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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순절] 눈물로 기도하신 예수님 (히 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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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곡과 눈물로 기도하신 예수님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히 5:7)

I. 본문 설명

히브리서 5장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들의 대제사장 되심을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을 대신하여 중보의 짐을 지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 거룩한 하나님과 죄 가운데 있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만나게 해주는 그러한 역할을 담당하던 자가 바로 대제사장입니다. 그들은 사람 가운데 취한 바 된 자들이며, 죄 지은 백성들을 위해 제사를 드림으로써 거룩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길을 열어 주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무지하고 미혹 받을 수밖에 없는 연약하고 어리석은 백성들까지도 모두 용납해 주어야 했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비록 제사를 드려주는 제사장이기는 하지만, 그러한 연약함에 있어서는 그 백성들과 다름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 대제사장의 직분은 존귀하고 영광스러운 것이었습니다. 그 누구도 제사장이 없이는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없었습니다. 그 누구도 제사장의 섬김을 통하지 않고는 하나님 앞에 제사를 드릴 수 있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이 직분은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니고 아론과 같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특별한 사람들에게만 주어지는 영광스러운 봉사였습니다.

그러나 이 제사장들이 드리는 제사는 항상 임시적인 것이었습니다. 거룩한 하나님 앞에 나아갈 길을 잠시나마 열어주었지만, 그 제사가 그치고 다시 범죄를 하게 되면 또 다시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는 길은 막혔던 것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속에 있는 모든 죄와 하나님 앞에 형벌 받아 마땅한 모든 불의로부터 영원한 사하심을 얻을 수 있는 것은 이 제사로는 불가능했던 것입니다. 인간들은 생각지 못할 그때에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사람들의 모습을 불쌍히 여기셨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가 애통하며 제사를 드리고, 그리함으로써 죄의 용서를 받고 주님과 교제의 길을 열지만 제사가 끝나면 돌아서서 범죄하고 다시 하나님 앞에 나아오지 못하고 고통 받는 어리석은 인생들을 위해서 하나님은 독생자 예수를 우리에게 보내주셨습니다. 이 모든 임시적인 제사들을 파하시고 자신의 몸을 거룩한 제단 앞에 제물로 드림으로써 하나님 앞에 사람들의 죄를 용서받게 하시기 위하여 그분이 오셨다는 것입니다.

그분의 몸은 십자가에 드려졌고, 흘린 보혈의 공로는 참으로 위대한 것이었습니다.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사람들이 그 샘에서 죄악을 씻었고, 예수의 거룩한 피로서 속죄를 얻었습니다만 아직도 그 피와 속죄케 하는 십자가의 위대한 능력은 감하지 않았습니다. 지금도 그 피와 그 물이 우리들을 구원하여 하나님 앞에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예배를 드리게 하고 있는 것입니다. 지금도 그 위대한 보혈의 능력은 땅 끝까지 이르러서 예수 그리스도의 증표가 되고 있습니다. 주님이 대제사장으로서 자기의 몸을 십자가의 제물로 드리셨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자기의 몸을 찢으시고 피를 흘리심으로 제사를 드렸고, 우리는 그의 보혈을 힘입어 하나님 앞에 나아올 수 있게 되었으며, 왕 같은 제사장이 되었습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오직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된 백성이니 이는 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자의 아름다운 덕을 선전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 2:9). 생각을 해보십시오. 그리스도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자신의 몸을 깨뜨려 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구원을 얻을 수 있었던 것처럼 우리들은 이 세상에 나아가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함으로써만 이 세상은 소망이 있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나아가 복음을 전하지 않는다면 세상은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주님이 못 하시는 것이 아니라 안 하시기로 결정을 하셨습니다. 그분의 깨뜨려진 옥체로 말미암아 휘장은 찢어졌고 그의 뿌리신 보혈로 말미암아 새롭고 산 길이 보좌 앞으로 나게 되었습니다. 학벌이나 가문이나 명예나 외모는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오직 맨발로 그 앞에 나아와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그분의 흘리신 그 핏 길을 따라 걸어가 보좌 앞에 무릎을 꿇을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은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새롭고 산 길을 열어주시기 위해서 자신의 몸을 대속 제물로 바치신 대제사장 되시는 주님이 어떻게 이 땅을 사셨는지를 한 마디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생각을 할 때에 지울 수 없는 것은 그분은 우리들처럼 이 세상에서 희희낙락(喜喜樂樂) 하시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웃으면서 사는 것을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생애는 그처럼 진지하고 고민하는 생애였다는 것입니다. 거룩한 하나님과 고민하는 백성들 사이에서 그분이 하실 수 있는 모든 진진한 생애의 표현은 기도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로 하여금 한없이 신앙의 옷깃을 여미게 하는 영광스러운 그분의 기도의 생애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II.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성경은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이 얼마나 죄스러운 일입니까? 그분은 하나님이셨습니다. 천상의 영광 가운데서 모든 천사들의 나팔소리와 우렁찬 찬양 소리로 영광을 받으셔야 했던 분이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은 육신을 입으셨습니다. 추우면 고통스럽고, 식사를 못하면 배고픈 연약한 육체를 입은 인간들처럼 말입니다. 죽으면 바람결에 날려갈 지푸라기 같은 육체를 입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생들의 모든 육체를 창조하신 그분이 육체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하늘의 보좌를 버리고 부끄러움을 개의치 않으시고 자기가 창조하셨던 들풀과 같은 인간의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던 것입니다.

