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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고전 1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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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아니하며 (고전13:4-7)

(4)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5)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6)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7)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바보같은 사랑

사랑의 일곱 번째 속성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 것입니다.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다는 것은 다른 사람의 유익을 먼저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자기 생각, 자기 욕심, 자기 편리에 빠른 현대인들에게 이 말씀은 고루한 말씀처럼 들립니다. 현대는 지극히 이기적인 시대입니다. 자기에게 손해나는 일은 전혀 하지 않으려 합니다.

그 현실은 저희와 같은 개척교회에서 많이 경험하고 있습니다. 8,90년대까지는 개척교회를 한다고 하면 주의 종으로서 마땅한 일이라 생각했습니다. 개척교회에는 하나님의 은혜가 더 많이 부어진다고 하여 성도님들이 교회를 옮기기도 하고 여러모로 도와주었습니다. 그러나 2천 년대에 들어와서는 개척교회의 환경은 아주 열악해졌습니다. 아예 처음부터 좋은 건물에, 일정 규모의 성도, 또 후원교회의 든든한 브랜드가 없이는 개척교회가 성공하기는 어렵습니다. 사람들이 개척교회는 여러모로 불편하고 부담이 되어 피하기 때문입니다. 저희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 개척한지 근 1년여가 되지만 주변에서 자연스럽게 저희 교회에 오시는 분은 거의 없습니다. 주변에 친한 분들도 권유를 하지만 쉽지 않습니다. 요즘 젊은 분들에게는 가장 큰 문제가 자녀 교육문제인데 그 문제가 불편하기 때문입니다. 이런 어려움과 사회적 추세에도 불구하고 저희 교회에 다니시기로 결심한 여러분들을 볼 때 정말 고마운 마음이 듭니다. 하나님께서 많이 축복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저는 사도 바울이 정의한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 사랑을 ‘바보 같은 사랑’이라 정의하고 싶습니다. 약삭빠른 요즘 시대에 좀 ‘손해 보며 살자는’ 사랑입니다. 저는 이 말씀을 묵상하며 산상수훈의 팔복이 생각났습니다. 산상수훈의 팔복은 말이 복이지 실상은 바보 같은 사람들을 나열하고 있습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1복), 애통하는 자(2복), 온유한 자(3복),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4복), 긍휼히 여기는 자(5복), 마음이 청결한 자(6복), 화평케 하는 자(7복),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8복) 하나같이 오늘날의 기준으로 보면 복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사람들은 심령이 부요한 것을 원하지 누가 가난한 것을 원합니까? 의에 주리고 목마르거나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는 것은 누구나 다 피하고 싶어 합니다. 애통하는 자가 무슨 복이 있습니까? 온유한 자는 바보같이 빼앗기는 자요, 긍휼히 여기는 자나 화평케 하는 자는 공연히 남의 일에 참견하는 자입니다. 마음이 청결한 자는 탐욕스런 세속 도시에서 발붙일 곳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는 모두 세상의 판단일 뿐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는 자들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에는 좀 바보 같아 보이는 이들이 복이 있다고 선포하십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이런 세속의 가치관에 맞서 하나님의 가치관을 붙잡아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의 눈에는 바보같은 이들이 실상은 진짜 행복한 자라고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축복을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애통하는 자가 위로를 받고, 긍휼이 여기는 자가 긍휼히 여기심을 받습니다. 온유한 자가 땅을 차지하고,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가 배부름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실제 그래요. 인간이 완벽하면 하나님이 도울 수도 없고 도움도 바라지 않습니다. 좀 부족해야 하나님이 도와주실 수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 신앙인들은 좀 바보 같이 살았으면 합니다. 요즘은 세상 사람들이 너무 약삭빨라 그런지 좀 바보같이 사는 사람들을 보면 오히려 신선하고 숨통이 트이는 것 같습니다. 세상에 바보가 되면 하나님께서 채워주신다는 것이 성경의 약속입니다.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 부부사랑

