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은혜의 루디아 (행 16:11~15)

  • 잡초 잡초
  • 197
  • 0

첨부 1


우리가 무슨 일을 하고자 하면 먼저 계획을 세웁니다. 물론 사람들에 따라서는 먼저 계획을 세워놓고 일을 시작하는 사람도 있고 일을 하면서 계획을 세워나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사람에 따라 성격과 기질에 따라 다르겠지만 그래도 이왕이면 완벽하고 갖추어진 상태에서 무엇이든 시작하면 훨씬 더 좋을 것은 분명합니다. 하지만 모든 것이 뜻대로만 되는 것이 아니기에 어떤 때는 전혀 계획에 없던 것을 갑작스럽게 시작하게 될 때도 있습니다. 하지만 먼저 계획을 세우라고 한다면 머리를 싸매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냥 시작하고 보자고도 합니다. 반면에 그로 인해서 많은 스트레스를 받으면서도 완벽한 계획을 먼저 세우고 준비를 하지 않으면 시작을 못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어느 것이 더 좋으냐는 그 사람의 성격에 따라 다르겠지만 먼저 시작하고 보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미리  계획하고 준비하는 사람을 볼 때 숨이 막히고 또 미리 준비하고 계획하는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계획성 없이 일을 하는 사람을 볼 때 답답해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하지만 계획을 완벽하게 세웠다고 해서 일이 잘 되는 것만도 아니고 준비성 없이 시작했다고 해서 반드시 일이 어긋나는 것만도 아니기에 세상살이가 참으로 묘한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한 가지 사실이 있다면 어느 쪽이든지 성령 하나님께서 이끄시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무엇을 하든지 먼저 성령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고 일을 시작하여야 한다는 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그런데 때로는 성령 하나님을 의지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따라 일을 시작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일이 제대로 진행되지 못할 때는 참으로 답답합니다. 아니 답답함을 넘어서 괴롭기가 짝이 없습니다.

바울과 그 일행은 아시아에서 전도하기를 그렇게도 원했지만 성령께서 막으셨습니다. 도무지 길이 열리지를 않습니다. 그래서 답답해하면서 전도의 길을 열어보기 위해서 무시아를 거쳐서 두로아로 내려갔을 때 바울은 밤에 어떤 마케도니아 사람이 바울 앞에 서서 “마케도니아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와주십시오”라고 애원하는 환상을 보았습니다. 바울이 그 환상을 본 뒤에, 우리는 하나님께서 우리를 부르셔서 마케도니아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셨다고 확신하고는 즉시 마케도니아로 떠날 준비를 했습니다. 그리고는 배를 타고 드로아를 떠나 곧장 사모드라게로 갔다가 이튿날, 네압볼리로 갔습니다. 다시 네압볼리를 떠나서 로마의 식민지요, 마케도니아 지방의 중심 도시인 빌립보로 갔습니다. 우리는 며칠 동안, 그 곳에서 머물렀습니다.
오늘은 이곳 빌립보에서 나타난 하나님의 역사를 함께 살핌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먼저 생각할 것은 하나님께서 준비하신 사람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환상을 통해 하나님께서 자기들의 길을 아시아가 아닌 유럽 쪽으로 이끄신다고 하는 확신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준비를 해 가지고 배를 타고 마케도니아에 도착해서 그 중심지인 빌립보까지 오게 됐습니다. 그러나 그곳에서 며칠 동안 머물면서 전도할만한 곳을 찾았지만 찾을 길이 없습니다. 지금까지 바울의 전도 전략이 있다면 먼저 어디를 가든지 유대인의 회당을 찾아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이미 하나님을 알고 섬기고 있는 사람들에게 구약에 예언된 메시아가 바로 예수님이라고 하는 것을 전했습니다. 물론 많은 반발도 있었지만 그로 인해서 보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구주로 믿고 따르게 됐던 것이 사실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 길을 인도하셔서 빌립보까지 오게 됐는데 문제는 그곳에는 유대인의 회당이 없다는 것입니다.

