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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제5계명 : 부모 공경 (출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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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계명의 4계명까지는 하나님께 관계된 계명이고 5계명부터는 인간관계와 관련된 계명입니다. 오늘은 부모와 자식의 관계를 다루고 있는 5계명에 대해 생각해 보고자합니다.

인간관계에서 발생하는 모든 혼란과 상처의 대부분이 잘못된 가족관계에서 비롯된다는 것은 이미 많은 사람들이 말해왔습니다. 십계명은 가족관계 중에서도 부모자식관계를 가장 기본으로 여겨서 이를 인간관계에 관한 최초의 계명으로 두었습니다. 이 관계는 출생과 함께 맨 처음 맺는 인간관계이면서 인간 스스로 선택할 수 없다는 독특한 특징이 있습니다. 그런데 5계명은 자식에 대한 부모의 태도는 전혀 언급하지 않고, 부모에 대한 자식의 태도만 말합니다. 이는 사람이 부모에게 가지는 태도가 그의 모든 다른 인간관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기 때문일 것입니다.

우리 민족은 유교의 영향으로 효를 인간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덕목 중 하나로 권면해 왔습니다. 그런데 “네 부모를 공경하라”(8a)는 말씀은 권면 정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으로 선언됩니다. 신명기에서는 이 점을 보다 명확하게 밝히면서 “너는 너의 하나님 여호와의 명한 대로 네 부모를 공경하라”(신 5:16a)고 했습니다. 잠언에서는 같은 내용을 “너 낳은 아비에게 청종하고 네 늙은 어미를 경히 여기지 말지니라”(잠 23:22)고 부정의 방식으로 표현했습니다. ‘아빠는 아무것도 모르면서 왜 그러세요’, ‘엄마는 알지도 못하면 가만히 계세요’, ‘이러려면 왜 낳았어요’라는 말들이 부모를 경히 여기는 태도입니다. 이런 말들은 부모의 마음에 모욕감과 함께 깊은 상처를 남깁니다. 이런 태도는 단지 불효만이 아니라 하나님의 명령을 어긴 죄에 해당합니다. 하나님께 대한 죄이기 때문에 그 형벌도 무거웠습니다.

출애굽기에 “그 아비나 어미를 저주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 지니라”(출 21:17) “자기 아비나 어미를 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라”(출 21:15)고 했습니다. 오죽 부모가 잘못했으면 자식에게 저주받고 맞아야 하는 상황이 되었겠습니까마는, 비록 그런 경우라 할지라도 부모를 저주하거나 치는 자는 사형 판결을 받았습니다. 신명기는 이런 악을 제거하기 위해 구체적인 예를 듭니다. “사람에게 완악하고 패역한 아들이 있어 그 아비의 말이나 그 어미의 말을 순종치 아니하고 부모가 징책하여도 듣지 아니하거든 부모가 그를 잡아가지고 성문에 이르러 그 성읍 장로들에게 나아가서 그 성읍 장로들에게 말하기를 우리의 이 자식은 완악하고 패역하여 우리말을 순종치 아니하고 방탕하며 술에 잠긴 자라 하거든 그 성읍의 모든 사람들이 그를 돌로 쳐 죽일지니 이같이 네가 너의 중에 악을 제하라 그리하면 온 이스라엘이 듣고 두려워하리라”(신 21:18-21)

아무리 자식이 완악하고 패역해도 돌에 맞아 죽도록 내어주는 부모는 흔치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부모나 그 사회가 형벌을 내리지 않을지라도 그러한 자에게 형벌이 따를 것을 성경은 분명히 말합니다. “자기의 아비나 어미를 저주하는 자는 그 등불이 유암 중에 꺼짐을 당하리라”(잠 20:20) “아비를 조롱하며 어미 순종하기를 싫어하는 자의 눈은 골짜기의 까마귀에게 쪼이고 독수리 새끼에게 먹히리라”(잠 30:17) 끔찍하고 무시무시한 표현들입니다. 그만큼 하나님께서는 자녀가 부모의 말씀을 공경하며 순종하는 태도를 중하게 여기셨습니다.

