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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중직선출] 부흥하는 교회의 일꾼들 (행 6: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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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예루살렘 교회는 부흥하는 교회였습니다.  부흥하는 교회는 부흥의 주역인 좋은 일꾼들이 있었습니다.  오늘은 “부흥하는 교회의 일꾼들”이라는 제목으로 함께 은혜를 나누려고 합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120명의 성도가 모여, 전혀 기도에 힘쓰던 중에 성령의 충만을 받았고, 복음 전파가 활발하였고, 교회는 부흥하고 발전하였습니다.  오늘 본문 사도행전6:1에는 “그 때에 제자가 많아졌는데...”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제자”란 예수님의 12제자를 부르는 말이 아니라, 예수님을 믿고 그리스도인들이 된 모든 성도들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교회 시대가 되면서 예수님의 12제자는 12사도라고 불렀고, 제자란 말은 예수님을 믿는 모든 성도들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습니다.  초대 예루살렘 교회는 120명의 성도에서 3000명으로, 다시 남자만 5천 명으로,  그리고 남녀의 큰 무리가 주께로 돌아왔으며,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가 돌아왔습니다.  모든 교회가 그 본질에 충실하고, 사명을 잘 감당하여 복음을 전파하면 양적으로도 성장하게 되어 있습니다.  유명한 주석가 렌스키에 의하면 초대 예루살렘 교회는 2만에서 2만5천명의 성도들이 있었을 것이라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교인들을 보면, 히브리파 유대인들이 주축을 이루면서 헬라파 유대인들이 들어왔습니다.  여기서 히브리파 유대인이란 이스라엘 땅에서 출생하여, 성장한 유대인들을 말합니다.  그들은 다 같은 아람어를 사용하므로 의사소통에 문제될 것이 없었습니다.  한편 헬라파 유대인이란 이방 세계에 흩어져 살고 있던 디아스포라들인데, 로마의 공용어인 헬라어를 사용하면서 이방 문화에 익숙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 중에 어떤 이들은 아람어를 잊어버리고, 의사소통에 다소 문제가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그 때나 지금이나 선민사상이 강하고 배타적인 생각이 강하였기에 헬라파 유대인들을 무시하고 열외 시켰으며, 소외감을 느끼게 하고 있었습니다. 

초대 예루살렘 교회는 양적으로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교회는 양적으로 성장하는데, 질적인 성장이 따르지 못하거나, 탄탄한 조직력이 뒷받침 되지 아니한다면 와해될 수도 있는 것이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중요한 사역 중의 하나가 구제하는 일이었습니다. 우리 기독교회도 유대교의 영향을 받아 어려운 극빈 교우를 구제하는 일에 열심이었습니다. 교회가 구제에 힘을 낼 수밖에 없었던 것은, 같은 유대인이면서 유대인 공동체로부터 소외를 당하고, 한 동리에 살면서도 기독교를 믿는다는 이유로 도와주지 않았기에 우리 기독교회가 전적으로 어려운 이들을 도와야 했습니다.  교회마저도 가난한 과부들을 돌아보지 않으면 그들은 생활고를 이겨낼 수가 없었습니다. 

이때에 12사도가 모든 제자들을 불러 모으고 외쳤습니다. 2절입니다.  “열두 사도가 모든 제자를 불러 이르되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접대를 일삼는 것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고 입을 열었습니다.

사도들은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 사역에 힘쓰고, 공궤하는 일, 접대하는 일은 평신도 지도자들에게 맡기겠다는 것이었습니다.  “공궤를 일삼는다, 접대를 일삼는다.”는 말은 먼지가 일어날 정도로 부지런히 움직여 봉사하는 것을 말합니다.  일삼는다는 열심히 일한다는 말인데, 이 말에서 집사라는 말이 나왔습니다.  일삼는다는 말이 “디아코네인”이라고 하는데 영어의 집사를 'Deacon' 이라고 하는데, 이 말은 바로 ‘디아코네인’이란 말에서 나왔습니다.  구제라는 말이 ‘다이코니아’라는 말인데, 그 말은 봉사라는 말입니다.

