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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산을 옮겨라 (막 11: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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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년에는 국가의 대통령 선거가 있는 해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요즘 큰 소리를 치는 사람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습니다. 저마다 대통령 될 것 같아서 여기저기서 큰소리를 치는데 결국엔 한 사람만이 될 것이며, 나머지 사람들은 정치적인 입지만 구축하거나 다음 대선을 기약할 정도가 되겠고, 다 허풍으로 끝나게 될 전망입니다. 국가와 나라와 민족을 바르게 이끌고 갈 참신한 위정자를 세우는 일을 위한 중보기도가 있기를 바랍니다.

지난 토요일 삼성 홈플러스에 갔더니 여러 사람이 줄을 서고 있는데 2층에 삼성전자에서 가게를 오픈한 모양입니다. 그래서 홍보 차원에서 '다니엘 헤니'를 데려와서 펜 싸인회를 하는데 얼마나 많은 사람이 줄을 서 있는지 겨우 그 곳을 지나왔습니다. 그런데 더 재미있는 것은 엘리베이터에 함께 타고 있던 한 부인이 자기 남편에게 '왜 진작 그 사실을 말해 주지 않았느냐고?' 마치 되돌아 돌아갈 기세였습니다. 그래서 "당신 남편이 내가 보기에는 씬 더 잘 생겼다."고 말해 주었습니다만 인기도 언젠가는 시들해져 버리기 마련입니다.

사람들은 돈 있으면 돈 있다고 큰소리 치고, 배우면 배웠다고 큰소리를 치며 살지만 분명한 것은 그런 의지하던 것들이 떨어지면 큰소리치는 것도 사라지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토마스 풀러(Thomas Fuller)는 '인간은 울면서 태어나 불평하여 살다가 실망하며 죽는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 믿는 성도들은 세상적인 자랑이나 허풍은 무의미한 것이지만 큰 소리 치면서 살아가야 할 것이 있습니다. 세상적인 것은 자랑할 것이 못되지만 그러나 십자가를 자랑하고 구원을 자랑하고, 복음을 자랑하고, 하나님을 자랑하고, 예수 믿고 받은 증거를 자랑해야 할 줄 믿습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이름을 높여드리고, 영혼 구원을 위해서, 또한 하나님의 나라 확장을 위해서는 필요한 자랑거리가 있어야 합니다. 저는 그래서 따라합시다. "산을 옮기는 믿음을 가지자."<반복> 라고 제목을 정해 보았습니다.

오늘 성경에 보면 예수님께서 길 지나가시다가 무화과나무를 바라보면서 저주를 하셨습니다. 그 다음 날 제자들이 유심히 보니, 무화과나무가 뿌리까지 완전히 말라서 죽었습니다. 제자들이 깜짝 놀라 "주님, 어제 저주하신 무화과 무가 저렇게 말라서 죽었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 "하나님을 믿어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하나님 되심의 권세가 있음을 분명히 알리시기 위해서 교훈한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심지어 요한복음 14:12절에 "내가 진실로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나의 하는 일을 저도 할 것이요 또한 이보다 큰 것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니라."고 하셨는데 오늘 본문에 보면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지워지라 하면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진다." 라고 약속하였고 마태복음 21:21절에도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지우라 하여도 될 것이요."라고 하였습니다. `산을 들어서 바다에 던진다.` 예수님 말씀은 '너희들이 그렇게 능력 있게 살아가라.'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본문에서 우리에게 말하는 산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산이라고 눈에 보이는 가시적인 산도 있지만 본문에서 말하는 산이란 장애물을 의미합니다. 우리 가는 길에 장애물인데, `이 장애물을 들어서 던지라.` 하는 말입니다. `그렇게 할 수 있다.`고 하신 것입니다.

여기 무화가 나무가 나오는데, 오늘 본문의 배경은 이렇습니다.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에 입성하신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인류의 죄를 대신 지시고 대속 물로 십자가에 죽어 주시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제자들에게 이야기하셨습니다. 내가 십자가에 죽을 것이다." 그러자, 예수님을 따르던 많은 제자들이 다 흩어져서 가버리고 가롯 유다는 배신했고, 거우 예수님의 열 한 제자만이 남았습니다.

