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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너, 하나님의 사람아! (딤전 6: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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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지니아택(Virginia Tech) 사건으로 가슴이 아픈 한 주간이었습니다.
나는 이번 일로 희생당한 모든 사람들, 그들의 가족, 친구들, 이 사건으로 스스로를 돌아보며 눈물짓는 모든 사람들에게 주님의 위로가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또 다른 한편, 그 젊은이의 영혼을 참 가슴 아프게 생각합니다. 마음 깊이 불쌍한 마음을 품습니다. 특히 그의 부모, 그의 누이, 식구들이 겪고 있을 고통을 생각하면 가슴이 저립니다.

오늘은 “디모데전서”입니다. 순서를 따라 여기까지 왔지만, 주제가 놀랍게도 일치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섭리라고 믿습니다. 따라서 오늘 설교는 “상황”을 따라 성경말씀을 풀어나가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따라 상황을 해석하는 방식을 따르겠습니다.

한 주일 내내 그 뉴스를 접하신 여러분께 다시 설교에서 그 이야기를 전하니, 미안한 생각이 큽니다. 그렇지만 한편, 우리는 이 엄청난 문제에 대한 성경적 답변을 기대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제 금요일 오후, 우연히 어떤 백인 변호사 부부를 잠간 만났습니다. 먼저 한국에도 가보고 그랬다고 했습니다. 묻지도 않았는데, 그의 아내가 자기 남편은 스탠포드 나왔다고 했습니다.

“도둑이 제 발 저리다”고 했나요? 내가 먼저 버지니아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그리고 “한국인으로서 대단히 미안하게 생각한다.”고 했습니다. As a Korean, I am sorry very much about that.

그랬더니, 그는 “이번 일로 누구라도 한국 사람을 단체로 비난하는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부담감을 갖지 마세요.” 라고 했습니다. 고마운 사람들이었습니다.

지난 18일(수요일), TIME 지(紙)에 실린 다음과 같은 기사는 20일 현재 검색율 8위로 올라 있었습니다.

While Americans were grieving and trying to a make sense of Monday’s massacre at Virginia Tech, on the other side of the Pacific, South Koreans were shaking their heads in disbelief that one of their own could unleash the worst massacre in U.S history.

미국인들은 지난 월요일 버지니아텍의 살상을 보면서 슬퍼하고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동안, 태평양 저편의 한국 사람들은 저들 중의 한 사람이 미국의 역사에서 가장 참혹한 살상행위를 저질렀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어하면서 고개를 젓고 있다.

Most Koreans don't regard Cho Seung-Hui as a "typical Korean" since he spent the bulk of his life immersed in American culture. Still, a collective sense of regret and guilt was palpable today due to the strong tendency of Koreans to perceive the tragedy in terms of Korean nationalism, in which the group trumps the individual. "It's a notion of collective responsibility," says Mike Breen, the author of The Koreans. When a Korean does something wonderful, the country rejoices, but when one of its own goes off the rails, like Cho Seung-Hui, there's a collective sense of shame and burden. So much so that South Korea's Ambassador to the U.S., Lee Tae Shik, pledged to fast for 32 days to show his sorrow today. "I can smell a collective sense of guilt," says Lim Jie-Hyun, a history professor at Hangyang University in Seoul. "There is confusion [in Korea] between individual responsibility and national responsibility."

대부분의 한국 사람들은 조승희를 전형적인 한국인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그의 대부분의 인생을 미국 문화권에서 보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집단적 민망함과 죄책감이 만연하다. 한국인들은 그 비극을 한국의 민족주의적 감정의 관점에서 이해하기 때문이다. 민족주의는 집단이 개인에 우선한다. The Koreans라는 책을 쓴 Mike Breen은 “그것은 집단 책임의식이다”라고 했다. 어떤 한국인 개인이 훌륭한 일을 하면 한국인은 모두 즐거워한다. 그러나 조승희 같이 그들 중 하나가 일탈하면 부끄러움과 부담을 집단적으로 느낀다. 이태식 주미대사는 32일 간의 금식을 선포했다. 오늘의 슬픔을 그렇게 느낀다는 것이다. 서울 한양대의 임지현 교수는 “나는 집단적 죄의식의 낌새를 챈다.” 이어서 그는 “한국에서는 개인의 책임과 국가적 책임 사이에 혼선이 존재한다.” 고 말했다. 