그렇다고 하여 사도들이 하는 기도와 말씀 사역은 위대한 일이고, 교인들을 도와주고, 봉사하는 일은 저급한 일로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교회 안에서 나누어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는 것이요, 사도들은 주님으로부터 부름 받은 자리와 소명의 사역이 있기에 그것이 우선적인 일이라는 것뿐입니다. 

당시 사도들은 기독교회의 가장 중요한 인물이며, 주님으로 세움을 받은 사도로서, 교회의 존폐를 가늠하는 그런 권위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주님을 목격한 사람들이요, 주님으로부터 직접 세움을 입었고, 주님의 부활을 목격하고 체험한 사람들로 교회 공동체를 이끌어가는 핵심 리더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일의 선후를 알았고, 중요하고 덜 중요한 일을 알았고, 교회가 커져감에 따라 일을 나눠 맡아야 하는 것도 알았습니다. 자기들에게 맡겨진 일들이 “모든 민족으로 제자를 삼고 주님에게 받은 말씀을 가르치고 지키게 해야 하는 말씀 사역과 그를 위한 기도 사역에 힘써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4절에서 확고한 의지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4절 말씀입니다. “우리는 오로지 기도하는 일과 말씀사역에 힘쓰리라”고 하였습니다.  “힘쓰리라”는 말은 전무한다는 말인데, 전력 질주한다는 말입니다. 그 일을 지속하고 꾸준히 하고 충성하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종들이 하나님의 말씀은 제쳐놓고, 교인들의 구제하는 일에만 매달려 원망이나 듣고 있다면 우선순위를 모르고, 그런 일들은 평신도 지도자들에게 얼마든지 위임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우리 교우들은 한 주간 힘들게 살다가 상한 심령으로 교회를 찾아오고 있는데, 목회자들은 교우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소망을 심어주고, 하나님의 은혜로운 말씀을 선포하는 일에 우선순위를 두어야 합니다.

그래서 사도들은 교회 앞에 일꾼을 택하여 세우자고 제안한 것입니다. 

3절 말씀에 “형제들아 너희 가운데서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여 칭찬 듣는 사람 일곱을 택하라. 우리가 이 일을 그들에게 맡기고”라고 했습니다.

일곱 분의 평신도 지도자들을 편의상 집사님으로 호칭합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성경주석가들이나 성서신학자들은 이 처음 안수하여 세우는 일곱 명의 일꾼을 장로의 역할을 감당한 분들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교회가 처음으로 세운 직분이기에 이들은 후에 자연스럽게 장로의 직분을 가지게 되었다고 말합니다.  우리는 일곱 집사로 생각하고 있었으니, 일곱 집사라고 불러봅니다.

초대교회가 세운 일곱 집사는 몇 가지 자격이 있어야 했습니다. 하나는 성령이 충만해야 하고, 또한 지혜가 충만해야 하고, 칭찬 듣는 사람이어야 했습니다.  이러한 자격을 다 갖춘 사람이 어디에 있느냐고 하실 것이지만 세움을 입고는 그런 사람이 되려고 힘써야 하고, 긴장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그래야 주님이 쓰시기에 합당한 일꾼이 되고, 그릇이 될 수 있습니다.

교회의 일꾼들 성령 충만해야 합니다.  이것이 가장 첫째 되는 자격이었습니다. 실력을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재력을 요구하는 것은 더욱 아닙니다.  영력이 있어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성령은 교회 성장의 원동력이요, 복음 전파의 권능입니다.  초대교회의 중요한 일꾼들은 모두다 성령이 충만하였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뜻대로 사역할 수 있었습니다. 

