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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려주일] 겟세마네 기도 (눅 22:3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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겟세마네 동산에서의 기도는 주님의 십자가 지기를 준비하는 기도이다. 아들로서의 모든 권세를 다 내려놓고 가장 비참한 처형의 제물로 자신을 내어 놓기 위한 기도이다.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임을 보여주신 능력과 표적의 삶을 내려놓고 죄의 짐을 대신 짊어지고 죽기 위한 기도이다. 그래서 겟세마네 기도는 죽기를 작정하고 나를 살린 기도이다. 겟세마네 기도의 자리를 머뭇거리는 삶은 내려놓지 못하고 죽지 못하고 개인의 안일과 유혹에 빠져 사는 나의 삶을 다시 경성케 하는 것이다.

겟세마네 기도에는 측량할 수 없는 주님의 어리석음이 있다. 주님의 사랑은 세상 눈으로 보면 어리석음이다. 멸시의 어리석음, 조롱의 어리석음, 무능의 어리석음. 세상에서 쏟아 붓는 모든 어리석음의 손가락질을 받아드리는 것이 사랑이다. 겟세마네 기도를 생각하면 사랑의 용기가 생긴다. 진정으로 내가 손가락질 당해도 되고 섬기고도 멸시받고 허비하고 손해보는 그 용기가 솟아난다.

고난 주간! 우리는 겟세마네 기도의 자리로 발을 옮겨야 한다. 아무리 많은 상상력을 동원해도 설명하기 어려운 겟세마네 기도, 우리는 겸손히 기도를 실천하자. 겟세마네 기도회로 모이는 교회의 새벽 아침 시간으로 발을 옮겨 하나님과 기도로 교제하는 무릎을 가져 보자.

겟세마네 기도는 이렇다.

첫째, 장소를 구별하신 기도다. (눅22:39)

눅22:39 “예수께서 나가사 습관을 좇아 감람산에 가시매 제자들도 좇았더니...”

예수님은 어느 특정한 날만을 위해서 장소가 구별된 것이 아니라 언제나 기도의 장소가 구별되어 있었다. 습관을 좇아 감람산에 가셨다고 하였으니 예수님의 기도하는 자리는 오늘 하루의 기도가 아니었다. 눅21:37에서는 이렇게 기록되어 있다.

“예수께서 낮이면 성전에서 가르치시고 밤이면 나가 감람원이라 하는 산에서 쉬시니...”

예수님은 감람원이란 산으로 가시는 일이 매일의 일이셨다. 요18:1~2을 보라. 예수님은 말씀을 마치시고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신다. 그 곳에 대해 “거기는 예수께서 제자들과 가끔 모이시는 곳으로 예수를 파는 유다도 그곳을 알더라”고 하였으니 얼마나 자주 가셨으면 “유다도 알더라” 하였겠는가? 그래서 누가는 겟세마네 동산이라고 기록하지 않는다. 그냥 감람산이라고 해도 다 아는 장소이기 때문이다.

우리도 기도하려면 기도하는 장소가 구별되어 있어야 한다. 집에서도 주님을 대면하기 위한 기도의 자리가 매일 매일 준비되어 있지 않다면 우리의 영혼은 너무나도 황폐할 뿐이다. 가정에서도 기도의 공간을 마련하라. 그곳에 가 있으면 건드리지 않고 기다려 주기로 가족 간에 정하라.

영국 런던에 있는 웨슬리 기념 교회에 갔더니 그가 머물렀던 이층에는 새벽 기도하던 자리가 있었다. 항상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 2시간씩 기도한 웨슬리는 예수님처럼 습관을 좇아 기도하는 자리에 머문 전도자였다.

금주 겟세마네 특별 새벽 집회를 맞이하여 습관을 좇아 찾아가는 기도의 자리가 만들어지도록 하자.


둘째, 혼자서 드린 기도다. (눅22:41)

고통의 목전에서도 기도의 장소를 찾는 예수를 바라보자. 예수님이 겟세마네 동산, 감람산으로 가셨을 때 제자들이 따라왔다. 그런데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시험에 들지 않도록 기도할 것을 부탁하신다. 그리고 눅22:41을 보면 저희를 떠나 돌 던질 만큼 가서 무릎을 꿇고 기도하신다. 이 말씀은 주님이 제자들과 뒤섞여 있지 못하시고 30~40m 정도 떨어져 혼자 있는 곳으로 나아가셨다는 말이다.

겟세마네 기도는 철저히 혼자서 드린 기도였다. “깨어 있어 기도하라”고 주님은 말씀하셨지만 제자들은 모두 잠들어 있었으니 주님은 고통하는 기도의 그 시간에 어떤 기도의 후원도 받지 못하셨다.