그 열한 제자와 예루살렘 성에 들어오시는 중에, 열 한 제자를 제외한 소수의 사람들만 남은 것을 보고 예수님의 마음이 어떠했겠습니까? 그래서, 그들에게 예수님께서 오늘 이 말씀을 주시는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에게도 그러했지만, 당시 제자들에게 있어 `산과 같은 장애물`이 무엇인가 하면, 그 당시의 종교적 지도자 `바리새인`, `제사장` 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이들의 장애를 넘어 설 수가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이 무화과나무를 죽게 했는데, 우리가 생각한 대로 예수님이 시장해서, 먹을 것이 없어서, 열매가 없음으로, 이 나무를 죽였으면 그 당시 열매가 없는 무화과나무는 다 죽어야 맞습니다. 그러나 유독 이 한 나무만 말라 죽은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시범을 보이신 것이었습니다.

무화과나무, 감람나무, 혹은 포도나무는 그 당시 유대교를 상징하는 나무였습니다. 그러기 때문에, 무화과나무를 죽이신 것은 `이 큰 산과 같이 능력 있고 큰 소리 치는 유대교라 할지라도 내 말 한마디면 다 죽는다.`, 그러나, 너희에게 주어진 `장애물`, `큰 산`이 이런 율법주의자일지라도, `이들을 넘어설 수 있다는 능력이 너희에게 있다`는 것을 알려주시고 `너희도 그렇게 해라`는 뜻으로 오늘 이 말씀을 교훈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도 갖가지 장애물과 고난과 시련과 어려움과 질고가 찾아오는데 산을 옮기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 어떻게 해야 합니까?

예수님은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 속으로 던지우라고 하면 그렇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한 가지 조건은 '부정적으로는 의심 없이 그리고 긍정적으로는 믿음으로 하나님을 신뢰하는 것인데 그러한 기도는 이루어지게 될 것이다.'라고 약속하고 있습니다.

‘기도는 사람으로는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게 하는 두드림이 되기 때문에 예수는 그의 제자들에게 무엇이든지 기도로 구한 것은 이미 받은 줄로 믿으라.’고 훈계하셨습니다.

성도의 능력은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역사가 나타나게 합니다. 산을 옮기는 기도라고 하는 것은 결국 '능력 있는 기도생활'을 하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기도라고 하는 것.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역사를, 우리의 기도를 통해서 나타내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저주를 받은 무화과나무는 뿌리로부터 말라서 죽어버렸습니다.

이를 본 베드로가 예수님께 무화과나무에 대해서 묻자 예수님은 “하나님을 믿으라. 그리고 의심하지 말고 기도하며 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 믿고 기도하면 응답하시리라는 것은 누구나 논리적으로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그 말하는 것이 이루어질 줄 믿고 마음에 의심하지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23절). 비록 자기에게 손해가 온다고 해도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착실히 순종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들으실 것입니다.

??1) 하나님께서는 회개한 자의 기도를 들으십니다. 죄는 그대로 마음에 두고 아무리 큰 소리로 기도를 해봐야 하나님은 그 기도를 물리치십니다(사 1:15). 하나님은 믿음을 가지고 회개한 자의 깨끗한 기도를 들으십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죄를 회개하고 구원을 위하여 간절히 기도하는 자의 기도를 들어 주십니다.

2) 하나님께서는 말씀을 의지하여 드리는 기도를 들으십니다. 사람의 안일과 영광을 위한 것이 아닌 하나님의 영광과 기쁨을 구하는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됩니다. 오늘도 자기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기도하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따라 그의 뜻대로 기도해야 합니다. 그런 기도를 할 때 산이 뽑혀서 바다에 던져지는 기적도 일어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기도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의 역사,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는 기적의 통로인 셈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영적인 권위를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예수를 그리스도라 하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한 베드로와 우리들에게 '천국의 열쇠를 주셨는데, 이 열쇠를 가지고 하늘도 열고, 그리고 귀신의 역사도 묶을 수 있는 그러한 능력도 주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의 영적권위와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날 수 있도록 신앙생활 해야 하는데, 오늘 성경이 우리에게 그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산을 옮기는 능력 있는 기도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1. 믿음으로 기도하였으면 산을 향해서 명령해야 합니다.

마태복음 21:21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만일 너희가 믿음이 있고 의심치 아니하면 이 무화과나무에게 된 이런 일만 할뿐 아니라 이 산더러 들려 바다에 던지우라 하여도 될것이요."라고 약속하였습니다.

마태복음 8:26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어찌하여 무서워하느냐 믿음이 적은 자들아 하시고 곧 일어나사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신대 아주 잔잔하게 되거늘"이라고 믿음의 명령에 순종한 사건을 통해 교훈하셨습니다.