교회 일꾼은 머리 좋은 사람이나, 돈 많은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과 지혜가 충만하고 칭찬 듣는 사람이라면 됩니다.  세상적으로 지위가 높다고 해서 교회의 일을 잘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쉽게 생각할 때에 교회는 열심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하는데 그것도 아닙니다. 성령이 충만하고 지혜가 수반되지 아니하는 열심은 자기를 위한 열심일수도 있습니다.  교회 안에는 가끔 대단한 열심을 가진 일꾼들을 보게 되는데, 자기의 실력과 인간적인 야망과 자기 기준으로 언제나 앞서 나가려고 하는 때문에 때로는 열심 없는 사람보다도 더 어려운 인간관계를 낳기도 하는 것입니다. 

히13:7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그들은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신들이 청산할 자인 것 같이 하느니라 그들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고 했습니다.  어떤 분들은 목회자에게 “즐거움으로” 그 사역에 힘쓰도록 용기를 주시고, 격려하는 이가 있습니다.  주의 종들로 하여금 “근심으로 하게 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 “유익이 없느니라”는 말을 유의하여야 합니다.  교회의 모든 일꾼들은, 교회로 보나, 자신에게로 보나 유익 없는 일이라고 생각되면 그것은 당장 그만두어야 하는 소모적인 일이라고 보아야 합니다.

교회 일은 성령이 충만해야 하고, 지혜도 충만해야 합니다.  여기 지혜란 인간의 지식이나 똑똑함이 아니라, 성령의 충만으로 인하여 받은 은사로서의 지혜를 말합니다.  그런 분들은 사리 분별에 참 빠릅니다.  하나님의 뜻을 잘 파악하고 참신한 아이디어를 내고, 조언하기를 아끼지 않습니다. 교회의 중요한 일을 처리할 때에도 지혜로운 이들은 정도(正道)를 따르고 감정에 치우치지 않고, 순리를 따르고, 이치에 맞게 처신합니다.  부흥하는 교회의 일꾼들은 지혜가 충만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교회의 일꾼들은 사리판단에서 능하고, 옳고 그름을 분별하고, 교회가 나아가야 할 비전을 볼 수 있는 지혜의 눈, 혜안(慧眼)이 있어야 합니다.

칭찬 듣는 사람이란 어떤 사람을 말하는 것입니까?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데서 나오는 결과가 칭찬 듣는 신실한 삶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교회 생활이나, 사회생활, 그리고 가정생활에 있어 평판이 좋고, 윤리적으로 흠이 없고, 모범이 되는 사람을 말합니다.  건전한 사고력을 가지고, 좋은 인간관계를 가지며, 사람들로부터 칭찬받아야 좋습니다. 

그런데 왜 꼭 일곱을 택하라고 하셨는지, 다양한 해석을 낳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7이라는 수는 거룩한 수요, 완전수요, 행운의 숫자로 여겼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유대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수를 자연스럽게 정했을 것으로 보는 것입니다.  유대인의 관습에 어떤 문제가 발생하였다고 하면 그 일을 수습하기 위하여 7인 위원회가 구성되었는데, 이러한 관습을 따른 것이라고 말합니다.  유대나라는 한 지역을 원만하게 지도하기 위하여 7명의 지도자들이 모여 의논하여 어떤 일을 처리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7명 정도의 일꾼이라면 당시의 구제 사업을 충분히 담당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되었기에 7분의 집사님을 세우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교회의 어떤 직분이나 사역에 있어 자격을 말한다면 그런 자격에 능히 합격할 사람이 얼마나 되겠습니까?    사도바울은 자신의 부족함을 고백합니다.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내가 전에는 비방자요 박해자요 폭행자였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내가 죄인 중에 괴수니라”(딤전1:12-13, 15)고 했습니다. 

우리는 되고, 되어가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목사가 되고나서, 점진적으로 목사가 되어가는 사람입니다.  부족하나 일단 장로가 되고, 장로다운 사람이 되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이들이 어떤 직분을 받기까지는 최선을 다하고, 힘쓰다가도 일단 되고 난 후에는 자신을 더 높은 단계로 끌어올리지 못하는 이들을 보게 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의 충만한데 까지 이르도록 힘써야 합니다. 사도바울은 말씀합니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리니,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라”(엡4:13, 15)고 했습니다.

