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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하박국의 시대 (합 3: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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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박국의 시대

우리는 예언자 하박국이 예레미야와 같은 시대 사람이고 예루살렘에 살았으리라고 추측합니다. 이스라엘 나라는 솔로몬 이후로 남왕국과 북왕국이 분열되었는데, 하박국 시대에는 이미 북왕국은 앗수르에게 망하고 남쪽 유다 왕국만 겨우 생존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바벨론]

주전 612년 –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 정복
주전 605년 – 갈그미스에서 이집트에게 승리
주전 597년 – 바벨론 일차 포로]

신흥 제국 바벨론은 주전 612년에 앗수르의 수도 니느웨를 멸망시켜서 앗수르 왕국은 끝이 납니다. 바벨론의 황태자 느부갓네살은 주전 605년 갈그미스에서 이집트와 싸워서 이기고 중동지역의 패권을 장악합니다. 바로 이 주전 605년과 유다 사람들이 처음으로 바벨론에 사로잡혀 갔던 때인 주전 597년(왕하24:10-16) 사이에 하박국이 활동했습니다.

바벨론 사람들이 세계 제국을 건설하면서 무자비한 폭력을 썼습니다. 이 때 예언자 하박국은 역사 가운데 하나님이 행하시는 바에 대해 아주 진지하게 여쭈어봅니다.

하박국은 어떤 예언자들처럼 아무런 준비가 안된 상태에서 가만히 있는데 갑자기 하나님 말씀을 받은 예언자가 아닙니다. 그는 시대의 고민을 가진 지성인이었습니다. 그는 당시의 국제 정세와 사회 현상을 보면서 엄청난 갈등 속에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께 질문과 기도를 드리면서 하나님께 메달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기다리는 예언자였습니다.

지금부터 2,600년전 하박국 시대에 눈에 보이는 것이 강포요 귀에 들리는 것이 죄악의 소식이었습니다. 언제 딸들이 겁탈을 당할지 몰랐으며 언제 아들들이 폭행을 당할지 몰랐습니다. 온통 정치판은 변론과 분쟁뿐이었습니다. 법은 약한 사람에게만 적용되고 정의는 땅에 떨어졌습니다. 그 시대를 하박국은 한마디로 “악인이 의인을 에워싸고 있는 시대”라고 표현했습니다(1:2-4).

이뿐만이 아닙니다. 돈은 먼저 집어삼키는 자의 것이며(2:9), 도시는 피와 폭력과 불의로 건축되었습니다(2:12). 그리고 세상은 온통 술독에 빠졌습니다(2:15). 이렇게 되니 백성들은 갈바를 알지 못해 우상숭배에 빠져들어가버렸습니다(2:18-19). 종교마저 타락을 부추겼다는 말입니다.

하박국은 아주 가까운 미래에 바벨론이 침입할 것을 예상합니다. 유다는 강대국 바벨론의 위협 앞에 놓이게 되었습니다. 무자비한 초 강대국 바벨론의 마병이 달려오는 것이 마치 독수리가 날듯이 빠른 속도로 쳐들어 오는데도 하나님은 아무 대답이 없습니다.

바벨론은 유다보다 몇배나 더 악하지 않는가? 이 악한 베벨론으로 유다를 심판하다니 하나님은 얼마나 모순된 분인가! 어떻게 공의로우신 하나님께서 작은 악을 심판하시기 위해 더 큰 악을 이용하실 수 있을까?

이렇게 되자 사람들은 하나님께 회개하기 보다는 하나님의 심판의 모순을 지적했습니다. 유다 백성들은 하나님의 무관심, 하나님의 침묵, 하나님의 모순됨을 느끼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회의주의가 판을 쳤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을 예배할 수도, 하나님께 감사할 수도 없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우리는 하늘을 향해 외칩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신다면 왜 가만히 계시는가? 왜 하나님은 무관심하게 나를 실직 상태로 버려두시는가? 왜 하나님은 방황하는 내 자녀들을 구원치 아니하시는가? 왜 하나님은 내 병든 몸을 고쳐주지 아니하실까?