말하자면, TIME의 논지에 따르면, 한국인들은 하나의 정신병자의 행위를 필요 이상으로 ‘집단’적 죄의식으로 몰고 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울러 TIME은 지난 2002년, 두 명의 여중생들이 미군의 장갑차에 깔려 죽은 사건 때 촛불시위 등으로 반미감정을 노출했던 것을 지적했습니다.

이 기사는 Virginia Tec 사건으로 인해 집단적 부담을 느끼고 있는 한국인을 편안하게 해 주려는 의도처럼 보입니다. 일면 그렇습니다.

그러나 다른 한편, 그런 한국인의 사고방식이 2002년의 여중생 사건에서 보여주듯 현명하지 못한 판단과 대처를 이끌어 낼 수도 있다고 지적합니다. 한 마디로, 한국인의 사고방식의 함정을 지적한 것입니다.

어쨌거나 이 기사는 오늘 우리가 되새겨야 할 하나의 중요한 사실을 말합니다.

1. 즉, 우리는 이번 사건으로 지나치게 죄의식에 빠질 필요가 없다는 것입니다. 여기서 ‘지나치다’는 것은, 어느 정도 한 걸음 물러나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는 것을 말합니다. 소위 “제2의 LA 폭동”이 유발되지 않을까, 하는 걱정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또, 지난 한 주일 동안 한인 운영의 비즈니스가 위축된 사실로 미루어, 이의 ‘경제적’ 파장이 자못 심각할 수 있다는 사실을 무시하려는 것도 아닙니다. 아울러, 집단적 죄의식을 표현함으로써 어떤 의미에서는 ‘스스로를 보호’하려는 노력을 하고, 어느 정도 성공할 수 있다는 사실도 숨기지 않습니다.

그러나 너무 걱정하다가 자존심을 심각하게 상하고, 학교생활이나 사회생활에 심각한 문제를 초래하는 등, 여러 가지로 위축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이번 기회에 ‘개인’과 ‘집단’ 간의 관계를 새로 정립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스물 셋의 그 청년은 ‘개인적’으로 ‘정신질환’을 앓고 있었습니다. 그는 한국 사람을 대표할 수 없습니다. 절대다수의 한국인은 그의 범죄에 책임이 없습니다.

TIME지 기사를 읽은 것이 어제 토요일입니다. 금요일에 만난 변호사 부부는 TIME지를 읽고 동감하는 사람처럼 말하는 것이었습니다.

2. 이민 1세로서 우리의 자녀교육은 어떤가? 돌아볼 기회를 가져야 하겠습니다.

3. 우리는 ‘인간 일반의 죄의 문제’를 생각해야 합니다.
인종이나 사회적 어떤 배경에 관계없이, 사람은 누구나 죄인입니다. 죄를 다스리지 못하면, 누구라도 지난 주 같은 사건을 저지를 수 있습니다. 사탄의 도구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오늘 설교는 바로 이 점에 초점을 두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부르심을 듣습니다.
“너, 하나님의 사람아!” You, man of God!

오늘 읽은 본문은 “디모데전서”에서 났습니다.
사도 바울이 믿음의 아들 디모데에게 보낸 두 통의 편지 가운데 첫 번째입니다.

오늘 말씀은 디모데전서의 결론부분입니다. 여기서 바울은 “물질세계”의 시험에 대하여 경고합니다. 그리고 디모데는 “하나님의 사람”이라는 점을 지적합니다.

[딤전 6:6-딤전 6:10]
그러나 지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이 큰 이익이 되느니라
But godliness with contentment is great gain.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For we brought nothing into the world, and we can take nothing out of it.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But if we have food and clothing, we will be content with that.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정욕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침륜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People who want to get rich fall into temptation and a trap and into many foolish and harmful desires that plunge men into ruin and destruction.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사모하는 자들이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For the love of money is a root of all kinds of evil. Some people, eager for money, have wandered from the faith and pierced themselves with many griefs.

우리는 맨 손으로 왔습니다. 맨 손으로 갈 것입니다.
지금 누리는 의식주(衣食住)를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을 일입니다.
더 부자가 되려고 힘쓰는 자들은 여러 가지 해로운 정욕에 빠집니다. 침륜과 멸망입니다.
돈을 사랑하는 것은 모든 악의 근원입니다. 미혹을 받아, 믿음을 저버리고,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습니다. 자해(自害)했다는 말입니다.