처음 교회에 나오는 사람들의 대부분이 하는 말이 있습니다. 그것은 '평안하다'는 것입니다. 요새도 마찬가지겠지만 제가 군대 생활을 할 때 휴가를 마치고 귀대하는 군인들보면 부대근처에 일찍 도착합니다. 그 이유는 늦게 귀대하면 기합을 받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일찍 와서 부대 근처에서 빙빙 돌다가 시간이 거의 되면 하는 수 없이 도살장에 끌려 들어가는 소처럼 마지못해 들어가는 것입니다. 휴가를 마치고 귀대하면서 '내가 기다리고 고대하던 부대로 돌아가노라...부대에 들어가면서 참 평안하구나'하면서 귀대하는 군인들 보았습니까? 한 사람도 없습니다. 직업 군인들도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 제아무리 좋은 직장일지라도 직장에 들어가면서 '아! 평안하다.'하면서 들어가는 분이 혹시 계십니까? 모르긴 해도 아마 한 사람도 없을 것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그곳에는 믿음과 신뢰와 사랑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올 때에는 너무도 즐겁고 기쁜 것입니다. 그리고 집에 들어서면서 긴장이 풀리고 평안함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가정에는 믿음이 있고, 신뢰가 있고, 더 귀한 것은 사랑이 있기 때문입니다.

지상에서 평안한 곳은 두 군데 밖에 없습니다. 하나는 가정이요, 또 다른 하나는 교회입니다. 가정에는 사랑하는 식구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교회에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 자매된 사랑하는 성도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서로 믿고, 서로 존경하며, 서로 사랑하는 성들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평안한 것입니다.

만일 증오와 갈등으로 뒤범벅된 곳이라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가정도 아니고, 교회도 아닙니다. 바로 지옥과 같은 곳입니다. 우리 교회는 영적으로 가정과 같은 곳이 되어야 할 줄 믿습니다. 서로 믿을 수 있고, 믿어주는 사람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의 모든 허물을 용서해주시고 끝까지 사랑해주시는 것처럼 우리도 서로 사랑할 때 천국과 같은 교회가 될 것입니다. 사람과 사람이 서로 믿고 신뢰하고 살면 평안합니다. 그러나 사람이 하나님을 믿으면 비교도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평안하고 행복합니다. 오늘 봉독한 본문을 보면 주님은 믿음과 그 결과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몇 가지 중요한 말씀을 찾아 볼 수 있습니다. 그것은 22절에 '하나님을 믿으라.'는 말씀과 23절에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는 말씀과 24절에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들을 정리해서 한마디로 말하면 '하나님을 믿으면 믿는 그대로 되며 또한 그대로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큰 은혜요 복입니까? 이것이 바로 하나님께서 믿는 자들에게 주신 약속입니다. 믿음으로 의심하지 아니하고 기도하였으면 `산아! 바다로 던지라.` 그렇게 명령하면 그대로 된다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역사를 믿기 때문에 그렇게 하라는 것입니다. 태산 같은 문제 앞에서 겁을 먹지 말고 `산이여! 내가 하나님께 기도하였으니 이제는 옮겨가라.`고 명령 하라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9:41절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믿음이 없고 패역한 세대여 내가 얼마나 너희와 함께 있으며 너희를 참으리 네 아들을 이리로 데리고 오라 하시니"라고 하시며 귀신을 명령함으로 쫒아 내셨습니다.

'기도는 악한 영들과의 영적인 전쟁'입니다. 다윗은 어린 소년이었지만 골리앗을 상대할 수 있었던 것은 바로 하나님의 능력을 나타냈기 때문입니다. "너는 칼과 단창으로 나아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으로 나아가느니라." 다윗이라고 하는 이 소년은 군복을 입고 칼을 들 정도도 못 되는 약한 소년이었지만 그는 골리앗 앞에서 절대로 겁을 먹거나 두려워하지 않고 담대하게 확신 있게 나아가서 "칼과 단창과 육신의 신체적 우위와 무기를 의지하는 골리앗! 너는 반드시 이길 것이다." 라고 믿음으로 나아갈 보잘 것 없는 물매 돌 한 개에도 골리앗을 넘어뜨린 것입니다. 골리앗이 큰 산인 것은 사실이지만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담대하게 나아가는 다윗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니었습니다.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백성들이 성전건축 공사를 하는 것이 얼마나 귀합니까? 그러나, 악한 영들은 절대로 이것을 내버려 두지 않습니다. 방해합니다. 그러자, 백성들이 겁을 먹고 두려워하기에 성전건축공사가 중단되어 버립니다. 이 때 학개와 스가랴 선지자가 나타납니다. 스가랴가 말하기를 "이는 힘으로 되지 아니하고 능으로 되지 아니하고 오직 나의 신으로 되느니라.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네가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라고 했습니다.