중보기도의 사역, 이 땅의 사역자들은 중보기도의 지원으로 영적 장벽을 깨뜨리고 세계 선교를 감당한다. 교회 성장학 교수인 피터 와그너는 자신의 중보기도 동역자가 120명이나 되고 지도력 훈련의 대가인 존 맥스웰도 100명의 중보기도자를 두고 있다. 20세기 부흥의 불꽃이었던 토레이도 중보기도의 사람들이 3,000명이나 되었다. 주님이 십자가 구속을 다 이루시므로 이 시대 복음의 사역자들은 중보기도의 특권을 소유케 되었다. 그러나 십자가의 고통을 수용하기 위해 기도하시는 예수님은 혼자서 하나님 앞에 대면할 수 밖에 없었다. 철저히 혼자서 외롭고 고독하게 아버지의 원대로 되게 하라는 기도를 드렸다.

주님의 아픔이 여기 있다. 마26:38을 보면 홀로 기도하러 가시는 예수님의 심정은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라고 하셨는데 이 뜻은 영어 성경으로「Horror and Sadness」즉, 공포와 슬픔으로 짓눌렸다는 말이다. 그가 가난하게 됨으로 우리가 부요하게 되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나음을 입게 되는 대속이 된 것처럼 그가 철저히 홀로 있어 기도하므로 우리를 홀로 있게 하지 않으셨다. 공포와 슬픔을 혼자서 감당하시므로 우리가 고통당할 때 도우시는 주님이 되셨다.

롬8:26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나의 기도에는 홀로 드리는 기도란 없다. 그러나 주님은 혼자셨다. 기도의 용기를 갖자.


셋째, 천사가 도와주는 기도다. (눅22:43)

하나님의 뜻과 나의 뜻, 아버지의 뜻과 아들의 뜻, 이 두가지의 뜻이 충돌할 때 예수님은 기도할 힘조차 없으셨다. 눅22:43을 보면 “사자가 하늘로부터 예수께 나타나 힘을 돕더라.”고 하였다. 누구도 도와줄 수 없는 이 기도의 선택 앞에 아버지는 가만히 계셨다. 아들을 십자가 수난 앞에 죽게 해야 하는 아버지 하나님, 아들을 버림으로 나와 모든 인생을 살려야되는 하나님으로서는 기도하는 아들을 볼 수 밖에 없었다. 오직 할 수 있다면 순종과 불순종으로 놓고 싸우는 기도를 계속할 수 있도록 기도만 도울 수 있을 뿐이었다. 하나님은 천사를 통해 기도를 도왔다. 예수가 오직 어떻게 선택하든지 고민하고 갈등하고 투쟁하는 기도를 더 할 수 있도록 기도의 힘을 도왔다. 그래서 겟세마네 기도는 한 번의 기도가 아니다. 짧은 기도가 아니다. 고민하는 이 기도는 제자들이 깊이 잠들 만큼의 긴 시간 동안의 기도이면 마26:34을 볼 때 세 번이나 동일한 말씀으로 아뢰였던 긴 기도이다. 여기에 하나님은 깊은 기도, 긴 시간의 기도를 하도록 도우신다. 천사를 통해 도우신다.

대학생 선교회의 김준곤 목사는 현재 80세가 넘었으나 그는 기도의 사람이다. 금식 기도를 할 때 너무 배가 고파 기도할 수 없었을 때 갑자기 자장면 냄새가 났다. 그것을 마음껏 마셔드렸는데 그 후로 배가 부른 듯 하여 배고픔을 모르고 기도의 힘을 얻었다.

하나님은 천사를 통해 영적 고투를 더하게 하는 예수의 기도를 돕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원대로 할 것이냐, 나의 원대로 할 것이냐, 어떤 것이 선택되든지 기도의 싸움을 도와주는 힘이었다. 그 힘은 김준곤 목사님처럼 배고픔의 고통을 없애주는 그럼 힘이 아니다. 편안하게 해주는 힘도 아니다. 고민이 사라지는 힘도 아니다. 그렇다고 너는 반드시 순종해야 한다는 일방적인 힘도 아니다. 오직 기도를 더 하게 하는 힘이었다. 갈등하는 기도를 하게 하는 힘이었다. 주님이 가련하고 불쌍하시다. 하나님을 아버지로 믿고 아버지 앞에 최후 순간까지도 교제하며 기도하는데 하나님 아버지는 기도할 힘만 주실 뿐 그 힘을 주신 것 만큼의 영적 고통을 주님이 겪에 하셨다.

