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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시험을 만나거든 기뻐하라 (약 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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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인생의 삶의 모든 일들은 때때로 내 마음대로 안 되는 때가 많이 있습니다.
심지어는 예수님께서도 십자가의 쓴 잔을 앞두고 겟세마네 동산에서 간절히 기도하기를 할 수만 있으면 이 잔이 내게서 면케 되기를 간절히 소원하셨습니다. 땀방울이 핏방울이 되기까지 간절히 기도하셨지만 그 예수님의 소원은 이루어지지 않으셨습니다.

마침내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의 쓴 잔을 마시고 고통과 절규 끝에 이 세상 인생의 마지막을 이루셔야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겟세마네 동산의 기도를 하시면서 열두 명의 제자들 중에서도 세 명을 특별히 뽑아 같이 데리고 가셔서 내가 정말 죽게 되었으니 나를 위해서 기도해 달라고 부탁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더 올라가 기도하셨습니다.

하지만 그 제자들은 예수님을 위하여 기도하지 못하고 쿨쿨 잠을 자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재차 오셔서 그들에게 부탁하셨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계속해서 혼곤한 잠을 이기지 못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그렇게 부탁해도 제자들이 그 주님의 부탁을 이루지 못했고, 또 주님이 그렇게 간절히 하나님께 기도해도 그 십자가의 쓴 잔을 결코 면치 못하고 예수님은 지고 죽으셔야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쓴 잔’을 과연 우리는 예수님의 ‘원함을 이루지 못한 실패’로 보아야 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오히려 그 십자가를 짊으로 말미암아 죽으셔서 우리 인간들을 위하여 대신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우리 인류를 구속하시는 영원한 구속사역의 완성을 이루셨던 것입니다.

때때로는 마음에 원하는 것이 있지만 그 원함을 이루지 못해도 또 이루지 못함으로 우리는 가야할 근본적인 목적지에 도달할 때가 있는 것입니다.
오늘 성경을 보면 ‘내 형제들아 너희가 여러 가지 시험을 만나거든 온전히 기쁘게 여기라’ 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즉 우리 삶에 닥치는 여러 가지 시험, 어려움, 고통, 마음의 상심, 아픔 여러 가지 어려움들을 당할 때 기쁘게 여기라고 말씀합니다.
왜냐하면 ‘시련은 우리에게 인내를 이루며, 인내는 우리들에게 온전하고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우리를 만들게 해주심’이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말씀은 <야고보서 1장>에 나오는 내용을 가지고 몇 주 동안 말씀을 드릴 텐데 첫 번째 내용으로써 ‘시험을 만나거든 기뻐하라’ 라는 내용입니다.
즉, 우리 인생에 여러 가지 어려움을 만날 때 우리는 그것으로 말미암아 한없는 좌절의 늪에 빠질 수밖에 없고 실망하여 말할 기운도 없는 낙심의 지경에 있을 때가 있지만, 그런 가운데 우리는 오히려 그 사실을 기뻐하고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새로운 역사를 이루어야 할 것을 권면하고 있는 것입니다.
어려운 일을 당하면 사람은 낙심하고, 어려운 일을 당하면 힘이 빠지고, 어려운 일 당하면 괴롭고 눈물 나는 것인데, 왜 오늘 성경은 우리들에게 왜 ‘시험을 만나거든 기뻐하라’ 라고 말씀하실까 하는 것을 생각해 보고자 하는 것입니다.

첫 번째 우리가 어려운 일을 당할 때 늘 느끼게 되는 것이 있습니다.
그 첫 번째 내용은 <누구나에게 시험은 있다>라는 사실을 잊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남은 일은 두렵고 힘든 일이지만, 어떻게, 누구에게나 있는 시험이니 내게도 당한 것을 특별하게 여기지 말고 극복하여 하나님의 은혜와 뜻을 이루어드릴까를 생각해야 합니다.

어렵고 힘들 때일수록 우리는 자기 연민에 빠지지 말고, 힘들다 생각하지 말고, 하나님을 바라보고 일어서야 합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에게 있어서는 잘 할 때, 모든 상태가 좋을 때, 그때만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 아니라, 어렵고 힘들고 고통스러울 때 의연히 일어남으로 말미암아 오히려 하나님의 더 큰 은혜와 영광을 선포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가 어려울 때 엎드려져 있으면 그것으로 말미암아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엎드려져 있으면 낮아진 수준이 우리의 기본적인 수준이 될 때가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어려움 속에 엎드려져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새 역사를 기대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바라보고 일어나 달려가야 합니다.

