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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주일] 다메섹으로 가는 길 (행 9: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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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주기도?

만약 내가 예수 믿는다고 핍박하는 사람이 있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교회 나간다고 괴롭히고 심지어 때리기까지 한다면 어떻게 하겠냐는 말입니다. 어떤 집사님은 고등학교 다닐 때 학교 선생님이 주일에도 학교 나오라고 시키고, 교회 가는 아이들은 사정없이 때리곤 했답니다. 자신도 주일에 교회 갔다가 매를 맞았다더군요. 너무 속상하고 화가 났지만 선생님이라는 이유로 반항 한 번 못해본 것이 지금도 억울하던데 더 큰 문제는 아직도 그런 학교, 그런 교사가 있다는 것입니다. 만약 내 자녀가 이런 일을 당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또 직장상사나 부모나 남편이 나를 핍박할 수 있습니다. 너무 속상하고 분노가 일어날 테지요. 시편 109편에 보면 나를 핍박하는 원수에 대한 저주기도가 나옵니다. 좀 심하다 싶을 정도로 저주를 퍼붓고 있습니다. 개역개정판으로 읽습니다.

악인이 그를 다스리게 하시며 사탄이 그의 오른쪽에 서게 하소서 그가 심판을 받을 때에 죄인이 되어 나오게 하시며 그의 기도가 죄로 변하게 하시며 그의 연수를 짧게 하시며 그의 직분을 타인이 빼앗게 하시며 그의 자녀는 고아가 되고 그의 아내는 과부가 되며 그의 자녀들은 유리하며 구걸하고 그들의 황폐한 집을 떠나 빌어먹게 하소서 고리대금하는 자가 그의 소유를 다 빼앗게 하시며 그가 수고한 것을 낯선 사람이 탈취하게 하시며 그에게 인애를 베풀 자가 없게 하시며 그의 고아에게 은혜를 베풀 자도 없게 하시며 그의 자손이 끊어지게 하시며 후대에 그들의 이름이 지워지게 하소서

그렇다면 우리도 우리를 핍박하고 예수 못 믿게 하는 사람에게 이렇게 저주하면 되겠습니까? 얼마나 속이 시원하겠습니까? 하지만 아니지요. 그럴 수 없지요. 그래서 이런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나를 핍박하는 사람을 위한 최대의 저주기도는 무엇인가? “주님 저 사람 망하게 해주세요.”나 “저 사람 사고 나게 해주세요.”가 아니라 “주님, 저 사람 선교사 되게 해 주세요.”라는 것이랍니다. “주님, 예수 믿는다고 나를 핍박하는 저 사람 예수 믿게 하시고, 예수 믿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선교사 되게 하시고 목숨 걸고 복음 전하는 사람 만들어 주세요.” 하고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우스갯소리처럼 들리지만 결코 농담이 아닙니다. 실제로 성경에 그런 인물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는 바로 사도 바울입니다. 본문 1절에 보면 바울은 사울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합니다. 사울은 율법에 대한 열심으로 예수 믿는 사람들을 괴롭히던 핍박자입니다. 예수 믿는다고 부인의 머리채를 끌고 가는 사람, 자식이 교회 나간다고 때리는 사람도 있지만 사울은 그 정도가 아닙니다. 그는 스데반 집사가 돌에 맞아 순교할 때 증인들의 옷을 맡았던 사람입니다(행 7:58). 또한 8장 1절에 사울이 스데반의 죽음을 마땅히 여겼다고 나오는데 이는 “죽어도 싸다”고 생각했다는 뜻입니다. 사람들은 이 구절들을 근거로 아마도 사울이 기독교인들을 핍박하다가 스데반의 죽음에도 앞장을 서게 되었고 신성모독죄를 적용해 돌로 쳐 죽일 때 옷을 맡았다는 것은 돌로 쳐 죽이는 사람들을 도운 정도가 아니라 그 죽음의 증인으로서 주도적인 역할도 한 것으로 봅니다. 누군가를 돌로 쳐 죽일 때 증인이 된다는 것은 그 죽음에 대해 내가 책임지겠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사울은 스데반이 이상한 이단을 전파하는 자요 율법을 위협하는 자로서 죽어 마땅하다고 생각했기에 기꺼이 스스로 그 죽음을 주도했다고 하겠습니다. 그만큼 사울의 율법에 대한 집념은 무서울 정도로 강했습니다.

