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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믿는 자가 되라 (요 20:24~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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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노부부가 평생을 자녀가 없이 살았습니다. 나이가 들어 너무 적적해서 아이를 키우고 싶었습니다. 고아원에 가서 마땅한 아이로 골라서 입양을 했습니다. 아이가 없던 집에 아이가 오니 활력도 생기고, 생기가 나고, 참 좋았습니다. 그런데 이 아이가 좀 거칠었습니다. 좀 시끄러웠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좋아지겠지!” 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이 노부부는 과자를 아주 좋아합니다. 늘 먹을 과자를 탁자위에 올려놓습니다. 어느 날 과자가 자꾸 없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아이에게 “너 혹시 과자를 먹었니?” 물었습니다. “저는 먹지 않았는데요.”라고 아이가 대답했습니다. “그럼 너 혹시 어디에 치워두었니?” “전 만지지도 않았는데요.” 그런데 한두 번도 아니고, 노부부의 마음에 의심이 생겼습니다. 노부부는 “분명히 이 녀석이 먹거나 감추어 두고는 모른다고 하는구나.”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어느 날은 이 아이를 불러놓고 호되게 꾸짖고 회유를 했습니다. “내가 잘못해도 솔직히 이야기하고 용서를 구하면 용서해 주겠다. 네가 가지고 갔지! 네가 치웠지!”라고 말했습니다. “아니예요. 저는 먹지 않았어요. 저는 손도 안됐어요.” 끝까지 고집을 피웠습니다. 이 노부부는 다른 것은 다 용서하지만 끝까지 고집피우는 것은 용서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 아이를 고아원에 다시 대려다 주었다고 합니다.

아이를 대려다 주고 산만해진 집안 대청소를 하다 보니 장롱 뒤에 무언가 수북이 쌓여있는 것이 보입니다. 가만히 보니 과자이었습니다. 과자를 옮겨 놓은 것은 그 아이가 한 일이 아니라 쥐가 한 일이었습니다. 쥐가 과자를 가져다가 이리 저리 뜯어먹고 장롱 뒤에 쌓아둔 것입니다. 그것을 보는 순간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 어린 마음에 얼마나 상처가 되었을까?” 달려가서 그 아이에게 무릎을 꿇고 말합니다. “우리를 용서해 다오. 우리가 잘못 생각해서 너를 의심했단다.” 이 아이는 “저는 다시는 가지 않을거예요. 저를 믿어주지 않는 곳에서 살지 않겠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돌아가지 않았다고 합니다.

여러분 사람들은 왜 의심을 할까요? 자신의 보는 것이 정확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자기 판단이 늘 맞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때로는 사람을 의심하고, 하나님을 의심할 때가 많습니다. 우리 인간이 보는 것은 아주 작은 부분에 불과합니다.

