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그놈 목소리 (요 12:20-26)

  • 잡초 잡초
  • 392
  • 0

첨부 1


그놈 목소리 / 요12:20-26

I. 영화: 그놈 목소리

세상에 많고 많은 죄가 있지만 유괴범만큼 나쁜 죄는 없는 것 같습니다. 영화 그놈 목소리는 유괴범의 목소리요 악마의 목소리입니다. 영적으로 구원받지 못한 우리의 가족, 우리의 태신자 VIP는 사실 마귀에게 유괴당한 영혼들입니다. 「베스트 셀러에 담긴 영혼의 양식」 그 다섯 번째 시간 오늘은 베스트셀러가 아니라 영화 「그놈 목소리」를 통해 귀한 양식을 얻고자 합니다.

1991년 추운 겨울 1월, 압구정동 현대아파트 놀이터에서 놀던 9살 이형호 어린이가 실종됩니다. 이 어린이는 유괴된지 44일만에 손이 묶여 지고 입과 눈이 테이프로 감겨진채 잔혹하게 살해된 모습으로 잠실대교 부근 한강 고수부지 속칭 "토끼굴"에서 발견됩니다. 부검결과 아이는 유괴당일 살해된 것으로 밝혀지지만 그 부모들은 44일동안 60여 차례 범인의 전화에 일희일비 혹독하게 시달립니다.

이 실화를 재구성하고 영화화 한 것이 「그놈 목소리」입니다.

화평하고 평온한 가정의 모습에서 영화는 시작됩니다. 범죄와의 전쟁이 선포되던 1990년대 방송국 앵커인 한경배의 집, 따뜻하고 여유롭던 가정에 어느 날 놀이터에 앉아있던 아이가 사라지면서 불행은 시작되었습니다. 아홉 살 된 아들 상우가 흔적없이 사라지고 유괴범의 1억원을 요구하는 피말리는 전화가 시작됩니다. 돈을 주고 아이를 찾는 것으로 끝내려는 한경배에게 범인은 아주 차분한 목소리로 지시사항을 전달하고 아내 오지선은 남편과 의논없이 경찰에 신고를 하지요.

경찰은 전담형사를 배치하고 상우의 아지트였던 아파트 지하에 비밀수사본부까지 차리며 과학수사를 표방하지만 범인은 그런 경찰을 놀리기라도 하듯 수사망을 빠져나갑니다. 그리고는 집요한 협박전화로 한경배 부부에게 새로운 사항들을 지시하고는 합니다.

범인에 대한 유일한 단서는 협박 전화속의 목소리 뿐, 감정도 없는 듯 소름끼치게 냉정한 범인의 목소리에 끌려 아들의 생사도 모르는 채 부모들은 이리저리 뛰어다녀야 했습니다. 아들의 목소리를 듣고 실날같은 희망을 걸었던 한경배 아들의 목소리가 녹음된 것이라는 것을 알고는 눌러왔던 분노를 터뜨립니다. 이제까지 범인에게 끌려 다니던 것과는 달리 범인에게 오히려 접선방법을 지시하며 아들을 되찾기 위한 정면대결에 나섭니다.

그러나 다시 돈만 잃은채 아들은 되찾지 못하고 결국 비가 내리는 날 한강변에서 발견된 아들의 시신과 만나게 됩니다. 냉동 보관되었던 아들의 시신은 유괴되던 다음날 질식사 한 것으로 추정되었습니다. 40여일 만에 다시 뉴스데스크에 앉은 한경배가 국민들에게 호소하며 범인을 향해 절규하는 모습으로 영화는 끝을 맺고 부모에게 협박하는 유괴범의 실제 목소리를 들려주는 것으로 막을 내립니다.

여기까지가 영화의 대략적인 줄거리입니다.

II. 기독교를 비웃는 그놈들의 목소리

자식 가진 부모라면 누구나 이 영화를 보는 내내 가슴이 아리고 눈물이 나게끔 되어있습니다. 아이의 행방을 단 몇 시간만 몰라도 가슴 졸이는 것이 부모의 마음 일찐데 44일동안 협박전화를 받아가며 얼마나 그 가슴이 타들어 갔을까. 그리고 마침내 아들의 싸늘한 시신을 만났을 때 그 어미의 마음이 어떠했을까. T.V. 앵커인 아비가 9시뉴스 마지막 멘트에서 범인에게 분노를 쏟아낼 때 터질듯한 심장을 어찌 억눌렀을까. 시종 내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러나 목사로서 이 영화를 보며 더 가슴이 아팠던 이유는 딴 곳에 있었습니다. 유괴범 "그놈의 목소리" 보다도 영화속에서 하나님을 비웃고 교회를 조롱하고 신앙을 웃음거리로 만든 다양한 「그놈들의 목소리」가 들리기 때문입니다. 영화에서는 기독교를 조롱하고 공격하는 이런 장면들이 나옵니다.