사도들의 이런 제안을 들은 온 교회가 기뻐하고 믿음이 충만하고 성령에 충만한 사람 일곱을 택하여 사도 앞에 세웠고, 사도들은 이들에게 안수하여 일꾼으로 세우게 되었습니다.  교회는 안수하여 일꾼을 세우고 있습니다. 모세가 여호수아를 세울 때에 안수하고 기도하여 세웠습니다. 교회가 누구를  안수하여 세운 것은 성령님의 기름 부으심과 성별을 상징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권위로 안수하는 것입니다.

일곱 집사의 이름을 한번 외워봅시다. “스빌브니디바니” 방언같은 소리이지만, 일곱 분의 이름의 첫 자입니다.  스데반, 빌립, 브로고로, 니가노르, 디몬, 바메나, 니골라 이상 7분입니다.  이들 중에 스데반집사님은 사도들을 제치고 첫 번째 순교의 면류관을 얻었고, 빌립은 누구보다도 전도에 열심을 내었던 집사였습니다.  그런데 유대교에 입교하였던 안디옥 사람 니골라는 배교자로 간주하는 것이 전통적인 해석입니다.  사도를 이어 교회를 이끌어 오신 이레니우스와 터튤리안 같은 교부들은 니골라가 요한계시록2:6-15에 나오는 이단의 무리인 니골라당을 세운 사람이라고 주장하였습니다.  오늘의 본문에서 니골라 한 사람만은 ‘유대교에 입교한 사람이었고, 안디옥이라는 이방에서 온 점을 설명하는 것’도 그의 배교를 뒷받침한다고 보았습니다.  12제자의 한 사람 가룟유다가 배반하였고, 집사에는 니골라가 있었습니다.

초대교회가 7인의 일꾼을 세운 후에 교회는 안정되었고, 사도들은 더욱 힘을 얻어 말씀을 전파하였고, 교회는 좋은 결과를 얻게 되었습니다.

7절을 보면 예루살렘 교회는 왕성하는 교회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점점 왕성하여 예루살렘에 있는 제자의 수가 더 심히 많아지고 허다한 제사장의 무리도 이 도에 복종하니라”고 말씀하였습니다.  ‘왕성한다’는 말은 ‘증가한다’는 말이요, ‘자라고 있다’는 말입니다.  교회가 질적으로, 양적으로 성장하였습니다.  제사장들이 누구입니까?  유대교의 최고 지도자들인데, 저들은 사두개인들이었습니다.  기독교에 들어오기에는 교리적으로 수용할 수 없는 부분들이 많았는데도, 기독교회로 돌아왔습니다.  제사장들이 돌아오는데, 허다한 제사장들이 돌아왔습니다.  이것은 당시 유대교로서는 치욕적인 일이었고, 예루살렘 도성 안에는 대단히 충격적인 일로 받아들였을 것입니다. 

어떻게 유대교회의 최고 지도자들이 기독교회로 돌아선다는 말입니까?  그것은 우리 주님의 부활이 사실이었고,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이시라고 믿어졌기 때문에 돌아온 것입니다.  예수님만이 구원을 주시는 유일한 진리였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만이 소망이요, 예수님만이 우리의 영원한 구원이 되십니다. 

오늘 예루살렘 교회가 일곱 분의 일꾼을 세우는 일을 살펴보았습니다.  저는 의사들이 필독하고 암송하는 ‘히포크라테스의 선서’라는 것을 병원에서 읽어본 적이 있습니다.  그 중에 이런 문구가 처음 부분에 있었습니다. 

“이제 의업에 종사할 허락을 받음에, 나의 생애를 인류봉사에 바칠 것을 엄숙히 서약하노라.  나의 은사에 대하여 존경과 감사를 드리겠노라. 나의 양심과 위엄으로서 의술을 베풀겠노라.  나의 환자의 건강과 생명을 첫째로 생각하겠노라.”는 것이었습니다.

