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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순절] 왜, 예수를 못 박는가? (눅 23:1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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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예수를 못 박는가? (누가복음 23:13~25)

어떤 수도사가 기도를 계속하는데 주님이 나타나셨다. 강단 앞에 나타난 주님은 너무도 약한 몰골에 뼈만 앙상하게 남아있는 모습이셨다. 부활하셔서 하나님의 우편에 앉아계시는 주님, 철장 권세를 가지고 다시 오실 주님이 왜 뼈만 남아 계신 모습으로 자신의 눈에 나타나셨을까? 괴롭고 슬픈 마음으로 강대상에 엎드려 있는데 환상 중에 주님이 다시 나타나셨다. 그리고 자신의 가슴을 보여주셨다. 그 가슴에는 창자국만 남아있는 것이 아니라 잔못이 서너 개 박혀 있었다. 깜짝 놀란 수도사는 “누가 주님 옆구리에 이 잔못을 박았느냐?”고 소리 지를 때 마음의 음성이 들려왔다.

‘너의 죄 때문이다.’
‘너의 허물 때문이다.’

회개하고서 예수를 믿으면서도 내가 생활 속에서 주님의 가슴에 다시 잔못을 박을 수 있다는 것에 대해 수도사는 깊이 회개하였다고 한다.

멜깁슨 감독이 만든 영화 「Passion Of Christ」를 촬영할 때, 예수를 못 박는 장면은 본인이 직접 찍었다고 한다. “누가 예수를 못 박았는가?”라는 기자의 질문에 유대인이 아니라 바로 죄 짓고 사는 자신의 손이었음을 고백하였다.

오늘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산다고 하지만 불신자와 똑같이 산다면 예수를 내 손으로 다시 못 박는 것이다. 예수님을 다시 못 박지 않도록 해야 한다.

오늘 본문에서 사람들은 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았는가? 그 이유를 찾아봄으로 예수를 다시 못 박는 실수를 되풀이하지 말아야 한다.

첫째, 우유부단의 죄가 예수를 못 박는다. (눅23:22)

유대의 총독으로 재판의 권세를 가지고 있는 빌라도는 예수님에게서 죄를 찾지 못했다. 그래서 빌라도는 예수를 때려서 놓아 주려 하였다. 그런데 뜻대로 되지 않자 빌라도는 눅23:20에서 예수를 다시 놓아주려고 시도한다. 그래도 수많은 사람들이 “저를 십자가에 못 박으소서, 못 박으소서!” 할 때 세 번째 예수를 놓아 줄 방도를 찾는다.

눅23:22 “빌라도가 세 번째 말하되 이 사람이 무슨 악한 일을 하였느냐 나는 그 죽일 죄를 찾지 못하였나니 때려서 놓으리라.”

결국 빌라도는 예수가 무죄한 사람임을 판단하고 있었던 것이다. 거기다가 빌라도는 특별한 계시가 있었다. 마27:19을 보면 아내의 꿈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었다. 재판 받는 예수는 옳은 사람이니 그에게 아무 상관도 말라는 부탁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러므로 빌라도는 예수를 사형의 자리에 넘겨주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예수를 못 박에 하지 않으면 민란이 날 것 같고 재판 자리에 모여든 사람들의 요구가 너무도 거세므로 올바른 정의를 따르지 못했다. 빌라도는 사람들의 만족을 위한 재판을 했다. 진리가 아닌 거짓의 소리에 타협하는 우유부단으로 나아갔다. Yes와 No를 분명하게 밝혀 말하는 것처럼 빌라도는 정의를 세우는 재판을 해야만 했다. 그러나 재판의 정의는 사라지고 자신의 안일과 이익과 세상적 자리로서의 지위를 유지하는데 초점을 맞춘 재판을 하였다.