우리가 넘어져 엎드려져 있다는 것은 우리가 하늘을 바라보고 앞을 바라보고 모든 사실을 파악하던 것을 이제는 우리 발밑에 있는 땅의 것도 바라보라는 하나님의 뜻으로 기대하는 것입니다.
오히려 새로운 분절을 이루어 우리가 이제까지 보지 못했던 새로운 세계를 보여주시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새로운 능력의 세계를 보여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잘돼서 잘되는 것이 아니라, 어려움을 겪었고 그 어려움을 극복함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과 영광을 선포케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더욱이 누구에게나 시험은 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은 우리 인류 중에는 모든 어려움과 고통과 아픔을 겪지만 반드시 실패로 끝나지 않았고, 그 실패를 딛고 일어선 사람들에 의해서 새로운 역사가 기술된 것을 봅니다.
역사라는 것은 모든 일이 잘돼서 성공한 사람들의 일들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어려움이 있지만 그 어려움을 극복한 사람들과 일들의 역사인 것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밤은 오지만 그 밤이 영원하지는 않고 또 새벽이 옵니다.

역사의 인물들은 모든 어두움의 시간에 밝은 아침을 기대하며 그 어두움 속에서도 승리를 향해 달려가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를 통해 새로운 역사가 쓰여질 것을 기대하며 일어나 가고 또 가야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모세의 좌절과 하나님의 은혜를 생각해 봅니다. 모세는 다베라 지역에 이르렀을 때 그야말로 큰 낙심의 지경을 당하게 됩니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백성은 광야에서 물을 먹었고 만나를 통해 음식을 먹었습니다. 정말 물 한 방울 없고 박토인 광야에서 그들은 끓이지 않은 음식을 하나님의 은혜로 만나를 통해서 먹었고, 그 물이 나지 않는 어려운 지경의 사막에서 하나님이 주시는 물을 가지고 먹고 지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간이 지날 때에 이들은 짜증이 나고 지루하고 앞날에 대하여 마음속에 확신을 가지지 못할 때 모세에 대하여 말하는 것입니다.

‘자, 우리가 이제는 애굽으로 돌아갈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애굽에서 고기 가마 곁에서 실컷 고기도 먹었고, 우리는 외와 부추와 여러 식물도 잘 먹고 지냈는데, 여기 오니까 우리가 만나나 겨우 먹고 사는 것이 아니냐? 매장지가 없어서 우리를 광야로 불러냈느냐? 우리는 애굽으로 돌아갈 것이다. 장관을 세울 것이다.’
그리고 애굽으로 돌아갈 구체적인 계획을 세웁니다.
그때 모세는 좌절했던 겁니다. 왜냐하면 그 물이 날수 없는 광야에서 기적으로 물을 먹였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하늘에서 만나가 내려서 먹였으며, 심지어는 그들이 출애굽 할 때 열 가지 재앙을 애굽에 주면서 이들을 구해냈고, 홍해를 갈라서 이들이 넘어왔음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이제까지 체험했던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를 까맣게 잊어버리고 눈앞에 있는 어려움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을 부정하고 부인한다는 사실입니다.
더욱이 이전에 그들이 애굽에 종노릇 했을 때 무슨 고기를 코에 넘치도록 먹었으며, 무슨 그런 평안한 생활을 했다고-그들이 그와 같이 얘기하는가, 생떼를 쓰는 거지요. 모세는 거기서 좌절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기적과 능력과 역사를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같이 전달하고 베풀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저런다면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이제 없지 않습니까?
하나님 앞에 기도합니다.
‘하나님 차라리 나로 죽여서 이 곤고한 모습을 보지 않게 하옵소서’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대답하시느냐하면
‘여호와의 손이 짧아졌느냐 여호와의 손이 짧아서 너에게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하느냐’
그 말은 뭐냐 하면 ‘모세야 네가 부족하면 부족한 것을 달라고 구해야지 네가 엉뚱하게 차라리 너를 죽여서 곤고한 모습을 보지 않게 해 달라는 것은 너는 분명히 어떤 패배적인 사고의 발상에 빠져있는 것이 아니냐, 오히려 어려움이 있으면 구해야 되지 않느냐, 내 손이 짧아서 너에게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하느냐,’ 하면서 하나님께서는 오히려 모세에게 은혜를 주시고 마침내 메추라기를 불어서 그들에게 코에 넘치도록 먹게 하시는 사건을 일으키게 됩니다.
모세는 좌절 속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이 끝끝내 좌절할 때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가운데 영광을 체험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을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다윗도 수많은 실패를 딛고 일어선 사람입니다.
환경 때문에 주어진 실패, 혹은 자신의 자만 때문에 주어진 실패, 또 여러 가지 스스로의 잘못과 자신의 모든 그릇된 심정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진 실패까지도 다 종합하여 그는 딛고 일어선 사람입니다.
다윗은 완벽한 사람이 아니라, 실패를 딛고 일어선 사람임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우리가 어떤 어려움에 빠졌을 때 정말 이 어려움은 나만 당하는 것 같아요. 세상에 나만 어려움을 당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나만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이 어려움을 당하고, 그 모든 사람이 다 망하는 것이 아니라 그 가운데에서도 일어난 사람이 있다는 사실은 결국 우리들에게 있어서 이 어려움이라는 것은 극복되어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어려움을 나만 당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딴 사람도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다 의연하게 살고 있는 것입니다.