① 목사와 심방대원들이 어린아들을 유괴당한 가정으로 심방을 갑니다. '고난과 시련도 감사하자' 어설픈 목사의 위로의 말에 상우 아버지는 분노를 하게 되고 성경책을 집어 목사의 품에 내어던지듯 안겨주며 말합니다. "시련과 고난이 감사해요? 나가세요. 오늘부터 하나님 안 믿어. 하나님도 이제 필요 없어."

여기에 기독교는 아픔당한 사람을 위로하지 못하는 종교가 되어 버리고 그들로부터 쫓겨 나가는 종교가 되고 맙니다.

② 영화속에서 시한부 종말론이 오버렙되어 나옵니다. "예수 천당, 불신 지옥" 전도대가 비쳐집니다. 여기서 기독교는 현실 도피적인 종교로 비쳐집니다. 기독교는 우리의 삶, 역사의 구체적인 현실속에서 아무런 대답을 줄 수 없는 종교로 치부되어집니다.

③ 영화속에서 벽에 걸어놓은 십자가는 내동댕이쳐져 부러지고 목에건 십자가 목걸이는 뜯겨져 던져집니다. 여기서도 기독교는 내동댕이 쳐지고 던져져 버려집니다.

④ 영화속에서 "내 주를 가까이" 찬송 선율이 배경음악으로 흐르는 가운데 상우 아빠는 성경책을 한 장 한 장 찢어 팽개칩니다. 여기서 종교의 신성과 경외감은 처절히 짖밟히고 맙니다. 목사인 내 마음은 이 장면에서 영화속 성경책이 아니라 내 가슴이 한 겹 한 겹 찢겨지는 고통을 느껴야 했습니다.

상우 아빠 한경배는 이제 모든 것을 "내가 하겠다"고 외쳐대지만 정작 내가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음을 비통하게 토로합니다. 범인을 만나기 위해 필사적으로 돌진하는 순간마다 수많은 거리의 인파와 차량에 길이 막히고 그는 군중속의 고독, 이웃없는 고독한 타자로 버림을 받습니다.

영화 구석구석 기독교 모티브를 등장시키므로 이 영화는 범죄자를 고발하는 사회적 영화인 동시에 기독교를 고발하는 종교영화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영화 한편이 불러 일으키는 파장을 생각한다면 교회에 대한 불신과 곡해 그리고 조롱화를 보면서 불쾌하지 않은 신앙인은 아마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도 조롱과 비웃음, 침뱉음 당함과 채찍질 그러다가 버림받아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셨습니다. 벗기우는 수치를 당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분은 부활하셨습니다. 결코 무덤에 묻히신채 버림받지 않으셨습니다. 이것이 기독교입니다.

그러나 내 마음이 쓰리고 아픈 것은 지금 한국교회는 영화 「친절한 금자씨」에서 "너나 잘하세요"라고 비아냥을 듣더니 한 편의 영화에서 다양한 「그놈들의 목소리」로 곡해 당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니 그보다 이처럼 처절히 짖밟히고 내동댕이쳐진 한국교회가 언제 새롭게 부활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아픔 때문에 내 마음이 쓰라려 왔습니다. 한국교회가 이 비웃음을 떨치고 일어나야 하는데. 한국교회가 새로워지기를 기대하는 "그놈의 목소리"에 멋지게 대답을 줘야 하는데. 다시는 이 신문에 깨지고 이방송에 짖밟히고 저 영화에 뭇매를 맞지 말아야 하는데. 그러나 아직 희망이 멀어만 보여 우리의 마음이 아픈 것입니다.

III. 당신의 몸으로 예수를 보여주시오.

여러분, 이게 과연 기독교입니까? 이게 교회입니까? 우리의 예수님 우리의 하나님은 과연 이처럼 힘없는 분이십니까? 그것이 아니라면 우리를 조롱하는 「그놈의 목소리」에 우리는 무엇이라고 대답해야 합니까? 어떻게 진정한 예수님을 보여줄 수 있습니까?

