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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제6계명 : 생명 존중 (출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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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계명 서론 설교에서 하나님의 계명을 지킴에 있어서 개인의 인격 수양 측면에서 생각할 것이 아니라고 말씀 드렸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계명을 주신 근본적인 이유는, 구별된 생각과 말과 행동을 통해 하나님 백성다운 사상과 품성과 처신을 익혀서, 하나님 백성다운 존재들로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케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 원대하신 뜻을 위해서 최소한의 지침으로 제시된 것이 율법입니다. 계명들을 문자적인 의미로 축소해서 생각하지 말아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살인하지 말지니라”(13)는 6계명의 말씀도 문자 그대로의 의미로만 생각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더 이상 이 말씀을 들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 계명에서 ‘생명을 존중’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헤아린다면, 단지 살인 하지 않은 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살인’을 낳는 여러 가지 원인들도 되짚어보게 될 것이고, 더 나아가서 형제를 사랑하는 품성이 형성되도록 힘쓸 것입니다. 예수께서 모든 계명을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으로 요약하신 이유도 율법의 문자 너머에 있는 하나님의 숭고한 뜻을 헤아리셨기 때문입니다.

모세오경은 고의적인 살인(故殺고살)과 고의적이지 않은 우발적인 살인(誤殺오살)을 구별하여 처벌을 달리 했습니다. 고의적인 살인은 계획해서 죽인 모살(謀殺)이든 계획 없이 충동적으로 직접 죽인 것이든 사형으로 처벌했습니다: “사람이 그 이웃을 짐짓 모살하였으면 너는 그를 내 단에서라도 잡아내려 죽일지니라”(출 21:14), “살인죄를 범한 고살자의 생명의 속전을 받지 말고 반드시 죽일 것이며”(민 35:31). 살인한 사람을 사형시키면 그것도 살인이 아닌가 하고 묻는 경우가 있는데, 살인은 개인적인 원한이나 유익을 위해서 개인이 범하는 것이고, 사형은 정당한 절차에 의한 공적인 처벌이기 때문에 다릅니다.

지금 우리나라의 형사 처분에 있어서도 ‘고의성’, 곧 살인하려는 의도를 품었는가를 신중하게 따집니다. 비록 성공하지 못했어도 살해할 의도를 품고 행동에 옮기고 있었다면 살인미수라 하여 형벌이 무겁습니다. 그런데 성도는 겉으로 드러나는 행동뿐만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마음의 중심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렇다면 죽여 버리고 싶다는 ‘분노’의 마음과 ‘보복심’을 고의적으로 품고 있는 것, ‘확 죽여 버린다’라고 말하는 ‘언어폭력’도 살인미수에 해당함을 인식하고 이런 일조차 없도록 애써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런 맥락에서 친구에게 노하거나 욕하거나 멸시하는 자까지도 이미 살인한자로 정죄하셨습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마 5:22)

고의성이 없는 우발적인 살인에 대해 우리나라 형법에서는 ‘미필적 고의’와 ‘과실치사’를 구별합니다. 미필적 고의는 죽을 가능성을 알지만 ‘죽어도 어쩔 수 없지’하고 방치한 경우입니다. 예를 들면, 자기 집에 불을 냈지만, 불이 번져 옆집에서 잠자던 사람이 타죽을 가능성이 있음을 알고도 방화한 경우입니다. 과실치사는 가능성을 알았지만 부주의해서 발생한 사고입니다. 예를 들면, 통행하는 사람이 많은 곳에서 과속하면 분명히 위험한데도, ‘난 운전 잘해’라며 과속했다가 사망사고를 낸 경우입니다. 이론적으로는 두 가지를 구별하지만 실제로는 분별하기 어렵습니다. 이처럼 고의성이 없으면 형법상의 처벌이 보다 가볍지만 어쨌든 생명을 잃게 한 일이기 때문에 중한 처벌이 따릅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들로 하여금 생명에 대한 존중의식을 가지기 원하신다는 사실은 도피성 제도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민수기 35:22-25절에 “원한 없이 우연히 사람을 밀치거나 기회를 엿봄이 없이 무엇을 던지거나 보지 못하고 사람을 죽일 만한 돌을 던져서 죽였다 하자 이는 원한도 없고 해하려 한 것도 아닌즉 회중이 친 자와 피를 보수하는 자 간에 이 규례대로 판결하여 피를 보수하는 자의 손에서 살인자를 건져내어 그가 피하였던 도피성으로 돌려보낼 것이요 그는 거룩한 기름 부음을 받은 대제사장의 죽기까지 거기 거할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완전히 고의성 없는 가운데 사람을 죽게 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의 생명을 잃게 했기 때문에 도피성으로 피해야만 생명을 보존할 수 있었습니다. 그만큼 구약에서도 생명은 존중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생명을 존중하셔서 “사람이 만일 온 천하를 얻고도 제 목숨을 잃으면 무엇이 유익하리요”(막 8:36)라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 사회는 이런 생명존중의식이 점점 희박해져가고 있습니다. 돈을 더 많이 벌기 위해서 콩나물을 농약으로 재배하거나 두부에 석회를 섞는 경우도 있었고, 벌레가 먹으면 상품 가치가 떨어진다는 이유로 출하 직전의 과일에 농약을 뿌리는 일들이 있었습니다. 사람 몸에 대단히 유해한 줄 알면서도 사람의 생명을 담보로 한 실험을 한다든지, 돈을 벌려는 욕심 때문에 안전 수칙을 준수하지 않는 일들이 우리의 삶 주변에 참 많습니다. 몇 푼의 돈이나 어떤 유익 때문에 사랑의 생명을 경시하는 것은 일종의 간접살인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현대 사회에는 성경에 구체적인 지침이 없는 다양한 사안들이 있습니다. 성경은 이런 일들에 대해 일일이 답하기보다는 바르게 판단할 수 있는 근본적인 태도를 가르쳐줍니다. 그 중 하나가 생명에 대한 존중의식입니다. 성도는 어떤 개인의 유익을 중심으로 생각하거나 심지어 민족과 국가의 이익을 중심으로 생각하는 것이 최고선이 아닙니다. 개인의 유익이나 민족과 국가의 유익을 무시해서가 아닙니다. 천하의 어떤 것보다 생명이 더 귀하다는 생명존중 의식 가운데서 생각해야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대로 결론을 내릴 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도의 사회생활에서 가장 중요하게 배워야 할 것은 구체적인 처세술이 아니라 생명존중의식입니다.