유명한 철학자 데카르트는 아침마다 일어나면 오솔길을 산책하는 습관이 있었습니다. 어느 날도 오솔길을 산책하는데 아직은 해가 뜨지 않고 좀 어두운 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길에 뱀 한 마리가 또래를 틀고 그곳에 있었습니다. 그는 뱀을 피해서 지나갔습니다. 그런데 그 다음날도 그곳에 뱀이 똑 같이 있는 것입니다. 또 피해갔습니다. 사흘째도 그 자리에 뱀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은 내가 돌아 갈 수 없어. 내가 오늘은 사생결단을 내야지.” 생각하고, 지팡이를 들어서 뱀을 힘껏 내려쳤습니다. 그런데 뱀이 아니었습니다. 밧줄이 감겨져 있는 것이 뱀으로 보였던 것입니다. 그때 이 철학자는 충격을 받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내 눈이 나를 속였다.” 눈으로 보는 것이 다 옳은 것 같지만 눈으로 보는 것을 다 믿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내가 도대체 무엇을 믿을 수 있는가?” 그때부터 데카르트는 회의주의 철학자가 되었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은 도마의 실수담을 이야기 해주고 있는 것입니다. 의심에 빠진 도마가 믿음의 확신으로 나아가는 모습입니다. 제목을 붙인다면 ‘믿음의 재발견’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부활하셨을 때 처음 예수님을 만난 사람은 마리아입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마리아의 말을 믿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의심했습니다. 그때 예수님이 제자들을 찾아오셨습니다. 마가의 다락방에서 문을 잠그고 불안해 떨고 있을 때 예수님이 오셨습니다. “너희에게 평안이 있을지어다.” 그리고 그들에게 전도의 사명을 주시고 성령을 부어주셨습니다. 제자들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 너무 좋았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 한 제자가 없었습니다. 바로 도마입니다. 아마 도마는 예수님의 죽음에 대해서 몹시 상심했던 것 같습니다. 도마는 어느 누구보다도 예수님을 사랑했던 제자였습니다. “우리가 주와 함께 죽으러 가자.”라고 장담했던 인물이 도마입니다. 예수님이 어디인가 가신다고 하니 “주여 어디 가시니이까?” 질문했던 인물도 도마입니다. 도마가 나중에 돌아와 보니까 제자들이 말합니다. “우리 주님이 부활하셔서 여기에 오셨다.” 도마는 “나는 믿을 수가 없다. 나는 눈으로 확인하지 않고, 손에 난 상처를 만져보지 않고 그 옆구리에 창자국에 손을 넣어보지 않고는 나는 믿을 수가 없다.”고 선포했습니다. 일주일후에 예수님은 도마를 다시 찾아오십니다. 예수님은 도마를 꾸짖지 않으십니다. 부드러운 목소리로 “도마야! 나를 보고 확인하거라. 네 손을 가지고 내 손의 못자국을 만져보아라. 내 손으로 내 옆구리에 창자국에 손을 넣어 보아라. 그리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음 있는 자가 되어라.” 고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 앞에 도마는 무너지게 됩니다.

파리의 노트르담 대 성당이 있는데 그 성당 안에 큰 조각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양손을 들고 도마에게 보이시는 장면입니다. 도마가 이상한 눈초리로 손가락을 가지고 예수님의 상처를 만지는 장면을 조각으로 만들었는데 도마의 인상이 아주 묘합니다. 도마는 예수님의 상처에 넣었는지 아닌지 성경에 기록이 없습니다. 어떤 신학자는 “그 상처에 손을 넣어 보았을 것이다.” 아니면 “넣지 않아도 그가 믿게 되었다.” 라고 말하지만 결과적으로 그 앞에서 무너집니다. 불신의 벽이 다 무너집니다. 의심의 안개가 다 걷혀집니다. 그리고 위대한 고백을 합니다.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여!” 부활하신 주님을 “나의 구주요. 나의 하나님!” 이라고 고백합니다. 그분이 하나님이라면 부활하신 것을 확실히 믿는다는 고백을 담고 있습니다. 이 고백은 예수님의 부활이후 가장 위대한 고백입니다. 고백의 절정입니다.

