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고난 받는 자를 위한 신앙인의 위로 (욥 2:11-13)

  • 잡초 잡초
  • 530
  • 0

첨부 1


고난 받는 자를 위한 신앙인의 위로 (욥 2:11-13)

탈무드에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떤 랍비가 당나귀를 타고 닭 한 마리와 등불과 천막을 싣고 여행을 떠났습니다. 닭을 가지고 다니는 이유는 아침을 알려주는 시계역할을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해가 저물어 길옆에다 천막을 치고 나귀와 닭은 천막에다 묶었습니다. 그리고는 천막 속에서 등불을 켜고 성경을 보고 있는데 갑자기 강한 바람이 불어 등잔대가 넘어지고 그만 불이 꺼지고 말았습니다. 할 수 없이 성경을 덮고 기도를 하고 잠을 잤습니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밤사이 맹수들에게 나귀와 닭이 죽고 없어졌습니다. 그런데 주위를 살펴보니 자기가 천막을 쳤던 바로 옆이 동네였는데 그걸 모르고 밤에 천막을 쳤던 것이죠. 바보구나 생각하며 동네에 들어갔더니 온 동네가 난리가 났습니다. 어젯밤에 강도떼가 쳐들어와서 사람들을 죽이고, 물건을 빼앗고 그야말로 아수라장을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걸 보고 랍비는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감사를 드렸습니다. 만일에 어젯밤 자기 천막에 등불이 켜 있었거나, 닭이나 나귀가 살아서 소리라도 냈더라면 자기는 어떻게 될 뻔했습니까?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이세가지를 미리 잃었기 때문에 살아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아침에 일어났을 때 잃어버린 것 때문에 마음이 아팠습니다만 잃어버린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을 얻었기에 그는 하나님께 감사했다는 이야기입니다. 큰 교훈으로 받아야 할 이야기입니다.

살아가다 보면 때로 우리도 많은 것을 잃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속에서 깊이 생각해 보면 잃은 것 보다 오히려 그것을 통해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은혜가 더 크다는 것을 반드시 알게 됩니다.
사람이 살아가면서 의식 중이든 무의식중이든 겪는 작고 큰 역경들을 우리는“고난”이라는 단어로 표현합니다. 질병도 고난이요, 실패도 고난이요, 배신도 고난입니다. 그 누구도 고난을 원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부지불식간에 밀어닥치는 불청객이 바로 이 고난입니다. 고난에도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육체적인 고난, 정신적인 고난, 민족적인 고난 등이 있는데 누구든지 한 가지 이상의 고난을 겪게 되어있습니다.

인간의 고난은 크게 네 가지에서 온다고 합니다. 첫째는 개인의 죄 때문에 오는 고난이 있다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이 고난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이라 스스로 자초한 고난입니다. 가령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건강을 해친다든지, 윤리적 타락으로 인해 받는 고난입니다. 둘째는 집단적인 죄악 때문에 오는 고난이 있습니다. 사회 집단적인 죄로 인해 전쟁이 일어나고 무죄한 백성들이 고통을 당하게 되는 현상입니다. 셋째는 실수로 말미암은 고난입니다. 고의성이 없는 교통사고나 의도하지 않은 실수로 말미암아 고난을 당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넷째는 불가항력적인 고난입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어찌할 수 없는 경우가 잇습니다. 이를 우리는 천재지변이라 하는데 홍수라든지, 눈사태 같은 자연재해로부터 오는 고난은 불가항력적인 고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어쨌든 이러한 고난을 누구나 할 것 없이 받으면서 살아간다는 사실인데 문제는 그 고난을 대하는 자세는 각기 다르다는 것입니다. 어차피 당해야 하는 고난인데도 어떤 사람은 원망부터 시작합니다. 어떤 사람은 낙심합니다. 어떤 이는 고난을 당하면 반항하고, 자포자기하고 자살까지 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이는 고난 앞에 아예 타락해버리고 심지어 상상도 못할 흉악한 죄를 범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결과론적으로 분명히 잘못된 태도들입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 내가 당하는 고난도 문제이겠습니다만 다른 사람의 고난도 마찬가지입니다. 고난 받은 자를 대하는 태도나 위로하는 마음에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사람이 고난을 받을 때에 어떤 자세로 그를 위로하느냐에 따라 그 사람의 고난을 절반으로 줄여줄 수도 있고 그 고난을 배가시킬 수도 있는 것입니다. 신앙인이라면 고난 받는 이를 위한 위로의 지혜를 알아야합니다. 여기에 성도의 올바른 교제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오늘 본문에 나옵니다. 귀를 기울여 들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공동체에서 놀라울 정도로 빠르게 확산되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소문입니다. 소문이라는 것은 참 빠릅니다. 특별히 나쁜 소식은 더 빨리, 더 멀리 퍼져나갑니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 사는 곳이면 똑같습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당대의 의인이요 부자라고 할 수 있는 욥이 망했다는 소식이 특종 기사 감처럼 삽시간에 퍼져나갔습니다. 교통도 정보수단도 발달하지 않았던 원시사회였지만 한 집안이 패가망신했다는 소식은 삽시간에 사방으로 퍼져 나갔습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소문이라는 것은 희한해서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과정에서 꼭 사실과 다르게 눈 덩이처럼 부풀려져서 희한한 말이 떠돌아다닙니다. 오늘 고난을 당하고 욥에게는 친구가 세 사람 있었는데 욥이 재기 불가능 할 정도로 끔찍한 불행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고 함께 먼 거리에서 찾아옵니다. 이친구들도 욥에 대한 별의별 소문을 다 들었을 것입니다.“욥이 나쁜 짓 하다가 벌 받았다”라든지,“욥이 몹쓸 사람이었는데 잘 되었다”든지 친구에 대한 안 좋은 소문을 많이 들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 세 친구는 욥을 믿었고 그 신의를 저버리지 않고 찾아온 것입니다. 11절에 보면 불행을 당한 친구 욥을 조문하고 위로하기 위해 서로 약속하고 찾아 왔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내가 고난 속에 빠져있을 때, 내가 아픔 속에 있을 때 좋은 위로 자가 있다는 것은 행복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이 고난 속에 있을 때에 좋은 위로 자가 되어 주는 것 또한 마찬가지로 행복입니다. 어떻게 하면 진정한 위로 자가 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오늘 욥의 친구들에게서 신앙적인 좋은 위로자의 값진 교훈을 배울 수 있어야 합니다.

