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 (요일 2:12-17)

  • 잡초 잡초
  • 3542
  • 0

첨부 1


<버지니아 공대 총격 비극에 관한 단상>
인천이 인도의 델리를 제치고 2014년 아시안 게임을 유치하게 되었습니다.
인천 시민으로서 참 기쁘고 고무적인 소식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 기쁜 소식은 미국 버지니아 공과대학 캠퍼스에서
일어난 대학살극으로 마땅히 받아야 할 스포트라이트를 충분히 받지 못했습니다.

미국의 명문 대학 중 하나인 Virginia Tech에서 수십 명의
학생들이 총에 맞아 숨졌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미국 사회에서
흔히 일어나는 총기 사고이겠지, 처음에는 다들 그렇게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범죄 수법이 너무나 잔인하고 침착해서
사람들은 점차 뉴스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습니다.

도대체 범인이 누굴까, 중국계 아시아 학생이라는 보도를 들었을 때 안심했습니다.
한국인이 아니라는 사실에 안도의 한숨을 쉬게 된 것이지요.
그런데 한국계 학생이 범인일지도 모른다는 뉴스가
가볍게 흘러나오다가 마침내 움직일 수 없는 사실로서 확인되었습니다.

그 때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집단적인 죄의식을 느꼈습니다.
같은 동포로서 숨진 학생들과 그 유가족들은 물론이고
미국 사회 전체에 뭔가 모를 죄의식 같은 것을 느꼈습니다.
까닭에 대통령이 세 차례씩이나 사과문을 발표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우리와 달리 미국 사람들은 범인인 조승희씨가 한국인이라는 민족적 사실보다는
총기를 자유롭게 소지할 수 있는 미국 사회의 근본적인 문제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우려했던 복수나 인종 갈등은 일어나지 않고 있습니다.

제 자신이 미국에서 이민 생활을 해봤고 또 아이들이 미국에 있기 때문에
저는 지난 한 주 내내 이 악몽으로부터 벗어날 수가 없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조승희씨가 NBC 방송국에다 보낸 사진과 동영상이 나온 뒤,
그 섬뜩할 정도로 광기 어린 모습이 떠올라 여러 날 동안 마음이 착잡했습니다.
어쩌다가 한 인간이 저렇게 무서운, 정신병자로 바뀔 수 있었을까, 생각했습니다.

조군은 초등학교 2학년 때 미국으로 이민 갔습니다.
서울의 다세대 주택의 반 지하 단칸방에서 네 식구가
살았다니 집안이 몹시 가난했던 것 같습니다.
아마 이런 가정이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면 십중팔구 자식 공부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자기들은 고생하더라도 자식들만큼은 좋은 교육을 받게 해서 미국에서
버젓이 성공시켜보자, 틀림없이 이런 꿈을 안고 미국에 갔을 것입니다.

처음 이민 간 분들은 너나 할 것 없이 밑바닥에서부터 출발해야 합니다.
영어도 짧지, 자본도 없지 하니까, 미국 사람들이 하기
싫어하는 고달픈 노동일을 떠맡아 일해야만 했을 것입니다.
하루 24시간이 모자랄 정도로 열심히 일했을 것인데, 그러다 보니
아이들이 부모와 함께 지낼 시간이 넉넉지 못했을 것입니다.

조군은 본래 타고난 성격이 내성적인 데다가, 영어도 짧지 하니까,
친구들한테도 자연스럽게 놀림과 왕따를 당했을 것입니다.
뉴스 보도를 보니까 친구들한테 집단 따돌림을 당한 경험도 실제로 있었습니다.
부모님은 일하며 바쁘다보니 아들한테 충분히 관심을 기울 수 없었고,
학교에서는 친구들과 잘 적응을 하지 못해서 고립을 당하니,
조승희씨는 점점 더 혼자만의 공상적인 세계로 빠져 들어간 것 같습니다.
본래부터 그가 정신질환자는 아닌 것 같고,
이렇게 특수한 환경이 그를 어렵게 만든 것 같습니다.