베드로가 마태복음 16장에서 주는 그리스도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했는데 그 고백을 뛰어넘는 고백이 이 고백입니다. 그리고 도마의 인생이 변화되었습니다. 도마는 이제 의심의 아들이 아닙니다. 이름을 ‘디두모라 하는 도마’가 라고 말합니다. 이는 쌍둥이라는 뜻입니다. 아마 쌍둥이 형제였던 것 같습니다. 어떤 신학자는 그 원어를 풀어 설명하기를 이 말은 ‘의심하는 자’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고 합니다. 도마는 실증적으로 만져 보아야하고, 눈으로 보아야 믿고, 이성적으로 이해가 되어야 믿는 사람이었지만 자신 앞에 나타난 예수님의 부활의 몸을 보고 불신앙의 벽이 무너져 버렸습니다. 그리고 나의 주 나의 하나님이라는 위대한 고백을 했습니다. 그 후 도마는 믿음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는 성경에 이끌림을 받아 주후 52년에 남인도로 넘어가서 교회를 세웁니다. 1500년경에 유럽의 군인들이 남인도 지역을 방문했는데 그곳이 바로 도마교회가 존재했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 교회를 통해서 많은 사람들이 예수를 믿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 후에 도마는 인도만이 아니라 중국까지 가서 복음을 증거 하다가 순교했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지금 남인도 지역에는 성 도마 교회 소속이라고 믿는 신자가 약 150만 명이 존재한다고 합니다. 2000년 전 이야기지만 우리에게 너무나 생생하게 증거 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도마의 잘못은 무엇입니까? 도마가 그 자리에 없었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 24절을 읽어보겠습니다. “열두 제자 중에 하나인 디두모라 하는 도마는 예수가 오셨을 때 함께 있지 아니하였더라.” 여러분은 함께하시길 바랍니다. 어떤 분들은 교우들과 함께 어울리지 않습니다. 주일예배 드리고 도망가 버립니다. 그리고 그 외에 저녁예배와 수요예배는 다 담을 쌓았습니다. 이것이 도마의 문제입니다. 은혜의 자리에는 늘 같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는 피합니다. 그러니 늘 의심하게 되고 믿음이 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0장 24절 이하에 보면 “모이기를 패하는 어떤 사람들의 습관과 같이 하지 말고 오직 권하여 그 날이 가까움을 볼수록 더욱 그리하자.” 다시 말하면 모이기에 힘쓰자는 것입니다. 왜 모여야 할까요? 모여야 기도하고, 말씀을 듣고, 찬양이라도 한 번 더 하게 됩니다. 로마서 10장에 보면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라고 말합니다. 말씀을 들을 수 있는 기회를 많이 만들어야 합니다. 은혜의 자리를 사모하여야 합니다. 오늘 도마의 문제는 그 자리에 그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학교에서도 공부할 때 수업시간에 졸고 있던 학생이 꼭 수업이 끝날 때쯤에 질문을 합니다. 왜냐하면 수업시간에 못 들었기 때문입니다. 예배에 참석하는 것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그것만이 아닙니다. 도마의 잘못이 또 한 가지 있습니다. 다른 제자들은 다 예수님을 보았다고 하는데 그는 그것을 믿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나는 못 보아도 다른 사람들이 보았다면 믿어야 합니다. 도마는 그것을 믿지 못했습니다. “내가 만져보지 않으면 그것을 믿을 수 없다.”고 했습니다. 오늘 본문 25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가 주를 보았노라 하니 도마가 가로되 내가 그 손에 못자국을 보며 내 손가락을 그 못자국에 넣으며 내 손을 그 옆구리에 넣어 보지 않고는 믿지 아니하겠노라 하니라.” 이 도마의 잘못이 무엇입니까? 내가 보지 못한 것은 믿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도마의 이런 점을 긍정적으로 볼 수도 있습니다. 믿지도 못하면서 믿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보다는 솔직하게 못 믿겠으니 못 믿겠다고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올은 것만은 아닙니다. 여러분 내가 보지 못했다고 못 믿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부모님에게 태어난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우리가 보았습니까? 본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남들이 그분이 나를 낳았다고 하고, 나를 키웠기 때문에 우리 아버지라고 어머니라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 어머니가 나를 낳은 것을 내가 언제 보았습니까? 아무도 보지 못했습니다. 보지 않고 믿는 것입니다. 내가 언젠가는 죽을 것을 다 믿습니다. 내가 죽어 보았나요? 안 죽어 보았습니다. 그러나 남들이 죽는 것을 보고 나도 죽을 것 이라고 믿게 됩니다. 도마는 다른 제자들이 보았다면 믿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는 믿지 못했다는데 문제가 있습니다.