물질 걱정이 해로운 정욕에 빠지게 하고, 멸망으로 이끌었다는 말입니다. 믿음을 저버리고, 근심으로 자기를 해롭게 했다는 말입니다.

물질은 “꼭 필요한 것”입니다.
선한 일에 사용되면, 정말 소중한 것입니다.
아이들 학교에 보낼 수 있습니다.
따뜻한 저녁식사를 할 수 있습니다.
편안한 잠자리를 줄 수 있는 집을 마련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 헌금을 드리며 기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물질은 “악한 일에도 사용될 수” 있습니다.
이런 ‘이중성’을 지닌 물질. 그것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Virginia Tech 사건과 이 경고는 어떤 관계가 있을까요?
조승희는 소위 “가진 자”에 대한 분노를 범행의 動機로 삼았습니다.
정상적인 판단을 할 수 없는, 정신장애자의 소행이기 때문에, 간단히 무시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사람은 자기보다 잘 사는 사람에 대한 감정이 복잡하기 때문입니다. 부러움과 동시에 질시가 있습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부자가 되려는 마음, 돈으로 모든 것을 재려는 태도가 잘못된 것이지만, 동시에 거기에 도달하지 못한 사람들이 느끼는 감정도 바르지 못한 것임을 지적한 것입니다.

이제 조금 각도를 달리해서 말씀을 이해하려고 합니다.

사람의 행동은 그 動機가 마음에 있습니다. 따라서 행위는 행위 자체로 평가할 수 없습니다. 숨은 동기가 무엇인가를 반드시 물어야 합니다. 지금 전 세계의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들이 Virginia Tech의 심적 배경에 초점을 두고 있는 이유입니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마음은 중립(neutral)이라는 것입니다.
마음은 일종의 “백지” 같습니다.
그래서 무엇을 써 넣는 대로 그 내용이 결정됩니다.
그러므로 마음만 보아서는 행동을 평가할 길이 전혀 없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심리학’을 신뢰하지 않습니다.
심리학은 일종의 ‘사회과학’으로서, 통계에 의존합니다.
사람의 삶의 상태가 어떻게 통계숫자로 표기가 됩니까?

마음은
      1. 그 자체로 평가를 내릴 수 없습니다. 중립입니다.
      2. 연약하기가 이를 데 없습니다. 영향을 아주 쉽게 받습니다. 극도로 예민합니다. 행복감과 좌절감 사이에는 종이 한 장의 간격도 없습니다. 우월의식과 열등의식은 가까운 친구지간입니다.

누가 “여자의 마음은 갈대”라고 했습니까?
그러면, 남자의 마음은 무엇입니까?

남자나 여자나, 사람의 마음은 갈대입니다.

마음을 움직이는 것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영, 하나는 물질입니다. 그것을


마음
물질

우리의 육체도 ‘물질’입니다. 물론 “영이 떠나면”이라는 조건이 붙지요.
이로써, 사람은 영-마음-육체 등 세 가지로 구성되어 있다는 논리가 가능해집니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
영이냐, 물질이냐? 둘 중에 하나입니다. 선택의 문제입니다. This is a matter of "either or."

그러나 때로 영에 인도함 받는 사람이 물질의 유혹을 받기도 합니다. 물질의 유혹에 빠진 사람이라고 영적인 그리움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때로 “정도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영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선한 영, 즉 성령님이 있습니다. 반대편에 악한 영, 즉 사탄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그러므로 영적 감화로써 사람의 마음을 이끄십니다. 우리를 이끄는 영적 감화란, ‘영적 즐거움’ ‘구원의 기쁨’ ‘감사’ 그런 것입니다.

반면에, 사탄은 물질로써 사람을 이끕니다. 물질에 눈이 어둡게 합니다. 물질에 눈이 어두운 사람의 생각은 “무엇을 입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먹을까?” 그런 육신의 정욕에 사로잡히게 합니다. 날마다 “돈 걱정”이 떠나지 않습니다. 주님께서는 “공중의 새”와 “들의 백합화”를 보라고 하셨습니다.

