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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믿는 자가 되라 (시 118:14-24, 계 1:4-8, 요 20:2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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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에게 우리 주님의 십자가 사건은 엄청난 스캔들이었습니다. 십자가 앞에서 제자들은 모두 걸려 넘어졌습니다.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실 때만 해도 그들은 저마다 다른 사람에 뒤질세라 주님께 충성을 다짐했습니다. 심지어 “죽는데 까지”라도 따르겠다고 했을 정도였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좌우의 자리를 청탁한 것도 따지고 보면 충성서약이었으며, 그 모습을 보고 분통을 터뜨렸던 제자들도 하나같이 충성심의 발로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들의 저 경쟁적이기 까지 했던 충성심은 십자가 앞에서 마치 물거품처럼 허물어지고 말았습니다. 우리 주님 홀로 십자가를 감당해야 했습니다. 측근의 제자들은 십자가 현실에 직면하자 주님을 버려둔 채 다 도망치고 말았습니다. 가까스로 심문현장까지, 그것도 멀찍이 따라갔던 베드로는 자기 신분이 탄로 나게 되자 질급을 하면서 부인하고 저주하고 물러갔습니다.

    당시 “십자가”라면 말만 들어도 모두가 몸서리를 칠만큼 끔찍한 사형 틀이었습니다. 평소 주님께서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하는 말씀을 듣기는 했어도 제자들은 그 말씀에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그때만 해도 제자들은 아직도 세속적인 성공과 출세라는 꿈에 잠겨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 제자들이었기 때문에 예수님께 닥친 십자가는 감당할 수 없는 스캔들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십자가 앞에서 풍비박산 흩어지고 말았습니다. 저 골고다 언덕에는 오직 주님 혼자서 그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이런 제자들을 다시 불러 모은 힘이 무엇이었습니까? 그것이 바로 주님의 부활이었습니다. 물론 부활 후에도 제자들에게서 공포와 의심 그리고 두려움이 살아진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부활 소식을 듣고 주님과 마지막 만찬을 나누셨던 마가 요한의 다락방에 모이기는 했지만 극도로 사람들의 시선을 의식했으며 문은 안으로 걸어 잠그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흩어졌던 제자들은 일단 다시 모였습니다. 기독교의 새 역사, 예수 운동의 새로운 국면은 여기서부터 새롭게 시작이 되었습니다. 그 원동력이 바로 우리 주님의 부활이었습니다.

    그 후 오순절 날 성령 받고 나서 베드로가 최초로 설교를 했습니다. 그 설교의 주제가 무엇이었습니까? “십자가와 부활”이었습니다. 십자가 앞에서 허물어졌던 제자들이 부활로 다시 모였는데 이제 성령을 받고 나니 십자가와 부활이 둘이 아니라 하나 즉 하나님의 구원의 놀라운 드라마라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셔서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고 증거 했습니다.

    나중에 다메섹 도상에서 주님께 부르심을 받은 사도 바울은 “내게는 우리 주님의 십자가 외에는 자랑 할 것이 없다”고 까지 했습니다. 비로소 십자가가 복음의 중심사건, 중심 내용이 된 것입니다. 그리고 십자가로 하여금 우리의 구원의 능력이 되게 한 것이 바로 주님의 부활이었습니다.

    다시 말씀드리면 오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고 하는 것은 십자가와 부활의 주님을 믿는 것을 말합니다. 오늘 우리 교회가 그리스도의 교회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주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고 증거하는 공동체인 것을 말합니다.