며칠 동안 머물면서 유대인의 회당이 있는가 하고 찾아보았지만 아무리 찾아보아도 빌립보에는 유대인의 회당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전도하는데 차질이 생긴 것입니다. 나름대로는 항상 하던 대로 빌립보에서도 유대인의 회당을 찾아 먼저 그곳에서부터 복음을 전하고자 하는 계획이었는데 막상 유대인의 회당이 없다고 하니 참으로 캄캄합니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 될지 모르겠습니다. 분명 성령께서 이끄신 길임에도 불구하고 처음부터 자기들이 생각과는 달리 회당조차도 없다 보니 자칫하면 원망부터 나올 법한 상황입니다. 그러나 바울은 결코 원망하거나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그보다는 마지막 한 가지 희망을 가지고 안식일에 기도처가 있을 만한 곳을 찾아 성문 밖 강가로 갑니다. 그것은 유대인들은 어느 도시나 마을에 정착하든지 그 수가 10가정이 넘게 되면 회당을 세우는 것이 그들의 관례였지만 그 수가 10 가정에 못 미칠 때는 우선 모이기 쉬운 강가에서 몇 명이든 함께 모여 기도하곤 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안식일에 기도처가 있을만한 곳을 찾아 성문 밖 강가로 찾아나셨던 것입니다. 그 결과 몇 명의 여자들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기를 시작합니다.