또, 물질적 풍요를 가치기준으로 삼습니다. 부자 앞에 기죽고, 가난한 사람을 멸시합니다.

이쯤하면, 기본적으로 “헬라적 이원론”이 아닌가? 물을 수 있습니다. 아닙니다.
영은 선하고, 물질은 악하다. 이런 단정 위에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물질도 “가치중립”입니다. 하나님의 영에 쓰임 받는가 여부에 달렸습니다.
하나님의 영에 쓰임 받는 물질은 선합니다. 하나님의 손에 있는 육신은 아름답습니다.

그러나 이것 보세요. 사탄이 조종하고 있는 물질은 악합니다.
이런 점에서 마음과 마찬가지로 물질도 중립(neutral)입니다.

사탄은 영적 존재입니다.
사탄이 우리를 사로잡는 것은 물질을 통해서입니다.
우리를 물질에 집착하게 합니다.
육신에 마음을 묶어둡니다.
우리는 물질도, 육신도 모두 “선하게 사용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영으로써 축복이 되기를 바랍니다.
그건 우리가 “하나님의 사람”이 됨으로써! 가능한 일입니다.
너, 하나님의 사람아!
우리는 그렇게 지으심을 받았습니다.
우리를 진흙에서 창조하신 하나님의 영을 헤아려 보십시오.
우리는 물질의 사람이 아닙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영적인 존재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로잡는 것은 영육 간의 모든 것을 통해서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영에 인도함 받습니다.

행동-마음-영

그러므로 영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성령
악령

모든 영을 다 믿지 말고 시험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겔 36:26-겔 36:27]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
I will give you a new heart and put a new spirit in you; I will remove from you your heart of stone and give you a heart of flesh.
또 내 신을 너희 속에 두어 너희로 내 율례를 행하게 하리니 너희가 내 규례를 지켜 행할지라
And I will put my Spirit in you and move you to follow my decrees and be careful to keep my laws.

[롬 8:15-롬 8:15]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For you did not receive a spirit that makes you a slave again to fear, but you received the Spirit of sonship. And by him we cry, "Abba, Father."

[고전 2:12-고전 2:12]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We have not received the spirit of the world but the Spirit who is from God, that we may understand what God has freely given us.

[요일 4:1-요일 4:3]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많은 거짓 선지자가 세상에 나왔음이니라
Dear friends, do not believe every spirit, but test the spirits to see whether they are from God, because many false prophets have gone out into the world.
하나님의 영은 이것으로 알지니 곧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This is how you can recognize the Spirit of God: Every spirit that acknowledges that Jesus Christ has come in the flesh is from God,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니 이것이 곧 적그리스도의 영이니라 오리라 한 말을 너희가 들었거니와 이제 벌써 세상에 있느니라
but every spirit that does not acknowledge Jesus is not from God. This is the spirit of the antichrist, which you have heard is coming and even now is already in the world.

[요일 4:6-요일 4:6]
우리는 하나님께 속하였으니 하나님을 아는 자는 우리의 말을 듣고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자는 우리의 말을 듣지 아니하나니 진리의 영과 미혹의 영을 이로써 아느니라
We are from God, and whoever knows God listens to us; but whoever is not from God does not listen to us. This is how we recognize the Spirit of truth and the spirit of falsehood.

마귀는 악령입니다. 세상일입니다.
성령으로 역사하는 것은 하나님의 일입니다.

마귀는 사람을 사로잡을 때 “물질”을 미끼로 삼습니다.
물질의 유혹에 빠지면, 영혼을 팔게 되는 엄청난 데까지 이릅니다.