너희 앞에 있는 악한 영의 역사는 큰 산과 같은 것이지만 ‘하나님께서 함께 하실 때에 평지같이 되리라.’라고 선언한 내용처럼 그래서 큰 산이 무너진 것입니다. 534년 중단된 성전재건이 14년 만에 기적적으로 완성이 된 것입니다.

여기 <산이라고 하는 것은 주님께서 주신 사명을 행하려고 할 때에 방해하는 모든 세력>인데, 이 모든 세력들을 담대하게 대하고 그들에게 믿음으로 명령하라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하시는 말씀을 기억하시고 믿음으로 선언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고백하였습니다. 언제든지 신앙인으로 담대하고 확신 있게 큰 소리 치면서 신앙생활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어려운 문제가 생기면 겁을 먹고 이 문제는 해결할 수가 없다고 하면서 포기하기가 쉽습니다. 이런 태도는 믿음이 없는 사람의 태도입니다. 결과적으로 하나님을 무시하는 결과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무시하는 일을 해서는 복을 받을 수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무화과나무가 예수님의 말 한마디에 말라 죽지 않았습니까? 오늘 이 산도 우리가 얼마든지 옮길 수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순절 성령의 능력을 받은 제자들이 담대하게 복음을 선포하기 시작하자, 많은 사람들이 주님께로 돌아옵니다. 성전 미문의 앉은뱅이를 하루, 이틀 본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성령의 능력을 갖게 되자, "내게 은과 금은 없거니와"라고 이야기합니다. 과거엔 은과 금이 있어야 앉은뱅이를 도와주고, 기쁘게 해 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은과 금은 없지만 이제는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을 힘입어 명하노니! 일어나 걸으라."고 말할 때 앉은뱅이가 일어나 걷게 되는 줄로 믿습니다. 나는 여러분들에게 이런 역사가 일어나게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늘 여러분의 삶에 있어서 산이 무엇입니까? 여러분의 가정에 산이 무엇입니까? 여러분, 악한 영의 세력들을 두려워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담대하게 외쳐야 합니다. "큰 산아, 너는 바다로 던져지라." 우리는 이러한 문제 앞에서 겁을 먹고 두려워 떠는 자가 되서는 아니 됩니다. 하나님이 주신 영적 권위를 가지고, 천국열쇠로 하늘의 문을 열고, 악한 영의 역사를 묶어야 되는 것입니다.

오늘 예배에 참석한 성도 여러분도 마찬가지입니다. 오늘이 여러분들의 `삶의 새로운 전환점`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믿음을 가지고 영적 권위를 가지고 자신을 향해서 축복을 빌어야 될 것입니다. `나는 하나님의 백성이다. 하나님의 은혜로만 승리케 하여 주시옵소서.` 라고 할 때 이제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자녀들에게도 우리의 영적 권위를 사용해야 될 것입니다. 자녀들을 위해 중보하며 기도할 때 "마귀의 세력을 묶어 주시고, 하나님의 은혜의 하늘 문을 넓게 열어 주시기를 원합니다."라고 담대하고 기도하고 이루어 진 줄 믿고 선언해야 합니다.

우리가 우리아이들에게, 우리의 지식, 학식을 주기 원하고, 재물 주기를 원하면서 하나님의 영적권위는 주지 않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왜 그렇게 하나님이 주신 권위를 무시하느냐 말입니다.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입니다.

오늘 주님은 우리에게 능력 있게 이 일을 행하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어떤 분은 전도하기 위해서, 이 남편이 교회에 안 나간다고, 그 남편의 신발을 부둥켜안고 나와서, 기도했다고 하지 않습니까? 그리고 남편을 향해 복을 비는 것입니다. "너는 내 것이다. 너는 구원받게 될 것이다."라고 할 때, 그 남편이 전도 받아 하나님의 교회에 나오게 되지 않습니까?

우리는 이런 작은 일 하나까지라도, 악한 영의 세력 앞에서 두려워 떨고 포기하고 절망하는 어리석은 백성들이 되서는 아니 될 줄로 믿습니다. 아무리 세상 사람들이 탕자라 할지라도, 하나님은 자신의 외아들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들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영적권위를 가지고 눈물을 흘리며 기도하는 어머니 모니카의 기도가, 탕자를 성자로 변하게 해서 위대한 하나님의 백성을 만들어 가시는 것이 아닙니까? 우리는 확신이 있어야 됩니다. 담대해야 됩니다. 그리고 문제를 향해서 명령해야 될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이루어 주실 줄로 믿습니다. 영적인 권위를 가진 사람답게, 능력 있게 큰 소리 치면서 나아가라고 하는 것입니다.