좀 부부간에도 바보 같은 사랑을 했으면 합니다. 상대방에 대한 계산이 너무 빨라요. 자기 손해를 보지 않으려고 해요. 자기 유익을 구하는 사랑을 하지요. 결혼한 지 오래 됐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이 남자 때문에’ ‘이 여자 때문에’ 그래요. 몇 년 이상 살았으면 이제 부부는 한 몸입니다. 상대방의 문제가 자기 문제가 되어 있어야지요. 어떤 분이 북유럽쪽에 몇 년 살다왔는데 이곳에는 더블침대가 없다고 합니다. 부부일지라도 싱글침대로 살고 사이좋은 부부면 둘이 붙여놓고 산답니다. 한 침대 쓰면 잠자리가 불편하고, 또 이혼율이 높아 이혼하면 자기 침대만 들고 가면 되니까 그런답니다.

좀 불편하더라도 한 이불을 쓰는 것이 부부입니다. 그래야 정도 깊어집니다. 제 집사람이 가끔 제게 옛날 이야기를 하며 서운한 감정을 말할 때가 있습니다. 제 큰 아이가 막 태어났을 때의 일입니다. 아이가 낮 밤이 바뀌면서 밤에도 시끄럽게 울어댔습니다. 당시 저는 신학교에 다니고 있었기 때문에 그 불면의 밤을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아이들을 키워보신 분들은 시도 때도 없이 울어대는 갓난아기를 돌보는 고통을 잘 아실 것입니다. 그래서 저는 합리적으로 결정하자고 하며 어차피 아이는 당신이 주로 보니까 아이가 적응 될 때까지는 제가 건넌방에서 자겠다고 하고는 몇 주를 그렇게 따로 떨어져 잔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집사람이 그것을 두고두고 이야기합니다. 서운하다는 것이지요. 제가 지금 생각해보니 너무 내 계산이 빨랐다는 생각을 합니다. 부부는 서로 짐을 나누는 것이요, 또 불편한 과정을 서로 견디면서 정도 듭니다.

자기 유익만을 생각하기 때문에 부부 사이가 갈라집니다. 자기 불편한 것을 못 참는 것이지요. 그래서 요즘 이혼율도 자꾸 높아집니다. 자기 유익에 부합하지 않을 때는 쉽게 갈라서기로 결정합니다. 결혼은 한 남자와 한 여자의 만남입니다. 그래서 결혼에서 중요한 것은 서로가 그 관계를 통하여 얼마만큼의 행복감을 맛보느냐 일 것입니다. 자기 중심적인 생각으로 판단하면 행복감이 주어지지 않으면 헤어지는 것이 정상입니다. 그러나 결혼과 가정은 단순히 자기 이기적인 마음만 가지고 결정할 것입니다. 자기뿐만 아니라 상대방의 인생을 결정짓는 중대한 문제요, 양쪽 가정과 부모가 얽혀 있습니다. 여기에 자녀까지 생겼다면 단순히 자기감정 차원을 넘어 자녀의 인생이 걸린 결정적인 문제입니다.

우리는 서로가 좋아서 결혼을 합니다. 그러나 그 이후에는 서로 싫다고 하면 간단히 헤어질 수 있는 것이 결혼이 아닙니다. 연애는 우리 마음대로 하지만 결혼은 하나님의 결정입니다. 『옥중서신』으로 유명한 독일의 신학자가 본 훼퍼가 옥중에서 결혼식 설교를 한 적이 있습니다. 이 중에 한 구절을 읽어 드리겠습니다.

“결혼이라는 것은 당신들이 서로 사랑하는 것 이상입니다. 결혼은 보다 높은 존엄성과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당신들의 사랑은 당신들만의 것이며 개인적인 것입니다. 그러나 결혼은 초개인적인 어떤 것이며 하나의 신분, 하나의 직무입니다.......사랑은 당신들로부터 오고 결혼은 위로부터 다시 말하면 하나님께로부터 옵니다. 하나님이 인간보다 높고, 보다 신성하듯이 결혼의 권리와 그 약속은 사랑의 신성이나 권리나 약속보다도 훨씬 더 높은 것입니다. 당신들의 사랑이 결혼을 유지하는 것이 아니라 결혼의 (이 신성함이) 당신들의 사랑을 유지해 갑니다.”

