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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참된 행복의 비결 (눅 6:2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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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복의 조건에는 네 가지가 있습니다.
① 일거리가 있어야 합니다.
무엇인가 할 일이 있어야 합니다. 일할 때에는 바쁘다, 힘들다, 피곤하다 하지만 세상에서 할 일이 없는 사람은 괴로운 사람입니다.

② 소망이 있어야 합니다.
내일은 오늘보다 더 나을 것이라는 소망이 있어야 합니다. 기대가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없으면 절망합니다. 절망은 죽음에 이르는 병입니다.

③ 사랑하는 대상이 있어야 합니다.
사랑받는 것이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사랑의 대상입니다.
내 마음과 정성을 다 바쳐 사랑할 수 있는 대상이 있어야 합니다.

④ 믿을 것이 있어야 합니다.
믿음의 대상이 없는 사람은 불행한 사람입니다. 아무 것도 믿어볼 것이 없다는 사람은 벌써 죽은 사람입니다. 참으로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나는 내게 말씀하신 그대로 되리라고 하나님을 믿노라는 바울의 믿음과 같은 고백을 가진 사람이 행복한 사람입니다.

◈ 예수님께서 산으로 가셔서 밤이 새도록 기도하시고 날이 밝자 제자들을 부르셨습니다.
그 중에서 12명을 택하여 사도라고 명명하셨습니다.
이 사도라는 말은 누가복음에 6번, 사도행전에 30번 누가가 기록한 글에서만 발견됩니다.
이것은 사도행전에서 계속되는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는 사도의 선포와 권위와 연결하기 위한 누가의 배려입니다.
예수님께서 12명의 사도들과 함께 산에서 내려오사 평지에 서셨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말씀도 듣기위해, 병 고침을 받으려고, 많은 목적으로 예수님께 나왔습니다.

◈ 산상수훈? 평지수훈?
마태복음에는 산상수훈, 산상설교로 기록 -- 누가복음에는 평지수훈으로 기록.
그러나 여기서 평지라는 것은 저지대의 평지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산중턱의 평지입니다.
그래서 산상수훈이나 평지수훈이나 같은 장소에서 같은 내용을 전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록방법이나 관점은 차이가 있습니다.

① 마태는 5장에서 7장까지 3장에 걸쳐서 기록하였는데 누가는 분량도 짧고 전체 중에서
핵심 내용을 조금씩만 기록하고 있습니다.

② 마태는 율법과의 관계를 새롭게 조명합니다. 마태가 자주 사용하는 말은
너희가 ~~하라는 것을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라는 표현입니다.
그러나 누가는 윤리적인 측면을 강조합니다.
특히 누가는 그 당시 종교적으로 사회적으로 천대받던 사람들에게 관심이 많았습니다.
이것은 소외되고 낮은 자를 위해 인자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③ 그러나 마태와 누가의 기본 틀은 같습니다.

둘 다 복이 있는 사람으로 시작해서 결론은 건축자의 비유로 끝을 맺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4가지 복이 있는 사람들과 4가지 화가 있는 사람들에 대한 말씀입니다.
누가의 관점에서 본문 말씀을 중심으로 정말로 행복한 사람이 되는 비결을 살펴보겠습니다.

◈ 모든 사람이 복받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이 복의 정체가 애매합니다. 복이란 눈에 보이는 것도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갑자기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복을 받으려고 복조리를 걸어놓고, 곳곳에 부적을 붙이기도 합니다.
베개나 이불, 그리고 숟가락에도 밥그릇에도 복복자를 새겨둡니다. 그러나 그런다고 복을 받는 것은 아닙니다.
성도는 복의 근원되시는 하나님이 주시는 복을 사모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의
원칙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주시는 복은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주어진다는 사실입니다.