한때 우리나라는 낙태천국이라 불렸습니다. 낙태된 태아들은 마치 음식 찌꺼기처럼 쓰레기통에 버려졌습니다. 낙태의 경우 별 문제의식 없이 행하는 사람도 있지만, 참으로 딱한 상황과 형편들을 가진 사람들도 있습니다. 심지어 낙태하지 않으면 산모의 생명이 위험한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피치 못할 이유가 있다 할지라도 그것 때문에 ‘다른 생명을 희생하는 것’이 정당하다거나 좋은 일이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친구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는 일은 그보다 더 큰 사랑이 없는 지고의 사랑에 해당하지만, 나를 위해서 친구의 목숨을 희생하도록 요구하는 일은 결코 정당한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배아 복제가 사회적인 이슈가 되었을 때, 국익에 도움이 되고 많은 불치병 환자의 치료에 도움이 된다는 측면에서 허용을 고려하려는 분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물론 국익과 불치병 환자의 치료는 매우 중요합니다. 그러나 배아 역시 ‘하나의 생명’이라는 관점에서 생각하면 불치병 치료라는 명목으로 ‘다른 생명의 희생’을 정당화해서는 안 된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됩니다. 배아가 자라면 인격을 갖춘 한 인간이 됩니다. 배아와 어린 아이와 성인으로 성장해가는 과정에서 단절된 어떤 시점이 전혀 없습니다. 생명이 아니다가 어느 순간 갑자기 생명이 된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성인을 죽이면 살인이지만 미성숙한 어린 아이를 죽이면 반쯤 죽인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렇다면 배아도 1/100쯤 죽인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생체실험을 무서운 범죄로 생각하다면 배아 실험 역시 생체를 실험하는 죄에 해당합니다.

불신자들은 생명이 자기 것이기 때문에 자기 마음대로 쓸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심지어 자식의 생명은 부모가 주인인 것처럼 ‘내 자식 내 마음대로 하는데 참견 마라’고 말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성도는 모든 생명의 주인이 하나님이심을 고백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안락사 문제나 자살 문제나 전쟁 문제를 생각함에 있어서도 마치 생명을 끝내는 일에 인간이 결정할 수 있는 주인처럼 접근해서는 안 됩니다. 생명의 주인이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폭식과 술과 담배와 마약 등으로 함부로 망가뜨려서는 안 되고, 적당한 휴식과 운동 등으로 자신의 생명도 소중이 다루고 잘 관리해야 합니다.

좀 더 나아가면 환경문제도 생명의 관점에서 생각할 수 있습니다. 성도가 환경 문제에도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은 인간은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세계를 잘 관리할 청지기로서의 사명을 받았기 때문이기도 하고, 환경이 생명과 연관되었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지금 우리가 유전자 변형 식품이나 환경 호르몬이나 대기 오염의 문제 등을 고려하지 않으면 후손들의 생명이 위협을 받습니다. 시간을 단축시켜 보면 부모가 오염시킨 물을 사랑하는 아들과 딸이 마시게 되는 셈입니다.

결국 “살인하지 말지니라”는 계명은 실제로 살인하지 않은 우리 모두의 삶의 전반에 걸쳐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알게 됩니다. SBS 방송의 ‘SOS 긴급출동’이라는 프로그램을 보면, 한 생명으로서 존중받지 못하고 살아가는 삶을 목격하고 가슴이 아픕니다. 그러면서 성도의 이웃 사랑은 무엇을 많이 주는 것 이전에 이처럼 사회에서 무시 받고 있는 생명에 대해서도 동등한 존중심을 가지고 대하는 일부터 시작되어야 할 것이라 생각하게 됩니다. 생명을 죽이는 것을 재미삼아 구경할 수 있게 만든 영화나 생명 죽이는 것을 오락으로 만든 게임 등도 성도의 삶에서 마땅히 버려야 할 요소들입니다. 그러한 일상의 일들이 생명을 경시하는 풍토와 사상을 심어 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살인하지 말지니라”는 말씀 앞에서 모든 생명은 동등한 가치를 가지게 됩니다. 나의 생명이 천하보다 귀한 만큼, 태아의 생명도 천하보다 귀하고, 노숙자의 생명도 천하보다 귀하며, 정신지체자의 생명도 천하보다 귀하고 후손들의 생명도 천하 보다 귀합니다. 노동력에 따라 생명의 가치에 등급을 매기던 시대가 있었습니다. 오늘날도 능력에 따라 ‘몸값’이 달라집니다. 노동력을 상실하면 버려지는 것처럼 무능한 사람이 도태됩니다. 이에 따라 생명의 가치마저 다르게 평가되고 있습니다. 이런 시대 상황 속에서, 사랑하는 우리 성도님들은 생명의 주인은 하나님이심과 모든 생명이 하나님 앞에 동등한 가치가 있음을 충분히 인식하고 생명을 존중하는 성품을 형성해 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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