예수가 십자가에 다시 못 박히는 것은 이와 같은 우유부단의 죄 때문이다. 내게 말씀이 주어지고 진리의 길이 주어진다면 정도로 가야 한다. 비록 자리에서 밀려나고 통치하는 총독의 능력을 외면당하더라도 의의 길을 따라야 한다. 그것이 예수를 못 박지 않는 길이다.

둘째, 다수의 죄가 예수를 못 박는다. (눅23:23)

재판하는 자리에 모인 대제사장들과 관원들, 그리고 백성들은 빌라도가 예수를 놓아주려는 듯 이야기했을 때 일제히 소리를 지르며 대들었다. 눅23:18, 눅23:21을 보면 소리질러 덤벼드는 모습들이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눅23:23을 보면 “저희가 큰소리로 재촉하여 십자가에 못 박기를 구하니 저희의 소리가 이긴지라.”하였다. 저희의 소리는 무조건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아 처형하라는 외침이었다. 다수의 무리들이 얼마나 이 불의한 외침에 하나로 마음이 모아졌는지 예수를 죽이는 일을 재촉하였다.

본래 대중이란 바람에 흔들리는 갈대와 같다. 옳고 그름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선동가에 의하여 선동의 바람이 불어오면 분위기가 흐르는 대로 휩쓸려가며 좌우로 날뛰는 이들이 된다. 정말 다수의 대중을 움직이는 것은 진리가 아니다. 바람이다. 정치에서도 한나라당 바람이 부니까 다 한나라당 소속 후보자들이 당선되었다. 탄핵의 바람이 불었을 때는 모두 열린우리당 바람이 불어서 떨어질 사람도 다 국회의원이 되었다. 다수의 시기는 무섭다. 다수의 결의는 무섭다. 다수의 횡포가 결국 예수를 못 박게 하였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다수는 진리가 아니다. 부활이 없다고 다수결로 정해도 부활이 없는 것이 아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들이 모여 다수가 속죄의 방법을 행함이라고 할지라도 그것이 맞는 속죄의 방법이 아니다. 다수는 어떤 면에서 마귀적인 것이 될 수 있다.

막5:1을 보라. 귀신들린 거라사인이 무덤 사이에서 나와 예수를 만난다. 군대 귀신이 들려 넘치는 힘을 가지고 있는 이 사람에게 예수님은 막5:9에서 이름을 물으신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랬더니 거라사인은 “내 이름은 군대니 우리가 많음이니이다.” 즉 다수라고 고백한다. 그래서 이 다수의 귀신은 2,000마리 돼지떼에게 들어가 바다에서 몰사한다. 다수는 이런 면에서 진리가기 보다 사탄적이다. 예수가 못 박힌 것은 이 다수의 죄 때문이다. 우리는 다수결로 모든 것을 결정한다. 의사 결정은 어쩔 수 없는 방법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진리에 관한 문제는 다수결로 정할 수 없다. 다수를 앞세우면 그것은 예수를 다시 못 박는 죄를 저지르는 것이다. 다수의 친구들이 예수를 사생자라고 말할지라도, 세상의 인기있는 스타들이 예수가 마리아와 결혼해서 아기를 두었다고 말할지라도, 다수결의 소리가 매스컴과 방송을 지배하고 만세를 부르더라도 내가 항복하고 흔들릴 필요가 없다. 가룟 유다의 복음이 나오고 하나님을 모르는 대중들이 방송에서 나오는 도올 선생의 강의를 듣고 기독교의 정도를 왜곡하더라도 다수가 진리가 아니다. 그를 따르면 부화뇌동하고 합세하면 예수를 못 박는 것이다.