◈ 하나님이 우리에게 복을 주실 때 말씀을 주십니다.
하나님이 아브람에게 복을 주실 때 먼저 말씀을 주십니다.
창 12:1-2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 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
창 15:4에는 자식을 주마 창15:7에는 이 땅을 네게 주마 하십니다.
먼저 말씀이 있고 그 말씀을 받아들이고 믿고 기다리며 순종하면 그것이 복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독교에서 말하는 진짜 복입니다.

성경에서 말하는 복은 하나님과 말씀에 대한 우리의 태도입니다.
신 11:26-28 “내가 오늘날 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두나니 너희가 만일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명하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들으면 복이 될 것이요
너희가 만일 내가 오늘날 너희에게 명하는 도에서 돌이켜 떠나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명령을 듣지 아니하고 본래 알지 못하던 다른 신들을 쫓으면 저주를 받으리라”
복 자체가 하나님의 말씀이고 그 주신 말씀을 지키고 순종하므로 축복을 받게 되고 거부하고 무시하고 떠나면 저주를 받게 됩니다.

우선 예수님은 4종류의 사람이 복이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① 가난한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20 - “예수께서 눈을 들어 제자들을 보시고 가라사대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나라가 너희 것임이요”
여기서 '가난한‘이라는 말은 (헬,프토코스) 구걸할 수밖에 없는 절대 가난을 의미합니다.
거지 중에 상거지를 의미합니다.
당장 먹을 것이 없는 거지가 사람들을 만나면 굽실굽실하고 한푼이나 얻으려고 웅크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고 이 단어는 동시에 '경건한 사람들'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즉 '경건한 사람들'은 흔히 하나님께서 돌보아 주시는 '고통받는 자' 또는 '가난한 자'로 설명됩니다. 마태는 심령이 가난한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의미는 별로 달라지지 않습...
가난한 사람이라는 것은 그냥 물질적인 가난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가난한 사람은 구걸하지 않고서는 단 한 순간도 살 수 없는 사람입니다.
언제나 하나님을 바라보고 하나님께 기도하며 하나님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믿는 사람입니다.

◈ 엘리사의 이야기 가운데 흥미있는 일이 있습니다.
가난한 신학생이 있었습니다. 그 집이 가난하여 남의 빚을 얻어 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그만 죽고 말았습니다. 남은 부인과 자녀들의 힘으로는 그 빚을 도저히 갚을 길이 없어 마침내는 부인과 두 아이들이 종으로 팔려가게 되었습니다. 이 소식을 엘리사가 들었습니다. 엘리사는 그 집을 방문하여 동네에 가서 그릇을 빌릴 수 있는대로 빌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남아 있는 기름을 부으라고 했습니다.
기름을 그릇에 붓고 또 부었습니다. 그릇을 더 가져오라고 말했지만 더 이상 빈 그릇이 없었습니다.
“다른 빈 그릇이 없나이다 하니 기름이 곧 그쳤더라”고 했습니다.
빈 그릇이 없어질 때 기름이 그쳤습니다.
교만은 하나님 앞에 큰 범죄입니다. 사울 왕은 교만으로 버림을 받았습니다. 영적으로 부자가 되어서 빈 그릇이 없어질 때 교만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잊어버렸습니다. 그 순간 범죄 했습니다.
성도 여러분 빈 그릇이 없습니다. 그 순간이 하나님의 은혜가 멈추는 순간임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가난한 사람이 복이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항상 빈 그릇인 가난한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친히 주인이 되셔서 은혜와 능력으로 다스려 주실 것입니다.