“기독교와 자본주의 정신”를 쓴 막스 베버가 있습니다. 다음은

합리적 자본주의의 특징은, 1. ‘형식적이고 자유로운 노동의 합리적인 자본주의적 조직화’와 2. ‘정기적 시장에 맞추어진 합리적 산업조직의 존재’입니다.
베버는 이런 합리적 자본주의가 가능하기 위해 무엇보다 사람들의 생활양식이 변화되어야 한다고 했습니다.
서구에서 생활양식의 변화를 가져온 것이 바로 자본주의 정신입니다. 자본주의 정신은 경제활동을 자신의 물질적 생활 욕구를 만족시키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삶의 목적 자체’로 여기는 소명의식입니다. 이런 자본주의 정신으로 인해 비로소 노동과 이윤추구 행위가 계속 이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이 금욕적 생활과 저축 관념을 매개로 근대적 자본축적이 가능하게 되었습니다.
베버는 자본주의 정신의 뿌리가 16, 17세기의 종교개혁에 바탕을 둔 금욕적인 프로테스탄트 윤리, 특히 칼빈주의라고 지적합니다. 칼뱅주의는 인간의 운명은 태초로부터 정해진 대로 살아갈 수밖에 없으며, 직업노동과 부의 추구를 하나님의 섭리로 받아들일 때 구원이 가능하다는 예정설을 중시하였습니다.
무엇보다도, 성경의 자본주의의 핵심은 “물질을 다스림”이라는 데 있습니다. 물질의 노예가 아니라 물질을 하나님의 뜻에 맞게 다스림으로써 진정한 자본주의를 이끌어낼 수 있습니다. 물질을 통해 하나님의 선을 이룰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번에 사건을 일으킨 젊은이가 가진 “관심”은 “물질”이었습니다.
그래서 “가진 자”에 대한 분노가 높았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심판한다는 명분을 세웠습니다.

그것도 제대로 한 것은 물론 아니었습니다.
학생들이 그 복수의 대상이 되고 말았다는 것은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더욱이 자기 스스로가 이미 “미국”에 와서 살면서, 비싼 대학에 다니고 있습니다. 아프리카나 방글라데시 같은 가난한 나라에 사는, 세계 인구의 절반을 훨씬 넘는 절대빈곤층에 비하면, 그 자신이 오히려 비판 받아야 하는 처지입니다.

문제는 “물질”에 사로잡히고 나니까, 물질적인 “비교”의식만 높아져 버린 것입니다.

반대로 영에 사로잡히면, 오히려 “모든 사람이 동등”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송명희가 “공평하신 하나님”을 찬양한 것이 좋은 예입니다.

      그는 가난한 자였습니다.
      그는 못 배운 자였습니다.
      그는 건강하지 못한 자였습니다.
      그러나 “영”에 초점을 두고 나니까, 그는 모든 사람들에 비하여
      결코 못 나거나, 부족하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물질에 초점을 둔 “공산주의”는 가진 자에 대한 “원한”의 칼날을 날카롭게 갈았던 것을 기억해 두시기 바랍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의 사람들은, 가진 잔 못 가진 자, 배운 자나 못 배운 자, 모두를 “불쌍한 죄인”이며, “길 잃은 어린양”으로 여깁니다. 그래서 가난한 자 앞에서 교만하지 않고, 부유한 자 앞에서 비굴하지 않는 것입니다.

영-물질을 구분하는 ‘이원론’이 아니라는 것은, 다음의 사실에서 분명합니다.
자본주의정신은 기독교에서 났습니다.
전혀 어울릴 것 같지 않은 이 두 가지가 어떻게 해서 관계가 있습니까?

물질은 “컨트롤”되어야 합니다.
가인에게 주신 하나님의 경고처럼, 우리는 “죄를” 그리고 “물질을” 다스려야 합니다.

컨트롤해야 합니다.
고삐가 풀리면 어떤 해악이라도 저지를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바울은 “하나님의 사람”인 디모데가 물질세계에 빠지지 않기를 권면하고 있습니다. 사탄의 종이 되지 않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입니다.

한 걸음 한 걸음 조심하면서 살아야겠습니다.
기도하면서 발걸음을 디뎌야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붙들어 주시지 않으면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실족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는 불만이 컸습니다.
경제적 불평등에 민감했습니다.
그의 정신적 장애가 그 불평등 느낌을 증폭시키기도 했을 것입니다.
아니, 어쩌면 그는 정신적 장애가 결정적 이유지만, 경제적 불평등은 하나의 구실에 불과했을 것입니다.

물질세계를 전부로 보면, 세상은 확실히 불평등합니다.
하나님께 대해서도, 교회에 대해서도 불만이 높았습니다.

그러나 송명희는 “공평하신 하나님”을 노래했습니다.
어째서 그럴 수 있었습니까?
영의 세계는 공평합니다.