전문가들은 조승희씨가 "자아도취적 과시증"을 갖고 있다고 분석했습니다.
현실 세계에 있어서 크게 억눌리고 자존심에 상처를 입다보니까
점점 더 속으로만 피해망상증과 과대망상증을 키워 나갔다는 것이지요. 
여러 가지 정황으로 볼 때 조씨는 철저한 외톨이가 되어서 자신의 상처와 좌절,
실패, 이 모두를 세상에 돌리며 격렬한 적개심과 복수심에 불타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어쨌거나 아무 죄 없이 단지 엉뚱한 시간에 엉뚱한 장소에 있었다는 이유
하나 만으로 억울하게 목숨을 잃은 모든 사람들에게 삼가 애도를 표할 뿐입니다.
그리고 이런 일이 세계 어느 나라를 불문하고 더 이상 일어나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자식 농사는 맘대로 안 된다"는 말 도 있듯이, 똑같은 부모
밑에서 자랐는데 조씨의 누나는 전혀 딴판이라고 합니다.
악한 부모 밑에서도 선한 자식이 나올 수 있고,
선한 부모 밑에서도 악한 자식이 나올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우리 부모들은 이번 사태를 보면서
우리 자신과 자녀들의 모습을 차분히 반성해봤으면 좋겠습니다. 
한국에서도 신경정신과 전문의들에 따르면 외톨이 문제로
병원을 찾는 사람들이 2-3년 전에 비해 배정도 늘었다고 합니다. 
집단적으로 따돌림을 당하여 외톨이가 되는 사람들은 자연히 사람들과의 교제와 의사소통이
끊어지니 폭력적인 만화나 인터넷 게임, 판타지 소설 등에 빠져들어 간다는 것입니다.
조승희씨의 경우가 꼭 그런 경우가 아닙니까?

제가 이번에 조씨의 동영상을 보고 충격을 받은 것 중에
하나는 그가 기독교를 언급했다는 사실입니다.
"나는 모세처럼 바다를 가르고 내 사람들을 이끌겠다."
"예수 그리스도처럼 약하고 힘없는 사람들을 위해 죽겠다."
더욱이 어떤 사진은 교회에서 목사님이 축도를 하는 장면을 연상시켰습니다.
그가 교회를 다녔고, 성경에 대한 지식은 있었지만 신앙은 없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교회에 다닌다고 해서 다 참 신자는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 한번 입증한 셈입니다.

<하나님 사랑 對 세상 사랑>
이와 같이 충격적인 소식을 접하면서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무엇에
더 큰 가치를 두고 살아야 하는지 다시 한번 되돌아 봐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 보면 '자녀들,' '아비들,' '청년들'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아마도 이 편지의 수신자인 교회내의 여러 연령 그룹들을 염두에 둔 말인 것 같습니다.
아비들은 나이 많은 장년층을, 청년들은 아직 나이 어린 젊은층을 지칭한 것 같습니다.
그리고 '자녀들'은 아비들과 청년들을 다 포함하는 교인 일반을 의미한 듯 싶습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말씀을 듣는 우리들은 아비들이나 청년들을 다 포함한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주신 말씀으로 들을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모든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주시는
말씀 중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이 15-17절입니다.
우리 다같이 읽겠습니다.

"이 세상이나 세상에 있는 것들을 사랑치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세상으로 좇아 온 것이라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흔히 기독교 경건주의의 'Magna Carta'(대헌장)으로 불리는 아주 유명한 말씀이지요.
여기서 요한은 '하나님 사랑'과 '세상 사랑'을 날카롭게 대조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세상을 사랑하는 이들은 그 사람 속에 하나님 사랑이 없다고 단정합니다.

그렇다면 세상 사랑이 무엇입니까?
세상 사랑은 세 가지, 즉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으로 요약됩니다.
아주 쉽게 말하면 어느 시대 어느 장소에서나 모든 인간을 사로잡은 세 가지
근본적인 욕심들, 즉 '성'(sex)과 '돈'(money)과 '권력'(power)을 의미합니다.
육신의 정욕(성)과 안목의 정욕(돈)과 이생의 자랑(권력)을
사랑하는 사람들 속에는 하나님 사랑이 없다는 것이지요!

어거스틴은 『고백록』제 10권 후반부에서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 이생의 자랑에 대해서 자세히 언급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육신의 정욕을 촉각과 미각, 후각, 청각, 시각의 유혹으로 설명합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쾌감을 주는 것을 접촉하고 만지기 좋아합니다.
촉감의 유혹이지요.

그 다음에 음식을 먹고 마심으로 얻는 미각의 유혹이 있습니다.
우리는 생존하기 위해서 아무도 먹는 유혹을 떨쳐버릴 수 없습니다.
성욕은 단 번에 끊을 수 있지만 미각은 끊을 수 없습니다.
음식 먹는 길을 포기하는 것은 곧바로 죽음을 의미하기 때문이지요.