작년에 성지순례를 갔다 왔는데, 삼십 여명 버스를 타고 갔는데 저희 교회에 같이 갔던 분들 중에서 한 분이 여권을 잃어버렸어요. 그랬으니 얼마나 놀랐겠습니까?
여러 가지 복잡한 과정이 필요하잖아요. 정말 분주해서 여권을 잃어버렸는데 천신만고 끝에 그 여권을 찾았습니다. 어떻게 찾았냐면 타고 왔던 버스에 떨어뜨리고 내려서 어떻게 해서든 그것을 다시 찾았습니다. 그러니 얼마나 기쁘겠습니까?
그런데 그 잃어버렸던 분이 떠나오기 전날 또 여권을 잃어버렸습니다. 제가 첫 번째 성지순례 갔을 때는 잃어버린 분이 없었는데 두 번째는 잃어버린 분이 생기더니 그분이 또 잃어버렸어요. 우리 권사님인데요.
얼마나 난감합니까? 두 번째는 바닷가에 있는 카페에 가서 차 마시면서 옆에 두었는데 누가 그 가방을 훔쳐간 겁니다. 뻔히 사람이 앉아있는데. 그러니까 얼마나 속상하겠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내일 떠나와야 하는데 여권이 없으면 같이 떠나오지도 못하고 혼자 거기에 남아있어야 되잖아요. 참 난감한 일입니다. 그래서 그날 여행일정을 다 포기하고 다시 돌아와서 영사관에 전화를 해서 출입증과 여권을 새로 만들 조치를 하고 다시 거기로 갔습니다. 그런데 계속 그 권사님 마음이 안 좋은 것 같아요. 한 번 잃어버린 것만 해도 창피하잖아요. 그런데 사람들이 다 난리를 피우고 찾았는데 두 번째 똑같은 사람이 잃어버린다니 얼마나 난감하겠어요. 위로를 해 드려야 되는데 권사님이 너무 낙심한 것 같아요. 그래서 제가 생각하다보니까 한 가지 생각이 나서 거기 차 안에 타고 있었던 사람들에게 한 가지 얘기를 했습니다. 한사람씩 나와서 자기가 여태까지 한 가지씩 잃어버린 것을 이야기 하자는 제안을 했습니다.
한 사람씩 와서 자기가 어려운 일을 당했던 것을 얘기하는 겁니다. 이런 얘기, 저런 얘기 다 하는데 한 분이 나와서 이런 얘기를 하더라고요.
전에 아파트를 하나 샀다가 다시 팔았는데 내가 그것을 팔지 않았으면 수억 원을 남겼을 텐데 내가 그것을 팔아서 굉장히 속상하다. 수억 원보다는 여권하나 잃어버린 것이 나은 것 같아요.
이런 얘기 저런 얘기 하다보니까 여권하나 잃어버린 것은 아무 일도 아니더라고요. 그러니까 좀 위로를 받는 것 같아요. 여권을 찾은 것은 아니지만 다른 사람이 더 어려웠다니까 위로를 받는 것 같았습니다.
우리 사실 따지고 보면 어려움을 당하면 자기 연민이 자꾸 강해지는 겁니다. 세상에 어려운 일 당한 사람이 나밖에 없는 것은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다 어려움을 당하고 있고, 실패도 다 해봤고, 그 가운데서 말 안할 뿐이지 지금도 속상해 하고 있는 겁니다.
제가 보니까 속상했던 적 한 번씩 얘기하라고 했더니 나와서 얘기하는데 한 사람도 빠짐없이 ‘나 속상한적 없습니다.’ 하는 사람 없었습니다. 다 속상한 적이 있더라고요. 그러나 다 살고 있었어요.
정말 권사님이 위로를 받는 것 같았습니다. 여권을 다시 만들어서 결국 같이 오기는 했는데 우리가 항상 어려움을 당할 때 느끼는 것은 나만 어려움을 당하는 것 같아요. 왜 나만 어려움을 당할까? 왜 나는 이렇게 어려울까? 그런데 생각해 보면 다른 사람들도 이렇게 어려움을 당한 경우를 생각해보면 우리는 별것 아닙니다.
이런 생각하는 것을 보면 우리는 자기 연민에 빠질 필요가 없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이 그 어려움을 통하여 내게 주시려는 이유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생각해보아야 합니다.
그 여권하나 잃어버려서 서로 격려하고 위로하고 또 우리 성도의 사랑의 교제를 나누게 된 것을 참 감사하게 생각을 합니다.
우리는 그것뿐이 아니라 인생에 큰 어려움이 있을 겁니다. 큰 어려움도 사실 먼 장래에서 보게 되면 별로 그렇게 큰 게 아닙니다. 그런데 그 당시에는 정말 이것 아니면 죽을 것 같아요. 그런데 시간이 지나보면 그것보다 더 큰 일이 얼마나 많은가하는 것을 또 생각하게 됩니다.