셋째, 혼돈의 죄가 예수를 못 박는다. (눅23:18)

대수의 무리들은 혼돈되어 있다. 미혹의 영에 사로잡힌 듯 놓아야 할 이와 놓지 말아야 할 이를 구별하지 못했다. 사실 예수는 의인이고 무죄한 이었다. 아무리 심문을 해보아도 사형에 넘겨야 할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백성들이 놓아주기를 요청하는 바라바는 악한 범죄자였다. 그는 성 중에서 반란 혐의로 붙잡힌 자요 사람을 죽인 살인자로서 옥에 갇혀 있는 자였다. 그러나 백성들은 눅23:18에 보면 이 사람 예수를 없이하고 바라바를 놓아 달라고 일제히 소리 질렀다. 혼돈의 죄, 어리석음의 죄다. 가치관이 전도되고 옳고 그름을 분별치 못하는 죄, 의인을 강도로 죄목을 뒤집어 씌우고 강도는 의인으로 둔갑하여 사면되는 부적절한 죄이다. 이 땅에서 하나님을 마음에 두기를 싫어하므로 상실한 마음대로 내버려두어 불의한 죄를 짓는 일이 너무나 허다하다. 그러나 그 엄청난 죄를 밥 먹듯이 지으면서도 혼돈은 계속 죄를 범하게 한다.

롬1:31~32을 보라.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저희가 이 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하다고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 하느니라.” 죄의 결과는 사형인데도 혼돈의 어리석음의 죄가 계속 죄 짓는 일을 옳게 말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혼돈의 죄는 예수를 다시 못 박게 한다.

신앙 생활을 하면서 가치관의 혼돈을 주의하라. 기도 생활을 하면서 계속 더러운 일을 탐하고 욕심을 붙잡고 사는 혼돈을 주의하라. 붙잡아야 할 예수 대신 다른 것을 더 의롭고 선하고 아름답게 보며 선택하는 죄를 분별하라. 철학책은 밤을 세워가며 읽어도 성경책은 내던져 버리는 신앙 생활, 캬바레와 사교장에서 즐기는 데에는 밤을 세워도 기도하는 밤은 내던져 버린 신앙 생활, 이 모든 것이 다 혼돈의 죄다.

이 시대에도 본문에 나오는 말씀처럼 우유부단의 죄, 다수 횡포의 죄, 혼돈으로 선택하는 어리석음의 죄가 예수를 다시 십자가에 못 박을 수 있다. 나의 죄를 씻어주시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 그분을 두 번, 세 번 계속 못 박는 일을 해서는 안된다. 사람들은 이상하게도 어리석은 것을 선택하고 복음, 교회, 하나님, 기도, 사랑을 내어 버린다. 그것이 예수를 다시 못 박는 죄다.

세 개의 못에 관한 이야기가 있다. 대장간에서 큰 못을 만드는 할아버지가 로마 병사에 의해 녹슨 못이 팔려 나갔다. 그런데 정작 그 못이 예수님을 못 박는 못으로 사용된 것을 보게 되었다. 그래서 자기가 만든 못이 예수님을 못 박는데 사용되는 것을 보고 통곡하며 울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렇다. 우유부단, 다수, 혼돈의 죄가 아니더라도 나의 무지와 나의 무의식과 나의 무계획까지도 때로는 주님의 가슴에 못을 박는다. 그 피가 나를 씻겨주고 그 주님의 살이 나를 치유하여 주는데 나는 계속해서 무지의 죄를 짓는다.

사순절기 우리의 모든 것을 고백하며 회개하자. 주님을 못 박지 않고 가슴을 아프게 하지 않는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결심하며 죄를 자백하자.

요일1:9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

여기서 자백은 하나님께 말씀 드리는 것이다. 소리 내어 말씀을 드리는 것이다.

그때 그 무리들이 예수님 못 박았네
녹슨 세 개의 그 못으로
망치 소리 내 맘을 울리면서 들렸네
그 피로 내 죄 씻었네

회개하자. 우유부단이란 못으로, 다수의 횡포의 못으로, 미혹받은 혼돈의 잘못으로 예수님을 못 박은 것을 회개하자.

주여 저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소서
주님 눈물로 기도했네
귀중한 그 보배 피 나를 위해 흘렸네
그 피로 내 죄 씻었네

회개한 나의 마음, 씻어주실 것을 믿고 일어나기를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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