왜 하나님은 이 시대의 폭력과 도덕적인 타락을 보고만 계실까? 이 시대의 사람들은 역사 이래로 최고의 소득과 높은 소비 수준을 누리면서도 왜 점점 더 물질적인 부족을 느끼는가? 그리고는 점점 더 물신을 섬기고 하나님을 버리는가?

이렇게 경제 수준이 높은 나라의 대학에서 철학과 같은 인문 과학이 홀대를 받는 나라가 또 있을까? 사람들이 온통 물질적 가치만을 추구하고 있지는 않는가? 사람들이 밥만 먹고 사는 것 같습니다. 그저 명품을 걸치면 인생이 엎그래이드 되는 줄 알고 사는 것 같습니다.

유다 온 민족이 술독에 빠졌다고 했는데 우리는 어떻습니까? 왜 이 민족은 1위를 좋아해서 알코올 소비 세계 1위, 교통 사고 사망률 세계 1위, 40대 사망률 세계 1위를 해야 하는가? 빈부의 양극화와 사회의 분열은 더욱 심해지고, 범죄는 왜 더욱 잔인해지는가?

이런 모순이 어디있나? 이런 회의가 찾아오는데도 우리는 감사할 수 있겠는가? 2600년 전의 하박국처럼 우리도 우리 시대의 고민과 질문을 던집니다.

말씀으로 돌아가는 것이 기본이다.

사실 이런 위기의 때일수록 기본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우리는 말씀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기본은 생명입니다.

여러분은 백선엽 장군의 이름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6.25 때 혁혁한 전과를 세워서 우리 국군의 심벌이라고 할 수 있을 만큼 대단한 지휘관입니다. 그 분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습니다. 자신이 과거에 탈환한 고지의 이름을 대면서 구체적으로 전투 경험을 되돌아보면서 하는 이야기입니다.

“비상사태일수록 원칙으로 돌아가야 한다. 고지를 향해서 진격을 했는데 실패를 했다. 그럴 때는 나는 항상 왜 실패했을까 그것을 따지기 위해서 원칙으로 돌아가곤 했다. 원칙으로 돌아가서 실패한 원인을 살펴보면 분명히 원칙대로 하지 아니한 부분들이 드러났다. 그래서 그것을 수정하고 다시 원칙대로 공격을 했더니 그 다음에는 성공을 했다.”

그는 계속해서 이런 말을 합니다.

“위기상황에서 변칙은 실패할 가능성이 가장 크다. 위기일수록 전술이면 전술원칙, 전략이면 전략원칙에 입각해야 한다. 경제도 통일문제도 마찬가지다. 잔재주 부리는 조조 스타일은 안된다. 위기일수록 안된다.”

이 말이 어떻게 전술에만 해당되는 것이며 전투에만 해당되는 것입니까? 오늘 우리의 신앙 생활에서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능력을 다시 한번 회복하는 길도 잔재주를 피워서는 안됩니다. 말씀의 원칙으로 돌아가야 합니다.

부흥의 기도

하박국 선지자는 민족의 위기 앞에서 하나님께 긍휼을 구하는 기도를 하면서 하나님의 일이 부흥되기를 기도했습니다.

“여호와여 주는 주의 일을 이 수년 내에 부흥하게 하옵소서”(하박국3:2).

[NKJV – revive]
[NIV - renew]

여기서 ‘부흥’이란 단어를 영어 뉴킹제임스 번역에서는 ‘revive’라는 단어를 써서 번역했고, NIV 번역 에서는 ‘renew’라는 단어를 썼습니다.

[이 수년 내에 – in our day]
‘이 수년 내에’라는 표현을 NIV 에서는 ‘in our day’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여 주는 주님의 일을 우리 시대에도 새롭게 하옵소서”(하박국3:2)

무슨 일을 부흥케 하라고 말씀하십니까? ‘주님의 일’입니다. 하나님의 일입니다. 하나님의 일은 인간 구원의 일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일의 부흥을 위해서 기도합니까? 내 사업의 부흥은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사업을 위해서는 얼마나 기도합니까?

부흥이란 무엇인가?
그러면 부흥이 무엇입니까?

부흥이란 말은 ‘생명이 있다, 살아있다, 생명을 유지하다, 영원히 살다, 되살아나다, 생명이나 건강을 회복하다, 유복하게 살다, 구원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1. 부흥은 생명의 회복입니다.