두 번째, <시험을 만나거든 기쁘게 여겨야 한다고 했는데 왜 그런가?> 하는 것을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왜 우리는 시험을 만나면 기쁘게 여겨야 하는가?
먼 산봉우리를 바라본 사람은 분명한 것이 있습니다.
그 꼭대기에 올라가려면 많은 수고와 시간이 걸린다는 것쯤은 압니다.
우리 앞에 오를 봉우리조차 없다면 우리는 행복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있어 힘든 것은 그 봉우리까지 가는 동안 우리 마음을 다스리는 것입니다.
여러분 산 멀리 있는 산봉우리를 봤습니다. 그 산에 올라가려고 하면 그 산하나 올라가면 되는 줄 압니까? 아닙니다.
앞산을 올라가고 그 뒤에 있는 산을 올라가고 그 다음 산을 올라가서 능선을 타고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면서 결국 우리는 몇 개의 산을 넘은 다음에야 겨우 그 산에 도달해서 다시 처음부터 올라가야 할 때를 만나게 될 겁니다.
기쁨으로 감당하면 우리에게 있어서 여러 가지 어려움은 즐거움이지만 우리에게 있어서 정말 마음이 낙심되게 되면 여러 가지 어려움이라는 것은 우리에게 고통일수밖에 없습니다.
우리의 모든 어려움이라는 것은 단순히 어려움일 뿐입니다. 극복하면 되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가짐입니다. 우리에게 어려움은 늘 있는 겁니다. 그런데 그 어려움을 어떻게 극복하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믿음의 시련은 우리에게 인내를 만들어주고, 인내가 우리를 온전케 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해 준다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수없는 실패를 겪었습니다. 하나님 앞에 너무나 부끄러운 사람이에요. 그런데 그 부끄러움을 거쳐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40년 동안 방황하다가 가나안에 입성하게 됩니다. 그런데 가나안에 입성하고 난 후에 첫 번째 전투가 여리고성의 전투고, 두 번째가 아이성의 전투입니다. 그런데 여리고성은 견고했습니다. 그들은 감히 난공불락이라고 생각했는데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그 여리고성을 함락시킵니다.
그런데 두 번째 아이성은 의외로 작은 성입니다. 자신있게 나갔지만 대패하게 됩니다. 그들의 원인을 살펴보니 하나님께 기도하지 않았던 때문이고, 또 그들에게 아간이라고 하는 사람이 여리고성에서 그 모든 전리품을 취하지 말라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욕심이 나서 취해서 숨겨두었습니다. 죄악의 요소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 두 가지 요소로 말미암아 실패했던 것입니다. 문제를 해결하고 다시 승리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뭡니까? 하나님께서 왜 가나안 입구에서 여리고성의 대승리와 아이성의 큰 패배를 주셨을까요? 다름이 아닙니다. 앞으로 수년간 너희가 거쳐 가야 할 텐데 하나님이 주시는 승리도 있고 실패도 있을 것이다. 그러니 너희가 승리와 실패를 체험하면서 하나님이 주시는 승리의 은혜를 어떻게 누릴 것인가를 곰곰이 생각하고 터득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것은 때로는 성공을 통해서, 때로는 실패를 통해서 우리들에게 결국 하나님의 사람으로 합당한 모습을 이루어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초년의 아브라함과 마지막 순간의 아브라함을 생각할 때 비교가 되지 않음을 봅니다. 초년의 아브라함은 정말 비겁한 사람이고 믿음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되어서 마침내 25년 만에 이삭을 선물로 얻고, 또 십 수 년이 지나서 그 이삭을 모리아 산에 제물로 바치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이전 같으면 아브라함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시험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이제는 믿음이 자라서 하나님의 시험을 의연히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내가 원해도 원치 않아도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니 그럴 바에는 하나님의 뜻을 순복하는 것이 내가 해야 될 일이라고 생각하며 그는 처연한 마음으로 모리아 산을 향하여 올라갔고, 하나님은 그런 아브라함을 긍휼히 여기셔서 아브라함에게 양을 준비시켜 주심으로 말미암아 여호와 이레의 대역사를 이루십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은 믿음의 조상으로 인정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야곱도 어떤 사람입니까?
야곱은 초반기에 능력은 있으되 덕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야곱이 가진 시련 끝에 마침내 인격을 가지게 됩니다. 마지막에 바로 앞에 설 때 그는 하나님 앞에 연단 받은 거룩한 은혜의 백성으로서 거룩한 모습을 이루게 되는 겁니다.
우리의 승리는 결국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져 가는 겁니다. 내가 내 앞에 있는 어떤 일을 잘 이루었다 이루지 못했다가 아니라 그와 같은 과정을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 앞에 만들어져 가는 것입니다.
내가 어떤 일을 이루지 못했을 때 마음 아파하는 나 자신에 대하여 낙심하지 말고 마음 아파하는 이 순간 내가 있을 수 있다는 것에 대해서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이 순간 나를 호흡하게 하셨다면 분명히 하나님의 뜻이 있을 겁니다. 불타버린 예루살렘의 황무한 소식을 들었을 때 탄식하고 금식하며 기도하지만 그것으로 눈물뿌리고 끝난것이 아니라 내가 가서 예루살렘 성을 다시 세워야겠다고 생각한 느헤미야는 마침내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게 됩니다.
인간적인 가능성의 여부를 넘어서 주님이 우리에게 제시한 것을 향하여 우리는 출발해야 합니다. 지금 가장 중요한 것은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내 마음이 실망되는가? 모든 의욕을 잃는가? 아니면 나는 여기서 또다시 일어나 가고 가야 할 것인가? 라는 중요한 갈림길입니다.
우리 삶이라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강도 건너고 산도 넘어야 하는 것입니다. 내가 원하는 것을 이루었어도, 원치 않은 것을 당하여서도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다음 순간까지 가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믿음의 입장에서 보면 일의 승패를 떠나서 우리가 그 순간 하나님의 마음에 합당히 있느냐 있지 못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백성의 평가의 시점이 어디입니까?
사람은 눈앞에 보이는 것으로 평가하는데 하나님은 그 뒤까지 바라보시고 평가하십니다.
여러분 하나님과 우리와 관계가 틀립니다. 자 한번 봅시다.
예수님께서는 죽은 사람에 대하여 죽었다고 얘기하지 않았습니다. 나사로가 무덤에 있을 때 사람들이 울며불며 장례 치르고 끝난 다음이지만 예수님은 가서 나사로야 일어나라 하니까 나사로가 그 무덤에서 나왔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회당 장 야회로의 딸이 도착했을 때 이미 죽었습니다. 예수님은 ‘잔다’라고 얘기했습니다.
그때 사람들이 비웃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소녀야, 내가 너에게 말하노니 그만 일어나라” 라고 말씀하셨을 때 그 소녀가 일어났습니다. 나한성 과부 여인이 아들의 장례를 치르고 울며 울며 아들의 상여를 따라갑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만 울라, 슬퍼하지 말라.” 하시면서 그 아들을 다시 살려주셨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인간은 ‘지금이 끝이다’라고 생각하는데 주님께서는 한 템포가 더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 울고 있을 때 “울 일이 아니다.”라고 말씀하시고 그 뒤의 일을 일으켜 주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내 눈앞에 있는 성공과 실패를 완결로 보지 않고 그 뒤에 있을 하나님의 역사를 바라보며 우리는 판단의 시점을 뒤로 더 미루어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늘 말씀드리지만 초보적일 때는 현상을 보고 깊어지면 의미를 봅니다. 우리 눈앞에 있는 것을 현상적으로 바라보고 ‘좋다, 나쁘다’하고 정서적으로 받아들이죠?
그런데 조금 더 성숙해지면 우리들에게 현상을 볼 것이 아니라, 그 현상이 의미하는 의미를 의지적으로 받아들인다는 것입니다. 내게 어떤 큰 슬픔이 다가왔습니다. 정서적으로는 ‘아, 슬프다’ 하고 마음 괴로워하지만 이 슬픔이 나에게 의미하는 것이 무엇일까? 하나님이 나에게 어려움을 주시는 이유가 무엇일까? 하는 그 의미를 파악합니다. 그리고 의지적으로 ‘그래, 이것은 슬픔이 아니야. 하나님이 나를 연단시키시며 연단해서 나를 온전히 인내를 주시고 인내를 통해서 온전히 만들려는 하나님의 뜻이야.’라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그 가운데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기 위해서 담대히 일어서는 것입니다.