그 중에 “나의 생애를 인류 봉사에 바칠 것을 엄숙히 서약하노라.  나의 은사에 대하여 존경과 감사를 드리겠노라.”라는 말이었습니다.  의사들은 의사라는 직을 소중하게 여기고 있습니다.  그래야 환자를 치료하는 것을 고귀한 소명으로 알고, 힘들지만 정성스럽게 감당할 수 있다고 봅니다. 

오늘 직원으로 세움을 받는 여러분, 우리는 세상의 일과 세상의 부름도 소중하지만, 하나님의 부르심과 우리 주님으로부터 세움을 받고 있습니다. 이것은 이 세상의 어떤 것과도 비교할 수 없는 소중한 직분임을 알고 감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는 주님의 부르심을 받아 섬기는 자로 부름을 받았고, 보내심을 받았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교회의 직분은 명예로운 직분이 없습니다.  ‘멍에직’입니다.  명예직과 멍에직은 참으로 다릅니다.  국어사전에도 멍에직이란 말은 없습니다.  제가 생각한 말입니다.  멍에는 아무나 메는 것이 아닙니다.  한참 일한 수 있는 젊은 소에게 코뚜레를 걸고 멍에를 메우는 것입니다.  우리의 인생길에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아 우리 주님과 함께 멍에를 메게 되었다고 하는 것은 특권 중에도 특권이요, 사실 하나님 앞에서 최고의 명예를 얻는 순간입니다. 

우리 교회 안에는 우리의 섬김을 기다리는 이들이 많이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인간의 진정한 성공은 나의 나됨을 아는 것이요, 내가 받은 은혜를 베풀면서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 세상에는 사랑할 사람밖에는 없습니다.  모두 다 대접할 사람들이요, 섬겨야 할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정말 가치 있는 삶은 소유에 있지 않습니다. 베풂에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모두 은혜를 나누고, 소유를 나누고, 지식도 나누어야 합니다.

해리트루먼 대통령이라고 하면 미국 역사상 가장 겸손한 대통령이었다고 평가하고 있습니다.  지난 2000년도 미국에서, 10가지 리더십의 원리를 가지고 미국 역사상에 가장 성공적인 대통령 다섯 명을 확정한 바 있습니다. 에이브러햄 링컨, 프랭클린 루스벨트, 조지 워싱턴, 시어도어 루스벨트, 해리 트루먼이었습니다.  해리 트루먼은 대통령 집무실에서 비서를 부를 때 사용하던 호출용 벨을 없애버렸습니다.  본인이 직접 문을 열고 비서실로 들어가서 사람들을 공손히 맞이하여 들였다고 합니다.    트루먼 대통령은 2차 대전을 승리로 장식하고는 소련의 스탈린과 영국의 윈스턴 처칠을 위하여 환영 만찬회를 마련하였습니다.  미국의 군인 ‘유진 리스트’ 하사가 그랜드 피아노에서 연주하게 되었습니다.  유진 리스트가 아무나 악보를 좀 넘겨 달라고 부탁하자 트루먼이 먼저 나가서 피아노 옆에 서서 악보를 넘겨주었습니다.  하사의 명연주가 계속되는 동안 대통령은 끝까지 서서 악보를 넘겨주었습니다.  나중에 리스트가 아내에게 쓴 편지에서 이렇게 감탄하였습니다.  “미국 대통령이 내 옆에서 악보를 넘겨주다니, 한번 상상해보시오.  우리 대통령은 그런 분이라오”라고 했습니다.

트루먼 대통령은 자신의 생애를 회고하면서  “나는 누구이며, 어디서 왔으며, 어디로 돌아갈 것인지 절대 잊지 않으려 했다.”고 말했습니다. 

리더는 섬기는 리더십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는 섬김을 받는 사람이 아니라, 섬기는 사람들입니다.  성령 충만을 사모하고, 지혜 충만을 사모하고 건전한 사고와 행동으로 칭찬 듣는 사람들, 부흥하는 교회의 일꾼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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