주님은 왜 자기 스스로 고난의 잔을 받아 마셔야 하는가?

우리의 대속을 위한 고난의 길이기 때문이다. 천사의 돕는 힘은 고작 기도를 계속하게 하는 힘이었다. 바로 그 고투가 나 때문인 것이다.


넷째, 땀이 피방울같이 되는 간절함의 기도다. (눅22:44)

눅22:44 “예수께서 힘쓰고 애써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땀이 땅에 떨어지는 피방울같이 되더라.”

주님의 겟세마네 기도가 얼마나 간절했는지를 이보다 잘 표현할 수는 없다. 갈등과 쟁투가 커질수록 기도의 간절함은 더해가고 자신의 의지를 꺾어 죽음에 자신을 바치는 결단이 이루어질 때까지, 땀이 피방울로 보이도록 붉게 만들었다. 문제가 클수록 기도는 간절해진다. 기도가 길어질수록 고민은 큰 것이다. 그리고 시험이 클수록, 한이 클수록, 포기와 내어버림이 클수록 기도는 땀이 되고 눈물이 되고 피방울이 된다.

십자가 수난 이전, 이렇게 큰 대가를 지불하는 땀방울과 피방울이 있었을 줄이야, 사람을 살려내기 위한 주님 자신의 눈물이 이렇게 클 줄이야, 이는 주님의 고통이면서 하나님 아버지의 고통이다. 간절함이 더할수록 주님의 사람은 더 큰 사랑이다. 나를 향한 겟세마네 기도는 피방울이 될 수 밖에 없는 간절한 이유는 다른 것이 아니다. 나를 향한 사랑이 너무나도 큰 것이어서 간절하게 된 것이다. 자신을 잡으러 오는 사람까지도 위하는 사랑, 자기를 심문하는 사람까지도 위하는 사람, 옷을 나누어 가지는 군병과 십자가 처형을 바라본 성난 민중을 위한 사랑, 그 사랑이 너무도 큰 것이기에 더욱 간절히 기도하고 이마에 땀이 피바울이 되었다.

겟세마네 기도, 겟세마네는 그래서 ‘기름을 짜낸다’는 뜻이다. 사랑을 위해 으깨어지고 부서져도 되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우리는 사랑을 위해, 사람을 위해 마음이 부서지고 기름을 짜내듯 간절함으로 숨이 막혀 본 적이 있는가? 머리로, 묵상으로, 설교로 다 전할 수는 없다. 주님을 따라가는 이번 겟세마네 기도회에 기도로 나서자. 잠을 자고 있는 제자들이 되지 말자.

영락교회에서 모였던 북한 동포를 위한 기도회는 기도하고 찬송하고 말씀 듣는 연속 기도회로 모였는데 울며 찬송하며 헌신하며 24시간 기도했다고 한다. 주님은 사랑 때문에 겟세마네 기도를 하셨다. 우리도 사람에 대한 사랑, 한 사람, 한 가족, 한 동족에 대한 사랑이 있으면 기도할 수 있다.

「Hi Family」가정 사역을 하는 송길원 목사는 그의 아들이 친구가 자살하려 한다고 하면서 자신에게 도움을 요청하였다. 가정 사역 전문가인 송 목사는 아들이 부탁한 말을 듣고 부산에 왔는데 이미 아들 친구의 부모님은 이혼하고 상황이 종료되었다. 그 때 송 목사는 돌이키지 못한 일을 체념하고 집으로 왔는데 아들이 이 일로 실어증에 걸리고 실망의 늪으로 빠져들었다. 아들의 집을 방문했을 때 아들의 현관문에는 구멍이 나 있었다. 그래서 “왜 구멍을 내었느냐?”고 물었더니 아들은 “아버지에게 화난 것이 아니라 내 친구의 부모 때문이었죠.”라고 하며 자신의 부모도 아닌 친구 부모의 이혼 문제로 찢어지는 마음의 아픔과 분노가 있어서 문을 망가뜨렸음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송 목사는 회개하고 기도를 시작했다고 한다. 한 가정의 이혼을 바라볼 때 아들은 가슴을 찢는 아픔을 가지고 있는데 정작 본인은 무정하고 덤덤한 마음으로 바라보았으니 이 얼마나 잘못된 일인가?

그렇다. 사랑이 없으면 기도도 없다. 무정하고 무자비한 이들에게 겟세마네 기도의 자리는 없다. 영혼 사랑, 교회 사랑, 나라 사랑으로 기도의 자리를 따라 나서자. 겟세마네 기도회를 통해 십자가를 짊어지는 사랑의 실천이 나타나기를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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