    그런데 주님은 지금도 여전히 우리에게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따르라”고 요구하십니다. 그리고 우리들도 별 생각 없이 “십자가를 내가 지고 주를 따라 가도다”라고 노래하고 고백합니다. 이런 낭만적인 우리 신앙이 정말 내가 지고 가야할 십자가 앞에 부딪치게 되면 저 제자들처럼 속절없이 무너지게 되는 것을 보게 됩니다. 결국 십자가는 우리의 허망한 꿈을 깨는 역할을 하게 됩니다. 그러므로 서양 속담에 “십자가 없으면 면류관도 없다”고 했습니다. 십자가 앞에서 우리의 허망한 꿈이 깨어지고 나서야 새 생명이 우리 안에 싹트게 됩니다. 여기 죽어야 사는 진리 즉 옛 사람이 죽고 새 사람으로 다시 살아나게 되는 진리가 있습니다. 바울은 그 체험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2.  오늘 요한복음 본문은 우리가 흔히 “의심 많은 도마”라고 하는 그 도마의 이야기입니다.
그러나 그 당시 의심 많았던 사람은 단지 도마만이 아니었습니다. 사실 도마는 나사로가 죽었다는 소식에 접하여 예수께서 유대 땅으로 가자고 했을 때 다른 제제들이 겁을 집어먹고 있었지만 “우리도 주와 같이 죽으러 가자”고 했을 정도로 용기 있는 제자였습니다. 또 부활 이후에도 교회사의 전설에 의하면 최초로 인도까지 가서 복음을 전한 사람이라고 합니다. 이 전설은 더 확대되어 그때 어쩌면 도마가 우리나라에 까지 왔는지도 모른다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오늘 본문의 사건 때문에 도마는 “의심 많은 제자”라는 말을 듣고 있습니다. 그러면 이런 도마가 어떻게 그 신앙이 성숙해 갔는가를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1) 도마가 이런 말을 듣게 된 배경에는 그가 제자들과 함께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즉 예수 공동체에서의 이탈이 문제였습니다.

    비록 우리 주님의 십자가 앞에서 엄청난 충격을 받기는 했지만 평소 주님을 따르던 제자들은 아주 멀리 도망 가버린 것은 아니었습니다. 예루살렘 주변을 맴돌고 있었습니다. 성 금요일과 안식일을 지난 첫날 여인들로부터 우리 주님이 다시 살아나셨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제자들은 너 나할 것 없이 그 방으로 모였습니다. 그 다락방, 마지막 만찬을 나누셨던 그 다락방으로 모였습니다. 가룟 유다를 제외한 제자들이 다 모였는데 어쩐 일인지 도마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바로 그 자리에, 문을 안으로 걸어 잠그고 있는 그 자리에 부활하신 주님이 나타나셨습니다. 아니 그들을 찾아오셨습니다. 여기 중요한 것은 부활하신 주님이 다른 곳이 아니라 제자들이 모인 그곳에 오셨다고 하는 사실입니다. 기독교 공동체는 이렇게 주님을 믿는 사람들이 모이고 거기 주님이 임재하심으로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주님도 “2-3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 나도 함께 하리라”고 하셨습니다. 나중에 히브리서 기자가 “그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모이기를 폐하지 말라”고 한 것도 이런 중요성 때문입니다.

    한번은 청년 한 사람이 저 유명한 무디를 찾아왔습니다. 자기는 예수님은 좋지만 교회는 싫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교회 내에서 일어나는 믿는 사람들의 문제점들을 하나하나 이야기 했습니다. 무디는 묵묵히 듣고 있다가 청년을 밖으로 데리고 나갔습니다. 그리고는 청년에게 장작불을 피우도록 했습니다. 활활 잘 타올랐습니다. 잠시 후 무디는 청년에게 장작을 하나하나 떼어놓으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장작들은 이내 불이 꺼지면서 연기만 피웠습니다. 그때서야 무디는 왜 성도들이 모여야 하는가를 말해주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모이고 부활하신 주님이 찾아오셨던 그날 그 자리에 도마는 무슨 일인지 참석하지를 못했습니다. 소식을 못 들었겠습니까? 아니면 듣고도 믿지 않았겠습니까? 어떤 이유이든지간에 도마가 그 모임에 불참한 것은 도마에게 엄청난 손실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다른 제자들이 다 부활하신 주님을 만났노라고 감격과 흥분을 이기지 못할 때 도마는 의심과 불신앙의 어두움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큰 불행입니까?

    여러분, 때로 우리가 교회라고 하는 공동체 안에서 신앙생활하면서도 사실은 교회에 실망할 때가 한 두 번이 아닙니다. 어떤 특정인에게 실망할 때도 있습니다. 어떤 사건 때문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그 때문에 교회에서 멀어지게 됩니다. 어떤 이들은 다른 교회로 옮기기도 합니다. 그러나 거기에도 천사들이 모인 곳은 아닙니다. 여전히 문제를 가진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그 허물투성이 제자들이지만 그들이 모인 그곳에 찾아오셨습니다. 오늘도 마찬가지입니다. 허물많은 우리 교회 여기 주님이 계십니다.