우리는 결혼에 대해서 하나님의 신성한 직무라고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까? 하나님은 가정을 통해서 우리가 행복하기를 원합니다. 영적인 자손을 얻고 잘 양육해 주시길 바랍니다. 민족은 망해도 가정은 망하지 않습니다. 세상은 가정에 의해서 유지됩니다. 창조의 6일째 만들어진 것은 사람이 아니라 가정입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하나님이 자기 형상 곧 하나님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시되 남자와 여자를 창조하시고”(창1:27)

부부간에 자꾸 자기의 유익을 주장하면 갈라지게 됩니다. 부부는 상대방의 유익을 위해서 존재합니다. 서로 모자라니까 서로 보충해주는 것이 부부입니다. 창세기에 아담과 하와가 처음 창조될 때의 모습이 그렇습니다. 아담의 갈빗대를 빼어 하와를 만듭니다. 아담은 갈빗대가 하나 없는 부족한 사람이요, 하와는 갈빗대만 들고 있는 쓸모없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둘이 만나니까 온전한 한 인간이 됩니다. 여자는 남자의 부족한 부분을 채워주는 존재요, 남자는 여자를 완성시켜야하는 존재입니다.

몇 년 전에 한 영화를 보니까 부부간에 치약 짜는 문제로 말다툼을 합니다. 남자는 치약을 밑에서부터 꾹꾹 누르며 곱게 사용하기를 원하는데 여자는 중간에서 뭉턱 뭉턱 짜서 사용합니다. 이런 사소한 성격차가 발전하여 이혼 위기까지 이르는 영화입니다. 그런데 여러분 그래서 부부가 필요한 것입니다. 한 사람은 중간 부분을 뭉턱 짜고 다른 한 사람은 끝에서부터 짜므로써 치약은 완전하게 사용되는 것입니다. 상대방이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은 내가 채워주어야 할 부분입니다. 부부가 각자의 유익만을 추구하면 서로 완성될 수 없습니다.서로의 유익을 먼저 생각해야 제 기능을 발휘하는 곳 그것이 가정입니다.

아낌없이 주는 하나님의 사랑

우리들이 좋아하는 책 중에 ‘아낌없이 주는 나무’라는 그림동화집이 있습니다. 한 소년을 사랑하는 한 나무가 자신을 다 버리기까지 사랑하는 모습을 그렸습니다. 나무는 어린 시절 그 소년의 그네가 되어 주었고, 놀이터가 되어 주었습니다. 소년이 성장한 후에는 돈이 필요하다고 하니까 자기 열매를 주어 장사할 밑천으로 줍니다. 소년이 나이가 들어 집이 필요하다고 할 때는 가지를 잘라 집을 지을 수 있도록 허락합니다. 멀리 여행하기 위해 배가 필요하다고 하자 이번에는 나무 몸통을 잘라 배를 만들게 합니다. 나이 늙어 돌아온 그 소년이 쉴 곳이 없어 하자 “쉬기에는 나무 밑동만한 곳은 없지” 하며 뭉툭하게 잘린 자신의 밑동을 의자로 제공합니다.

자기 이익에 빠른 현대인들에게 아무런 조건없이 자기를 내어주기만 하는 이 한편의 동화는 우리 마음을 따뜻하게 만듭니다. 우리 하나님의 사랑이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아낌없이 주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만드셨습니다. 하나님은 인간들이 자신의 명령을 어겼을 때도 끝까지 사랑하셨습니다. 하나님은 멸망의 길을 향해 가는 우리들을 구원하기 위해 언약을 주시고 율법이라는 말씀을 주셨습니다. 아낌없이 주는 하나님의 사랑은 무엇보다 십자가에서 드러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자기의 아들을 내어주기까지 우리를 아낌없이 사랑하셨습니다.

