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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려주일] 주님 고난으로 이루신 것 (요 19:28-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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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종려주일이자 고난주일입니다.
  전 세계 모든 성도들이 오늘 종려주일을 시작으로 하여  한 주간을 고난주간으로 지내게 됩니다. 종려주일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기 일주일전 나귀를 타시고 열두제자와 더불어 수많은 인파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며 예루살렘에 승리의 입성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주님의 말씀 따라 한 번도 사람을 태워보지 않았던 어린 나귀를 준비하고 그 위에 제자들이 옷을 벗어 안장을 삼았습니다.  모인 사람들은 종려나무 가지를 베어 길에 펴고, 어떤 이들은 아예 자기의 겉옷을 벗어 길에 깔고 호산나를 외치고 있습니다.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 [요 12:13]

'호산나'라는 말은 '우리를 구원하소서'라는 뜻입니다.  모인 무리가 호산나를 외치는 것은 자신들을 구원할 왕이 예루살렘으로 들어오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수많은 고난을 겪고 지금은 로마의 식민지가 되어버린 조국 이스라엘을 구원할 메시아를 간곡히 소망하고 있었습니다. 애굽 바로의 압재속에서 이스라엘을 구한 모세와 같은,  온 나라와 민족이 수천 년을 고대하고 기다리던 바로 그 왕이 지금 입성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호산나의 외침 한 가운데로 들어선 주인공은 초라했습니다.  늘씬하고 당당한 말이 아닌 나귀를 타고 있었습니다.  갑옷도 왕관도 허리에 찬 칼도 없이 너무도 소박한 모습으로 백성들의 영접을 받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저 나귀 위에 얹은 제자들의 겉옷만이 그 위엄을 상징하는 전부였습니다.

그러나 흥분한 사람들이 호산나를 외치는 찬양하는 함성은 하늘을 찌를 듯했습니다.  또한 그 뒤를 따르는 제자들도 모시던 선생님이 곧 왕이 되실 것만 같은 분위기에 한껏 고조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나귀를 탄 주인공은 아무런 말씀이 없었습니다.  묵묵히 힘에 겨운 발걸음을 옮기는 나귀의 호흡에 마음을 담고 무엇인가를 깊이 생각하고 계실 뿐이었습니다. 예수님이 그 순간에 무엇을 생각하고 계셨을까요?

예수님의 생애 전체가 고난 자체입니다. 하늘보좌 영광가운데 계실 분이 낮고 천한 땅에 오심 자체가 고난이며, 온 인류의 섬김과 찬양을 받아야 마땅하신 주님이 오히려 세상의 낮고 천한자들을 섬기셨으니 고난입니다. 그중에서도 예수님께서 받으신 가장 혹독한 고난인 십자가의 고난을 묵상하는 고난주간 첫날에 예수님이 받으신 고난의 목적이 어디에 있는가? 왜 예수님이 고난을 받으셔야 했는가를 살펴보며 은혜를 나누려 합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위에서 고난을 당하시면서 하신 말씀이 나옵니다. 그중 하나인 “다이루었다”라는 말씀은 고통스런 외침과 절규가 아닌 승리와 확신의 음성임에 틀림없습니다.
주님께서 하신 일곱마디의 말을 살펴보면
첫째 (눅23:34)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일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라”는 도고의 음성과,
둘째 (눅23:43)“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라”는 한 강도에게 주신 구원의 약속과
셋째, (요19:26-27)여자여 보소서 아들이니이다, 보라 네 어머니라“라는 효성에 넘친 고백과 요한에게 모친을 의탁하는 말씀과,
넷째(마27:46) “엘리엘리 라마 사박다니-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란 고통의 절규와
다섯째(요19:28)“내가 목마르다”
여섯째(요19:30) “다 이루었다”
일곱째(눅23:46) “아버지여 내 영혼을 아버지 손에 부탁하나이다” 라는 최후의 말씀을 하십니다. 여기서 여섯 번째 다 이루었다라는 말씀은 고통의 음성이아니라 승리의 음성이며 고난 받는 목적을 밝히는 음성임을 알 수 있습니다.

과연 예수님이 무엇을 이루기 위해  이 같은 고난을 받으셔야만 했습니까? 과연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신 것은 무엇일까요?

1. 예수님의 고난은 구원을 이루신 고난입니다.