오늘 성경 본문을 살펴보십시다.
헬라인들이 예루살렘에 머무는 동안 예수님은 화제의 인물이 되고 있었습니다. 때문에 그들은 예수님에 대하여 소문을 듣게 되었고 또한 얼마 있지 않아 유대인의 모함을 받고 틀림없이 죽임을 당할거라는 느낌을 받은 것 같습니다.

전해오는 얘기에 의하면 여기 찾아온 사람들은 헬라 에데사 왕국에서온 장관들이라고도 합니다. 에데사 왕국에 왕자가 중병에 들었는데 예수란 분을 만나게 되면 틀림없이 낫는다고 하는 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임금님께서는 장관들 몇 사람을 보내어 예수님과 면담을 요청하게 된 것이지요. 그리고 보아하니 예수님의 신변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얼마 있으면 예수님은 틀림없이 잡혀서 죽을 거라고 하는 것을 금방 저들은 알 수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에데사 왕국에 아주 높은 고문자리 하나를 준비해 두고 예수님께 찾아와서 "예수님 여기 있다가는 당신의 신변에 큰 위험을 만나게 될 터니까 당신을 위하여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는 아름다운 자리를 준비해 두었습니다. 그러니 오셔서 그 자리에서 여생을 편히 쉬시고 우리의 왕자님을 고쳐주십시오." 요청하기 위해서 찾아왔다는 것입니다.

"선생이여 우리가 예수를 뵈옵고자 하나이다" 그들의 간절한 소원은 예수를 만나 자신들이 안고온 문제도 해결하고 그분의 말씀도 듣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예수를 뵈옵고자 하나이다" 이 말씀은 비록 2천년전 그 헬라인들만의 소원은 아닌 것 같습니다. 죄 때문에 번뇌하는 모든 인류의 소원이요, 참 생명의 길을 찾지 못하고 빛을 잃은 수많은 생명들의 간절한 절규입니다. 인생의 고통을 끌어안고 아파하는 모든 사람의 아우성입니다. 우리 귓전에 들리는 다양한 그놈들의 목소리는 살아계신 하나님, 살아있는 기독교가 보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 후 2000년 동안 인류역사상 가장 큰 화제의 인물은 이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오늘도 변함없이 시시각각으로 세상 사람들은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여 (집사여, 장로여, 목사여, 선생이여) 예수를 뵈옵고자 하나이다" 예수를 보여 달랍니다.

하나님이 있으면 보여 달라고 예수 그리스도가 어떤 분인지 보여 달라고, 하는 무언의 요구와 도전을 해오고 있습니다. 이러한 요구와 도전 앞에서 어떤 예수를, 어떻게 보여 주시렵니까? 자신있게 보여 줄 예수님은 소유하고 계십니까?

이 시대 그놈의 목소리는 눈으로 예수를 볼 수 있게 해 달랍니다.

이제는 설교나 설득의 입술을 통하여, 교파나 교리 논쟁을 통하여, 하나님을 알 수 없다는 것이지요. 입술로는 존귀영광 모든 권세 다 버렸다고 외치면서도 명예 싸움이나 하고 사리사욕이 경건을 자랑하고 덤비는 교권주의자들에게서 하나님을 발견할 수 없더라는 겁니다. 뿐만 아니라 장엄한 예배의식을 통하여도 예수를 볼 수 없더라는 것입니다. 내가 아파할 때에 내 곁에 있어주는 예수, 내가 울때 함께 울어주는 그 예수를 보고 싶다는 것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로마를 물리치고 로마군대를 제압하는 힘있는 예수, 영웅호걸 예수를 기대했습니다.

예수를 따르는 군중의 눈에는 예수께서 지배자답게 위풍이 당당하지 못하다는 점에 대해서 늘 불만이 많았습니다. 영웅처럼 위압하고, 제왕처럼 군림하며, 장군처럼 호령하는 지배자이기를 바랬건만, 그는 언제나 영웅보다는 친구로, 지배하는 제왕이나 장군보다는 섬기고 봉사하는 종으로, 몸소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시는 못난 선생으로 자처하셨습니다. 주님의 눈에는 모든 사람은 자신이 섬겨야할 자로만 보이신 것입니다. 섬김을 받기 위해 사는 사람은 천국에서도 지옥을 살지만 주기위해, 섬기기 위해 사는 사람은 지옥에서도 천국을 살 수 있습니다.

