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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나님의 기준 (눅 18:9-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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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가 된 이후에 다른 사람에게 자신을 소개해야 되는 일들이 많아지면서 자신을 어떻게 소개하여야 진실한 내 자신을 소개하는 것일까 라는 생각을 할 때가 많습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이 내 자신을 소개할 때는 지금 나를 소개하고 있는 것이 아니고 다른 어떤 훌륭한 분을 소개하고 있구나 라는 생각이 들면서 항상 어색한 느낌을 가지게 됩니다. 지금 나에 대한 소개를 하나님이 듣고 계시는데 라는 생각을 하면 너무도 송구스러운 마음을 금할 길이 없게 됩니다.

우리 사람에게는 몇 가지 모습이 있습니다. 우선 타인이 보는 나 자신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타인에게 자신을 소개할 때 자신의 부족한 부분이나 약한 부분들은 감추거나 축소하고 자신의 자랑이나 장점만을 부각시키는 경우가 많습니다. 부족한 것도 자신의 모습이고 좋은 점도 자신의 모습이지만 타인은 좋은 점만 기억해 주기를 기대하는 것입니다. 때문에 일반적으로 한 사람에 대한 이해들이 사람마다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그 사람의 좋은 점을 본 사람은 그 사람을 훌륭하게 말하고 그 사람에 대해서 나쁜 것을 본 사람은 그 사람을 나쁘게 말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우리의 모습에는 하나님이 보시는 나 자신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인생을 언제나 보시고 계십니다. 성경말씀에는 나의 앉고 일어섬을 아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젖먹이는 어머니가 자식을 잊을지라도 하나님은 우리를 잊지 않으신다고 했습니다. 때문에 하나님은 나를 잘 아시는 분이십니다. 신앙의 사람들은 항상 하나님이 나를 어떻게 보실 것인가에 대해서 의식하며 사는 사람입니다.

그 다음으로 자기가 보는 자신이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에 대해서 나름대로 보고 있는 모습이 있습니다. 그런데 자기가 보는 자신의 모습 가운데는 다른 사람이 보는 자신과 하나님이 보는 자신 모습 사이에 어떤 것을 자신의 모습으로 인식하고 있느냐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에 대해서 호의적입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자신을 보는 것보다 더 옳다고 생각을 합니다. 소크라테스는 너 자신을 알라고 했습니다.

오늘 말씀은 예수님께서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주신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자기가 중심이 된 인생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자기를 의롭다고 믿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마음 구조를 가지고 있다고 했습니다. 항상 모든 면에서 상대적인 의는 다른 면에서 상대적인 죄인으로 만들게 됩니다. 가장 조심해야 할 것은 상대적인 의를 자랑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의를 드러내기 위해서 남을 정죄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자기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다른 사람을 죄인으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자신의 삶을 미화하기 위해서 타인의 삶을 판단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이런 일들이 우리에게서 너무 보편적으로 일어나기 때문에 우리 자신이 이런 잘못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인식조차 하지 못하고 살 때가 많습니다.

마리아는 매우 값진 향유를 가지고 예수님께 와서 옥합을 깨뜨리고 예수님의 발에 부었습니다. 이 때 유다는 그 비싼 향유를 허비한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이 여자의 한 일을 잘 하였다고 했습니다. 저가 내 장사를 준비했다고 했습니다. 가롯유다는 자신의 생각을 남에게 정당화시키기 위해서 타인이 한 행위에 비판한 것입니다. 타인이 한 행위가 얼마나 아름답고 거룩한 일인가를 볼 수 없었던 것입니다. 누구나 자신이 중심이 된 사람은 남의 아름다움까지도 짓밟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헌신마저도 비판의 대상으로 삼을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까지도 비판하게 되는 것입니다.

감옥에 간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열 사람 중에서 7-8명은 자신은 죄 없이 들어왔다고 말한답니다. 감옥에 들어온 사람들은 자신이 죄 없다는 사실을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대개는 세상을 욕하고 다른 사람들을 욕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서 검사를 욕하고 판사를 욕하고 나중에는 자기를 낳아준 부모까지도 욕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기준이 된 사람은 그 심리적 색깔이 항상 남을 판단하는 자리에 서 있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기준이 된 사람은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리에 서 있는 사람이라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남을 욕하는 사람을 보시면 그는 자기 중심이 된 사람이 틀림이 없습니다. 남을 판단하고 있는 사람을 보면 자기 자신이 중심이 된 사람의 모습입니다.

다음으로 주님은 자기가 기준이 된 사람의 기도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에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가로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나는 이레에 두 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라고 했습니다.

사람이 자기 중심이 되면 인생이 하나님께 드리는 기도까지도 변질시키게 된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바꾸어 말하면 사람이 자기 중심이 되면 종교적 행위를 왜곡시키는 사람이 되어 집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자기 중심인 사람은 종교적 열심이 아무리 많아도 오히려 하나님을 대적하는 자리에 서게 된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통해서 종교적 열심 속에 자신의 변하지 못한 인격을 감추어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사악한 것은 변화 받지 못한 종교적 열심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의 이름으로 하나님을 대적하는 사람들입니다. 기도하면서 기도를 왜곡시키는 사람들입니다. 내가 변하지 않으면 기도까지 변질시키게 되는 것입니다.

그 다음 자기가 중심인 사람은 자신을 모르고 있는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자기 중심적인 사람은 자신에 대해서 가장 잘 안다고 생각합니다. 오늘 말씀에도 바리새인들은 자신에 대해서 잘 안다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을 전혀 알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이 자기 중심인 사람들이 받게되는 하나님의 심판인 것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도 그러했습니다. 그들은 나는 부자라 부족한 것이 없다고 했습니다. 자기 자신에게 도취된 교회였습니다. 그러나 라오디게아 교회는 자기를 보지 못하는 교회였습니다. 영적 장님이었습니다 주님은 라오디게아 교회의 가장 치명적인 불행은 자기를 보지 못하는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이것은 누구에게나 같은 것입니다. 사람은 자신의 부족 때문에 불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자랑하는 교만 때문에 망하는 것입니다.

스펄전목사는 위선적 신앙을 비유하기를 “그것은 마치 연극 배우가 왕의 복장으로 분장하여 무대 위를 늠름히 거닐다가 연극이 끝난 후에는 평복으로 갈아입고 가난한 자신의 삶으로 돌아가 부끄러움을 느끼는 것과 같은 것”이라고 설교를 했습니다. 연극 배우는 자신이 맡은 역할이 자신이 아닙니다. 왕처럼 행동을 하지마는 실제로는 왕이 아닌 것입니다.

그러나 세리들은 다릅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죄인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을 불쌍히 여겨 달라고 기도했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허물을 보았던 사람입니다. 진정한 하나님의 사람들은 자신에게 있는 허물을 먼저 볼 줄 아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자신의 허물을 고백하면 하나님은 우리를 씻어주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겸손과 교만에 대해서 이렇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했습니다. 자신에 대해서 말할 때에 죄인으로 말하는 사람, 자신에 대해 말할 때에 자격이 없다고 말하는 사람, 이런 사람이 하나님의 기준에 맞는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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