첫째로 부흥은 생명의 회복입니다.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생존입니다.

사람들 중에는 부흥이란 단어를 쓰기를 꺼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부흥이 아닌 것을 부흥으로 생각하고 부흥이란 단어를 오용했기 때문입니다.

부흥은 부유한 사람이 더 부유해지고, 건강한 사람이 더 건강해지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부흥은 더 많은 복을 받는다는 양적인 것이 아닙니다. 부흥은 죽었던 생명이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위축되었던 생명력이 활기를 찾는 것입니다. 생기를 유지하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흥을 위해서 기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주님의 일을 새롭게 한다는 것은 당신의 백성들을 다시 살리시는 것입니다. 부흥이란 죽었던 영혼들이 다시 살아나는 것을 말합니다. 부흥이란 단어가 우리 입술에 붙어있어야 합니다. 부흥은 사치스런 풍요가 아니라, 생존입니다. 재산을 뻥튀기 하기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re – 다시, 그리고 vive – 살아나는 것입니다.
부흥을 위해서 계속해서 기도하십시오! 기도하면 당신의 영이 살아날 것입니다.

2. 부흥은 회개입니다.

둘째로 부흥은 회개입니다. 회개는 우리의 생각을 바꾸어서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것입니다. 여기에 생명이 있습니다.

우리는 다시 살아나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주님께로 돌아와야 합니다. 돌아오기만 하면 다시 살 수가 있습니다. 지금 이 순간 가슴을 여시고 하나님을 부르십시오. 그리고 그분을 우리의 가슴 한 복판에 모셔 들이십시오. 내 마음 속에 주님을 모시고, 우리가 주님의 가슴 품으로 들어가서 안겨야 합니다.
하나님을 만나는 순간, 우리의 인생은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또한 그리스도의 생명을 가지고 있는 지체들이 함께 모여서 그 생명을 서로가 나눕니다.

3. 부흥은 믿음의 회복입니다.

셋째로 부흥은 믿음의 회복입니다. 믿음의 확신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하박국은 말하니다.
“의인은 그의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하박국2:4).

성경말씀대로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신 말씀을 믿고,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을 그저 믿는 것입니다. 부흥은 말씀을 믿는 믿음의 회복입니다.
믿음의 확신은 내 인생과 세상에 변화를 가져오기 때문에 무서운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믿는 것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 중에서 가장 위대한 일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일을 하는 것입니다. 믿는 것을 통해서 하나님의 나라는 확장되어갑니다.
지금 우리들 중에서 부흥이 필요하지 않은 사람은 없습니다. 낙심과 실패로 영영 헤어 나오지 못할 것 같은 불신앙의 삶에 빛이 보이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4. 부흥은 기도의 회복입니다.

네번째로 부흥은 기도의 회복입니다. 하나님과의 대화를 회복합니다. 하박국 선지자는 하나님께 질문을 던지고, 대답을 기다렸습니다. 하나님과 대화하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대화의 회복은 곧 관계의 회복이고, 관계의 회복은 생명의 회복입니다.
이스라엘의 영적인 죽음 앞에서 하박국 선지자는 하나님께 기회를 달라고 호소합니다. 바로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구하는 것이 부흥입니다.

5. 부흥은 역사의 회복입니다.

다섯째로 부흥은 역사의 회복입니다. 복음의 전달의 역사를 계속해야 합니다. 우리 세대에 복음의 능력이 약해지고 있다는 것은 비극입니다.

복음은 전하는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복음은 그 자체로 퍼져 나가는 것이 아니라, 복음의 담지자가 있어야 복음이 퍼져 나갑니다. 복음을 담고 있는 복음의 ‘담지자’는 복음의 ‘유지자’이고 복음의 ‘전달자’입니다. 복음의 역사는 복음의 담지자의 역사입니다. 교회가 복음의 담지자입니다. 그래서 복음의 역사는 교회의 역사입니다. 성도 각자가 복음의 담지자입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 교회를 사랑하지 않으면 모순입니다. 교회가 복음의 도구입니다. 교회가 사라지면 복음의 능력도 사라집니다.
번창하게 전달되어 왔던 복음이 이 시대에 능력을 잃어간다는 것은 우리가 능력을 잃었다는 것입니다. 부흥은 교회가 생명의 능력을 회복하여 시대의 고통에 동참함을 의미합니다.