독특하게도 5계명은 지켰을 때 구체적인 복이 약속됩니다.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 생명이 길리라”(출 20:12b), “그리하면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네게 준 땅에서 네가 생명이 길고 복을 누리리라”(신 5:16b) 제2계명에서도 “내 계명을 지키는 자에게는 천대까지 은혜를 베푸느니라”(출 20:6)는 약속이 있습니다만 구체적이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에베소서에서는 제5계명이 “약속 있는 첫 계명”(엡 6:2)이며, 지킬 때 “네가 잘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엡 6:3)고 했습니다.

힘든 세상을 사는 것이 고역처럼 여겨지는 사람은 장수를 복이라 여기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생각은 어려운 상황 때문이며 장수 자체는 복이 분명합니다. 또한 이 약속에는 장수하면서 고생하는 것이 아니라 복을 누린다고 했습니다. 이처럼 구체적인 복의 약속은 이 계명을 지키고자 하는 마음을 조금이나마 더 생기게 합니다. 또한 부모 공경이 부모님만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일임도 알게 합니다. 골로새서에도 “자녀들아 모든 일에 부모에게 순종하라 이는 주 안에서 기쁘게 하는 것이니라”(골 3:20)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구체적인 복의 약속에서 부모를 공경하게 하시려는 하나님의 강한 의지를 발견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왜 이처럼 부모 공경을 강조하셨을까요? 그 이유를 전혀 알 수 없어도 우리는 이 계명을 지켜야만 합니다. 다만 성도의 유익을 위해서 두 가지 이유만 추정해 보고자 합니다. 첫째는 보이는 부모님을 공경함으로써 보이지 않으시는 하나님께 대한 공경의 태도를 몸으로 익힐 수 있다는 점입니다. 공경하는 태도도 반복되는 행동을 통해서 습관이 됩니다. 습관은 성품을 만들고 성품은 인격을 형성합니다. 부모님을 멸시하는 사람이 하나님께 대한 공경의 습관을 가지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부모님 말씀을 멸시하고 반항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에 복종하는 성품을 가진다는 것도 불가능합니다.

바리새인들은 마땅히 부모님께 드려야 할 것도 고르반, 곧 ‘하나님께 드림이 되었다’고 하기만 하면 그만이라고 가르쳤습니다. 하나님을 섬긴다는 명목으로 부모 공경의 의무를 저버렸습니다. 둘 다 잘하려니 힘들었겠죠. 그런데 예수님은 이 일을 사람의 전통으로 하나님 말씀을 폐하는 일이라 정죄하셨습니다(막 7:10-13). 이처럼 부모를 공경하지 않고서 하나님을 잘 섬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순전히 착각이며 외식하는 바리새인과 같은 교묘한 태도입니다. “부모의 물건을 도적질하고 죄가 아니라 하는 자는 멸망케 하는 자의 동류니라”(잠 28:24)는 잠언 말씀은 이런 경우에도 해당되는 것 같습니다.

부모 공경을 강조하신 두 번째 이유로, 부모는 경건한 자녀로 교육해야 할 첫 번째 책임자이기 때문이라 추정할 수 있습니다. 경건은 하나님의 말씀을 잘 듣고 순종하는 것이 생활화된 모습과 관련이 있습니다. 그런데 부모를 공경하지 않으면 부모의 가르침을 새겨듣지 않게 되고, 자연스럽게 하나님의 말씀도 멸시하게 됩니다. 오늘날 경건 교육의 책임을 목회자가 거의 담당하고 부모는 뒷전에 있는 현상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어쨌든 이런 상황에서는 자녀에게 목회자를 공경하도록 가르치는 것 역시 중요합니다. 목회자 혹은 주일 학교 교사에 대해서도 공경의 태도를 가질 때 그들의 가르침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으면서 자라갈 수 있습니다.