② 주린 사람은 복이 있습니다.
21절 상반절 “이제 주린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배부름을 얻을 것임이요”
마태복음에서는 “의에 주리고 목 마른 자”라고 했습니다.(마6:5)
주린 사람은 영적으로 주린 자, 심령이 주린 자를 의미합니다.
현대는 육신의 배고픔에는 큰 관심이 있습니다. 그러나 영적인 주림에 대해서는 느낌이 없습니다. 안타까움도 없습니다.
영혼이 굶주린 사람은 하나님을 찾습니다. 그런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으로부터 채움을 얻을 수 있습니다. 이런 사람이 복이 있는 사람입니다.
시편 기자는 영혼의 주림과 목마름에 대하여 시편에 이렇게 노래했습니다.
시 42:1,2 “목마른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 내 영혼이 하나님 곧 생존하시는 하나님을 갈망 하나니 내가 어느 때에 나아가서 하나님의 앞에 뵈올꼬”
인간은 짐승과 달라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어졌습니다. 돈을 아무리 많이 벌고, 큰 권력을 손에 쥐고, 육적으로 배가 불렀다 해도 참 만족이 없습니다.
사람에게는 하나님이 아니고서는 채워질 수 없는 절대 공간이 있습니다.
인간의 참 만족은 하나님을 만날 때입니다. 하나님을 만날 때 영혼의 배부름과 만족이 있습니다. 눅 18장에 기도하는 세리는 가슴을 치며 자비하신 하나님께 나가고 있습니다.

◈ 종교 개혁자 말틴 루터(M. Luther)는 카톨릭의 형식과 종교의식 그리고 조직 로마 교황청의 권위와 전통 속에 구원이 없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고행을 통해서 구원을 얻어 보려고 교황청 계단을 무릎으로 기어오르며 계단 계단에 입을 맞추며 피가 나도록 오르내렸습니다. 그러나 그런 고행 속에도 구원이 없었습니다.
그는 참된 구원을 간절히 갈망하다 로마서1:17절을 영접하고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을 얻을 수 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17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
하나님께서는 목마른 사슴과 같이 구원을 갈망하던 루터를 만나 주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부족함을 깨닫고 영적 만족을 위해 투쟁할 때 그를 만나주셨습니다.
히딩크 감독이 많은 말을 남겼는데 가장 인상적인 말은 16강 진출을 확정짓는 순간 남긴 말입니다. 우리는 아직 배고프다 라는 말입니다.
이 시대는 말씀이 말라버린 시대입니다.
암 8:11 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
성도 여러분 하나님의 말씀에 목말라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만이 참 평안과 만족을 주실 줄로 믿고 구하시기 바랍니다.
주린 영혼을 가진 사람! 그가 행복한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 배부르게 해주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③ 우는 사람이 복이 있습니다.
21절 “이제 우는 자는 복이 있나니 너희가 웃을 것임이요”
예수님은 우는 자가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저희는 웃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어떤 때에 웁니까? 슬플 때도 울고, 외로울 때도 웁니다. 또 너무 기뻐도 웁니다. 몇 차례 남북한 이산가족 상봉이 있었습니다. 50년만에 만난 가족들이 껴안고 울었습니다.
반가워서 울고, 서러워서 울고, 고생을 생각하며 울고, 헤어질 때는 아쉬움으로 더 울었습니다. 그러나 이런 울음은 복 있는 울음이 아닙니다.
울고 나면 잠시 더 큰 외로움과 허무함이 있습니다.
본문에서 말하는 우는 사람은 자기의 죄악을 애통하며 우는 사람입니다.
【시 51:17】 『하나님의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치 아니하시리이다』
자기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고 상하고 통회하는 심정으로 하나님께 나아갈 때 그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십니다.
성도는 구원의 은혜에 감격하며 감사하며 하나님 앞에 나아가야 합니다.
그리고 동시에 자기가 항상 하나님 앞에 죄인이라는 것을 슬퍼하며 하나님을 찾아야 합니다.

행 3:19 “너희가 회개하고 돌이켜 너희 죄 없이함을 받으라 이와 같이 하면 유쾌하게 되는 날이 주 앞으로부터 이를 것이요”
언제 기뻐서 웃을 수 있습니까? 눈물로 죄를 애통하며 자백하고 회개하여 용서함을 받을 때입니다. 죄 용서함을 받은 사람이 진짜 웃을 수 있습니다. 이것이 참 웃음입니다.
다시 슬픔이 없는 웃음입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 앞에 죄인됨을 고백하시며 애통해하며 가슴을 치며 우는 사람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 사람이 복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주시는 용서와 위로가 있기 때문입니다.

