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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책임전가와 책임감당 (창 3:8-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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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제목 : 책임전가와 책임감당 
본문말씀 : 창세기 3장 8-13절

(창 3:8) 그들이 날이 서늘할 때에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아담과 그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창 3:9)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창 3:10) 가로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창 3:11) 가라사대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고하였느냐 내가 너더러 먹지 말라 명한 그 나무 실과를 네가 먹었느냐
(창 3:12) 아담이 가로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창 3:13) 여호와 하나님이 여자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찌하여 이렇게 하였느냐 여자가 가로되 뱀이 나를 꾀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남녀가 만나서 서로에게 끌리는 사랑의 감정이 충만해지면 결혼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런 감정은 오래 가기가 어렵습니다. 대부분의 부부는 결혼생활을 하다보면 사랑의 감정이 차츰 식어지는 것을 경험합니다. 그러면서 서로 판단하기 시작합니다. 사랑의 감정이 충만할 때 볼 수 없었던 상대의 단점이 눈에 들어옵니다. 전에는 나와 다른 면이 있어서 매력적이었는데 이제는 못마땅하고 눈에 거슬립니다. 상대방이 변했다기 보다는 나 자신의 감정이 변한 것입니다.

  이처럼 사랑이 식어질 때 중요한 것이 있습니다. 책임의식입니다.  결혼을 유지하고 지탱하는 강력한 힘은 책임의 힘입니다. 남자와 여자가 사랑의 감정때문에 결혼햇다면 결혼이 유지되는 것은 책임때문입니다. 서로가 책임을 지려고 하고 관계를 발전시키면 그 관계는 지속됩니다.  그러나 문제가 생겼을 때, 서로 책임을 회피하고 서로 탓하게 되면 관계는 힘들어지고 깨어지게 됩니다.

  미숙한 사람은 책임보다는 감정을 관계에서 앞세웁니다. 그래서 감정에 따라 관계가 흔들리고 불안합니다. 그러나 성숙한 사람은 사랑의 감정을 책임으로 발전시킵니다. 탓하기보다는 책임지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웃에 사는 두 집이 있었습니다. 한 집은 싸움소리가, 다른 한 집은 웃음 소리가 그칠 날이 없었습니다.
  싸움소리집 남자가 웃음 소리집 남자에게 비결을 묻습니다. "아아 그건 간단합니다. 우리집에는 모두 나쁜 사람들만 살아서 그렇습니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가령 내가 방 한가운데 놓여있던 물그릇을 모르고 엎질렀다고 합시다.
  아내는 '제가 그곳에 물그릇을 놓아두어서 그렇게 되었으니 제 탓이에요.'라고 합니다.
  나는 '내가 부주의해서 그랬으니 내 탓이요.'하면
  우리 어머니는 '아니다. 나이살 먹은 내가 보고도 치우지 못했으니 내 탓이다.'하십니다.
  모두가 자진해서 나쁜 사람이 되려고 하니 싸움을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답니다."

  그런데 현실은 점점 심각해지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 주변에 보면 많은 관계가 위험해지고 있습니다. 특히 우리 주변을 들여다보면 위태로운 가정이 너무 많습니다. 많은 부부들이 관계가 깨어져가고 있습니다. 서로 탓만 하고 아무도 책임지려고 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남을 탓하고 책임을 전가하는 것은 인류의 역사만큼 긴 역사를 가지고 있습니다.  어쩌면 수 많은 사람들이 인간관계가 어려워지고 있는 이유와도 깊은 관련이 있다고 여겨집니다. 창세기 3장에는 인류의 처음 사람 아담과 하와의 관계가 깨어지는 모습을 상세하게 그려 놓았습니다. 그 일은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고 먹지 말라는 선악과를 따 먹은 직후에 일어났습니다. 아담과 하와는 자신들이 저지른 죄에 대해 아무도 책임지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서로 탓하고 책임을 전가했습니다.