유엔은 세계 각국의 대표들이 모여서 인류의 평화와 발전을 의논하고 결정하는 국제 연합기구입니다. 우리나라에서 유엔 사무총장이 나왔는데 참으로 놀라운 축복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나라의 위상이 세계 속에 높아진 결과입니다. 그런데 이 유엔에는 여러 부서들이 있는데, 그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부서는 안전보장 위원회입니다. 그리고 이 안전보장 이사회에는 투표함이 하나 있다고 합니다.

철제로 만들어진 투표함인데, 중요한 결의를 할 때 이 함에 투표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지난 1997년에 이 투표함이 낡아서 바꾸게 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참 감동적인 일이 하나 있었습니다. 철제 박스를 뜯어서 분해하다 보니, 그 투표함 안쪽에 무슨 글이 써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거기에는

"이 안전보장 이사회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결정이 창조주 하나님의 뜻에 합당하게 결정이 되어 인류 역사의 올바른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합니다."라고 새겨져 있었고, 마지막에는 `폴 안토니오`라는 사람의 서명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을 추적했더니, 그는 바로 그 철제함을 만든 대장장이였고, 진실한 크리스천이었습니다.

그 무명의 크리스천이 유엔에서 결정되어지는 모든 일들이 하나님의 뜻대로 되어 지기를 기도하는 마음으로 그런 글을 투표함 철판 안에다 써넣은 것입니다. 그가 그런 글을 써넣은 것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숭고한 마음과 기도를 하나님은 받으셨습니다. 그래서 중요한 결정이 있을 때마다 하나님의 오묘한 간섭이 나타났던 것입니다.

본문 22절에 보면 "예수께서 대답하여 저희에게 이르시되 하나님을 믿으라."라고 하셨습니다. 요14:1절에도 보면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하나님을 믿으라.'는 말씀의 원문의 뜻은 '하나님에 의해 믿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내가 믿음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로 믿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엡2:8절에 보면 "너희가 그 은혜를 인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었나니 이것이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고 했습니다.

믿음은 내가 만들고, 내가 생각해내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믿음을 사설학원 등록금으로 생각합니다. 시간나면 나가서 수강하고, 틈나지 않으면 그만둘 수 있는 것이 학원입니다. 그러나 믿음은 그런 것이 아닙니다. 사느냐 죽느냐, 성공하느냐 실패하느냐, 행복하게 되느냐 불행하게 되느냐의 문제가 걸려있기 때문에 내 기분 내키면 하고, 싫으면 그만두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그 자체가 은혜요, 복입니다. 신앙은 필요에 따라서 선택하는 물건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선물이요, 나를 향해서 베풀어주시는 은혜와 복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으라 하실 때에 생각해 볼 필요도 없고, 이해하려고 노력할 필요도 없는 것입니다. 그저 받고 믿고 순종하기만하면 되는 것입니다.

선물을 받을 때 '좀 생각해보고 받겠습니다.'라고 말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그저 감사하므로 받는 것입니다. 선물을 받을 때 이해하고 받는 것도 아닙니다. 그저 받아드리면 됩니다.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믿음을 구원의 선물로 주시는 것이기 때문에 그저 감사하므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은혜와 사랑이 풍성하신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그렇습니다. 믿어야 할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이십니다. 사실 사람도 믿을 것이 못되고 돈도 믿을 것이 못됩니다. 세상에 믿을 것은 하나도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만이 의롭고 신실하시기 때문에 신앙적인 믿음의 대상은 오직 하나님뿐이십니다. 그러므로 과학으로나 철학으로나 인간의 지식으로 이해하려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하나님은 우리의 이해의 대상이 아니라 바로 믿음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경외와 환희와 감사와 감격을 가지고 찬양해야 할 경배와 섬김의 대상이 되는 것입니다. 그 하나님을 믿는다면 오늘 하신 말씀도 믿어야 합니다. 그래서 믿음의 기도로 산을 옮기는 복 된 삶을 살아가는 성도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복 빌어 드립니다,


2. 마음에 의심하지 말아야 합니다.