그 여자들 중에 두아디라라는 도시에서 온 루디아라는 여자가 있었습니다. 루디아는 자주색 옷감 장수였으며,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었습니다. 루디아가 바울의 말을 귀담아 들을 수 있도록 주님께서 그녀의 마음을 여셨습니다. 그 결과 최초의 유럽 교회인 빌립보 교회가 시작될 수 있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먼저 생각할 것은 하나님의 일을 할 때 내 생각대로가 아닌 하나님의 방법대로 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하나님의 인도하심대로 따를 때 그곳에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인도하시기 때문에 아무 어려움도 없이 모든 것이 수월하게 이루어질 것으로 기대를 합니다. 하지만 아닙니다. 그것은 어디까지나 내 생각일 뿐이지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길은 때로는 고난의 가시밭길을 걷게 하실 때도 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쉬운 길은 없다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면 하나님께서 유럽으로의 길을 여셨다면 처음부터 아주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받아들이고 큰 역사가 나타나도록 이끄시지 않을까 싶었는데 생각밖에 빌립보에는 유대인이 거의 없었습니다. 지금까지 아시아에는 흩어져 있는 유대인들이 어디든 있어서 쉽게 접근을 할 수가 있었습니다. 물론 반발도 있었지만 복음을 전하기가 훨씬 쉬웠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러다보니 그 대상이 거의 유대인 중심이었습니다. 물론 회당에 함께 모인 이방인으로서 하나님 신앙을 가진 사람들 중에 예수를 구주로 믿고 받아들이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그래도 우선은 유대인이었습니다. 분명 바울 자신도 하나님께서 자신을 이방인의 사도로 세웠다고 하는 것을 잘 알고 있었고 또 그렇게 고백도 했었는데 그래도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항상 자기도 모르게 먼저 유대인들을 만나고 그들에게 복음을 전하곤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빌립보로 오면서부터 그런 바울의 전략을 바꾸지 않으면 안 되는 입장이 되고 만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바울 자신의 생각이 아닌 이제부터는 철저하게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서 복음을 전하여야만 하게 된 것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회당조차도 없는 빌립보로 바울을 먼저 이끄셨는가 하면 모든 역사를 철저히 하나님의 뜻을 따라 이루어나가라고 하는 깨우침이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들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나름대로 우리는 계획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 바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렇게 되었으면 좋겠다 또는 이런 대우를 받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지만 내 생각과는 다른 결과와 모습들을 보게 될 때 우리는 실망합니다. 나름대로는 최선의 방법을 찾아서 이왕이면 힘들지 않게 모든 것을 처리하고 싶은 마음도 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원리는 땀을 흘리지 않고서는 거둘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수고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수고하는 것조차도 하나님의 이끄심과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서 해야 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서 내 생각과 내 방식은 철저히 내려놓아야 합니다. 사람들끼리도 서로 생각과 방식이 달라서 당황스러울 때가 없지 않은데 하물며 하나님 앞에서 내 생각 내 방식을 내세운다고 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여전히 내 생각, 내 방식을 고집합니다. 내 생각에 좋고 내게 유리하다고 느껴지는 것만 추구하려고 합니다. 하지만 그래서 반드시 결과가 좋은 것은 아닙니다. 욥기 8장 11절 이하에 이런 말씀이 나옵니다. “늪이 아닌 곳에서 왕골이 어떻게 자라겠으며 물이 없는 곳에서 갈대가 어떻게 크겠느냐? 물이 말라 버리면, 왕골은 벨 때가 아직 멀었는데도 모두 말라 죽고 만다. 하나님을 잊는 모든 사람의 앞길이 이와 같을 것이며, 믿음을 저버린 사람의 소망도 이와 같이 사라져 버릴 것이다. 그런 사람이 믿는 것은 끊어질 줄에 지나지 않으며, 의지하는 것은 거미줄에 지나지 않는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하루도 온전히 살아갈 수가 없음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데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결코 하나님의 일은 돈만 가지고 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열심만으로 할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누가 높으냐 낮으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누가 앞서고 뒤서고의 문제도 아닙니다. 단지 하나님의 은혜 아래 하나님의 공급하시는 힘으로 우리 모두가 한 마음으로 함께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누가 하나님의 은혜 아래 머물 수가 있습니까? 하나님의 방법대로 하나님이 이끄시는 대로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보십시오. 바울은 조금도 실망하지 않고 안식일에 성문 밖 강가로 나갔습니다. 그곳에 모여 있던 몇 몇 여인들을 만나게 되고 그들에게 예수를 전했는데 그 자리에 있던 이미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인 루디아라고 하는 자주색 옷감 장수가 그 말씀을 받아들였습니다. 그리고 그 여인을 통해서 드디어 유럽에 복음이 시작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은 이렇게 바울의 생각과는 달리 전혀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 그러나 이미 하나님을 알고 믿고 있는 루디아라고 하는 여인을 준비하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여인과 또 한 사람 하나님이 준비한 인물이 다음에 보게 될 빌립보 감옥의 간수장입니다. 이들은 전혀 유대인이 아닙니다.

결국 하나님의 뜻은 더 이상 유대인들을 통해서가 아닌 철저히 이방인들 중심으로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것을 여기서 깨우쳐 주시고 계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복음을 전하는데 있어서도 그 대상을 누구로 삼아야 할지 하나님께 여쭈어야 하는 것이고 그들을 만나고 복음을 전하는데 있어서도 하나님의 도우심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언제든지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구하며 그 보여주시는 길을 기쁨으로 따라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귀한 역사를 위한 도구로서의 역할을 감당하게 되기를 간절히 축원합니다.

다음으로 생각할 것은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의 역사를 우리의 삶에 적용시킬 수가 있겠는가 하는 것입니다.
루디아는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듣고 자기혼자 믿는 것으로 그치지 않았습니다. 자기만이 아니라 그 집안 식구들이 다 세례를 받았습니다. 이는 그 온 집안 사람들이 다 예수를 구주로 영접했음을 뜻합니다. 이는 평소에 루디아가 자기 가족들을 위해서 많은 기도를 해 왔음을 보여줍니다. 그리고 평소에 그 집안 사람들에게 하나님에 대해서 바로 증거하는 삶을 살았기에 그가 깨달은 예수를 가족들이 받아들이고 깨우쳐 구주로 영접할 수가 있었던 것이요 그 믿음으로 집안 식구들이 다 세례를 받았던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언제든지 우리의 가족들로 하여금 믿음 안에 함께 있도록 깨우치고 가르칠 필요가 있습니다. 그저 대강 이 정도면 믿는 거야 하고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반복적으로 예수는 나의 구주이심을 고백할 수 있게끔 말씀을 가르치고 깨우쳐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직 믿음 안에 있지 못하는 가족들이 있을 때는 그들을 위해서 루디아가 하는 것처럼 믿음의 사람들과 함께 모여 기도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그러니까 기도는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합니다.