세계적인 전도자 빌리그래함이 인도네시아에서 한 청년에게 전도를 하였습니다. 빌리그래함의 말씀을 한참이나 듣고 가만히 눈을 감고 있던 그가 무섭게 눈을 뜨면서 "인도네시아에서 예수 믿는 사람을 보여 주시오. 내가 그를 보고 예수를 알겠나이다." 의미심장한 이야기올시다. 어찌 인도네시아에서 예수를 믿는 사람이 없었겠습니까 만은 생활속에서 예수의 향기를 풍기며 나의 일거수 일투족을 통하여 불신자들에게 감동을 주지 못하고, 내 생활속에서 주님을 전하지 못할 때 이렇게 무서운 도전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온 인류의 목소리엔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고 싶어하는 목소리로 가득차 있습니다.

하루는 제자들이 예수님께 하나님을 보여달라고 요구해 왔을 때 예수님께서는 말씀하십니다. "나를 본 자는 하나님을 보았다고"

「그놈들의 목소리」 - 교회에 실망한 그들이 예수를 보여달라고 요구해 왔을 때 "나를 본 자는 예수를 보았다고, 내 생활을 보고 예수를 알아보라고" 얼마나 자신있게 확신에 찬 음성으로 말할 수 있을는지, 다시 한번 나 자신에게 질문을 해 봅니다. 예수를 보고자 하는 그들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할 때 오늘도 그들은 돌을 던지고 비웃고 조롱할 것입니다. 「그놈들의 목소리」는 예수를 보여주지 못하는 오늘 모든 성도들에게 들려오는 조롱의 목소리입니다.

IV. 교회는 예수를 보여주는 곳입니다.

"선생이여, 우리가 예수를 뵈옵고자 하나이다" 그들의 요구에 어디서 어떻게 예수를 보여줄 수 있을까요? 우리교회에서, 성도들의 모임속에서, 우리가 서로 사랑하고 단결하는 모습속에서 예수를 보여주어야겠습니다. 교회는 예수의 몸이요 예수님은 교회의 머리입니다. 우리는 몸을 보고 여자인지 남자인지 구별할 수 있듯이 몸된 교회, 지체된 성도들의 모임을 보고 예수님을 알 수 있어야 겠습니다.

본문을 거슬러 요한복음 2장으로 돌아가 보면 주님께서 성전 내부를 청결하게 하신 장면이 나옵니다. 주님께서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사 그 안에 있던 소와 양과 비둘기 그리고 장사꾼들을 내어 쫓으셨습니다. 그 인자하신 분이 왜 채찍을 드셔야만 했던가?

1) 돈 바꾸는 사람, 비둘기를 파는 장사꾼들은 먼 지방에서 예배드리러 오는 순례자들을 위해 성전밖에 장사상을 차려두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성전 밖에 있던 것들이 언젠가부터 성전 안으로 들어와 판을 치게 되었습니다. 밖에 있어야 할 것들이 안으로 들어오고야 말았습니다. 문 밖과 문 안의 경계선이 무너졌다는 것입니다. 성전과 시장의 구별이 모호해졌습니다. 거룩해야 할 성전이 어느덧 짐승들이 우굴거리고, 수지 맞추기에 혈안이 된 장사꾼 소굴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 당시의 성전의 모습이요, 종교의 축도였기에, 주님이 이를 그냥 두고 볼 수가 없었던 게지요. 여기서는 헬라인 히브리인이 아니라 그 누구도 예수를 하나님을 볼 수 없었던 게지요.

오늘 교회는 어떻습니까? 세속과 교회의 경계선이 무너지지 않았는가? 하는 것입니다.

2) 밖에 있던 소와 양들이 성전안에 들어오는 경우는 그것이 제물이 되었을 때입니다. 그런데 저 성전 마당에서 우굴거리던 저 많은 우양들은 상품으로 들어온 것입니다. 그것이 죽어 제물이 되지 않고는 상품입니다. 상품은 성전에 들어올 수 없습니다.