사랑의 대원리는 사랑을 받은 사람만이 사랑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사랑의 원천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하나님의 아낌없는 이 사랑을 받은 자만이 자신 또한 아낌없는 사랑을 할 수 있습니다. 루터는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구원의 진리를 발견한 사람입니다. 루터의 신학 이론 중에 ‘행복한 교환’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인간과 그리스도 사이에는 행복한 교환이 이루어집니다. 우리는 우리가 가진 죄와 불의를 그리스도에게 줍니다. 그러면 그리스도는 자기가 가진 의를 우리에게 줍니다. 그래서 우리는 죄인이지만 의롭게 됩니다. 우리를 하나님 앞에 설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은 바로 그리스도의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 아낌없는 이 사랑 때문입니다.

고린도 교회의 사랑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 사랑은 고린도전서 10장의 우상의 제물에 대한 사도 바울의 태도에서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모든 것이 하나님께서 지으신 것이기에 다 선함을 알고 있었습니다. 우상이란 신은 존재하지도 않기에 그들 앞에 바친 음식은 단순한 음식일 뿐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에게는 아무런 양심의 거리낌이 없이 먹을 수 있는 믿음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만일 어떤 사람이 이런 믿음을 갖지 못한 상태에서 이것을 우상에게 바친 제물이라고 말한다면 사도 바울은 그때는 먹지 말아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나는 먹을 수 있는 믿음이 있지만 이 모습을 보고 다른 사람들이 귀신의 제물을 먹는다고 판단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니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치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고전10:23,24) 나의 유익을 위해서는 먹을 수 있지만 덕을 세우고 남들이 실족하지 않도록 자신은 먹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먹는 문제에 대해 “그런즉 너희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10:31)고 명령합니다. 이는 자기의 유익을 위하지 말고 다른 사람의 유익과 교회의 덕을 세우기 위해서 하라는 뜻입니다. 저는 술 담배 문제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한국교회는 술 담배를 하지 않는 전통이 있습니다. 믿는 사람은 곧 술 담배 먹지 않는 사람으로 생각합니다. 성경에 술 담배하지 말라는 말씀은 없습니다. 사실 술 담배가 우리 신앙을 보증하는 표지도 아닙니다. 그러나 만일 술 담배를 먹는 내 모습을 보면서 다른 사람이 판단하거나 실족한다면 먹지 않는 자세가 필요합니다. 고린도전서 8장 13절에서 사도 바울은 모든 것을 먹을 수 있지만 “만일 식물이 내 형제로 실족케 하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치 않게 하리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자신의 자유나 유익보다 다른 형제의 유익을 생각하는 태도입니다.

성령의 은사와 관련되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울은 방언을 최고의 은사로 생각하며 방언을 자랑하는 고린도교회를 향하여 방언하는 자는 방언 통역을 사모하라고 권면합니다. 방언은 영으로 하는 기도이기에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합니다. 한 마디로 자기 유익을 위한 은사입니다. 그러나 방언을 통역하게 되면 모든 사람이 듣게 됨으로 유익이 됩니다. 그래서 바울은 방언보다 예언의 은사를 더 사모하라고 말씀합니다. 예언의 은사는 그 말씀을 들을 때 다른 지체들이 깨닫고 돌이키게 함으로 공동체에 덕을 세우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자랑하고 자기 유익만을 구하면 교회는 갈라지고 서로 시샘하는 공동체가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사를 주신 까닭은 그 은사로 자기의 유익만을 위해 사용하라고 주신 것은 아닙니다. 그 공동체에 필요하기 때문에 그 은사를 주신 것입니다. 우리는 내가 가진 은사, 달란트는 내 것이 아니요, 다른 사람의 필요를 위해 있다고 생각해야 합니다.

나의 이웃은 누구인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않는 사랑을 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관점이 바뀌어야 합니다. 내 중심에서 상대방의 필요를 바라보는 눈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이는 누가복음에 나오는 선한 사마리아인과 같은 태도라 할 것입니다(눅10:25-37).