그런데도 우리는 기도의 자리에 함께 하기보다는 다른 곳에 머물기를 더 좋아하지는 않습니까? 기도하는 시간을 오히려 부담으로 여기고 있지는 않습니까? 기도하는 시간이 부담으로 남는 것은 아직도 하나님의 도우시는 은혜를 온전히 의지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주님이 나를 돕는 분이심을 우리가 믿을진대 그렇다면 더 이상 기도는 부담이 아닌 기쁨의 시간이 되어야 합니다. 기도하면 되는데 기도하지 못하기에 더더욱 주님의 도우심 없이 나 혼자 헤매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그래서 나 혼자 힘쓰고 애쓴 결과가 무엇입니까? 설사 그 결과가 만족하다고 해도 주님이 도우신다면 거 좋을 것이 아니겠습니까? 아니 지금의 삶이 불만스럽다면 주님의 도우심을 더욱 간절히 사모하여야 할 것이 아니겠는지요?

특히 루디아가 아름다운 여인임을 볼 수 있는 또 한 가지는 루디아는 진정으로 섬길 줄 아는 여인이었다는 것입니다. 루디아는 원래 자주옷감 장사라고 했습니다. 장사하는 사람이기에 사람들을 섬길 줄 압니다. 소위 서비스를 할 줄 압니다. 사람을 어떻게 자기 사람으로 만들 줄 압니다. 그 하나가 바로 섬기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루디아는 예수님에 대해서 깨닫게 되었을 때 집안 식구들 모두로 하여금 다 세례를 받도록 하였습니다. 하지만 거기서 끝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 감사한 마음을 가지고 루디아는 바울과 그 일행을 자기 집으로 초대를 합니다. 그것도 “제가 참으로 주님을 믿는 사람이라고 생각하신다면, 저희 집에 오셔서 머물러 주십시오”라고 간청하면서 바울과 그 일행을 자기 집으로 데리고 갔다고 합니다. 그 결과 루디아의 집이 최초의 빌립보 교회이자 유럽교회가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구역 모임을 각 가정으로 돌아가면서 모이는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각 가정으로 하여금 작은 교회가 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함께 모여 마음을 열고 하나님께서 우리들에게 베풀어주신 은혜를 나누고 또 함께 중보하며 기도하고 말씀을 나누면서 교제하는 그 시간을 통해서 하나님의 놀라우신 은혜와 복이 그 모이는 집 그 교회 위에 있도록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또한 그 가정과 온 가족에게 크신 하나님의 복이 임하도록 하는 비결이기도 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구역 모임을 각자의 집으로 초청해서 함께 모임을 가지게 될 때 바로 주님을 그 가정에 모시는 것이요 주님이 그 가정에 함께 계시게 되니까 주님께서 우리들의 가정에 필요한 모든 것으로 채워가시며 필요를 따라 도우시는 역사가 그 가정에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더군다나 섬기며 대접을 하는 자에게는 더 크게 대접을 받도록 하나님께서 만들어 주시겠다고 약속을 하셨습니다.