  아담은 하와에게 책임을 전가했습니다. (창 3:12) '아담이 가로되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하게 하신 여자 그가 그 나무 실과를 내게 주므로 내가 먹었나이다.'  하와가 따서 먹고 주었기에, 즉 하와때문에 하나님이 금하신 선악과를 먹었다는 것입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까지 원망합니다. '하나님이 주셔서 나와 함께 하신 여자'가 주었다며 여자를 지으신 하나님을 은근히 원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번에는 하와에게 물으십니다. 하와는 뱀이 꾀어서 먹었다고 대답을 합니다.  정말 하와가 선악과를 먹게된 이유는 뱀의 형상으로 찾아온 사단의 유혹때문일까요?  뱀은 남자보다 여자가 유혹에 더 약함을 알고 호기심을 건드립니다. 교만함을 충동입니다. 그리고 여자의 말에 잘 끌려가는 남자의 심리를 알고 여자를 이용하여 아담까지 선악과를 먹게 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사이를 분리시켰습니다.  그러나 유혹이 있었기 때문이다 라고 말하면 안됩니다. 유혹이 있어도 넘어가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왜냐하면 나의 인생의 모든 결정은 내가 하기 때문입니다. 바른 결정을 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사단의 유혹을 꿰뚫어보고 사단의 모든 계교를 실패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따라서 아무리 강력하게 유혹하고 압력을 가했다 하더라도 확신이 있다면 그리고 말씀을 묵상한다면 충분히 유혹을 떨칠 수 있습니다.

  둘 다 잘못을 인정하기 보다 서로 탓하고 원망합니다. 책임을 회피하고 오리발을 내미는 책임전가의 원조는 아담과 하와입니다.  만약 아담이 "제 책임입니다. 모든 잘못은 저로 인하였습니다."라고 하나님께 말슴드렸다면 인류 역사는 바뀌어졌을지 모릅니다. 
  사실 하나님은 책임 추궁하려고 에덴동산에 찾아오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아담과 하와는 미리 겁을 먹고 숨기 바쁩니다. 하나님께서 그들을 찾아내셔서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물으신 것은 스스로 잘못을 깨닫고 돌이키게 하려고 하신 것입니다. 그런 하나님의 마음을 모르고 책임 전가하기 바쁜 아담을 보며 하나님께서 얼마나 안타까우셨을까요?

  하나님이 아담에게 "네가 어디 있느냐?" 라고 물으신 것은 방향이 잘못된 것을 깨우쳐 주시기 위함입니다. 회개하도록 일깨우시려는 의도입니다. 하나님은 죄를 짓고 도망가는 범죄자를 추격하는 경찰관이 아닙니다. 우리를 벌주기 위해 따라오시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를 살리기 위해, 우리를 돕기 위해 찾아 오십니다. 속도를 줄이라고 하십니다. 잠시 멈추라고 하십니다. 그리고 관계를 회복시켜 주시고 방향을 바로 잡아 주십니다.

  그런데 인간은 그런 하나님의 마음을 모른채 도망가고 숨으려고만 합니다. 죄가 드러나면 책임전가하기 바쁩니다. 하나님과 아담의 관계가 멀어지고 아담과 하와의 관계가 어려워진 것은 죄를 지은 때문이며 나아가 책임을 회파하고 전가한 때문입니다.

  잘못했을 때 책임을 회피하는 게임, 서로 탓하고 남을 탓하는 게임을 우리들도 지금 하고 있습니다. "하나님, 제가 잘못했습니다. 제 책임입니다." 하면 새로운 길이 열릴텐데 꼬였던 문제가 풀리고 좋은 길이 열릴텐데, 하나님의 선하신 의도는 모르고 사람들은 책임전가하기에 급급합니다.

  무슨 일이 잇으면 부모탓하고 남편과 아내탓으로 돌립니다. 사회 구조탓이고 어려운 환경탓을 하고 심지어 하나님 탓으로 돌립니다.  우리의 불행의 일차 원인은 바로 나자신입니다. 우리가 죄를 범하고는 스스로 인정하기 보다는 오히려 하나님을 멀리 했기 때문입니다. 죄를 범한 것도 나쁘지만 그 후에 잘못 반응하는 것은 더 나쁩니다.

  스티븐 코비는 책임감이란 어떤 상황이나 여건하에서도 자신의 반응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능력이라는 사실을 기억하라고 말합니다.
  결혼해서 함께 살고 있다면 함께 책임을 감당할 줄 알아야 합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책임을 지는 것입니다. 우리는 사랑할수록 책임을 감당합니다. 자원해서 책임을 감당하는 사람일수록 인격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임마누엘 칸트는 "인격은 책임능력이다."라고 했습니다.