우리는 이 스데반의 죽음이 예수님의 죽음과 많은 부분에서 비슷한 것을 보게 됩니다.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다가 유대인들의 손에 처형당한 것처럼 스데반도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전파하다가 유대인들의 손에 죽음을 당합니다. 예수님에게 참람죄(신성모독죄)라는 죄목이 주어진 것처럼 스데반도 신성모독죄가 적용되어 돌로 쳐 죽임을 당하게 됩니다. 무엇보다 예수님이 가상칠언에서 첫 번째 말씀으로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 23:34) 하신 것과 똑같이 스데반도 돌로 맞아 순교하는 순간 무릎을 꿇고 “주여 이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행 7:60)라는 말을 남기고 죽습니다. 너무도 비슷한 이 두 죽음을 보면서 우리는 사울이 스데반의 죽음을 주도한 것은 바로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을 주도한 것이나 다름없음을 느끼게 됩니다. 즉, 바울은 비록 예수님의 죽음에 관련된 적이 전혀 없고 십자가 처형 장소에 가보지도 않았지만 예수님을 연상하게 하는 스데반의 순교를 주도하고, 또 그가 전했던 예수의 복음을 부인하고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하기 위해 다메섹으로 달려간 사실만 놓고 보아도 사울이 예수님을 핍박하고 처형시킨 사람과 다름없음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 9장 4절에 보면 부활하신 예수님이 사울에게 나타나 “사울아 사울아 네가 어찌하여 나를 핍박하느냐?”고 물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부활하신 예수님이 핍박자 사울에게 직접 나타나 그의 삶을 변화시키고 핍박자에서 선교사로, 예수 믿는 자들을 가두고 죽이던 자에서 자신이 예수를 위해 갇히고 죽음 당하는 순교자로 바꾸시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부활하신 주님의 능력입니다. 그러고 보면 혹시 예수 믿는 사람들을 핍박한 사울을 보면서 누군가가 그렇게 저주 기도를 했는지도 모릅니다. “주님, 저 악독한 핍박자 사울이 선교사 되게 해주세요.” 어쨌든 오늘 우리는 본문에서 기독교 2천년 역사 상 가장 위대한 전환점을 보게 됩니다. 이 사울 한 사람의 인생의 전환점이 기독교 전체 역사를 송두리째 바꾸어 놓는 놀라운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삶의 전환점에서 거꾸러지다

누구나 삶의 전환점을 맞이하게 마련입니다. 내 삶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는 그 순간, 내 삶의 목적이 180도 바뀌게 됩니다. 이런 현상을 설명할 때 먼 길을 가는 것으로 비유할 수 있습니다.

두 가지 경우가 가능합니다. 첫째는 완전히 길을 바꾸는 것입니다. 난 지금까지 이 길이 옳은 줄 알고 열심히 달려왔는데 어느 날 이 길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래서 그 길을 돌이켜 완전히 반대방향으로 가게 되는 일이 생기는 것입니다. 저는 며칠 전 자명 쪽에서 새로 난 길을 통해 경주 방향으로 가게 되었습니다. 갈 때는 잘 갔습니다. 그런데 오는 길에 길을 잘못 들어 완전히 반대방향으로 갔습니다. 가다가보니 오천방향입니다. 이럴 때는 빨리 길을 돌이켜 유턴을 해야 합니다. 지금까지 온 거리가 아깝다고 그 길을 계속 가면 완전히 잘못된 길로 가게 됩니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입니다. 아무리 먼 길을 열심히 달려왔다 하더라도 이 길이 아니구나 하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순간 과감하게 유턴을 해서 바른 길로 찾아가야 합니다. 지금까지 헐레벌떡 달려온 길이 너무 아깝다고 주저하면 우리 인생도 영영 돌아올 수 없는 길로 가게 되고 맙니다.