나는, 우리교회는 주의 제단에 쪼개어 바친 제물인지? 아니면 뜰에서나 팔리는 상품인지를 분명히 구별해야 합니다. 주의 희생을 찬양하는 우리가 나만은 희생할 수 없다고 발버둥한다면... 순교한 성도들의 마지막 피 한방울을 찬송하는 우리들이면서도 내 자신은 땀 한방울 흘릴까? 벌벌 떨고 있다면 이건 상품입니다. 순교적 신앙을 잃어버린 오늘의 신앙인 공동체는 예수를 보여줄 수 없습니다. 순교하기 위해서 신앙을 위해서 초개와 같이 목숨을 던지던 믿음의 선진들의 그 숭고한 신앙을 잃어버렸다면 오늘 우리는 재물이 아니라 상품입니다. 교회에 왔기 때문에 신앙을 이용하여 하나님을 이용하여 세상 사람들보다도 내가 더 잘 살아야 되고, 내가 더 숭고해야 되고, 내가 하나님을 알고 신앙을 가졌기 때문에 세상에서 꾸던 그 욕망의 덧칠을 하는 것이 믿음생활하는 유일한 이유라고 한다면 그것은 재물이 아닙니다. 상품입니다.

3) 우리는 교회 부흥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합니다. 참으로 부흥이 무엇입니까? 부흥은 양적인 것만은 아닙니다. 대교회 주의에 급급한 것이 부흥이라면 그것은 경계선을 침범한 우양떼에 지나지 않을 겝니다. 한국교회가 교회는 성장되었는데 왜 이렇게 욕을 먹어야 하는 것입니까? 그것은 성전이 아니라 시장이 되어져 버렸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부흥은 소란이 아닙니다. 아무리 떠들고 덤비고 법석대어도 내가 주님 십자가 밑에서 죽지 못하면 그것은 다 짐승떼의 울부짖음에 지나지 않습니다.

우리교회는 시장인지 제단인지?
그리스도인은 상품인지 제물인지?
성직자는 제사장인지 부로커인지? 돌이켜 봐야 할 때입니다.

겸손히 죽지 못한 성도는 상품이요 그리스도를 보여주지 못하는 교회는 시장이요 그리스도를 보여주지 못하는 성직자는 부로커입니다. 여기서는 그놈들의 충고와 끊임없는 목소리를 듣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를 보고자 교회문을 두드린 수많은 사람들이 왜 쓴웃음을 짓고 돌아서야만 하는가? 말입니다. 갈급한 심정이 있어서, 생의 의미를 발견해 보고자 교회를 찾았던 젊은이들이 왜 실망과 낙담속에서 돌아서야만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교회가 감정에 도취된 광란적인 교회는 아니라고 할지라도 구원을 잘못알고 있는 이단적 교회는 아니라고 할지라도 차지도 덥지도 않은 라오디게아 교회, 처음 사랑을 잃어버린 에베소교회, 오늘 세상을 이길 힘을 잃어버린 무력한 교회, 할말을 못하는 벙어리 교회, 인간이나 법이 중심된 중세교회가 아닌지요?

문예 평론가 정의령씨는 교회를 빙자해서 말하기를 "가롯유다가 부럽다. 그는 참으로 행복한 사람이었다. 가롯 유다는 팔아먹을 예수라도 있었지만 현대교회는 팔아먹을 예수조차 없다."고 하여 웃어넘기지 못할 충고를 해 줍니다.

일본의 우찌무라 간조는 말하기를 "불신자들이 교회를 몰라서 예수를 믿지 않는 것이 아니요 교회를 너무나 잘 알아서 믿지 않는다."고 하여 의미심장한 조언을 했습니다.

예수께서 12살 되던 해에 부모님들과 함께 유월절날 예루살렘에 올라갔다가 내려오는 길에 그만 예수를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허겁지겁 동분서주 예수님을 찾다가 어디서 예수님을 찾게 됩니까? 성전에서, 교회에서 예수를 찾지요.

세상에서 잃어버려진 예수
신자들의 생활속에서 버려진 예수
과학자들의 도전과 물질 문명의 무관심 속에서 버려진 예수
신문에 터지고 방송에 짖밟히고 영화에 깨진 예수!

바로 이 예수를 우리 교회, 한소망교회에서 찾아올 수 있도록 합시다. 하나님이 보이는 예배, 성령의 능력이 살아 숨쉬는 교회, 진리가 살아 꿈틀거리는 교회를 보면 「그놈의 목소리」는 찬송으로 변하고 회개의 목소리로 바뀌게 될 것입니다.

V. 살아계신 예수님을 보여 주는 공동체가 있습니다. 바로 셀입니다.
이 시대 「그놈 목소리」에 가장 민감한 곳이 있다면 바로 셀입니다.

원래 영화에서 말하는 「그놈 목소리」는 사랑하는 아들을 유괴하고 그 아비 어미의 피를 말리는 유괴범의 목소리입니다. 악마의 목소리입니다.