신앙인의 바른 위로 첫 번째는 남의 고난을 보면 내 자신의 일처럼 생각할 수 있어야 진실한 위로가 될 수 있습니다. 사람이 가진 것이 있고 소위 잘 나갈 때는 주위에 사람들이 많습니다. 뭘 좀 얻을까하는 마음 때문에 늘 그 곁을 맴돕니다. 그러나 이런 사람들은 그 사람이 망하면 곧 떠나 버립니다. 얻을 게 없다 싶으면 얼른 떠나버리는 철새 같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오늘 세상을 가만히 보면 정치도 그렇고, 사회도 그렇고 심지어는 신앙의 교제도 그렇습니다. 아마 욥도 그랬을 것입니다. 잘 나가는 사람이었습니다. 주위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있었겠습니까? 늘 그 주위를 맴도는 사람들로 북적거렸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망했다 소문나니까 사람들이 없었습니다. 오직 그 친구 셋만이 욥을 찾아왔습니다. 요즈음 세상에서 욥의 친구들처럼 진실한 위로를 해줄 수 있는 사람은 극히 드뭅니다. 흔한 인간의 마음이란 나와 모종의 거래가 있거나 도움을 받았으면 그 사람을 위해 억지로라도 마음을 기울일 수 있습니다. 현대인들은 매우 약삭빨라서 실속을 차릴 수 있는 일이면 울기도 하고 밤샘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 이득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에서 욥의 세 친구처럼 진정으로 위로해줄 수 있는 사람을 찾기는 어렵습니다.

오늘 이 시대에도 진정한 위로 자가 필요합니다. 얄팍한 동정을 보여주는 정도의 위로는 소용없습니다. 욥에게도 형통한 날에는 많은 사람이 친구가 되었으나 어려움을 당하니 다 멀어졌습니다. 그런데도 이 세 친구는 욥을 떠나거나 버리거나 배반하지 아니하고 우정을 계속 했습니다. 욥이 형통했을 때와 똑같이 변하지 않는 진정한 우정으로 욥을 찾아왔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겪는 고난이 욥과 같을 수야 있겠습니까마는 또 다른 여러 형태의 고난을 겪으면서 살아갈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좋은 위로 자, 진정한 위로 자를 만나야하는 것입니다. 정말 내 형편과 처지를 누구보다도 이해하고 일시적인 듣기 좋은 말이 아니라 근본적인 위로가 될 수 있는 순수한 동기로 선한 위로를 아끼지 않는 욥의 세 친구와 같은 위로 자를 만나야할 것이요 또 그런 위로 자가 되어주어야 할 것입니다. 내 자신의 일처럼 생각하여 영혼에 상처입지 않도록 내 감정을 어루만져줄 수 있는 그런 위로가 필요합니다. 이 위로 뒤에 주어질 보상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순수한 동기로 시작해서 순수한 동기로 끝나는 위로 자가 필요합니다.