어느 교회에 재미있는 집사님이 있었다고 합니다. 목사님이 노총각 한사람을 불러서 “자네 결혼하지 않아야 하나?”라고 물었습니다. “예! 결혼해야 하는데 마땅한 신부감이 없습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목사님이 “그럼 내가 한사람 소개해줄까?”라고 물었습니다. “아니 목사님이 소개해주시면 무조건 가겠습니다.” 라고 노총각은 대답했습니다. “그럼 만나보겠나?”라고 목사님이 물었을 때 노총각은 “만나긴 뭐 만나보겠습니까? 목사님이 소개해주면 그냥 결혼하겠습니다.” 라고 했다고 합니다. 그 교회에 또 다른 처자가 있어서 불러 “자네도 결혼해야지?” 그 처자도 “예! 목사님! 신랑감이 없어서 못하는데 신랑감만 있으면 할 것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내가 소개해줄까?”라는 물음에 “소개해 주세요.” “내가 만나게 해줄까?” “만날 필요가 있나요? 목사님이 보셨으면 됐지 무엇이 더 필요합니까? 그냥 하겠습니다.” 그래서 그 신랑 신부가 결혼식장에서 처음 얼굴보고 결혼을 했다고 합니다. 그래도 잘산다고 합니다. 여러분 요즘 젊은이들은 어떻습니까? 결혼을 하려면 만나 봐야 합니다. 대화해 봐야 합니다. 사귀어 봐야 합니다. 심지어는 좀 살아봐야 합니다. 살아보고 결혼해서 1년, 2년 지나고 나면 해어진다고 난리입니다. 우리가 한 달 살아보면 잘 알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저는 아직도 모르는 것 같습니다. 한 달 살아보고 결혼해서 잘 맞으면 그것이 맞는 것입니까? 인간이 느끼는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인간이 듣는 것도 한계가 있습니다. 우리는 아주 작은 부분을 듣는 것입니다. 아주 작은 부분을 보는 것입니다. 인간이 가지고 있는 지성은 너무나 제한되어 있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지고 한사람을 어떻게 평가할 수 있습니까? 그래서 우리는 남을 판단하면 안 됩니다. 그 사람이 착하다 나쁘다 판단하면 안 됩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할 일이지 내가 판단하면 교만한 것입니다. 나 자신을 모르면서 남을 판단할 수 있습니까? 남을 판단하지 마십시오. 그 사람의 과거를 어떻게 다 알고 이렇다 저렇다 판단할 수 있습니까? 그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내가 가진 작은 능력으로 무엇을 보고 판단한다는 것은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 보면 보고도 믿지 못한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또한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네가 본고로 믿느냐! 보지 않고 믿는 것이 복되도다.”고 했습니다. 꼭 봐야 믿을 수 있는가? 그렇지도 않습니다. 역사 속에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은 애굽을 나올 때 열 가지 재앙을 경험했습니다. 모세가 가서 바로에게 내 백성을 내어달라고 했을 때 가 그냥 보내주지 않으니 나일강을 피로 만들어서 먹을 물이 없게 했습니다. 또, 나일강에서 개구리 때가 나와서 온 집안에 개구리가 가득하게 됩니다. 독충이 날아옵니다. 파리 때가 득실거립니다. 이가 집안에 천지입니다. 몇일동안 흑암이 계속됩니다. 또, 장자가 죽습니다. 홍해가 갈라집니다. 이정도면 무엇을 더 바랄 수 있습니까? 그러나 그들이 하나님을 온전히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광야에서 또 불평합니다.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하나님 대신에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절했습니다. 물이 없다고 불평하고 양식이 없다고 불평하고, 돌을 들어 모세를 치려고 했습니다. 그들은 기적을 보았지만 믿음이 없었습니다. 불신이 깔려 있었습니다.