하나님은 에덴동산에서 범죄여 타락한 인류에게 궁극적 구원을 약속하셨습니다.(창 3:15 내가 너로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고 너희 후손도 여자의 후손과 원수가 되게 하리니 여자의 후손은 네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는 그의 발꿈치를 상하게 하리라) 이것을 원시복음이라고도 합니다.
이 말씀은 여인의 후손으로 세상에 오신 예수님이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서 마귀의 권세를 정복하고 승리하게 되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갈 4:4에 보면 여인의 후손이란 바로 예수님으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갈4:4 때가 차매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고 율법 아래 나게 하신 것은)

여기에 발꿈치를 상하게 된다는 말씀은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을 예표하고 있고 머리를 상하게 한다는 말씀은 마귀의 권세가 예수님에 의해서 온전히 굴복되는 것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최초 인생은 마귀에게 미혹을 받아서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죄를 짓고 마귀의 종노릇을 하면서 살아왔습니다. 인간의 힘으로 마귀를 이길 수 없습니다. 사람은 죄의 세력을 이길 수 없습니다. 그 증명이 바로 인생에게 죽음이 지배한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죄의 삯은 사망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죽음을 이길 수 없습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못 밖히신 배후에는 사단의 세력이 존재합니다. 여인의 후손인 예수님의 발꿈치를 상하게 했던 존재가 바로 사단 이였기 때문입니다. 사단은 예수님을 죽이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했습니다. 주님을 죽이기 위해서 모든 것을 다 이용했습니다. 제자를 이용했습니다. 당시 총독이었던 빌라도를 이용했습니다. 유대인의 왕이었던 헤롯을 이용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민심을 이용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는 아무도 없었습니다. 주님의 사랑하는 제자 모두 주님을 버리고 도망을 했습니다. 하나님 마져도 주님의 십자가 고난을 외면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십자가로 죄의 권세를 이기시고 승리하신 것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이 인간을 구원하시는 거룩한 계획이었습니다. 십자가는 주님을 죽이는 자리 같으나 실상은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는 자리가 된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 선지자들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구세주로 이 땅에 오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특히 이사야53장에 보면 구체적으로 예수그리스도의 고난을 설명하기도 합니다.
53:5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이렇게 구약성경은 예수그리스도가 메시야로 이땅을 구원하기위해 오실것을 예언하셨고 실제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셨습니다.

또한 예수님 자신도 이 세상에 오신 목적이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함이라고 말씀합니다.  [막 10:45]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예수님은 대속의 죽음을 당하려고 이 땅에 오신 분입니다. 그의 죽음은 영원한 속죄를 이루셨습니다. (히9:12) 염소와 송아지의 피로 아니하고 오직 자기 피로 영원한 속죄를 이루사 단번에 성소에 들어 가셨느니라.

(요 1:29) 보라 세상 죄를 지고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을 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죄를 지고 가는 어린양은 구약의 아사셀을 두고 한 말씀이며 궁극적으로는 예수님을 가리켜 하신 말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일년에 한차례씩 속죄일을 지킵니다. 이 때 염소 두 마리를 뽑아서 한 마리는 이스라엘 민족의 죄를 그 염소에게 전가시켜 그 죄를 진 염소는 광야로 보내졌고 한 마리는 이스라엘의 죄를 위한 속죄 제물로 피 흘려 죽여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짐승의 피의 제사는 완전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주님께서 영원한 제사장임과 동시에 영원하고 완전한 제물이 되어 속죄제사의 피를 흘리셨던 것입니다.

히7:26-27  이러한 대제사장은 우리에게 합당하니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고 죄인에게서 떠나 계시고 하늘보다 높이 되신 자라. 27 저가 저 대제사장들이 먼저 자기 죄를 위하고 다음에 백성의 죄를 위하여 날마다 제사 드리는 것과 같이 할 필요가 없으니 이는 저가 단번에 자기를 드려 이루셨음이니라

이렇게 우리의 모든 허물과 죄를 대속했던 것입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죽으심은 이 구원을 이루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인간의 어떤 공로에 의해서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완성된 것입니다. 이 사실을 믿고 주님을 영접한 사람이, 입술로 시인한 사람이  구원을 받는 것 입니다.  이렇게 주님의 고난은 구원을 이루신 고난이었습니다.

2.율법을 이루신 고난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율법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그 율법이 우리를 구원하지 못합니다. 율법의 목적은 몽학선생으로 죄를 깨닫게 하는데 있습니다. 율법으로 말미암아 “죄의 삯은 사망”(롬6:23)임을 깨닫습니다. “피 흘림이 없이는  사함이 없느니라”(히9:22)는 말씀은 율법의 요구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고난당하심으로써 이 율법의 요구를 충족시키셨습니다.

[마 5:17]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나 폐하러 온 줄로 생각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케 하려 함이로라

예수님께서 고난을 받으시고 죽으심으로 모든 율법의 요구를 다 이루셨음을 깨닫게 합니다.
바울 사도는 이 사실을 로마서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8:3-4)“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를 인하여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4 육신을 좇지 않고 그 영을 좇아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를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주님이 육신의 모양으로 우리에게 오신 것은 바로 율법의 요구을 이루어지게 하심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주님이 고난 받으심으로 율법의 목적과 그 요구를 단번에 다 이루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율법의 정죄가 없어지는 것입니다.