거룩한 영광의 본체이신 그분이 왜 낮고 천한 육체를 입으시고 이 땅에 오셔야했습니까? 천상의 영광을 무슨 이유로 버리셨습니까? 그것은 오직 저와 여러분들을 구원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분이 오신 것은 인간을 대속하시기 위해 영원한 제물로 죽으시기 위함이었고, 그렇게 죽으시기 위해서는 하나님이신 그분이 죽음의 속성을 가진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이 땅에 오셔야만 했던 것입니다. 구약의 모든 제물들 가운데 아무리 훌륭한 제물이라 할지라도 살아서 하나님께 제물로 드려진 적은 없습니다. 피 흘림이 무엇을 뜻하는지 아십니까? 완전한 죽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완전히 죽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을 떠난 어리석은 백성들과 거룩한 하나님과의 사이에 영원한 제물로 자신을 드리기 위하여 이 땅에 오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인 것입니다.

그러나 이처럼 하늘의 영광을 모두 버리시고 죄인 된 우리를 구하기 위하여 이 땅에 오신 그분을 세상이 어떻게 대접을 하였습니까? 하늘에는 아름다운 별들이 빛나고 양떼들이 잠든 그 때에 말구유에 오신 그분을 세상은 죽일 준비를 하고 있었습니다. 주님은 가난한 환경에서 자라나셨습니다. 우리처럼 문화 혜택을 누리지도 못했습니다. 낮고 천한 목수로 사셨습니다. 허드렛일을 하시면서 사셨습니다. 그러다가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하여 한 점 죄도 없으신 그분이 죄 있는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러 나갔을 때 하늘에서는 음성이 있었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늘의 음성이 들린 후에 그분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습니까? 세례를 받으시고 이 땅에 등장하셨을 때에 그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사십 일 동안의 굶주림과 악한 마귀의 시험이었습니다. 하늘의 아름다운 음성은 들렸으나 그분의 생애는 고난으로 얼룩졌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그분을 영접치 아니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성경은 말을 합니다.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요 1:5). 세상은 그분을 영접하지 아니하였습니다. 오직 우리를 위하여 하늘 영광을 버리신 그분을 세상은 거절하고 미워했습니다. 세상은 그분을 사랑하여야함에도 불구하고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그들이 십자가의 예수를 죽일 때에 그들은 자기의 생명을 죽인 것입니다. 세상은 그를 향하여 돌은 던졌으며 우리도 그에게 침을 뱉었습니다. 채찍으로 그를 때리고 가시관을 씌울 때 우리도 거기에 있었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주님께서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실 때에 세상이 당신을 영접치 않을 것이며, 이런 일들이 자기에게 일어날 것을 미리 아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분은 오셨고 이 모든 고난을 홀로 당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이 말씀 앞에서 두려워 떨게 하시기를 원합니다. 이토록 치욕스러운 멸시와 천대를 받게 됨에도 불구하고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은 오직 우리들을 구원하시기 위함이었습니다.