④ 핍박을 받는 사람이 복이 있습니다.
22 - 인자를 인하여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며 멀리하고 욕하고 너희 이름이 악하다 하여 버릴 때에는 복이 있도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예수님 때문에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받고 소외를 당하고 욕을 얻어먹고 많은 핍박을 당하면 복이 있다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인자를 인하여 핍박을 받는 것을 이야기 하셨습니다.
내 성질 때문에 어려움을 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실수, 내 죄 때문이 아닙니다.
예수님 때문에, 교회 때문에 핍박을 받는 것을 이야기합니다.

벧전 2:20-21 “죄가 있어 매를 맞고 참으면 무슨 칭찬이 있으리요 오직 선을 행함으로 고난을 받고 참으면 이는 하나님 앞에 아름다우리라 이를 인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나니 그리스도도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느니라”
사도 바울은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핍박을 받으리라고 했습니다.(딤후:3:12)
예수님 때문에 교회 때문에 당하는 고난과 핍박과 친해지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신앙생활을 잘하는 것입니다.
여기까지는 잘 이해가 되는 데 예수님은 한 걸음 더 나아가십니다.
23- “그날에는 기뻐하며 뛰놀라 하늘에서 너희 상이 큼이라 저희 조상들이 선지자들에게 이와 같이하였느니라”
예수님은 핍박을 받을 때 기뻐하고 뛰놀라고 하셨습니다.
그냥 꾹 참고 견디라고 하지 않으시고 기뻐하고 춤을 추라고 하십니다. 그 고난을 적극적으로 맞이하라고 하십니다. 환영하라고 하십니다.
우리는 소외당하고 욕을 얻어먹을 때 우리는 분을 품기 쉽습니다. 큰 맘 먹고 참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기뻐하며 춤을 추라고 하십니다.
외롭고, 소외될 때 슬퍼할 것이 아니고 기뻐 뛰놀 수 있어야 합니다.
영원한, 시들지 않는 면류관, 영광의 면류관이 우리를 위해 예비되어 있음을 알기 때문임.

이 시대에 정말로 행복하게 사는 비결을 알려 드리겠습니다.
그 비결은 바로 오늘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성도 여러분
① 하나님 앞에서 겸손한 심령,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이는 한 순간도 살 수 없는 가난한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살 수 있습니다.
② 돈에 주리고 명예에 목말라 하지 마시고 하나님의 말씀에 주리고 의에 주리고 목마른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는 주린 영혼을 만족케 하시는 분이십니다.
③ 잘 우시기 바랍니다. 기분따라 울지말고 T.V 연속극이나 영화를 보고 울지 말고, 울어야 할 때 잘 우시기 바랍니다. 하나님 앞에 지은 죄를 애통해 하고, 예수 믿지 않은 영혼을 위해서 울어야 합니다. 눈물로 씨를 뿌린 자는 기쁨으로 단을 거둔다고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죄를 용서해 주시고 위로해 주실 것입니다.
④ 예수님 때문에 믿음 때문에 교회 때문에 핍박과 고난이 있을 때 그냥 억지로 견디지 마시고 환영하며 기뻐하고 춤을 추시기 바랍니다. 영원히 시들지 않는 영광의 면류관이 예비되어 있습니다.

◈ 이 땅은 전쟁터입니다. 우리는 영적 전쟁을 싸우는 그리스도의 군사입니다.
영적 전쟁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느냐 못 돌리느냐 하는 싸움입니다.
이 싸움에서 믿음으로 승리하시기를 바랍니다. 주님을 의지하시므로 이기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 큰 영광을 돌리는 하나님의 산 백성이 되시기 바랍니다.
(심인보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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