본문 23절에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고 하였습니다.??'의심'이라는 것은 사실을 사실대로 믿지 않고 내 나름대로 생각하고 판단함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믿음에 가장 큰 암초는 바로 '의심'입니다. 믿음은 세우는 것이지만 의심은 파괴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관계를 아름답게 하는 것이지만 의심은 관계를 나쁘게 만드는 것입니다.

심리학적으로 볼 때에 의심은 정신질환의 한 원인이 됩니다. 사람이 의심하면 약도 약이 되지 않고, 좋은 음식도 영양분이 되지 못합니다. 남편이 아내를 의심하기 시작하면 그것이 의처증으로 발전하게 되는 것입니다. 아내가 남편을 의심하기 시작하면 그것은 의부증이 됩니다. 이것은 병중에 무서운 병입니다. 이 병에 걸리게 되면 자신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가정은 산산조각이 나는 것입니다.

부모가 자식을 의심하고 자식이 부모를 의심하면 그 가장은 깨어진 가정일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목사가 교인을 의심하면 사랑의 목양을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또한 교인이 목사를 의심하면 말씀이 은혜가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신앙이 자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의심하기 시작하면 되는 것이 없습니다. 잘 될 일도 잘 못되는 것입니다.

의심은 개인관계와 가족관계와 사회적 관계와 나아가 국제적 관계를 파괴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의심은 인간만사를 불행으로 끌어넣는 소용돌이와 같은 것입니다. 인류 최초로 의심을 품은 사람은 바로 아담의 아내 하와였습니다. 어느 날 뱀이 속삭이는 말 때문에 하나님이 하신 말씀에 의심을 가지기 시작했습니다. 하와는 하나님을 의심하다가 하나님의 말씀을 불순종하여 타락하게 되었고 결국은 남편까지 망하게 만든 것입니다.

약 1:6-7절에 보면 "오직 믿음으로 구하고 조금도 의심하지 말라 의심하는 자는 마치 바람에 밀려 요동하는 바다 물결 같으니 이런 사람은 무엇이든지 주께 얻기를 생각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8절을 보면 "두 마음을 품어 모든 일에 정함이 없는 자로다."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갈팡질팡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의심은 자신의 삶을 황폐하게 할 뿐만 아니라 가정과 사회를 황부지로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직 믿음으로만이 의심을 물리치고 승할 수 있는 것입니다. 꼭 기억하십시오. 영적인 능력을 행하는 사람은 마음에 의심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의심이라는 병은 세상에 어떤 병과도 비교할 수 없는 무서운 병입니다. 그렇게 사랑하는 부부사이에도 이 의심이 들어가면 어떻게 됩니까?

아내를 의심하는 의처증이나 남편을 의심하는 의부증은 상대방은 힘들게 합니다. 의처증이나 의부증이 있는 남편이나 아내하고 사는 것처럼 힘든 것은 없습니다.

우리 삶의 현장이 다 이렇습니다. 이런 의심은 신앙생활에 있어서 특별히 경계해야 합니다. 어떤 사람은 믿음이 있으면 의심을 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결코 그렇지가 않습니다. 의심이란 누구에게나 다가오게 되어 있습니다. 마귀는 항상 우리에게 의심의 화살을 끊임없이 쏘아 대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의심이 내 마음에 자리 잡지 못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마귀가 주는 의심을 극복하고, 갈등을 극복하고, 고난을 극복하면서, 강한 믿음으로 자라가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나의 신앙생활 속에 의심이나 갈등이 없기를 바라지 마십시오. 이 의심과 갈등을 극복함으로서 강하고 담대한 믿음으로 자라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일본에 한의학과 양 의학를 전공한 `히로야마 시게오`란 유능한 의사가 있습니다. 이 분의 이론에 의하면 ‘사람들이 고통을 겪을 때 이 고통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 에 따라서 우리 몸 안에 있는 단백질의 역할이 달라진다.’고 주장합니다.

어떤 고통이 왔을 때 `아! 이건 내게 하나의 시련이다. 이것을 잘 극복하면 소망이 있다`고 긍정적으로 받아들이는 것과 부정적으로 절망하는 것에 따라 우리 몸의 단백질의 역할이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긍적적으로 받아들이면 그 단백질은 `부신피질호르몬`으로 변하는데, 이것은 육체건강을 회복시키는 역할을 합니다. 그리고 `엔돌핀`으로 변해서 정신 스트레스를 해소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다고 합니다.