어떤 율법사가 예수님께 나아와 질문을 합니다.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님께서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느냐”하고 묻습니다. 그러자 율법사가 “네 마음을 다하며 목숨을 다하며 힘을 다하며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고 또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하였나이다” 이 대답을 듣고 예수님께서 율법사에게 말씀합니다.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사랑은 행동입니다. 행하면 됩니다. 그러나 이 율법사는 계속해서 질문만 합니다.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오니이까?” 예수님은 율법사의 문제가 무엇인지 간파하시고는 다음과 같은 비유의 말씀을 들려 주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났습니다. 강도들이 그 옷을 벗기고 때려 거의 죽게 만들어놓고는 달아났습니다. 마침 한 제사장이 그 길로 내려가다가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갔습니다. 레위인도 그 곳에 이르러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갔습니다. 이들이 피한 이유가 무엇입니까? 바빴을는지 모릅니다. 제사장은 급히 제사를 드려야 할 일이 있고, 레위인은 사랑학 강의를 하러 가야했을는지 모릅니다. 아니면 두려웠을는지 모릅니다. 주변에 그 강도가 숨어 있을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갑자기 자기 가족들이 생각났을는지도 모르고 다른 한 편으로는 저 사람은 도와줄만한 가치가 없다고 생각했을는지도 모릅니다. 아무리 멍청이라도 위급한 상황을 빠져나오는 데 필요한 이유를 갖다 대기에 철학교수 뺨칠 정도로 교묘한 것이 우리들입니다.

그러나 마침 그때에 어떤 사마리아인이 그 곁을 지나게 되었습니다. 사마리아인은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가까이 가서 기름과 포도주를 그 상처에 붓고 싸맵니다. 자기 짐승에 태워 주막으로 데리고 가서 돌보아 주었으며 하룻밤을 같이 지샙니다. 그 이튿날 그 집을 나오면서 데나리온 둘을 내어 주막 주인에게 주며 잘 보살펴 달라 부탁하고 비용이 더 들면 돌아올 때에 갚겠다고 약속합니다. 이 사마리아 인과 강도 만난 자는 전혀 일면식도 없던 관계였는데 이처럼 정성을 다해 보살핍니다.

사랑은 항상 이렇게 다가옵니다. 내가 다 준비된 연후에 사랑을 행하는 게 아닙니다. 사랑을 행하려는 자는 누구나 자신의 계획이 방해받을 각오를 해야 합니다. 우리는 오늘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갑자기 맡기시는 과제에 놀랄 준비를 하고 있어야 합니다. 사마리아인이 강도만나 자를 만나리라고 누가 예상을 했겠습니까? 이 우연한 만남에 충실했을 때 사마리아인은 성경에서 증거하는 사랑의 모범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예기치 않은 순간에 일어납니다. 내가 다른 일을 위해 모든 것을 준비하고 있는데 갑자기 우리 앞길에 나타납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은 자기 계산이 너무 빨랐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만 것입니다.

주님은 이야기를 마치며 율법사에게 묻습니다. “네 의견에는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그러자 율법사가 대답합니다.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님께서 율법사에게 말씀합니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우리는 예수님과 율법사의 대화에서 율법사의 문제가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율법사는 “내 이웃이 누구입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반면에 예수님은 “누가 강도만난 자의 이웃이겠느냐?”고 묻습니다. 질문의 주체가 다릅니다. 율법사는 “내 이웃”이라 하여 자기로부터 출발합니다. 자기로부터 출발하면 인간은 이기적인 존재인지라 사랑할 수가 없습니다. 사랑하기도 전에 자기에게 무엇이 유익하고 손해인지, 자기가 그럴 능력이 있는지를 따집니다. 율법사는 사실 이웃의 한계를 물어본 것입니다. 우리 동족만 사랑할까요? 아니면 이방인까지, 이방인 중에서도 죄인들도 사랑해야 합니까? 등 자기로부터 경계를 그어가는 이웃입니다.

이렇게 하면 사랑할 수 없습니다. 사랑은 상대방의 필요로부터 시작합니다.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은 강도 만난 자의 필요를 채워주는 자가 그의 이웃입니다. 그러므로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는 모든 자가 내가 도와주어야 할 나의 이웃입니다. 이웃을 민족이나 혈통, 거주의 경계로 구분하는 것은 자기중심적 태도입니다. 생면부지의 사람일망정 그가 나의 도움을 필요로 하면 그가 바로 나의 이웃입니다. 하나님은 그런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인간의 몸을 입고 오신 이유도 우리를 더 끔찍히 사랑해서가 아닙니다. 인간이라는 존재가 강도만난 자처럼 다 죽어가고 있는 불쌍함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은 고통당하는 인간들의 필요를 채워주시기 위해서온 것입니다.