두 번째는 어떤 목적을 가지고 길을 가고 있었는데 가던 도중 길을 가는 목적이 완전히 달라지는 경우입니다. 가는 길은 똑같지만 그 길을 가는 목적이 완전히 달라지는 것입니다. 처음 길을 떠날 때는 이 일을 해야지 하고 갔는데 가던 도중 목적이 달라집니다. 목적지는 똑같지만 그 목적지를 향해 가는 목적이 180도 달라지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사울이 다메섹으로 가는 길은 이 두 경우 중 어디에 해당되겠습니까? 두 번째입니다. 다메섹으로 가던 도중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인생의 전환점을 맞이합니다. 그래서 그의 인생이 송두리째 180도 바뀐 것은 우리도 잘 아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바뀌었습니까? 예수님을 만나서 다메섹으로 가는 길을 포기하고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왔습니까? 그렇지는 않았습니다. 그냥 다메섹으로 갔습니다. 다만 그 전에는 대제사장이 발급해 준 체포영장을 가지고 호기 있게 다메섹으로 달려가던 사울이 이제는 눈이 멀어 다른 사람의 손에 이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간 차이 있습니다. 이전의 사울은 내 힘으로 다메섹도 갈 수 있고 안디옥도 갈 수 있고 어디든지 내 맘대로 가서 내 뜻대로 예수 믿는 자들을 색출하여 말살할 수 있다고 믿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부활한 주님을  이후 사울은 눈이 멉니다.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겨우 남의 손에 이끌려서야 다메섹으로 들어갈 수 있는 사람으로 바뀝니다. 졸지에 앞 못 보는 처지가 되어 남의 손을 붙잡고 더듬더듬 다메섹으로 들어가게 된 사울은 바로 그 순간 인생이 내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을 깨달았을 것입니다. 내가 얼마나 못난 존재인지, 내가 얼마나 연약한 사람인지 절실하게 깨달았을 것입니다.

우리도 인생길에서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면 이런 일이 생깁니다. 예수님 만나기 전에는 나름대로 신나게 살았습니다. 모든 일이 내 뜻대로 될 줄 알고, 내가 원하는 것, 내가 이루고자 하는 것이 다 가능할 줄 알고 다메섹으로 힘차게 달려갔던 인생입니다. 그런데 그 인생길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게 되고 그분을 만난 순간 우리는 사울처럼 땅바닥에 고꾸라집니다. 지금까지 내 뜻대로 내 마음대로 살 수 있다고 여기던 그 자신감이 여지없이 땅에 떨어지고 나는 눈이 멀고 맙니다. 누군가의 손에 이끌리지 않으면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는 인생이 되고 맙니다. 바로 그 순간 내가 얼마나 못난 존재인지를, 누군가의 도움이 없으면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인생임을 절실하게 깨닫게 됩니다.