여러분 여호수아 1장을 보면 여리고의 기생 라합이라는 여인이 나옵니다. 이 여인은 이스라엘의 기적의 역사를 한 번도 본적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믿었습니다. “상천하지에 하나님 보다 위대한 분이 없는 것을 내가 아노니 그 하나님이 그 백성을 이끌어 내셔서 광야로 이끄신 것을 내가 알고 있었다. 내가 간담이 녹는 줄 알았다.” 그는 보지 않았지만 소문만 듣고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리고 정탐을 온 이스라엘 사람을 숨겨주었습니다. 여러분 그것을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입니까? 우리가 북한에서 건너온 간첩을 두 명이나 우리 집에 숨겼다가 내 보낼 수 있겠습니까? 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는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보지 못했지만 소문만 듣고 믿었습니다. 보지 않고 믿은 사람이 복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믿음이 부족할 때 믿음을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래서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우리 주님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진정 예수님의 부활을 믿습니까? 하나님의 능력을 믿습니까? 그런데 왜 하나님이 죽은 것처럼 행동하십니까? 입으로는 예수님의 부활을 노래하지만은 아직 여러분이 믿는 예수님은 무덤에 계셔서 말도 못합니다. 우리는 그런 예수님을 믿고 있지 않습니까? 정말 그분이 살아계셔서 내게 능력을 주시고 내 오른손을 잡아주시는 그런 예수님을 여러분이 믿고 고백을 하고 있습니까? 여러분 믿음이라고 다 똑같은 것이 아닙니다.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런 어떤 분들은 믿는 다고 하면서도 믿음의 능력 안에 살아가지 못합니다. 요한복음 10장 10절에 보면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영생을 얻습니다. 그러나 풍성한 삶을 다 사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은 예수 믿고 구원은 받았지만 늘 의심합니다. 늘 흔들립니다. 늘 회계합니다. 늘 뒤돌아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그 믿음 안에서 풍성한 삶을 누릴 수 있습니다. 행복한 삶을 누립니다. 강하고 담대한 삶을 살아 갈 수 있습니다. 확신 있는 삶을 살아 갈 수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믿음에 속하십니까? 정말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느냐? 아니면 아직도 무덤에 있는 시신의 예수님을 믿고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빌리 그래함 목사님이 신학교에 입학을 했는데 그가 입학한 신학교에 성서 해석에 문제가 있었던 것 같습니다. 다양한 신학의 학설을 소개하다보니 어떤 신학의 학설은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전하기는 하지만 성경에는 인간의 말도 있다는 해석학을 듣고 낙심이 되어서 설교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고민에 빠져 기도하고 고민하면서 길을 걷고 있는 그에게 하나님의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빌리 그래함아! 너는 말씀을 신뢰하라. 그리고 이 말씀을 사실 그대로 선포하라.” 그래서 빌리 그래함은 다시 힘을 얻고 하나님의 말씀을 힘있게 선포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항상 ‘성경이 말씀하시기를’ 라고 선포합니다. 내 철학이나 내 논리를 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는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의 말씀이 이렇게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는 그 말씀을 있는 그대로 선포할 때 그것이 큰 능력이 되었습니다.

우리의 믿음은 인간의 감정이나 의지에 좌우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의 토대위에 새워진 것입니다. 이 말씀을 일점일획도 변함이 없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모두 예수님의 부활을 본적이 어디 있습니까? 손들어 보십시오.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증언하고 있는 것을 믿습니다. 복음서에 예수님의 부활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목격한 사람들은 다 변화되었습니다. 절망하던 사람들이 희망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비급한 사람들이 용기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죽고자 한 사람이 살게 되었습니다. 고향으로 내려간 사람들이 주님을 만나고 다시 예루살렘으로 올라오는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에 사도바울이 말하기를 부활하신 예수님이 500여 형제에게 나타나셨는데 그중에 절반이상의 사람들이 지금도 살아 있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부인할 수 없는 것입니다. 250명의 사람들이 지금도 살아서 증언 할 수 있는데 어떻게 부인할 수가 있습니까? 오늘 우리는 그 하나님의 말씀을 믿고 우리도 부활의 신앙을 가지고 능력 있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여러분 부활의 주님은 오늘날도 역사하는 것을 믿으시죠?