롬8: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자에게는 결코 정죄함이 없나니.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

그렀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  선포하심으로 우리는 율법의 정죄로부터 자유를 누릴 수가 있게 된 것입니다. 사단은 율법으로 우리를 계속해서 정죄합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주님이 십자가에서 다 이루심을 믿습니까? 사단의 정죄로부터 자유함을 누리시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3. 화목을 이루신 고난이었습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당하신 고난은 화목을 이루는 고난 이였습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화목했던 관계가 불순종의 죄로 말미암아 깨어지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과 원수가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과 화목하기 위해서 화목제의 제물을 드렸습니다.
(레3:1) 사람이 만일 화목제의 희생을 예물로 드리되 소로 드리려거든 수컷이나 암컷이나 흠 없는 것으로 여호와 앞에 드릴찌니 2 그 예물의 머리에 안수하고 회막 문에서 잡을 것이요 아론의 자손 제사장들은 그 피를 제단 사면에 뿌릴 것이며
이와 같이 인간이 범죄한 이후에 하나님께 나가기 위해서는 화목제의 피가 필요했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 달리실 때 그의 모친과 다른 여인들과 사도 요한만이 그 곳에 있었고 다른 제자들은 없었습니다. 그 자리에 없었던 마태와 마가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셔서 큰 소리를 지르고 운명하실 때 성전의 휘장이 위로부터 아래로 찢어졌다고 증거하고(마27:51, 막15:38), 누가는 성소의 휘장이 한가운데가 찢어지며 예수가 운명했다(23:45)고 증거 합니다.  반면에 요한은 예수님께서 다 이루었다고 말씀하시고 영혼이 돌아갔다고 증거 합니다. 결국 예수님께서 십자가위에서 다 이루었다고 선언하실 때 성소의 휘장이 갈라졌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것은 무엇을 뜻하는 걸까요?
  인간이 범죄한 후에는 거룩하신 하나님께 나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대제사장이 짐승의 피를 앞세워야 만 휘장 넘어 하나님께서 임재해 계시는 지성소에 들어갈 수가 있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죽임을 당했습니다. 이 대제사장이 앞세운 피는 어린양 되신 예수님의 피를 예표 합니다. 예수님께서 죽임을 당하시고 흘리신 피는 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원수 된 우리를 화목 시키는 것임을 말합니다.

바울사도는 엡2:14에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라고 가르칩니다.
16절에서는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라고 설명합니다.

[롬 5:10]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요일2:2)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 우리만 위할뿐 아니요 온 세상의 죄를 위하심이라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화목제물” 이 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고난 받으신 또 하나의 목적은 원수된 것을 자기의 육체로 폐하시고 한 새사람을 지어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게 하는 데 있습니다. (엡2:15)  “원수 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고난이 없이는 우리가 그의 자녀로서 화목케 되는 축복을 누릴 수 없다고 교훈합니다.

(롬3:25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 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우리는 예수님께서 고난 받으심으로써 이뤄 놓은 이 화목을 누리면서 하나님을 “아바 아버지”라고 자신있게 부릅니다.
(갈 4:6]너희가 아들인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이 세상 사람들이 해아래서 당하는 수고와 고난은 결국 헛되고 헛된 허무한 것이 되고 말지만 성도들이 당하는 고난은 회개를 이루기도 하고 영적 성장을 이루기도 합니다. 주님은 성도가 주님을 위해 고난을 받으면 천국을 천국 저희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나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이 당한 고난은 사망의 저주로부터 나를 구원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당한 고난은 율법의 정죄로부터 나를 자유케 하였습니다.
예수님이 고난을 당함으로 우리가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습니다.
그럼으로 십자가 구원함의 감격으로 가지고 삽시다.
그럼으로 십자가 자유함의 기쁨으로 찬양하며 삽시다.
그럼으로 십자가 화목됨의 감사를 주님께 드립시다

그리스도의 고난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최고의 사랑표현 입니다. 찬양의 가사처럼 “ 내 어찌 그 사랑 잊으리 내 어찌 주의 긍휼 잊으리 내 영혼의 모든 소원 만족시킨 하나님”할렐루야! 결코 잊을 수 없는 그사랑 우리는 어찌 갚아야 할까요?

우리는 고난 주간을 맞이했습니다. 주님의 은혜를 깊이 생각하며 세상에 주의 사랑 전함으로 주님 고난에 동참하는 성도들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헌혈과 주일 봉사 전도대에 모두 참여하시기 바랍니다. 고난에 동참한다는 것은 주님사랑실천입니다.
주님의 고난으로 말미암아 주어진 구원의 복과, 자유함의 복과 화목의 복을 마음껏 누리시길 축복합니다.  고난 받으신 예수님의 심정으로 이 주간을 보내시고 주님 부활의 기쁨에 함께 참여하는 성도들이 되시길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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