늘 여기에서 시작되어야 하는 삶이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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