믿음의 백성의 차이가 여기 있습니다. 모든 사람이 똑같이 어려움을 겪을 수 있으나 믿음의 백성은 그 가운데 하나님의 뜻을 바라보고 이루어질 그 뒤를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요즘 <안드레아 보첼리>라는 가수가 있습니다.
이사람 맹인임에도 불구하고 열심히 공부해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또 음악을 공부할 마음을 가지고 음악공부를 하는데 너무 돈이 없어서 레슨을 받지도 못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부를 해서 아주 훌륭한 성악가가 되었습니다.
카루소, 델모나코, 파발로티 이런 사람의 뒤를 이어서 아주 훌륭한 성악가로서 테너가수로 훌륭한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노래도 잘 부르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삶에 대한 진지한 태도입니다. 이 사람이 한 말 중에 정말 잊혀지지 않는 것이 있는데 뭐냐 하면 나는 불행에 적응하는데 일주일이면 충분하다. 불행이 다가왔을 때 불행에 적응하는 데 일주일이면 충분하다는 것입니다. 일주일이면 불행을 적응하여 소화하고 그 가운데서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 무엇인가를 파악하여 그 일을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 믿음의 사람에게 누구든지 충격이 있으면 휘청거리겠죠?
그러나 그 충격을 흡수하는 시간이 짧을수록 우리는 하나님의 위대한 인물이 되는 것입니다.
음악가가 소리를 못 들으니 어떻게 음악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전에 있었던 모든 영감을 가지고 그는 결국 작곡을 하게 되지요.
그는 자기가 작곡한 것을 지휘해서 연주해 놓고도 청중들이 박수치는 소리를 못 들어서 뒤를 돌아보지 못했던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그는 ‘고난을 뚫고 기쁨으로’ 라는 위대한 말을 남겼습니다. 결국 기쁨이라는 것은 고난을 뚫고 기쁨으로 가는 것입니다.