이 세대의 헌신
그러면 부흥이 언제 필요한 것입니까?

“주님의 일을 우리 시대에도 새롭게 하옵소서” 하고 하박국이 기도할 때, 언제를 말하고 있습니까? ‘우리 시대에도’입니다. ‘이 세대 중에서’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각자가 지금 몇살입니까? 언제 복음이 부흥했습니까?
전 세대를 말하는 것도 아니고, 다음 세대를 말하는 것도 아닙니다. 이 세대, 즉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대에 부흥을 이루어 달라는 것입니다.
이 기도는 하나님의 능력을 바라는 기도인 동시에, ‘이 시대를 살아가는 나와 우리를 써 주시옵소서’ 하는 헌신의 기도인 것입니다.
이 기도는 ‘내가 복음의 담지자로서 능력있게 살아가게 하시옵소서. 나를 통하여 복음의 부흥을 이루어주옵소서’ 하는 기도입니다.

우리는 너무 안일하게 살아왔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70년대 80년대에 복음의 부흥을 주셨습니다. 문제는 이 세대가 지나기 전에 복음이 쇠퇴한다는 점입니다. 부흥을 경험한 다음의 몇 세대 후도 아니고 바로 다음 세대도 당대에 쇠퇴를 경험합니다. 이 얼마나 큰 비극입니까? 하나님께서 주신 부흥의 은혜를 유지하지 못하고, 부흥과 쇠퇴의 역사를 한 세대 안에서 경험한다는 것은 땅을 치고 하늘을 보고 통곡할 일입니다. 얼마나 게을렀는가? 얼마나 안이했는가? 우리의 다음 세대에 복음을 물려주기에 얼마나 게을렀습니까?

부흥을 왜 부끄러워합니까? 부흥이란 단어를 왜 금기시 합니까? 왜 부흥이란 단어를 쓰지를 않습니까? 부흥이란 단어를 왜 상투어로 생명력 없는 단어로 쓰고 있습니까? 살아나는 일인데, 생명력으로 충만하기를 바라는 건데 모든 사람에게 모든 교회에 반드시 일어나야 하는 일이 부흥입니다.

우리가 사업을 하면서 열심히 일해도 매출이 줄 때가 있습니다. ‘그래, 조금 힘들어도 참고 살자. 소비 수준을 줄이면 되지’ 할 수 있습니다.

교회의 정체는 생명이 정지 되었다는 말입니다. 교회의 쇠퇴는 단순한 숫자가 아닙니다. 매출이 아닙니다. 생명이 죽어간다는 말입니다. 이 사회 속에 생명의 복음의 영향력이 사그러들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다시 살려주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합니다.

여러분의 가족이 6명이었는데 3명이 교통사고로 죽었습니다. 그 때 ‘그래, 잘 죽었다. 그냥 3명이라도 오붓하게 살자’ 이렇게 생각하는 사람있습니까? 가족이 족었으면 통곡을 하지 않습니까? 사람이 죽었는데 슬프지 않습니까? 생명이 죽었습니다. 애도할 수 밖에 없습니다. 부모가 죽고, 형제가 죽고, 자식이 죽었는데, ‘인생은 나그네 길 왔다가 가는거지 뭐, 슬퍼할 게 뭐가 있나, 자기 인생 자기가 살다 간거지 뭐’ 아무런 감정도 슬퍼하지도 않는 그런 사람이 있습니까? 그럴 수 있습니까?

지금 일어서야 합니다.

죄악을 넘어서서

그런데 우리는 무능합니다. 우리는 부족합니다. 우리가 완벽해서 이 일을 감당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악합니다. 우리는 죄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더욱 기도합니다.

하지만 분명한 사실은 성경은 결코 사람들, 심지어 기독교 지도자들조차, 완벽하다고 주장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은 죄와 악, 잘못과 싸우는 사람들의 분투에 대해 말씀하고 있습니다.