윌리암 크리에거라는 미국의 유명한 부활신학자가 있다고 합니다. 이 사람이 한번은 유명한 무신론자와 공개 토론회를 벌이게 되었습니다. 정말 하나님이 살아계시는지 예수님이 부활했는지 그것을 가지고 공개 토론을 벌였습니다. 회당에 8000명이 되는 사람들이 모여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의 논쟁을 지켜보았습니다. 누가 승리 했을까요? 이 신학자의 일방적인 승리로 끝이 났다고 합니다. 그는 하나님이 살아계시는 증거, 예수님이 부활하신 증거를 의학적으로, 과학적으로, 법학적으로 다 증거 했습니다. 그러나 무신론자는 아무것도 제시하지 못했습니다. 그의 제시는 너무나 빈약했다고 합니다. 그곳에 참석한 수많은 사람들이 기독교는 분명한 증거위에 서있다는 것을 인증했다고 합니다. 100개의 라디오로 그것이 중개되었고 그곳에 참석한 불신자 47명이 그 순간에 예수님을 영접했다고 합니다. 하나님의 존재는 부인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오늘도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가운데 역사하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며칠 전에 신문에 문화관광부 장관을 지낸 지성인이고 석학인 이어령 씨가 근래에 기독교에 귀화할 것을 약속하고 7월에 세례받기를 공개적으로 기자에게 이야기 했습니다. 그는 종교에 대해서 많은 토론을 했습니다. 그는 예수를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를 믿고 세례를 받게 되었습니다. 참 놀라운 일입니다. 김용옥 교수 같은 사람은 요한복음 주석이라는 책에서 기독교를 부인하고 예수님을 폄하하는 논리를 펴고 있지만 이어령 씨는 예수그리스도를 믿고 세례를 받으려고 합니다. 이유가 있습니다. 기독교는 죽은 종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의 딸이 처음 예수님을 믿기 시작했는데 미국에 유학을 가서 변호사가 되고 검사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딸이 어느 날 갑상선 암이라는 진단을 받게 되었습니다. 수술을 했는데 재발을 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또 수술을 했는데 재발을 했습니다. 직장도 못나가게 되었고, 어린 아들도 불행하게 척수 자폐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학교를 갈 수가 없었습니다. 어려움이 겹치기 시작했습니다. 그것만이 아니었습니다. 망막이 파괴되어서 볼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이어령 씨가 딸이 치료받고 있을 때 딸에게 가면 딸이 아버지를 대접하려고 주방에서 일을 하는데 숟가락이나 밥그릇을 재대로 씻지를 못하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얼마나 마음이 아팠을까요? 그는 낙심하지 않고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기도하며 부르짖었습니다. 망막을 치료하려고 한국에 왔더니 당신의 망막은 다 치료되었다고 합니다. 수술할 필요가 없어졌습니다. 너무 감사해서 그는 어느 교회에서 간증을 했다고 합니다. 이어령 씨가 “우리 딸에게 이런 은혜를 주신 하나님을 나도 섬기겠습니다.”라고 기자와 인터뷰해서 이야기 했습니다.

부활의 하나님은 죽음의 하나님이 아니라 지금도 역사하는 하나님이십니다. 오늘도 하나님은 일하고 계십니다. 여러분 그분이 만약에 부활하지 못했다면 이런 역사를 일으킬 수 있었을까요? 살아계시기 때문에 오늘도 기적을 일으키시고, 병든 자를 치료하시고 가정을 변화시키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성경의 결론은 무엇입니까?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는 것입니다. “너희가 본고로 믿느냐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더 복되도다.”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더 복되다고 합니다. 우리는 눈으로 예수님의 부활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보지 않고 믿는 자가 더 복되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믿음의 축복을 누리십시오. 여러분! 믿음의 부활을 쓰레기통에 던지지 마십시오. 네가 믿으면 하나님의 영광을 볼 것이라고 주님은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는 이 믿음, 하나님의 존재와 그 능력을 믿는 믿음을 가지고 어려운 세상가운데 담대하게 살아가는 승리자들이 다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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