새로운 눈이 열리다

그 다음에 어떤 일이 일어납니까? 누군가의 손에 이끌려 다메섹으로 들어가 사흘 동안 아무 것도 보지 못하고 먹지도 못하고 지내던 사울에게 주님이 보내신 아나니야라는 제자가 찾아오고 아나니야가 안수하는 순간 사울의 눈에서 비늘 같은 것이 벗어지면서 다시 보게 됩니다. 우리 주님이 사흘 동안 무덤에 계시다가 어둠을 이기고 나오신 것처럼 사울도 사흘 동안 암흑 속에 눈멀어 있다가 다시 보게 된 것입니다. 사울이 단순히 사흘 동안 못 보다가 다시 보게 된 것이 아니라 완전히 새로운 눈을 뜨게 되는 순간입니다. 주님은 이전에 눈 뜨고 있던 사울이 육신의 눈은 뜨고 있지만 소경과 같은 존재임을 깨닫게 하신 것입니다. 그는 육신의 눈은 멀쩡히 뜨고 있으되, 그리스도를 보지 못하고 진리를 보지 못했습니다. 자기가 바라보던 율법만, 유대교만 진리인 줄 알고 오직 그것만 향해 맹목적으로 달려간 인생을 살았습니다. 자기가 보는 것만 옳은 줄 알고 다른 것을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눈은 뜨고 있지만 소경과 같은 인생을 산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다메섹 도상에서 눈먼 사울을 만나 진짜 사흘 동안 눈멀게 했다가 아나니야의 안수를 통해 그 눈에서 율법의 비늘, 유대교의 비늘, 맹목적인 자기 확신의 비늘을 떨어지게 함으로 새로운 눈을 뜨게 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는 이제 전혀 새로운 세계, 참된 진리에 눈을 뜨게 됩니다.

우리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면 눈에 비늘이 떨어지고 새로운 눈이 열리게 됩니다. 지금까지 육신의 눈은 멀쩡하게 뜨고 살았다고 믿었지만 사실은 재물로, 권력으로, 명예로, 이기심으로 눈멀었던 내가 예수님을 만나는 순간에 그 눈을 가렸던 재물의 비늘, 권력과 명예의 비늘, 이기심과 세상적인 비늘이 떨어지고 새로운 눈이 열리고 새로운 세상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내가 진리인 줄 알고 맹목적으로 좇아가던 것이 얼마나 헛된 줄 깨닫고 새로운 눈을 떠 참된 진리가 무엇인지, 내가 이제는 무엇을 위해 어떻게 살아야 하는 지 깨닫게 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됩니다.

사명을 받다

마지막으로 눈에 비늘이 벗어지고 새롭게 세상을 보게 된 사울에게 어떤 일이 생깁니까? 사명이 주어집니다. 이미 주님은 사울을 어디에 어떻게 사용하실 지 계획을 다 세우고 다메섹 도상에서 사울을 만나 그를 거꾸러뜨리신 것입니다. 그 사명은 15절에 나옵니다.

주께서 가라사대 가라 이 사람은 내 이름을 이방인과 임금들과 이스라엘 자손들 앞에 전하기 위하여 택한 나의 그릇이라

주님은 이전에도 이미 사울이라는 사람을 눈여겨 봐두었던 것입니다. 그 놈 참 쓸 만하다고 본 것이지요. 저 정도 열심이면, 저렇게 한번 시작하면 목숨 걸고 뿌리를 뽑고 마는 성격이라면 복음을 위해서도 열심을 품고 생명 걸 수 있는 그릇임을 알아보신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사울에게 엄청난 사명을 주십니다. 그것은 지금까지 유대지역과 유대인에게만 머물고 있던 복음을 이방인들에게 전하는 ‘이방의 사도’의 사명입니다. 이 사명을 감당하려면 보통 일이 아닙니다. 전 세계를 발로 돌아다니며 고생도 해야 합니다. 이방인들에게 목숨의 위협도 받을 것입니다. 게다가 복음은 유대인에게만 전해야 한다는 편견도 이겨내야 합니다. 이 엄청나게 힘든 일을 감당할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사울임을 알아본 주님은 부활 후 그를 친히 만나 이 사명을 맡기십니다. 그러므로 다메섹으로 달려가던 사울의 발걸음은 주님을 만난 후에도 똑같이 다메섹으로 향하지만 가는 목적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똑같이 다메섹으로 갔지만 이전에 다메섹으로 가던 길은 예수 믿는 자들을 핍박하고 기독교를 말살시키기 위한 길이요 이제 복음을 전하고 주님을 증거하는 길로 변하게 됩니다.