노아는 술취했습니다. 롯은 근친상간을 범했습니다. 아브라함은 거짓말을 했으며, 그의 아들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다윗은 간음을 범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에 대해 거짓말을 했으며, 이로 인해 살인까지 범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였고 예수님께서 그 위에 그의 교회를 세우겠다고 말했던 베드로는 두려움에 떨며 거짓말했으며, 도망쳐야만 했습니다.

이들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고 하나님의 일을 감당했습니다. 이들은 다시 일어섰습니다. 우리가 잠시 위축되었다고 해서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모두는 결점을 가지고 있으며, 유혹에 약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하나님의 일을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이 실패할 것이라는 사실을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실패하고 또 실패하기에 다시 살리시는, 부흥시키시는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겪는 고통, 우리가 경험하는 유혹, 그리고 우리의 잘못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실패의 밤에 통곡하며 회개했습니다. 이때 하나님은 그를 다시 쓰셨습니다.

사람들은, 심지어 가장 위대한 사람조차도 실패합니다. 그러나 결코 우리는 낙담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은 결코 인간이 실패하지 않을 것이라고 이야기한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회복[revival]시키고 새롭게[renewal] 하고 고치시기[reform] 위해서 우리와 함께 계시기 때문입니다.

위대한 기독교 지도자들의 특징은 이것입니다.

“역사를 통해, 위대한 사람들은 자신의 삶을 완전히 바꾸어 놓을만한 잘못된 결정들을 내렸다. 비록 나쁜 선택은 있었지만, 그들은 그것으로부터 배우기로 결정했고, 이를 통해 성장했고, 그리고 그 이전보다 더 위대한 인물들이 되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80년대의 부흥을 주셨는데, 그 부흥을 잘못이해하고, 숫자가 조금 불어나는 것으로 좋아했습니다. 제국주의적인 사고 방식 속에서 힘자랑하고 교만했습니다. 잘못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제라도 회개하고 하나님께 돌아간다면 진정한 부흥을 이루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은 한국 교회를 다시 쓰실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는 넘어지나 아주 엎드러지지 아니함은 여호와께서 그의 손으로 붙드심이로다"(시 37:24)

주님께서 붙들어서 다시 살리시는 것입니다. 다시 살리는 것이 무엇이라고요? 부흥, revival 입니다. 위대한 인물들은 한결 같이 위대한 부흥(revival)을 경험했습니다.
모든 사람들은 구원자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그렇다면 모든 사람에게 부흥이 필요한 것입니다.

진정한 기쁨을 위하여
부흥은 기쁨의 원천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부흥을 맛본 사람들은 특별한 기쁨을 가지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종종 잘못된 곳에서 기쁨을 찾고 있습니다. 우리는 보다 큰 교회, 즉 교회 성장이나 보다 효과적인 사역, 그리고 종종 동료나 성도들의 칭찬에서 기쁨을 찾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노력의 결과는 공허뿐입니다. 그곳에서 우리는 결코 기쁨을 찾을 수 없습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자신의 우선순위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그러나 무엇이든지 내게 유익하던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빌립보서 3:7~8)

이것은 ‘이익과 손실에 대한 선언’입니다. 바울은 한 때 ‘유익했던’ 것들이 그리스도를 아는 것과 비교하면 다 ‘해로운’ 것이었다고 말합니다. 만약 우리의 우선 순위가 예수 그리스도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지 않거나,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것을 의지하고 있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다 해로 여길뿐더러”라는 표현을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바울은 “해롭다”고 표현했습니다. 만약 예수 그리스도가 없는 모든 것은 좋지 않다가 아니라 해롭게 여긴다는 것입니다. 명성, 돈, 권력 이런 것들은 결코 예수 그리스도를 알아가는 이 단순한 큰 기쁨을 대체할 수 없습니다. 이것이 바울은 바로 편지를 쓸 당시 감옥에 갇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기쁨이 넘쳐날 수 있었던 이유였습니다.

그런데 신앙생활의 기쁨을 잃도록 만드는 중요하지 않은 것들은 우리 주변에 너무나 많습니다. 특별히 사람들에게 여러분의 초점을 맞추지 마십시오. 그들은 우리가 원하는 대로 행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가 필요할 때 그 자리에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필요할 때 도움을 주지 못할 것입니다. 사람들은 너무나 쉽게 실망시킬 것입니다.