    도마의 신앙적 탈선은 믿음의 공동체인 제자들과 함께 있지 않은데서 출발했습니다. 신앙의 탈선이 믿음의 공동체에서 이탈하는데서 시작하는 것이라면 믿음의 회복은 반대로 믿음의 공동체 안에 함께 있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오늘 요한복음 본문 26절을 보십시오. “여드레를 지라 제자들이 다시 집안에 (모여) 있을 때에 도마도 함께 있는데...예수께서 오셨다”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저와 여러분, 우리가 함께 모여 있는 여기 주님이 임재하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서 나는 과연 평소 교회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며, 교회 공동체와의 관계가 어떤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교회와 나와의 정신적 거리가 주님과 나와의 거리를 나타낸다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우리 찬송가에 “내 주를 가까이 하려 한다”고 했는데 마찬가지로 “내가 교회를 가까이 하기 원한다”고 해야 합니다. 함께 기도하고, 찬송하며, 주의 일에 충성하는 믿음의 공동체가 되어야 합니다.

  (2)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주님과 함께 해야 합니다.

    우리 주님은 세상에 처음 오실 때도 마구간에 오셨지만 부활하신 후에도 화려한 왕궁이 아니라 한 가난한 과부의 다락방으로 찾아오셨습니다. 내가 성지 순례 때 그 다락방에 가보았습니다. 물론 예수님 당시 그 집은 아니지만 좁고 초라하기가 이루 말할 데 없었습니다. 그러나 거기 주님이 오시니까 그 초라한 자리가  인류 역사상 가장 유명한 자리가 되었습니다. 사도들이 거기서 모여 열흘 동안 오로지 기도함으로 기도가 살아난 자리요, 거기 성령께서 강림하셔서 기독교가 탄생한 자리요, 복음 선교의 출발지가 된 복된 자리였습니다.

    오늘 우리 교회가 거룩하고 존귀하다는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건물을 잘 지었기 때문입니까? 사람 수가 많기 때문입니까? 아닙니다. 여기 주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 주님이 계신 교회이기 때문에 우리는 절대로 이 교회를 떠날 수도 없고, 무시하거나 부정할 수도 없습니다.

    저 호렙산에서 하나님이 모세에게 “네가 선 땅은 거룩한 땅이라”고 했는데 그 이유가 어디 있습니까? 거기 여호와께서 임재 하셨기 때문입니다.

    도마는 그 이후로 주님을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인도까지, 어쩌면 우리나라까지도 목숨을 내걸고 복음을 가지고 갈수 있었습니다. 우리 신앙이 성숙하는 것은 다른데 있지 않습니다. 주님과 함께 하는데 있습니다. 주님을 만나는데 있다는 이 사실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3) 그러나 우리 신앙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야 합니다. 그것은 도마의 경우를 보아서 알 수 있습니다.

    도마가 제자들로부터 주님 부활의 이야기를 귀가 닳도록 들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믿지를 못했습니다. 그 다음에 그가 친히 주님을 뵙게 되었습니다. 그 정도가 아닙니다. 주께서 도마에게 “네 손을 내 밀어 내 손을 보고 내 옆구리에 넣어보라”고 했습니다. 도마가 어떻게 했겠습니까? 아마도 주님 말씀의 권위에 압도되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그 손을 내밀어서 주님 손을 만져보고 그 옆구리의 상처까지 만져 보았을 것입니다. 그리고는 눈물을 흘리며 그 자리에 무릎을 꿇고 “나의 주님, 나의 하나님!”이라고 고백했을 것입니다. 이것이 체험적인 신앙입니다.

    사도 요한도 요한 1서를 보내면서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고 했습니다.

    렉시오 디비나에서도 말씀드렸듯이 신앙은 단순히 두뇌작용이 아닙니다. 어떤 성경지식이나 신학 지식의 축적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포도나무 비유에서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어야 열매를 맺는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과의 만남이요, 생명의 연결입니다. 주님 말씀대로 “내가 주님 안에 주님이 내 안에 거하게 되는” 막역한 관계입니다.

    오늘 내 신앙의 현주소가 어디인지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이스라엘 성전에는 이방인의 뜰이 있고, 여인들의 뜰, 남자들의 뜰, 성소, 지성소로 구분되어있습니다. 주께로 더 가까이, 마침내 지성소에까지 나아가 주님 안에 거하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나는 지금 어디 있다고 생각되어집니까? 자신을 살피면서 “믿는 자가 되라”고 하시는 주님 음성을 새롭게 듣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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