이 사명대로 사울은 눈을 뜨자마자 바로 다메섹의 회당에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전파하기 시작합니다(29절). 또 예루살렘에도 가서 자신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것을 증거하며 예수의 이름으로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합니다(26~29절). 부활의 증인이 된 것입니다. 사울은 자신의 사명이 무엇인지 알았기에 이렇게 한 것입니다. 그런데 변화된 그를 세상이 그냥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다메섹에서 그가 부활의 증인이 되자 다메섹에 사는 유대인들은 사울을 죽이려고 공모합니다. 사울을 붙잡아 죽이려고 밤낮으로 성문을 지키니 다메섹에 있는 주의 제자들이 사울을 살리기 위해 밤에 광주리에 사울을 담아 성 밖으로 달아 내립니다(23~25절). 겨우 목숨을 부지해 도망한 사울은 이번에는 예루살렘에 가서 부활을 증거하지만 이번에는 예루살렘에 사는 헬라파 유대인들이 사울을 죽이려고 해서 하는 수 없이 형제들이 사울을 다소로 피난시킵니다(29~30절).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면 사명을 받게 됩니다. 너도 부활의 증인이 되라는 사명 말입니다. 그런데 그 사명을 감당하는 길이 결코 순탄치 않습니다. 예수 안 믿었으면 이 고생 안 해도 될 것을 부활의 주님 만나는 바람에 사서 고생하게 됩니다. 때로는 핍박을 받습니다. 고난도 당하고 왕따도 당합니다. 때로는 생명을 걸어야 할 일도 생깁니다. 왜냐? 마귀사탄이 우리가 부활의 증인 되는 것을 너무나 싫어하기 때문에 무슨 일이 있어도 못하게 막고 방해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역으로 말하면 우리가 아무리 고생이 되어도 예수님의 부활을 증거하는 삶을 살게 되면 그것이 바로 주님이 가장 기뻐하시고 마귀가 가장 두려워 떠는 일이라는 뜻입니다. 비록 부활의 주님 증거하는 사명이 너무 힘들고 외로워서 내가 왜 이런 고생을 사서 하나 싶을 때도 있겠지만 그 사명이 얼마나 놀랍고 귀한 것인지 깨닫게 되면 그 기쁨과 감격은 말로 헤아릴 수 없음을 알게 될 것입니다.

부활체험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은 부활절입니다. 이 감격스러운 부활절에 사울처럼 우리도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는 체험을 해야 합니다. 부활신앙은 체험의 신앙입니다. 과거의 사건으로만 끝나고 안 되고 성경에 기록된 문제로만 끝나서도 안 됩니다. “누구누구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다더라.” 하고 끝나서는 안 되고 나 자신이 직접 부활의 주님을 만나야만 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부활하신 주님이 베드로를 제일 먼저 만나고, 그 다음에 열두 제자와 오백문도들과 야고보와 모든 사도들에게 나타나신 후, 맨 마지막에 ‘만삭되지 못하여 난 자 같은 나’에게도 나타났다고 고백합니다. 칠삭둥이 팔삭둥이처럼 덜 떨어진 자신, 내가 믿는 진리만 참 진리인 줄 알고 날뛰던 나 같은 자에게도 부활의 주님이 나타나셨음을 감격으로 고백하면서, 그 부활의 주님이 그 못난 나를 직접 만나 사명을 주셨기에 지금 이방인에게 복음 전하는 사명을 감당하노라 고백합니다. 이 부활의 주님을 만난 순간이, 그 다메섹 도상의 사건이 사울을 바울 되게 하고, 그의 인생을 완전히 바꾸어 놓은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가져왔습니다. 불신에서 신앙으로, 잘못된 신앙에서 참 신앙으로, 핍박자에서 사명자로 그의 인생이 바뀝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에게도 이 다메섹 체험이 필요합니다. 우리 인생을 송두리째 180도 바꾸어 놓을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 필요합니다. 그래야 우리도 사명자로 거듭날 수 있습니다. 오늘 이 감격적인 부활절에 여러분도 부활의 주님을 직접 만나 그 분으로부터 내가 왜 살아야 하는지,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듣고 그 사명 감당하여 그 부활의 영광과 감격을 함께 누리는 여러분 되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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