  사랑의 극치는 희생에 있습니다. 다른 사람을 위해 희생을 감수하는 데 있습니다.  희생한다는 것은 책임을 대신 지는 것입니다. 어떤 문제에 대한 책임이 자신에게 있지 않지만 사랑하기 때문에 상대방이 감당해야 할 책임까지 대신 감수하는 것이 희생입니다. 이것이 성숙한 사랑입니다.

  그러나 미숙한 사람들은 한결같이 남을 비난합니다. 원망합니다. 남 탓을 하느라고 자기 자신의 허물과 문제를 보지 못합니다. 그것은 고통을 직면하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진실을 대면하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문제는 풀리지 않고 더 심각해집니다. 어른이 되었으나 어린아이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도박에 중독되어 가정을 돌보지 않습니다. 그로인해 남편 또는 아내와 자녀들이 심한 고통에 시달립니다.  어떤 사람은 알콜 또는 쇼핑 춤 등에 중독되어 무책임하게 살아갑니다. 가정이 파괴되고 가족들과 주변 사람의 생활까지 파괴합니다. 무책임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러나 그런 문제를 직면하려 하지 않고 남의 탓만으로 돌리고 합리화합니다.

  그러나 간혹 그런 큰 허물이 있는 가족의 문제를 안고 희생적으로 가정을 지키는 이들도 있습니다. 무능한 배우자로 인해 자녀들이 평생 큰 고통속에 살것을 우려하여 가정을 지키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랑때문에 자기를 희생하는 것입니다. 그 고통은 말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자녀를 사랑하기 때문에 다 감수하고 온 몸을 던져 지키려고 하는 것입니다.

  링컨은 대통령 재임시에는 많은  비난을 받았다.행동보다는 사색이 많은 우유부단한 지도자라는 평가를 받았다.그러나  링컨은 사후에 국민들로부터 더 많은 존경을 받았다.그가 얼마나 훌륭한 지도자였는지를  보여주는 편지 한 장이 최근 공개됐다.
  링컨은 남북전쟁때 게티즈버그전투를 마치고 미드 장군에게 총공격 명령을 내렸다.짧은 편지 한 장과 함께….`미드  장군.이 작전이 성공한다면 그것은 모두 당신의 공이오.실패의 모든 책임은 내가  지겠소.만약 작전이 실패하면 장군은 링컨의 명령이었다고 말하시오.그리고 이 편지를 공개하시오'.
  지도자는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니다.책임은 자신이 지고 영광은 부하에게 돌리는 링컨의 용기는 지금도 미국인들  사이에 널리 회자되고 있다.존경받는 지도자는 자신이 고통의 멍에를 짊어진다.그러나 영광의 면류관은 부하에게 돌린다.

하나님도 죄를 범한 아담과 하와를 위해 가죽 옷을 지어 입히셨습니다. 양을 희생물로 잡아 가죽으로 옷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스스로 죄와 부끄러움을 감추려고 나뭇잎으로 치마를 만들어 입어보나 몇 시간가지 못합니다. 다시 수치가 드러납니다. 불안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친히 가죽옷을 만들어 입히셨습니다.

  이 사건은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에서 우리를 위해 하실 일을 예표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희생을 목적으로 오신 어린 양입니다. 우리의 죄에 대한 책임을 대신 담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죽으셨습니다. 우리의 죄에 대한 책임을 대신 담당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의의 옷을 입혀주셨습니다. 우리가 받을 저주와 정죄 그리고 심판을 십자가에서 대신 받으시고 우리에게 하나님과 화평할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첫번째 아담은 죄를 지은 다음 죄를 전가했습니다. 우리에게 죄를 전가하고 사망을 전가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아담인 예수는 죄가 없으심에도 사랑때문에 오히려 우리의 죄를 대신 담당하시고 우리에게 의의 옷을 입혀주셨습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 5:21)

  여러분, 행복해지고 싶습니까?  죄책감에서 자유를 얻고 싶습니까? 예수를 믿고 그분안에 들어오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도 자신의 책임뿐 아니라 다른 사람의 책임까지도 감당하고 행복을 확산시키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까?  예수를 믿고 그분 안에 들어오시기 바랍니다. 그분의 인격이 여러분안에 녹아 들어 책임을 잘 감수하는 성숙한 모습이 곧 여러분의 모습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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