이제 중요한 것은 우리의 생명과 건강을 유지하기 위하여 꼭 필요한 적당량의
음식물만 섭취하면 되는데 문제는 그 식탐이라는 것이 우리를 괴롭힌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이것은 뷔페 식당에서 흔히 나타나는 현상이지요.
그냥 생명과 건강만 유지하자고 한다면 적당량만
먹으면 되는데 우리는 이것저것 욕심이 너무 많습니다.
그리하여 식탐이 건강을 위한다는 생각을 앞서 갈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어거스틴은 만일 어떤 사람이 식탐을 버리고 자기의 생명과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 꼭 필요한 한계선을 넘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위대한 사람이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서 자기는 죄인이기 때문에 결코 그렇게 못한다고 솔직히 고백합니다.   
어거스틴 같은 성자가 그 정도니 우리는 두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 다음에 후각의 유혹은 아마 5각 중에서 가장 미약한 유혹일 것입니다.
꽃향기나 향수의 유혹을 우리는 쉽게 물리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우리는 꽃향기나 향수 냄새를 맞지 않고서도 얼마든지 세상을 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청각의 유혹은 대단합니다.
우리는 어떤 노랫소리에 빨려 들어가면 때로 정신을 잃습니다.
서울서 부산 가는 고속 버스를 타고 여행을 하는 서너 시간 동안
차안에 유행가를 내내 틀어 놓을 경우, 그 가사와 멜로디가
우리 기억 속에 녹음이 되어서 오랫동안 우리를 따라붙습니다.
그밖에도 우리를 유혹하는 소리를 들으면 쉽게 뿌리치지 못하고
끌려갈 때도 있기에 청각의 유혹은 결코 만만치 않습니다. 

그런데 아마 가장 강렬한 유혹은 시각에서부터 온다고 봐야 할 것입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야한 장면을 보았을 때 오랫동안 우리의 기억이 혼란스럽게 됩니다.
음란 만화나 동영상은 너무도 강렬해서 우리의 마음을 쉽게 교란시킵니다.

오늘 이 세상은 우리의 시신경을 사로잡는 것들이 너무도 많습니다.
동인천같이 조용한 곳에서 살다가 남대문 시장 같은 곳에 가면 정신이 하나도 없습니다.
이런 상품 저런 상품, 이렇게 생긴 사람, 저렇게 생긴 사람, 우리의 시신경을
빼앗는 것이 수천 수만 가지이니 우리의 마음도 더불어 복잡해집니다.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눈의 즐거움을 위하여 수 없는 물건들과 영화와 예술품들을 만들어냅니다.
또한 아름다워지기 위하여 외모를 꾸미는 일에도 엄청난 시간과 물질을 투자합니다.
그러나 대개는 우리 생활에 정말 필요한 경우는 얼마 되지 않고,
더더군다나 경건 생활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 경우가 대부분이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볼거리, 시각의 쾌락으로부터 자유로운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요!

둘째로, 안목의 정욕을 호기심의 유혹으로 설명합니다.
육신의 정욕이 우리 육체의 감각을 만족시키기 위한 것이라면
우리 육체가 감각을 통하여 어떤 경험을 얻으려는 유혹이 있습니다.
어거스틴은 이것을 학문과 지식이라는 이름으로 인간을
끝없이 유혹하는 호기심으로 풀이하고 있습니다.
쾌락은 보기 좋고, 듣기 좋고, 냄새 좋고, 맛 좋고, 부드러워 만지기
좋은 것을 추구하지만, 호기심은 새로운 경험을 얻으려고 합니다.
호기심은 주로 눈을 통해서 얻어지므로 '안목의 정욕'이라고 부릅니다.

호기심과 관련해서 어거스틴은 시체를 예로 듭니다.
만신창이가 된 시체가 있다고 가정할 때 그 소름 끼치는
시체를 보고 쾌감을 느낄 사람은 정신병자 외에는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집요한 호기심 때문에 고개를 돌리며
괴로워하는 한이 있더라도 기어코 그 시체를 보려고 한다는 것이지요.

오늘날 사람들이 다른 사람의 사생활에 대해서
그토록 많은 관심을 기울이는 것도 다 호기심 때문입니다.
아무개 연예인이 결혼했더라, 이혼했더라, 무슨 일이 일어났더라 인터넷을
뒤지고 TV를 쳐다보고 하는 것이 다 그 호기심의 유혹 때문입니다.