진정한 삶의 깊이는 삶의 고통과 아픔을 이겨내고 이룬 것일 때 역사성과 생명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시험을 통과해야 우리는 가야할 목적지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룬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어려움 때문에 인내하게 되고, 인내는 연단을 이루어 마침내 우리에게 소망을 이루어줍니다.
여러분 예수님의 능력이 일어났던 것은 언제든지 최악의 지경이었습니다.

오병이어의 기적을 보면 우리는 너무나 기운이 나지 않습니까? 물고기 두 마리와 떡 다섯 개로 오천 명을 먹이고도 열두 광주리나 남았지 않습니까?
오병이어가 왜 일어났습니까?
오병이어의 기적이 왜 일어났겠습니까? 배고픈 사람이 즐비했기 때문에 일어난 것입니다.
병 고치는 역사가 왜 일어났습니까? 아픈 사람이 있기 때문에 일어났던 것입니다.
맹인의 눈을 뜨게 하는 기적이 왜 일어났죠? 눈이 멀어 고통스러운 사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왜 풍랑을 잠잠케 하셨습니까? 풍랑 때문에 죽을 것 같은 제자들이 있었기 때문에 풍랑을 잠잠케 하셨던 것입니다.
왜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셨어요? 왜 구속의 역사를 이루셨습니까? 인간이 죄로 말미암아 죽을 수밖에 없는 절망의 상태가 있었기에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들에게 영원한 생명의 역사를 주신 것이라는 말입니다.
세상에서 가장 두렵고 무서운 사람은 기다리며 인내하고 때를 바라보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은 당해낼 수가 없어요. 인내를 터득한 사람은 당해낼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호흡을 길게 가지며 참아내야 합니다.
소망을 품게 하신이가 누구인가? 삶의 한 장면을 보고 우리는 일희일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바라보고 달려가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지금 성취를 이루었건 실패를 했건 그것이 아니라 우리들에게 하나님이 원하신 뜻을 위해 달려가는 것입니다.