물질세계에 갇히면, 사람은 “우상숭배”를 하는 것입니다.
구약의 모든 신들은 “물질의 풍요”에 국한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두 주인인 모델을 제시하셨습니다.
사람이 하나님과 물질을 섬길 수 없다고 했습니다.
여기서 ‘물질’이란 곧 ‘물신’입니다.

물질에 사로잡히면 “인간관계”가 헝클어집니다.
가난하지만 형제애가 좋던 가정에 물질이 들어오면, 가정의 사랑이 사라지는 비극을 경험하는 예가 많습니다.
물질이 생겨서 가정이 파괴되는 경우가, 물질 궁핍으로 그렇게 되는 것보다 훨씬 많습니다.

조금 영적으로 생각해 봅시다.
사람이 물질에 집착하면 ‘이기적’이 됩니다.
"Share" 해야지! 어른들이 말하지만, 어린 형제들이 그걸 못하면 이기적으로 발전합니다.
조승희의 경우도, 물질에 집착했기 때문에 보다 건강한 인간관계를 발전시킬 수 없었습니다.

그 반대의 흐름도 가능합니다. 건전한 인간관계가 안 된 사람은 물질에 집착합니다. 이러므로 물질집착과 인간관계 파괴는 필요충분조건(必要充分條件), 즉 서로 오가며 원인과 결과를 제공하는 현상입니다.

디모데는 사도 바울의 훌륭한 제자입니다.
바울은 그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기를 바랐습니다.
그런 삶에 가장 중요한 것은 “부하려 하는 욕심”을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상대적 박탈감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지금 하는 일에서 물질적 만족감을 얻으려는 것은 옳지 못합니다.
예를 들어 사회사업(社會事業)을 하는 사람이, 상담과 여러 일을 하면서 월급에 매인다면, 그의 봉사가 자연스럽지 못합니다.

우리의 모든 전문분야는 일 그 자체의 보람이 있어야 합니다.
아니라면, 우리는 불행합니다. 물질의 노예가 되고 말기 때문입니다.
성경은 우리에게 영적인 가치를 부여해 줍니다.

영적인 자유를 누려야하겠습니다.
기쁨에 충만한 삶이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영에 붙들려야 하겠습니다.
사울(Saul)은 이스라엘의 첫 번째 왕이었습니다.
그는 본래 평범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그를 택하시고 성령님으로 함께 하셨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권능을 입고 예언을 하고, 이스라엘의 왕으로서 능력을 발휘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악령에 사로잡힌 사람이 되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그를 떠나고 악한 영이 그를 잡았기 때문입니다.
그토록 훌륭하던 사람이, 하나님의 영이 떠나자마자 정말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아니, 파괴적이어서, 다윗은 물론 자기 아들까지 없애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기름 부으신 제사장들을 수십 명이나 살해했습니다.
이스라엘을 엄청난 고통의 자리로 몰아갔습니다.
결국 스스로 파멸의 길로 들어섰습니다.

어떻게 해서 하나님의 영이 그를 떠났을까요?
하나님의 말씀을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의 불순종은 크게 세 가지입니다.

1. 아말렉과의 전투에서 헤렘(전멸)의 명령을 거역했습니다.
2. 서원한 것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을 우습게 만들었습니다.
3. 제사장이 드려야 할 제사를 왕으로서 집행했습니다. 거룩해야 할 제사가 형식적인 것이 되어버렸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떠나시자, 그의 빈 마음에 사탄의 영이 자리 잡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그 반대의 사람이었습니다.
악한 영이 그를 사로잡았습니다. 그래서 스데반을 비롯한 교회의 지도자들을 박해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영이 그를 감싸셨습니다. 그때로부터 그는 하나님의 종으로서 능력을 발하며 살아갔습니다.

문제는 하나님의 영입니다.

버지니아 사건을 생각하면서, 사람으로서 어떻게 그런 끔찍한 일을 저지를 수 있나? 의아해 합니다. 그런 사람은 타고나는 것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죄인”입니다.
누구나 사탄의 도구가 되면 그런 엄청난 일을 저지를 수 있습니다.

버지니아의 경우 “총격” 살인이었습니다.
사탄의 조종을 받을 경우, 보다 더 무서운 모습이 될 수도 있습니다.
“전쟁” 같은 경우입니다.
전쟁을 결정하는 악한 마음은, ‘합법적으로’(!) 수도없이 많은 인명을 살상할 수 있습니다.