도대체 그분이 세상을 위하여 어떤 나쁜 일을 하였습니까? 그분은 죄인을 구원하기 위하여 하늘의 보좌를 버리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 죄인의 몸을 입으셨습니다. 가난함과 피곤함에 복종하며 사셨습니다. 그는 우리의 구원을 위해 우셨고, 비참한 죄인들을 위하여 기도하였으며, 가난하고 병든 자를 위하여 먹이시고 치료하였습니다. 그분은 자신의 온 생애를 자기를 위해서 살지 않으셨습니다. 우리를 위해 오셨고, 우리를 위해 희생하셨으며, 우리를 위해 세상의 즐거움을 버리셨습니다. 가난한 자와 함께 가난해지고, 고통 받는 자와 함께 쓰라림을 나누셨습니다. 그리고는 야위신 그 몸에 걸쳐진 옷 한 벌마저도 군병들에게 내어준 바 되었고, 이제 벌거벗은 몸으로 오직 하나 남은 자신의 육체마저 깨뜨려 십자가에 매달리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십자가의 사랑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끊임없이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다시 태어나지 않는다면, 우리들은 우리들이 알지 못하는 사이에 주께서 우리를 구속하신 위대한 십자가를 잃어버리고 세상을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될 것입니다.

III. 심한 통곡과 눈물로

육신을 입고 오신 그분이 이 땅에 계실 때에 어떤 삶을 사셨는지에 대해 성경은 이어서 우리에게 말해주고 있습니다.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렇습니다. 주님의 생애는 곧 기도의 생애였고, 그분의 기도는 그분의 전 삶을 통해서 드러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주님의 생애는 피의 생애였고, 땀으로 얼룩진 생애였습니다. 무엇보다도 그분의 생애는 눈물로 살다간 기도의 생애였습니다. 십자가에서 흘리신 거룩한 보혈은 우리의 모든 죄를 사해주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을 기억하십시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 구속을 위해 십자가에서 흘리신 그리스도의 보혈을 받으시기 전에 먼저 그분이 흘리신 눈물의 잔을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은 그분의 기도하는 모습을 그리고 있습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무릎을 꿇고 심한 통곡과 눈물로 하나님 앞에 몸부림을 치는 주님의 기도하는 모습을 제외하고는 예수님의 모습을 생각을 할 수가 없었다는 것입니다. 거룩한 하나님을 섬기는 가장 첫 번째 소명이 곧 골방의 소명이라는 것을 기억하십시오.

1. 우리를 위해 탄원하시는 기도

예수님의 기도생활에 대해 언급하면서 히브리서 기자가 왜 이렇게 극단적인 표현을 쓰고 있을까요? 예수님의 생애는 늘 기도하는 것이었지만, 오늘 히브리서 기자의 시각은 철저하게 십자가에 초점이 맞춰져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기도를 떠올릴 때에도 주께서 잡히시던 날 밤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던 모습을 그리고 있는 것입니다. 그분은 다르게 기도하였습니다. 요한복음 17장에는 주님이 드리신 기도의 내용을 볼 수 있습니다. 그 기도는 처음부터 끝까지 대제사장의 기도였습니다. 그 기도는 남겨둔 사람들과 제자들을 위한 기도였고, 이 땅에서 마땅히 돌려져야 할 하나님의 영광을 구하는 기도였습니다. 이 기도가 바로 주께서 잡히시던 날 밤, 겟세마네 찬바람 부는 동산에서 홀로 심한 통곡과 눈물로 기도하게 만들었던 그 기도의 제목이었다는 사실입니다.