교회는 가족입니다. 천국가족입니다. 교회가 가족임을 가장 실감나게 보여주는 곳이 셀입니다. 셀교회는 우리가 품은 태신자 VIP를 또다른 가족으로 이해합니다. 그래서 전도는 유괴범 악마에게 유괴당한 우리가족을 찾아나서는 영적 전쟁으로 이해합니다. 잃은 가족을 찾는 하나님의 가슴앓이가 숨쉬는 곳이 셀입니다.

제 책 「하나님의 가슴앓이」서문에 보면 이런 내용이 나옵니다.

진나라 때 일입니다. 환온이라는 장수가 촉을 정벌하기 위해 여러 척의 배에 군사를 나누어 싣고 양쯔강 중류의 협곡인 삼협이라는 곳을 지나고 있었습니다. 이때 한 병사가 새끼 원숭이 한 마리를 잡아왔습니다. 그러자 원숭이 어미는 새끼가 잡혀간 배를 쫓아 백여 리를 뒤따라오며 슬피 울었습니다. 배가 강어귀가 좁아지는 곳에 이를 즈음, 어미 원숭이는 몸을 날려 배 위로 뛰어들었습니다. 하지만 어미 원숭이는 배에 오르자마자 죽고 말았지요. 병사들이 죽은 원숭이의 배를 가르자 창자가 토막토막 끊어져 있었답니다. 자식을 구하려는 일념으로 애를 태우다가 창자가 끊어진 것입니다.

이게 단장의 슬픔, 단장의 아픔, 가슴앓이입니다. 유괴 당한 하나님의 가족들을 바라볼 때 하나님에게는 가슴앓이가 있는 것입니다. 거룩해야 될 한국교회, 세계 열방을 살릴 사명이 있었던 한국교회, 이 땅에 빛되고 소금되어 영광의 공동체가 되어야 될 한국교회가 오늘 여기저기서 깨지고 처절하게 내 팽개쳐질 때에 우리 하나님 얼마나 가슴이 아팠을까? 우리 하나님 얼마나 애간장이 녹았을까?

셀이 무엇입니까? 이런 하나님의 마음, 하나님의 가슴앓이가 녹아 있는 곳입니다. 고통가운데 신음하고 가슴 아파 울고 있는 사람곁에 함께 있어 주는 공동체가 셀입니다. 내가 넘어질 때 네가 붙들어 주고 네가 힘들어할 때 내가 힘이 되어주는 공동체. 그게 교회요 셀입니다.

저는 영화를 보면서 이런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영화속의 한경배씨의 가정이 셀교회 셀가족이었다면 우리 셀은 그 가정을 어떻게 도와줄 수 있었을까? 우는 그들 곁에서 함께 울어주고 가슴에 피멍이 들도록 가슴을 치며 살도록 내버려 두었을까? 형식적인 심방, 어설픈 위로에 분노하도록 팽개쳐 두었을까?

사랑하는 여러분,
교회를 향해 조롱하는 「그놈들의 목소리」가 강하면 강할수록 우리는 교회다운 교회를 만들어가야 합니다. 본래 셀교회의 그 능력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내동댕이쳐진 십자가를 다시 손에 들고 울고 있는 그들을 찾아가야 합니다. 갈기갈기 찢겨진 하나님의 말씀이 오늘도 살아 있음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밖으로 쫓아낸 예수, 팽개친 기독교를 다시 모시도록 그들을 도와 주어야 합니다. 버림받아 십자가에 달린 그 예수님, 무덤속에 갇힌 그 예수가 부활하듯 다시 일어서는 오늘의 교회를 보여주어야 합니다. 그것이 부활이요 그것이 부흥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 살아 계시니 한국교회여 일어나라! 한국교회 성도들이여 새로워지자. 함께 일어나라 외쳐야 합니다.

「그놈들의 목소리」가 「그들의 찬송」이 되는 그 날을 보고 싶습니다. 그 날은 오고야 말 것입니다. 우리교회 알파코스 그리고 셀을 통하여 얼마나 많은 「그놈들의 목소리」가 기쁨과 감격, 찬송과 환희로 바뀌고 있습니까? 이번주 셀마다 열리게 될 "VIP 초청잔치"를 통해서도 「그들의 목소리」가 기도와 찬송 그리고 구원의 감동으로 바뀌게 될 것입니다. (류영모 목사)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