요즘 특별 새벽기도회중에 요셉에 대하여 말씀을 나누고 있습니다.
너무 하는 일마다 안 되지 않습니까?
형들에게 미움 받아서 죽을 뻔 했다가 다행히 구사일생으로 살아서 종으로 팔려가고 그 가운데 열심히 해서 인정받는가 했더니 음모를 받아서 감옥에 갇히고...... 그러나 그 감옥에서도 최선을 다합니다.
결국 슬픔이 가중될 때 그 가중되는 슬픔에도 불구하고 네게 주어진 여건 속에서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냐를 찾아서 그 일에 최선을 다할 때 결국 그를 통해서 하나님의 역사가 이루어지는 겁니다.

마지막 세 번째입니다.
어떤 시험이 다가와도 우리는 굴하지 않고 우리 앞에 놓인 강을 건너고 산을 넘어 가야할 곳까지 가야한다는 것입니다.
어려움보다 어려움을 극복하려는 의지가 강하면 우리는 그 어려움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믿음의 사람에게 의지가 생기는 것은 하나님을 바라보기 때문입니다.
<시험을 만나거든 너희는 온전히 기뻐하라>
지금 어려워요. 아파요. 고통스러워요. 그런데 어떻게 기뻐합니까?
고통스럽고 아픈 것 때문에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그 가운데도 그 일을 섭리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고통스러운 것 바라보면 고통스럽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기뻐합니까?
고통스러운 것이 아니라 그것을 섭리하시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고통스러운 장면에만 집착하면 우리는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습니다.
인생의 승리와 패배는 ‘하루 맑았다, 하루 비 왔다’ 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어떠한 것도 우리들에게 지속적으로 고정된 것은 없습니다.
상황이 끝났다고 생각하는 평가의 시점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내게 주어진 어떤 것을 생각할 때,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우리 삶의 색깔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여러 가지 일들이 있습니다. 실패했을 때도, 승리했을 때도, 우리는 그것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와 영광을 바라볼 수 있는 마음의 준비가 이루어져야 합니다.
다만 ‘실패해도 한 게임 실패했을 뿐이야, 성공해도 한 게임 이겼을 뿐이야.’ 또 다른 게임을 준비하고 또다시 마음에 용기를 가지고 일어나야 됩니다.
얼마 전에 보니까 고등학교 3학년 되는 박태완이라는 수영선수가 세계 수영 선수권대회에서 예상하지 않았던 자유형 종목에서 금메달을 받아서 우리나라 사람들이 굉장히 좋아했던 것 같습니다.
동양 사람들이 보통 체구 적으로나 여러 가지 여건으로 볼 때, 수영에서 특별히 다이빙도 아니고 경형에서 이렇게 이기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사람들이 환호했습니다. 나이는 어리지만 3년 전에 그 선수가 아테네 올림픽에 국가대표로 출전했던 선수입니다.
국가대표선수로 올림픽에 나간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5천만명중에 수영을 제일 잘하는 사람 아닙니까? 그 부분에서 수영을 제일 잘하니까 뽑혀서 간 겁니다. 그런데 해보지도 못하고 탈락되었습니다. 왠지 아십니까? 스타트대에 섰는데 예령에 뛰어내려 실격패하고 헤엄도 한 번 못 쳐보고 그냥 온 겁니다. 얼마나 창피하겠습니까?
그런데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3년 뒤에 세계선수권대회에서 우승했습니다.
자기 주 종목이라는 1500m에서 예선도 통과 못했습니다. 그러니까 뭐라고 했나요.
“상해올림픽에서는 잘 할 수 있다.”
우리는 그런 말에 소망을 가지는 것 아닙니까?
‘내가 여기서 이것도 못했으니 이것도 나는 안 되겠다.’ 하고 생각하지 않고 또다시 도전하고 노력하는 이런 삶이죠.
우리 삶에는 결정적인 시합이 있을 겁니다.
그러나 거기에 승리와 패배가 어떤 것이라고 할지라도 우리는 시간이 지나면 그것도 결정적인 것이 아니라 삶의 또 다른 하나의 언덕에 불과한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또 넘고 넘는 것입니다.
한번 우리가 결정적인 순간에 패배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은혜로 언제든지 또다시 세워질 수 있는 것을 봅니다.