이번 미국 버지니아 공대의 끔찍한 집단 살인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이번 한 주간을 참 우울하게 보내야만 했습니다. 비뚤어진 한 인간의 광기가 얼마나 엄청난 비극을 만들어내는가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이번 사태를 보면서 다시 한 번 깨닫게 되는 것은 사랑의 소중함입니다. 이 집단 살인을 저지른 조승희란 청년의 과거를 보니 우울증과 혼자만의 세계에서 고립된 채 살아왔기 때문입니다. 조승희 청년은 초등학교 2학년 때 미국으로 이민을 갔습니다. 아마 부모님들은 자녀들 잘 양육하고자 하는 소망으로 태평양을 건너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초등학생 2학년 나이에 언어가 통하지 않는 낯선 땅은 이 소년을 점점 세상과 단절하게 만들었습니다. 영어도 잘 못하고 발음도 잘 못하니까 아예 말을 하지 않았고, 친구들로부터 따돌림을 받으면서 자기 혼자만의 세계로 빠져 들어갔던 것 같습니다. 결국 그 안에 쌓인 분노를 이렇게 집단살인이라는 끔찍한 범죄로 표출한 것입니다.

버지니아 공대 정원에는 희생자들을 위로하는 글들이 실렸는데 그 중에는 조승희 씨를 위로하는 이런 글로 실려 있었습니다. “미안하다. 내가 도움이 필요했다는 것을 알지 못해서” 이런 모습을 보며 미국은 문제가 많아도 그래도 성숙한 사회라는 것을 느낍니다. 서로의 아픔과 분노를 나누면서도 문제를 근원적으로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인간은 사랑을 먹고 자랍니다. 승희 청년이 힘들었던 시절 곁에서 함께 도와 주는 사람이 있었다면 이렇게까지 극단적으로 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 영혼은 강도만난 자와 같습니다. 우리에게는 그 신음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귀가 필요합니다. 모든 상처받은 영혼들은 소리를 냅니다. 우리가 자기 세계 속에 갇혀 있어 그 소리를 못들을 뿐입니다. 지금도 우리의 무관심 속에서 제2의 조승희를 만들어내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성격이 이상하다고 피하고, 말이 안 통한다고 피할지도 모릅니다. 엉뚱한 짓을 하고, 외면하고, 오히려 폭력적인 겉모습 이면에 있는 그 영혼의 소리를 들을 줄 아는 사랑의 눈이 필요합니다.

아무리 어린이들이지만 어린이들도 그 소리를 들을 수 있고 나름대로 사랑하는 법을 압니다. 미국의 위스콘신 주의 밀워키라는 도시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한 십대 소년이 암에 걸렸습니다. 화학요법과 방사선 치료를 하느라 그만 머리가 다 빠지고 말았습니다. 소년의 걱정은 건강보다는 대머리가 된 모습으로 친구들을 보는 것이었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는 이 소년을 맞기 위해 반 친구들이 50명이 집으로 몰려왔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부끄러움을 무릎 쓰고 집에 들어선 순간 소년은 깜짝 놀라고 말았습니다. 모든 친구들이 머리를 박박 밀고 대머리가 된 채로 친구를 반갑게 맞아 주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친구가 머리 빠진 것 때문에 부끄러워한다는 것을 알고 모두 자기 머리를 민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사랑입니다. 자기의 유익을 생각하지 않고 다른 사람의 유익과 아픔을 먼저 생각하는 것입니다. 비록 어리다 할지라도 아이들 안에는 이 사랑의 힘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자기의 유익을 구하는 데 빠른 까닭은 실상은 사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랑은 ‘사랑해야 한다’는 당위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랑하면 자기의 유익보다 다른 사람의 유익을 구하게 되어 있습니다. 문제는 사랑입니다. 주님의 아낌없는 사랑을 받은 여러분 우리 가정 안에서, 또 매일처럼 만나는 동료들과 낯선 사람들에게 이 아낌없는 사랑을 보여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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