누가복음에서는 이 땅에서 백배로 받게 된다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더욱 기쁨으로 섬겨야 하는 것이요 억지로라도 본문의 말씀처럼 강청하여서라도 자기의 집으로 모셔 들여야 합니다. 그것은 결코 낭비가 아닙니다. 오히려 더 많은 것으로 얻게 되는 투자입니다. 그렇기에 구역 모임을 각자의 집에서 모이는 것을 부담이 아닌 기쁨으로 여겨야 합니다. 대접하는 것이 부담스럽다고요? 아니요 부담으로 여기지 마시고 그렇다고 서로 경쟁적으로 부담을 가지면서까지 잘하려고 하지 말고 그저 정성껏 준비하셔서 대접하면 됩니다. 이것을 깨달은 바울 사도는 갈라디아서 6장에서 “너희가 심는 그대로 거두게 되리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섬김의 마음은 사랑이 밑받침 된 겸손이어야 합니다. 나는 이렇게 섬기는 자라고 하는 것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냥 섬김을 받는 사람이 정말 감사하며 축복하도록 만들어주는 것입니다. 그럴 때 그 축복하는 마음을 받아서 하나님께서 놀랍도록 갚아주시는 것입니다.

보십시오, 한낱 장사하는 사람으로 그치고 말았을 루디아가 지금은 온 세상의 복음이 전해지는 모든 곳에서 기억하는 여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빌립보서에서 보듯 이렇게 섬김으로 시작된 교회이기에 빌립보 교회가 그토록 아름다운 섬김의 일을 계속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바로 그런 대표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이 복의 근원이 될 수가 있었던 것을 우리는 잘 압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역시 복의 근원되도록 부름을 받았습니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자는 믿음 안에서 아브라함과 함께 복을 받는다고 했습니다. 왜 주님께서 주님을 따르겠노라고 하는 한 청년에게 “먼저 가서 네 모든 재산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고 그리고 나서 나를 좇으라”고 하셨습니까? 그것이 그 사람으로 진정 더 큰 복을 받아 누리는 비결임을 예수님은 말씀하시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우리를 향해서도 너희는 먼저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면 때가 되면 높이시리라고 하십니다. 그러나 섬기지 못하면 아무리 때가 되도 높임을 받을 수가 없습니다. 먼저 나눠주는 자가 되지 못하고는 아무리 하나님이 우리를 복주시기를 원해도 주실 수가 없습니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이 세우신 법이요 약속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먼저 목 받기를 원하시거든 먼저 내 집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교회가 되도록 하십시오. 힘써 베풀고 섬기도록 하십시오. 그리고 다른 사람들 앞에서 스스로를 낮추고 겸손하십시오. 그러면 하나님께서 채우시고 높여주실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루디아처럼 온 가족을 구원으로 이끄는 기도의 사람으로 그리고 내가 먼저 섬기도록 해 달라고 강청해서라도 섬기는 삶을 사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 앞에서 큰 복을 받아 누리는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제 다시금 시작하십시다. 지금까지 잘 해 온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온 교회적으로 섬기며 베풀며 나누는 것으로 그치지 말고 우리 모두가 함께 섬기며 베푸는 성도로서 살아가도록 하십시다. 베드로 사도는 “그러나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민족이며 왕의 제사장입니다. 또 거룩한 나라이며, 하나님께서 홀로 다스리는 나라의 백성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행하신 놀라운 일들을 알게 하시려고, 여러분을 어두움 가운데서 불러내어, 그의 놀라운 빛 가운데로 인도하셨습니다. 

여러분이 전에는 하나님의 백성이 아니었지만, 지금은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이전에는 은혜를 몰랐지만, 지금은 은혜를 받고 누리고 있습니다.”라고 말하며 이어서 “여러분 주위에는 믿지 않는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은 여러분이 잘못 살고 있다고 말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므로 착하게 사십시오. 그들이 여러분의 선한 행동을 보고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 드릴 것입니다.”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착하게 산다고 하는 것은 곧 섬기며 베푸는 자로서의 삶을 말합니다. 이런 귀한 섬김의 사람으로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때 하나님께서는 하늘과 땅에 속한 모든 복으로 우리를 복 주실 것입니다. 이런 귀한 하나님의 사람들 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