이와 반대로, 어떤 고통이 왔을 때 좌절하고 열등감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면, 그 단백질이 독성을 지닌 호르몬으로 변해서 사람의 정신과 몸을 망가뜨린다는 것입니다. 우리 몸 안에 있는 영양분도 내가 어떤 자세를 가지고 사느냐에 따라서 그 결과가 달라진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 신앙생활도 아무리 주님의 은혜가 많다고 하여도, 내게 주어지는 이 산 앞에서 `의심하는 것`과 `의심하지 아니 하는 것`의 결과는 엄청난 차이가 있는 것입니다.

`의심하지 말라.`는 헬라어 `디아크리노마이`는 "...을 통하여 판단하다. 결정하다."의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환경으로 보아, 눈으로 보아,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생각이 되더라도 마음속에서 "이것은 불가능하다. 도저히 안 되겠다."라고 판단을 하거나 결정을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은 전혀 다르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14:23절에 "의심하고 먹는 자는 정죄되었나니 이는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한 연고라.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고 하였습니다.

"의심하지 말라."는 것은 '내 생각대로 결정하고 판단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아무리 신앙적 경험이 깊어도 내 생각대로 안 되는 것입니다.

요 5:19~20에 보면 예수님이 능력 있게 일하시는 비결이 나옵니다. 교독하겠습니다.

(19) 그러므로 예수께서 저희에게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이 아버지의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 아버지께서 행하시는 그것을 아들도 그와 같이 행하느니라.
(20)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하사 자기의 행하시는 것을 다 아들에게 보이시고 또 그보다 더 큰 일을 보이사 너희로 기이히 여기게 하시리라.

예수님의 능력의 비결은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지 않고는 아무 것도 스스로 하지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기 때문에 다윗도 `여호와의 도를 행하게 하시고` 라고 고백합니다. `여호와의 도`라고 하는 것은 율법이 아닙니다. 성경원문에 보게 되면 `하나님이 원하시는 길만 가게 하시옵고`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보여 주시는 길이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의 문제는 하나님이 보여주시는 것을 보지 않고, 내 생각과 내 판단대로 결정해 버리는 데에 있습니다. 오늘 우리의 숙제는 먼저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은 먼저 하나님의 뜻을 아는데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깊은 교제를 통해서, 먼저 그 분의 뜻을 알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성공은 일보다, 성공보다, 주님을 체험하고, 그분의 뜻을 알고,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능력이고 성공인 것입니다. 우리가 ‘주님의 뜻을 행할 때만이 위대한 기적의 역사가 따르게 된다.’는 사실을 깨달으시길 바랍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의심하지 말라.` 하는 말은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더하시리라.` 하는 말과 같은 것입니다.

먼저 하나님을 생각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일을 갈 때, 능력의 사람이 될 줄로 믿습니다. 진정으로 능력의 사람이 되기를 원한다면 의심하지 마십시오. 판단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보여 주시는 그 길을 가는 여러분에게 승리의 역사가 있을 줄로 믿습니다.


3. 이룰 줄 확실히 믿으면 그대로 이루어 주십니다.

23절에 보면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 믿고 마음에 의심치 아니하면 그대로 되리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24절에 보면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고 했습니다.

이 말씀은 기도에 관한 말씀입니다. 즉 이미 받은 줄로 믿고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확신을 말합니다. 속된 말로 '받아 놓은 밥상이라'는 뜻입니다.

본문의`의심하지 말라.`는 말씀 이전에 `그 말하는 것이 이룰 줄을 믿고`라고 하셨습니다. 우리가 의심하지 않아야 하는 이유는 하나입니다. 그것은 "내가 하나님께서 명령한 것을 이루게 해 주실 줄로 믿어야 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성경에 수많은 약속을 하셨는데 한 번도 식언(거짓말)을 하시거나 불리하다고 해서 약속을 변경하신 적이 없습니다. 이미 우리는 부활절을 지냈습니다만 예수님은 자신의 도작생자를 우리를 위해 십자가를 지게 하시고 죽게 하심으로 구원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허탄한 듯이 보여 믿지 못했고, 부활의 몸을 목격하고 심지어 십자가의 상처를 만져 보았으나 고향으로 돌아가 제자의 사명을 버렸던 그들을 다시 찾아가 사명을 회복시켜 주셨습니다. 오죽하면 연약함을 아시기에 오순절 날 성령을 보내어 주신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주님이 말씀하신 약속이기에 우리는 의심해서는 안 됩니다.

창 22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 외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고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에게 외아들 이삭을 바치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이 그 외아들 이삭을 제물로 받고 싶어서가 아닙니다. 하나님의 목표는 아브라함의 신앙과 순종을 보려고 하신 것이었습니다.