<미가서 7:8>을 보면 ‘나의 대적이여 나로 인하여 기뻐하지 말찌어다 나는 엎드러질찌라도 일어날 것이요 어두운 데 앉을찌라도 여호와께서 나의 빛이 되실 것임이로다’라고 말씀합니다.
‘내가 실패했다고 해서 나를 비웃던 너희들 즐거워하지 마라. 나는 반드시 또 일어날 것이다. 하나님께서 나의 빛이 될 것이다’-라고 그는 외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 한번 따라서 합시다.
복의 의지를 지닌 자는 반드시 극복합니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버리지 않습니다.
결코 시험이란 하나님이 그 백성을 달아보심으로 축복을 주어도 감당할 자격이 있는가를 달아보시는 것입니다.
우리 성도님들은 분명히 확신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분명히 살아계시고, 하나님은 우리들을 섭리하시고 우리들의 길을 인도하시는 겁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살아계셨다는 것을 부정하면 우리가 어떤 일을 잘 이루었거나 승리했던 그것이 도대체 우리에게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우리는 믿음이라는 것이 우리 삶의 일부가 아닙니다. 우리 삶의 기본적인 근거이기 때문에 우리 삶의 전부입니다.
‘하나님은 살아 계시다’는 것을 우리는 믿습니다. 그러면 내 앞에 어떤 일이 일어나도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면 ‘최종적으로 그 길을 어떻게 인도하실 것인가’ 하는 것을 생각하게 됩니다.

이제 오늘의 말씀을 마치고자 합니다.
<시험을 만나면 기뻐하라> 라고 말씀합니다.
‘시험이, 시련이, 우리에게 인내를 이루고 그 인내가 우리를 온전케 한다.’ 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른 이들은 모두가 끝났다고 할지라도 하나님의 역사는 지금부터이기 때문에 우리는 반드시 기뻐하며 소망을 가져야 합니다.
어려운 싸움일수록 우리는 기뻐해야 합니다. 내게 어렵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이 우리들에게 주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어둔 밤 깊은 바다에 홀로 빠져 누구도 도울 자 없는 가운데도 우리는 반드시 날이 밝을 것을 기대하며, 우리는 끊임없이 버둥거림을 이루어야 합니다.

제가 이런 생각을 해 봤어요.
나 한사람 개인의 삶이 아니라 하나님의 백성으로 모든 사람과 더불어 가는 공적인 삶이라면 우리 삶의 자세는 달라질 수밖에 없겠다는 것입니다.
저는 목사인데 제가 늘 생각하는데 스스로 실망할 수가 없는 것 같습니다.
제가 제 자신을 볼 때 늘 실망할 것이 많지 않겠습니까?
‘하루 빨리 그만두는 게 났겠다.’하는 생각이 들것이고, 여러 가지 본인에게 실망할 것이 많을 겁니다.
또 대하는 사람에게서 실망하는 일도 많겠지요.
또 하고 있는 일과 결과에 대해 실망할 것도 많겠지요.
그런데 한 가지 분명한 것이 있어요. 저는 실망하면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목사가 실망하면 되겠습니까?
목사가 실망하면 무슨 설교를 하겠습니까?
여러분 살아보니까 결과적으로 안 되더라고요.
여러분 이렇게 설교하면 어떻겠습니까?
목사는 실망하면 안돼요. 실망할 수가 없더라고요.
왜냐하면 제 위치는 실망해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저는 실망할 수가 없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 마찬가지입니다.
여러분을 바라보고 있는 수많은 사람이, 여러분을 기대하는 수많은 사람이 우리를 바라보는 하나님의 은혜의 눈길을 생각하면 우리가 실망하고 낙심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만 우리에게 주어진 어떤 어려움과 아픔이 있다면 한 걸음 뒤로 물러서서 준비하고 다시 그 언덕을 넘어가는 것 밖에 없습니다.
주어진 상황에 대해서도 실망할 수 없고, 주어진 여러 가지 결과에 대해서도 실망할 수 없고 나를 실망시켰던 사람에 대해서도 우리는 실망할 수 없고 특별히 내 자신에 대해서 우리는 실망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바라보고 계시는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또 모든 사람이 주시하고 있는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입니다.

<시편 37편 4절>은 말씀합니다.
우리 한 번 따라서 합시다.
‘여호와를 기뻐하라 저가 네 마음의 소원을 이루어 주시리로다’
우리는 여호와를 기뻐하며 하나님이 우리의 소원을 이루어주실 때를 기대하며 우리가 지금 어떤 상황에 놓여 있을지라도, 어떤 결과를 받을지라도 우리는 하나님을 바라보고 기뻐하며 그 가운데 하나님의 일을 기대해야 합니다.
우리 교회에 속한 모든 성도들-하나님의 자녀인 모든 백성들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은혜를 받고 바라보고 지금 내게 주신 시련, 어려운 시험들을 반드시 극복하여 하나님의 역사를 이루는 성도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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