제가 책을 낸 다음에 경험하는 일인데요.
기왕이면 제 책이 베스트 셀러가 되었으면 하는 마음이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어떤 인터넷 웹사이트에서 책의 랭킹을 매겨주는데
거의 매일마다 한 번씩 점검을 해봅니다.
어떤 날은 순위가 수십 등씩 점프해서 쭉 올라갈 때가 있는가 하면,
또 어떤 때는 쭉 떨어질 때도 있습니다.
그 랭킹이라는 것이 얼마나 믿을 만한 것인지 모르지만 일단 호기심 때문에 본다는 것이지요!

길을 지나다가 누가 다투기라도 하면 그냥 빨리 지나가야 하는데
어느새 내 신경과 마음은 호기심 때문에 그쪽으로 기울어집니다.       
아, 호기심이란 얼마나 이겨내기 어려운 안목의 정욕인지요!

셋째로, 이생의 자랑을 교만의 유혹과 칭찬의 유혹으로 설명합니다.
이생의 자랑은 마음이 부풀어올라 자꾸만 뻐기고 어깨에 힘이 들어가는 교만의 유혹입니다.
깊은 성찰 없이 우리 마음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교만으로 부풀어오를 수 있습니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칭찬 받고자 하는 유혹은 아무도 뿌리칠 수 없는 최고의 유혹입니다.
칭찬은 돌고래도 춤추게 한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우리는 무엇을 하든지 사람들이 "잘했다, 잘했다!"하고 칭찬해주기를 바랍니다.
어거스틴은 육체의 쾌락, 즉 육신의 정욕과, 호기심, 즉 안목의 정욕은 어느 정도
통제할 수 있는데, 이 칭찬 받고자 하는 유혹은 도무지 제어할 수 없다고 고백합니다!

문제는 내가 잘못을 저지르고 진리 위에 서지도 못한 채
칭찬을 받고자 한다면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정직하고 의롭게 살면서 비난을 받는 것이 거짓과 불의 속에 살면서
칭찬을 받는 것보다 훨씬 더 좋은 것이기 때문이지요!

우리는 칭찬을 받을 때 무엇보다도 하나님과 이웃을 위한 것인가를 물어야 합니다.
하나님도 기뻐하시고 이웃에게도 선익이 되고 내 양심도 즐거워하는 칭찬일 때에는
그 이웃의 칭찬이 양약이 될 수 있지만, 그 반대 경우의 칭찬은
우리의 영혼을 병들게 하고 결국 파멸의 구렁텅이로 내모는 아첨이요 독일뿐입니다.

<당신의 사랑의 무게는?>
이제 결론을 맺습니다.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은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으로부터 온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온 것은 영원히 시들지 않지만,
세상으로부터 온 것은 금방 덧없이 사라지고 맙니다. 

그래서 본문 17절은 이렇게 결론을 내립니다.
"이 세상도 그 정욕도 지나가되 오직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이는 영원히 거하느니라."

옳습니다.
육신의 정욕, 촉각과 미각과 후각과 청각과 시각의
유혹에서 생기는 쾌락은 순식간에 지나갑니다.
안목의 정욕, 호기심의 유혹도 알고 나면 별 것 아닙니다.
이생의 자랑, 명예와 권력으로 자랑하는 교만도 오래 못 갑니다.
남들에게 듣는 수없이 많은 칭찬도 일시적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행하는 사람은 영원합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내일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하나님을 모시고 살기 때문이지요.

어거스틴은 사랑은 무게라고 했습니다.
물체는 자기의 무게 때문에 제 자리를 찾아갑니다.
돌을 던지면 밑으로, 불은 위를 향하여, 물 속에 부은 기름은
물 위로 떠오르고, 기름 위에 부은 물은 기름 밑으로 가라앉습니다.
모두 다 제 무게로 인해 제 자리를 찾아가기 때문이지요.
그것들이 제 자리를 이탈하면 불안정해지고 제 자리에 다시 돌아가면 안정을 찾게 됩니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어거스틴은 우리의 사랑이 우리의 무게라고 말합니다.
우리는 어떤 방향으로 움직이든지 간에 사랑의 무게가 이끄는 대로 움직이기 마련입니다.
오늘 여러분의 사랑의 무게는 무엇입니까?
육신의 정욕?
안목의 정욕?
아니면 이생의 자랑?

아침에 있다가 금방 사라지고 말 것에 사랑의 무게를 두지 맙시다.
영원히 시들지 않는 하나님을 향하여 가장 큰사랑의 무게를 두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이 하나님을 사랑하면 그 무게 중심이 자연 하나님을 향하여 기울어집니다.

버지니아 공과대학의 총격 사건을 계기로 오늘
여러분의 사랑의 무게가 어디에 있는지 다시 한번 점검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