늘 죄를 짓고 하나님과의 교제가 끊어지는 우리는 통곡할 때가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죄 없으신 주님께서 이처럼 통곡하시며 눈물을 흘리신 이유가 무엇이었습니까? “나를 보내신 이가 나와 함께 하시도다 내가 항상 그의 기뻐하시는 일을 행하므로 나를 혼자 두지 아니하셨느니라”(요 8:29). 이것이 우리 주님의 영적 상태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마치 주님이 큰 죄악을 회개하시는 것처럼 통곡하며 기도하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무엇 때문에 그분은 그렇게 우셨습니까? 기억하십시오. 그분이 말할 수 없는 통곡과 넘쳐나는 눈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셔야 했던 것은 당신 때문이 아니라, 우리를 위한 탄원이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주님은 강한 분이셨습니다. 자기를 죽이려고 다가오는 핍박 앞에서도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으셨습니다. 주님을 배반하고 모두들 떠나갔을 때 한숨 한 번 내쉰 적이 없으셨습니다. 이 모든 통곡과 눈물은 모두 우리의 죄악으로 인한 것이라는 점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느낄 수 없었던 하나님의 심판을 그분은 보셨기에 그런 통곡과 눈물로 기도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의 기도제목은 무엇입니까? 우리는 무엇을 위하여 통곡을 하며, 무엇을 인하여 눈물을 흘리고 있습니까? 처음 주를 만났을 그때에 우리가 공통적으로 표하는 신앙의 고백은 마음이 뜨거웠다는 것입니다. 무릎을 꿇고 기도를 할 때는 힘없이 십자가를 지시고 겟세마네 동산으로 올라가는 주님의 모습이 떠올랐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흘리신 그 눈물소리가 들렸습니다. 이런 첫사랑에 붙잡혔을 때에 우리의 기도는 나를 위한 기도가 아니라, 교회와 사랑하는 형제들과 고통 하는 이웃과 구원받지 못한 가족을 위한 기도가 전부였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신앙이 하나님을 만나는 감격을 잃어 버렸을 때에 우리의 기도는 처음부터 끝까지 오직 나만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것도 대부분이 육체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이제 주님이 그토록 통곡을 하지 않고는 기도하지 않을 수 없었던 그 기도의 제목들을 회복을 하여야 할 것입니다. 우리들에게도 그분이 우셨던 그 기도의 제목으로 울게 해달라고 하나님 앞에 간구하여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애통하여야 할 것입니다. 주님이 애통해하시던 기도의 제목들이 내게는 왜 가슴 아프게 다가오지 않느냐고 주님 앞에 애통 하여야 할 것입니다. 우리 각자의 기도의 골방을 돌아봅시다. 우리의 눈물로 기도의 방을 적시게 해달라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모든 육체는 풀이요 그 모든 아름다움은 들의 꽃 같으니”(사 40:6). 곧 시들어 버릴 이 세상 사랑이 우리들로 하여금 주님의 통곡하시는 그 기도의 제목을 다시 회복하지 못하게 만든다면 우리들은 하나님의 사람이 아닙니다.