두 번째로 생각해 볼 진정한 위로의 지혜는 때로 침묵이 훌륭한 위로가 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욥의 세 친구는 매우 지혜로운 사람들이었습니다. 욥의 모습을 보았을 때 말이 필요 없다는 사실을 금방 알아차렸습니다. 일주일을 함께 앉아 있으면서 욥이 먼저 입을 열기 전 까지는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그 고통 하는 마음에 쓸데없는 말 몇마다 하는 것이 아무 의미 없다는 것을 그들은 너무나 잘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만약에 이들이 자기들이 들었던 소문을 한 마디라도 했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떠도는 소문이 말이 아니었습니다. 물론 근거 없는 뜬소문이고 욥을 몹시 싫어하는 사람들의 소리였지만 얼마나 심한 욕들을 했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욥의 세 친구들은 아무런 말도 백해무익한 말이라 여겨 침묵하고 있습니다.

위대한 침묵, 이 속에는 얼마나 큰 뜻이 숨어 있습니까?‘우리가 안다. 네 아픔을 왜 모르겠니? 아무 말 하지 않아도 네 속이 타 들어가는 것을 다 안다. 쳐다만 봐도 네 심정이 전해진다. 우리 아무 말 하지 말자.’이 침묵이 단순히 입만 다물고 있는 것이 아니라 이런 의미 있는 침묵입니다. 때로는 침묵이 진정한 위로가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아무 말 하고 싶지 않습니다. 떠올리고 싶지 않은 고난이 있단 말입니다. 그 때는 자꾸 말시키지 말아야 합니다. 위로한답시고 던진 말 한마디가 불씨를 만들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왜 전화해서 이래라저래라 합니까? 그 사람도 충분히 괴로워하고 있습니다. 더구나 긍정적인 말이나 하면 다행이지요. 파괴적이고 부정적인 말로 거기에다가 또 불을 질러요. 절대로 그 사람을 위한 것도 아니요 지나고 나면 나 자신도 몹쓸 사람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차라리 침묵하는 것이 더 큰 위로가 됩니다. 욥의 친구들, 욥 앞에서 한 많은 세상을 탓하지도 않았습니다.“언제 아무개가 너더러 뭐라고 하더라.”하지도 않았습니다.“너 이러다가 망한다.”불난데다 기름을 끼얹지도 않았습니다. 단지 침묵할 뿐입니다. 물론 시간이 흐른 후에 말을 하긴 합니다마는 적어도 지금은 침묵하고 있습니다. 우리들도 이 지혜를 배워야합니다. 뭘 좀 안다고 입이 근질근질해도 참아야 할 때가 있는 것입니다. 적어도 지금은 아니라는 판단정도는 할 줄 알아야합니다. 잠15:23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삶은 그 입의 대답으로 말미암아 기쁨을 얻나니 때에 맞는 말이 얼마나 아름다운고.”물론 세 친구들이 끝까지 말을 조심했더라면 더 좋았을 뻔 했습니다마는 어쨌든 오늘의 침묵은 진정한 위로자의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우리 주변에는 언제나 어려운 일을 당하여 고난 가운데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신앙 안에서 고난을 혼자 삭이며 살아가는 이웃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성경을 조금 안다고 해서 남의 고난을 함부로 해석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교회에 출석한 연조가 오래 되었다고 해서 남의 고난을 향하여 설교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이 설교, 이 해석, 이 변론이 친구의 고난을 가중시킨다는 것을 왜 모르십니까? 차라리 아무 말하지 말고 함께 있어 기도해주기만 하면 더 크고 훌륭한 위로가 될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태양이 내리쬐는 곳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었습니다. 정성껏 화폭에 담았는데 그림을 완성해보니 전혀 실감이 나지 않는 그림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그는 다시 그림을 그렸는데 두 번째 그림은 만족할 만한 그림이 되었습니다. 무슨 차이가 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 그림을 비교해보았더니 첫 번째 그림에는 그림자를 그리지 않았고 두 번째 그림에는 그림자를 그렸더라는 것입니다. 그림자가 없음으로 말미암아 그림의 진실성이 결여 된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인생의 화폭에도 이와 같이 고난의 그림자가 드리워지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거짓인생에 젖어 살아가고 있을지도 모릅니다. 고로 우리는 우리인생에 찾아오는 고난의 그림자를 멸시하지 말아야합니다. 그 그림자는 인생의 가장 아름답고 가치 있는 그림을 성사시키는 초석이 될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고난이 없는 인생은 거짓 인생입니다. 어떤 고난이든 따라오게 되어있는 것이 우리의 삶임을 잘 알아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이 고난을 어떻게 받아들이며 사느냐하는 문제와 고난당한 자에게 어떤 위로 자가 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더욱 큰 문제입니다. 신앙생활 하는 가운데서 나에게 다가오는 고난도 문제이거니와 부디 고난당한 자 앞에 신앙의 진정한 위로자의 삶을 살아나가시기를 바랍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