부모를 공경하게 하기 위해서 부모는 어떤 태도를 가져야 할까요? 에베소서는 “또 아비들아 너희 자녀를 노엽게 하지 말고 오직 주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엡 6:4)고 했습니다. 먼저 자녀로 노엽게 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 조상들 중에는 ‘술 먹고 때리는’ 권위주의적인 아버지가 많았습니다. 비인격적이고 비도덕적인 아버지로 인해 하나님도 ‘아버지’니까 괜히 반발심부터 가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처럼 부모가 자녀를 노예처럼 대하거나, 성적으로 학대하거나, 부모의 소원과 뜻을 강제로 주입하려 하다보면 자녀로 노엽게 할 수 있습니다. 자녀가 부모를 원수로 여기거나 짐승같이 생각하는 상황이 발생했다면 부모의 책임이 아주 큽니다. 그러므로 부모 입장에서는 먼저 하나님을 공경하여 마음으로 공경하며 순종할 만한 경건한 부모가 되도록 힘써야 합니다.

다음으로 주님의 교양과 훈계로 양육하라고 했습니다. 일반적으로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이 맑은 법이지만 하나님의 계명은 아랫물인 자식의 태도를 더 기본적인 것으로 다루었습니다. 사실 부모는 본능적으로 자식을 사랑합니다. 가르쳐주지 않아도 자식이 바르게 자라서 잘되기를 바라는 것이 부모의 마음입니다. 그러나 부모 공경은 본능이 아니어서 가르쳐야만 비로소 형성됩니다. 사랑해주기만 하면 가르치지 않아도 저절로 부모를 공경하게 되리라는 것은 착각입니다.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잠 22:6)

‘행할 길을 가르치라’는 것은 무슨 심오한 사상을 가르치라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행동을 가르치라는 말입니다. 기도를 가르친다면 기도는 내 소원을 이루는 수단이기 전에 하나님의 소원을 알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할 수 있는 힘을 구하는 것임을 부모가 먼저 잘 알아서, 그러한 내용으로 자녀가 기도할 수 있도록 기도 내용을 구체적으로 가르쳐주어야 합니다. 그렇게 일일이 지도하지 않으면 아이들의 기도는 흔히 자기 소원이나 필요를 아뢰는 것으로 끝나고 맙니다. 자녀가 바른 가르침을 멸시할 때는 징계해야합니다. “초달을 차마 못하는 자는 그 자식을 미워함이라 자식을 사랑하는 자는 근실히 징계하느니라”(잠 13:24), “채찍과 꾸지람이 지혜를 주거늘 임의로 하게 버려두면 그 자식은 어미를 욕되게 하느니라”(잠 29:15)고 했습니다.

성경은 부모가 이 일에 매우 부지런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네 자녀에게 부지런히 가르치며 집에 앉았을 때에든지 길에 행할 때에든지 누웠을 때에든지 일어날 때에든지 이 말씀을 강론할 것이며”(신 6:7). 이 모습은 기회 때마다 조근 조근 설명하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자녀들은 설교를 통해 듣고 배우는 것보다 생활 중에서 보고 배우는 것이 훨씬 많습니다. 그러므로 일주일 한 번의 설교에 자녀교육 전부를 맡겨서는 안 됩니다. 일상생활 중에서 고민과 스트레스가 있을 때마다 말씀 묵상과 기도로 극복해나가는 부모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다면 자녀를 노엽게 하지 않고 하나님을 경외하게 하는 최상의 교육이 될 것입니다.

이처럼 부지런히 자녀를 가르치지 않고 있다면 자녀의 경건성은 이미 문제가 있고 문제가 커지고 있습니다. 어릴 때 가르치지 않으면 나이 들수록 돌이키기가 어렵습니다. 매 없이 키워서 영적으로 죽이는 것보다는 매를 들어 죽임을 면케 하는 것이 좋습니다. 부모 공경을 통해 하나님의 공경이 성품이 되기까지 부지런히 교훈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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