2. 세상과 맞서는 기도

여기서 한 가지 질문이 제기될 수 있습니다. 우리를 위해 기도하셨으면 하셨지 왜 그리 통곡하며 기도하셨느냐는 것입니다. 천국에서의 주님의 사역은 끝이 났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계속되고 있는 사역이 있으니 그것은 곧 우리를 위한 중보기도입니다. 주님은 지금도 우리를 위해 기도하고 계십니다. 그렇다면 천국에서는 눈물 없이 이루어질 수 있는 이 기도가 왜 이 땅에서는 그토록 통곡하며 기도하셔야 했을까요? 그것은 바로 이 때문입니다. 세상은 하나님을 위해서 살고자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도와주지를 않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천국에는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 이외에는 없습니다. 그러나 이 세상은 하나님을 위해서 살고자 하셨던 그분을 도와주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뜻을 거스르고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뜻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는 것이었으나, 세상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지 못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주님은 생명을 주시기를 원하였으나, 세상은 그 생명을 받기를 원하지 않았습니다. 이런 모든 것들이 그분으로 하여금 고통 가운데 통곡하며 기도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를 원하는 자마다, 자신을 하나님 앞에 헌신하기를 원하는 자마다 이처럼 자신을 도와주지 않는 세상과 맞서야 합니다. 더불어 싸워야 합니다. 더 깊은 기도의 세계로 들어가기를 원하십니까? 세상과 싸울 준비가 되어있느냐고 물어 보십시오. 세상의 은밀한 즐거움을 영혼의 위로를 삼고 있는 사람들은 결단코 이런 기도의 세계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IV. 전능하신 하나님께

이어서 성경은 우리들에게 예수님께서 이렇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기도하신 것에 대해 하나님이 어떻게 생각을 하셨는지를 보여줍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분에게 기도를 올리셨다고 말입니다. 이는 주님께서 기도를 하실 때에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여기셨는지를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기도를 올리신 분, 예수님의 그 기도를 듣고 계신 분은 죽음에서 그분을 구원하실 전능하신 하나님이셨습니다. 다가오는 십자가의 고난을 앞두고 심한 통곡과 몸부림으로 기도할 때에, 그 기도를 들으시는 분은 단지 기도를 들으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를 죽음에서 끌어올려주실 분인 만군의 하나님이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미 부활을 바라보는 기도였습니다. 그렇습니다. 다가오는 십자가의 죽음 앞에서 드리는 겟세마네의 기도가 끝이 나고, 예수님은 그 십자가를 지시기로 결정하셨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기도하신 우리 주님에게 하나님께서는 부활의 능력을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이 얼마나 놀라운 믿음입니까? 주님께서는 이처럼 하나님을 신뢰하였습니다. 사망의 음침한 칼날이 자기를 향하여 오고 있고, 자기의 피를 요구하는 십자가가 당신을 향하여 다가오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는 죽음에서 능히 자신을 구원하실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을 바라보고 힘차게 일어섰던 것입니다.

오늘 아침에 드린 우리의 기도는 누구에게 올린 기도입니까? “하나님 아버지시여!”라고 그분의 거룩한 존함을 부를 때에, 나를 둘러싸고 있는 수많은 문제들이 사망과 같이 엄습한다고 할지라도 능히 우리를 살리실 수 있는 능력의 하나님이 우리의 기도를 듣고 계신다는 믿음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V.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

마지막으로 주님은 기도의 응답을 받으셨습니다. 오늘 성경은 예수님께서 그 기도를 하실 때에 하나님이 그 기도를 들어 주셨다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응답받은 주님의 기도가 어떤 것인지 깊이 깨닫고 싶어집니다. 왜냐하면 주님은 태도에 있어서만 모범이 된 것이 아니라 기도의 응답에 있어서도 모범이 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성경이 언급하고 있는 바와 같이 주님처럼 심한 통곡과 눈물로 기도를 하면 모두 다 응답을 받을 수 있는 것일까요? 성경은 그분이 말할 수 없는 통곡과 눈물의 기도, 간절히 드려지는 기도를 올렸기에 하나님이 예수님의 기도를 들어주셨다고 말하지 않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주님은 간절한 기도의 모범이 되시기는 하지만, 간절히 기도한다고 해서 하나님이 반드시 들어주실 것이라는 생각은 오해라는 것입니다.