또한 사람들의 칭찬과 인정에 어려분의 초점을 맞추지 마시기 바랍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에 보내는 편지를 통해 우리에게 당신이 지금 가지고 있는 어떤 종류의 칭찬도 중요하지 않다고 말합니다.

바울은 빌립보서 3장 8절에서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긴다”고 말합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인생에서 무엇인가를, 혹은 누군가를 1등의 자리에 두기로 결정해야 합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얻기 위하여 모든 것들을 포기한다고 합니다.

물론 우리 모두는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무엇인가를 포기해야 한다는 사실에 대해 잘 알고 있습니다. 어쩌면 이 사실에 대해 너무나 잘 알기 때문에 우리의 우선순위를 예수님께 맞추지 못하는 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무엇인가를 포기한다는 사실에 대해 두려워합니다. 우리는 결핍에 대해서 두려워합니다. 우리의 소유가 적어지고 결국에는 없어진다고 하면 엄청난 공포를 느낍니다.

그러나 우리가 모든 것을 포기하고 예수님 자신을 내어놓는다면 예수님께서 우리를 새롭게 하실 것입니다. 하나님께 먼저 헌신하는 것이 새롭게 되는 길입니다. 부흥의 길은 헌신입니다. 다시 사는 길은 헌신입니다.

우리의 우선순위를 바로 잡고, 헌신의 기쁨을 회복해야 합니다.
복음을 위해서, 복음의 부흥을 위해서 헌신하시기 바랍니다. 교회가 부흥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교회가 복음을 힘있게 전하면 사회 속에 생명의 능력이 퍼져 나갑니다. 교회가 진정한 생명력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교회의 부흥을 위해서 헌신하시기 바랍니다. 교회는 내 속에서, 성도들 각자의 영혼 속에서 눈에 보이지 않게 이루어져 가고 있습니다. 또한 교회는 눈에 보이는 사람들의 공동체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눈에 보이는 건물 등 물질적인 형태로 존재하고 있습니다. 교회는 이 세 가지가 다 중요합니다.

내 속에 있는 교회가 중요합니다. 하지만 사람은 사회적 존재입니다. 신앙도 공동체적 신앙입니다. 눈에 보이는 공동체 없이는 내 마음 속에 있는 성전이 자라지 않습니다. 눈에 보이는 공동체인 교회는 눈에 보이는 물질적 기반이 없이는 발전되지 않습니다. 내 마음의 무형의 교회, 성도의 공동체, 물질적인 교회 모두가 중요한 것입니다.

우리 사람이 영과 혼과 육체로 되어 있어서, 내가 내 영혼을 사랑하면 사랑할수록 내 육체의 건강을 보살핍니다. 내 영혼이 건강하려면 내 육체가 건강해야 합니다. 우리는 영혼을 위해서 육체에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하는 것입니다. 분리적으로 2분법, 3분법적으로 생각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교회를 사랑하면 그냥 사랑하면 됩니다. 복잡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가장 중요한 이유는 ‘하나님의 일’이기 때문입니다.

사람에게 육체와 영혼이 모두 소중하듯 교회도 영과 물질이 모두 중요한 것입니다.
에쿠아도르 인디안들에게 순교 당한 짐 엘리엇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결코 잃어버릴 수 없는 것을 위하여 가질 수 없는 것을 포기하는 것은 결코 어리석은 일이 아니다.”

그렇습니다. ‘결코 잃어버릴 수 없는 구원’을 위하여 ‘결코 영원히 소유할 수 없는 세상의 것들’을 포기하는 것은 아주 현명한 일입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이 포기하기 어려운 것은 무엇입니까? 여러분의 인생과 사역에 있어서 잘못된 우선순위는 무엇입니까?

자기 이름을 남기기에 얼마나 고생을 합니까? 내가 남기는 업적을 남기기 위해서 내가 만든 물건을 오래 보존하기 위해 애착을 가지고 있지는 않습니까?