여러분, 만약 부모가 자녀를 시험하려고, `힘든 일`을 시켰다고 가정해 보십시오. 부모 된 입장에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지시해 놓고 그냥 무관심하게 두겠습니까?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아이들이 부모님의 훈련을 위한 심부름을 시켰다면 어디에 가서, 무엇을 하게 되면, 그 심부름을 시키고 전적으로 아이들에게만 맡겨 놓을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당연히 수시로 확인합니다. 지금 어디에 있는지, 샀는지, 무엇을 하는지 확인하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면, 아이들은 짜증을 냅니다. "제가 알아서 다 하겠습니다." 이것은 아이들의 말이고, 부모는 심부름을 시켜 놓고 확인에 확인을 거듭하는 것입니다. 혹시 심부름시킨 것 때문에 어려움 당하지 아니할까 하면서 말입니다. 늘 그런 마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외아들 이삭을 제물로 바치라."고 해 놓고 그냥 두실 것 같습니까? 천만에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그냥 두시지 않습니다. 모리아 산에서 아브라함이 외아들 이삭을 바치려고 할 때, 하나님은 그의 손을 막으시고 수양 한 마리를 제물로 준비하셨습니다. 이를 가리켜 성경은 `여호와 이레`, 즉 `하나님이 준비하셨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여호와 이레`라고 하는 말도 원문에 보면 `준비했다.`고 하는 말과 함께 `하나님이 보고 계신다.`는 뜻이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우리에게 명령을 하시고, 그것이 되어가는 과정을 보고 계신 것입니다. 다윗은 그것을 알기에 `내가 공중에 올라가도 하나님 나를 알고 계시고, 바다 밑 음부 속에 들어가도 나를 알고 계시고, 내가 바다 저 끝에 가도 나를 알고 계시고, 나를 보고 계시는 줄로 믿습니다.`라고 시편에 고백하고 있습니다.

지금, 하나님이 여러분을 보고 계심을 믿으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이 나를 보고 계시며, 순종할 때마다 예비하신 은혜를 넘치도록 주시는데, 우리가 무엇 때문에 의심한다는 말입니까?

오늘 우리는 이 세상에 나아가서, 능력 있게 살기를 바라는 하나님의 마음을 깨달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능력 있게 여러분의 영적권위를 선포하시길 바랍니다. 여러분 앞에 가도 막혀 있는 산은 바다로 던져지게 될 것이며, 여러분 앞에 놓여있는 모든 것은 다 망하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악한 영들의 역사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의 삶 속에 있는 이런 악한 영의 세력을 마땅히 물리쳐야 될 줄로 믿습니다. 두려워하거나, 겁내거나, 의심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보고 계십니다. 나를 위해 준비하고 계십니다. 명령한 것이 그대로 이루어지게 될 줄로 믿습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서 여러분의 기도생활이 더 힘 있게 되기를 원합니다.

24절에 보면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무엇이든지 기도하고 구하는 것은 받은 줄로 믿으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그대로 되리라"고 했습니다. 믿고 기도하는 순간 이미 응답받은 것으로 믿어야 그대로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자녀들도 부모가 주실 것을 믿고 끈질기게 졸라대면 받지 못하는 법이 없습니다. 하물며 모든 것을 소유하신 하나님께 믿음으로 구해서 받지 못할 것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대로 될 줄로 믿는 사람만이 응답을 받습니다. 하나님께서 도와주신다고 했습니다. 빌4:13절에 보면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나는 못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내가 주 안에 있으면 나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기도의 능력을 활용하시기 바랍니다. 산이 옮겨지고, 나날이 하나님의 승리의 역사에 감사하면서 살기 위해 하나님의 약속을 믿는 믿음과 기도생활을 잘 활용하시기 바랍니다. 이 세상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물질이나, 지식이나, 권세가 조금 부족하고 아니 없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로 부터 부여받은 산을 옮기는 능력을 가지고 담대하게, 받은 증거 있는 삶을 사시고, 어떤 삶의 현장 속에서도 승리하며 권세 있는 삶을 살아가는 여러분이 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믿음의 기도는 산 같은 절망도 뚫고 나갈 수 있고, 대양보다 큰 좌절도 건너갈 수 있고, 하늘보다 높은 고통도 해결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믿고 의지하여 기도생활을 바로 함으로 산을 옮기는 주인공으로 이 땅에서도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며 큰 역사를 이루시는 복된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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