어느 교회의 한 성도님의 이야기입니다. 남편이 죽을병에 걸려 사경을 헤매게 되자, 아내 되는 집사님은 믿음을 가지고 남편을 낫게 해달라고 기도원에서 간절히 기도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간절히 드려진 기도에도 불구하고 남편은 끝내 하늘나라로 갔고, 실의에 빠진 집사님은 목사님을 찾아와 성경의 모든 말씀이 하나님의 말씀이 아니라는 뜬금없는 말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말씀은 곧 “너희가 내 이름으로 무엇을 구하든지 내가 시행하리니···”(요 14:13)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때에 목사님은 이런 답변을 집사님에게 해주었습니다. “그 말씀 속에 나와 있는 ‘너희’는 자매님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말씀 뒤 구절을 보세요.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요 14:21)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계명을 온전히 지키는 자, 삶의 동기가 주를 경외하는 것에 모두 맞춰진 자의 기도를 하나님은 들어주신다는 것입니다. 심한 통곡으로 가슴을 칠 만큼 그 기도가 아무리 간절하다 할지라도, 그의 삶이 주를 경외하고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을 위해서 살려고 몸부림치는 삶이 아니라면 그가 외치는 기도 소리는 주님의 보좌 앞에 아무 것도 아닌 것입니다.

위대한 기도의 사람들의 삶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들은 골방에만 묻혀있는 사람들이 아니었습니다. 주를 위하여 생명을 걸고 나아가 싸운 사람들이었습니다. 복음의 불모지에 복음을 들고 담대히 나아가 외쳤으며, 자신이 살아있는 동안 주께 영광 돌리기 위해 몸 버려 피 흘려 수고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의 기도는 짧아도 힘이 있었습니다. 위대한 능력이 있었습니다. 여호수아의 기도가 그러했고, 다니엘의 기도가 그러했습니다.

그들은 모두 단순히 기도의 사람이 아니라 주를 위해서 산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사람들의 기도를 주님께서 응답을 해주셨습니다. 우리의 입술은 주의 영광을 위해서 살게 해달라고 간절히 기도하는 것 같아도 우리의 속사람은 우리에게 송사를 하고 있습니다. 마음에 들어온 세상의 탐욕과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 그리고 학개 시대의 백성들처럼 여호와의 전을 지을 때가 멀지 않았다고 하며 자기들은 편안한 집에 거하는 이기적인 탐심들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입술로는 아무리 주를 위해서 살겠다고 해도 속사람은 영원히 너희의 기도는 참된 기도가 아니라고 참소를 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말을 합니다. 여호와께서 이런 사람들의 기도를 들어주신다고 말입니다. 우리는 왜 그렇게 깊이 기도를 할 수가 없습니까? 우리는 반드시 어떠한 희생을 치루더라도 더 깊은 기도의 세계 속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이런 친밀함을 누리는 것에 대해서 성경은 언급합니다. “여호와의 친밀함이 경외하는 자에게 있음이여 그 언약을 저희에게 보이시리로다”(시 25:14). 성도 여러분, 눈을 들어 예수를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통곡과 눈물로 기도를 하실 때에 응답해주셨던 하나님이 지금도 이 교회의 주인이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또한 우리들의 삶의 주인이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VI. 맺는 말

우리는 결단하여야 합니다. 주가 오르셨던 겟세마네 동산으로 올라가야 할 것입니다. 그분이 통곡하며 기도하셨던 것처럼 우리들도 잃어버린 영혼들을 위해 울부짖어야 할 것입니다. 그분이 찬바람 부는 갈보리 언덕, 겟세마네 동산 모퉁이에서 우리의 이름을 부르며 눈물을 흘리셨던 것처럼 하나님의 거룩한 교회에 성령으로 말미암아 부어지는 부흥을 주시기를 간절히 기도하는 눈물의 잔들을 채워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것을 원하시고 계십니다.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하였던 예수님의 기도를 외면하지 않으셨던 것처럼 우리들도 이렇게 주를 경외하며 그 마음으로 기도를 올릴 때에 하나님은 결코 우리의 기도를 외면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주의 영광이 찬란하게 드러날 것입니다.
(김남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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