유명 여배우 최은희 씨가 CBS 라디오 인터뷰에서 하는 말이 자신은 많은 상과 트로피를 받았는데 현재 가지고 있는 트로피는 단 한 개도 없다고 합니다. 그 이유인 즉은 집 수리를 위해서 집을 비우고 다른 곳에 살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보관중이던 트로피를 상자에 넣어 창고에 보관했는데 다른 사람이 창고를 열고 트로피가 귀금속으로 된 줄 알고 훔쳐 갔다는 것입니다.

제임스 돕슨은 말합니다.
“얼마간 시간이 흐른 뒤에 당신 삶의 모든 트로피는 누군가에 의해서 버려지게 된다.” - 제임스 돕슨

많은 사람들은 이 땅에서의 영원한 유산을 만드는데 인생을 보냅니다. 그들은 죽은 뒤에도 기억되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기록은 깨지고, 명성은 사라지고, 공로는 잊혀질 것입니다.

남이 버리기 전에 내가 먼저 주님께 드린 것만이 영원합니다. 도리어 우리는 하나님의 일을 부흥시키는데 헌신해야 합니다. 우리는 없어질 것들을 가지고 없어지지 아니하는 영원한 것을 위해서 헌신해야 합니다.

“주여, 주의 일을 이 세대에 부흥케 하소서!” 이것이 나의 기쁨인 것입니다. 내가 나의 것을 가장 가치 있는 일에, 사람을 살리는 일에, 생명을 풍성하게 하는 일에, 나를 기쁘게 하는 일에 투자하는 것이 나의 부흥입니다.

부흥이 나혼자 잘 먹고 잘 사는 것이라면, 내가 좀 안락하고 편안하게 살기 위한 것이라면, 그저 힘이나 키우고 물질적인 풍요 속에서 만족을 얻는 것이라면 왜 간절하게 기도합니까?

오늘 하박국 선지자의 기쁨은 세상의 어떤 조건에 있지 않았습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기뻐하리로다”(합3:17-18).

그에게 있는 기쁨의 조건은 소유에 있지 않았습니다. 기쁨의 절대적 조건은 하나님이었습니다.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합3:18).

이 기쁨을 찾으시기를 바랍니다. 복음의 부흥을 위해서 헌신하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100주년을 앞둔 역사적 기로에 서 있습니다. 우리가 얼마나 헌신하느냐에 따라서 복음의 역사가 변화되는 것입니다.

우리 세대에 하나님께서 주셨던 부흥의 역사를 순간적으로 반짝이는 불꽃으로 맛보고 꺼뜨릴 것인가? 다시 살려서 다음세대에 능력있게 전할 것인가? 하는 세기적인 사명이 우리 앞에 있습니다. 아니면 나의 헌신으로 복음이 앞으로 100년 동안 여러 세대를 거쳐서 이 지역에서 온 세상으로 퍼져나가도록 할 것입니까? 이것은 우리에게 달린 일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영원히 붙잡지 못할 것을 붙잡겠다고 인생의 기로에서 실패하지 마시고, 영원한 구원을 위해서 우리 한번 도전해야 합니다.

‘내가 섬기는 교회가 이 땅에서 능력있게 복음을 전파해 나간다. 이 교회에 들어오는 사람은 누구나 평화를 누리고, 생명을 누리게 될 것이다.’

얼마나 아름다운 꿈입니까? 젊은이들이 교회를 가득 매울 수 있도록 환경을 마련해주는 일 얼마나 아름다운 일입니까? 우리가 지은 교육관에서 많은 사람들이 아침부터 저녁까지 생명의 말씀을 배우고, 인생을 새롭게 하며, 우리가 섬기는 사회봉사를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위로를 받고, 용기를 얻으며, 생의 의욕을 되찾는다면 얼마나 행복한 일입니까? 세계의 복음의 불모지에 복음이 능력있게 전파된다면 얼마나 기쁜 일입니까?

‘내가 헌신할 때 복음이 이 교회를 통해서 앞으로 100년 동안 다음 세대에게 능력있게 전파될 것이다.’
‘내가 드린 작은 헌신이 이 땅에 부흥을 이루리다.’
이 꿈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생각만 해도 기쁜 일입니다.

주님께서 다시 살려 주십니다 - Revival.
주님께서 새롭게 해 주십니다 - Renewal.
주님께서 고쳐주신다 – Refor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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