거짓된 글과 말로써 사람의 심령을 현혹하는 것입니다.
실제로 성경은 요한계시록에 구체적으로 드러나듯이 “참람한 말”로써 하나님을 거역하고 사람들의 마음에 잘못된 생각을 심어주는 일을 경고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조심해야 할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우리의 혈기를 조심해야 하겠습니다.
우리의 입술을 조심해야 하겠습니다.

가인의 경우를 주목합시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죄가 문 앞에 엎드린다”고 경고하시고, “죄를 다스려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죄는 누구에게나 다 있습니다.
우리의 출입(出入) 모든 상황에 죄는 기회를 노립니다.
사탄에게 기회를 주어서는 안 됩니다.

예수님을 시험하고 넘어뜨리려고 하던 사탄이었습니다.
그는 우리를 갖은 방법을 다 사용하여 파괴하려고 합니다.
거기 걸려 넘어가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과 화해해야 합니다.
그래야 살 수 있습니다.
영원한 생명이 있습니다.

하나님과의 화해.
그것이 물질 얼마로 ‘거래’가 될 문제라고 생각하십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친히 ‘십자가’에 달려, 모든 피를 흘려야 가능했던 사건입니다.
하나님과의 화해. 이것은 정말 ‘값을’ 매길 수 없는 엄청난 사건입니다.
그 귀한 것을 오늘 우리가 가졌습니다.
그것을 우리는 “지켜야”겠습니다.

“보물을 발견”했습니다.
모든 것을 다 팔아서 사야 합니다.
물질의 모든 가치를 다 내놓고라도 구입해야 합니다.
그러나 모든 물질을 다 주어도 ‘값’을 치를 수 없습니다.
그래서 감추인 보화입니다.
그러나 문제는, 영의 보물을 발견한 사람이 그것을 “얻기” 위해 전력을 다 기울였다는 데 있습니다.

얻은 이후(以後), 우리의 자세는 어떠해야 합니까?
지켜내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영적 전쟁은 “지키기 전쟁” 즉 “방어전쟁”입니다.

하나님의 영으로 감화 감동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한 사람으로 살아가야 합니다.
그래야 원수 마귀로부터 우리의 생명을 지켜낼 수가 있습니다.

물질만능의 세상,
돈 때문에 형제의 의리도 깨어지고
부자지간의 따스함도 사라지는 세상.
이런 마귀가 지배하는 세상에서 승리해야 합니다.
하나님과 화목함으로써 그렇게 승리해야 합니다.

세상살이는 ‘피곤’합니다.
돈을 벌었어도 괴롭습니다.
이렇게 언제까지나 살아갈 수는 없습니다.

예수님께서 계십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소망을 주셨습니다.

[잠 30:7-잠 30:9]
내가 두가지 일을 주께 구하였사오니 나의 죽기 전에 주시옵소서
"Two things I ask of you, O LORD; do not refuse me before I die:
곧 허탄과 거짓말을 내게서 멀리 하옵시며 나로 가난하게도 마옵시고 부하게도 마옵시고 오직 필요한 양식으로 내게 먹이시옵소서
Keep falsehood and lies far from me; give me neither poverty nor riches, but give me only my daily bread.
혹 내가 배불러서 하나님을 모른다 여호와가 누구냐 할까 하오며 혹 내가 가난하여 도적질하고 내 하나님의 이름을 욕되게 할까 두려워함이니이다
Otherwise, I may have too much and disown you and say, 'Who is the LORD?' Or I may become poor and steal, and so dishonor the name of my God.

“적당한 것” 그것이 필요합니다.
어떻게 그런 수위(水位)를 조절할 수 있을까요?
하나님께서 가르쳐 주셨습니다. 
“일용할 양식의 지혜”입니다.

우리에게는 ‘집’이 있습니다.
돌아갈 집, 천국이 있습니다.
물질의 욕망으로 가득한 세상을 떠나
영원한 쉼이 있는 하늘의 집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사랑으로 죄 씻음 받고, 우리는 천국을 바라봅니다. 

기도합시다.
하나님.
저희들은 연약합니다.
저희들의 심령을 잡아주시옵소서.
물질의 유혹이 큽니다.
저희들을 영으로써 이기게 하시옵소서.
주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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