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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떤 한 사람이 되시렵니까? (롬 5:1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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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한 사람이 되시렵니까?
본문 : 롬 5:12-21
 
오늘 본문에 유난히 많이 나오는 단어가 있습니다. 어떤 단어입니까?
성경봉독 순서 때 우리는 귀로는 성경 봉독 순서를 맡은 분이 성경을 읽는 것을 들으면서 눈으로는 자기의 성경을 보아야합니다.
청각과 시각을 동시에 동원해야 합니다.
그래서 성경 말씀이 심각(心覺), 마음의 감각으로 연결되도록 해야 합니다.
그렇게 한 분들은 ‘오늘 본문에 유난히 많이 나오는 단어가 무엇입니까?’ 하는 질문에 쉽게 대답할 수 있을 것입니다.
대답을 잘 하지 못하는 분들은 성경봉독 순서를 건성으로 넘겼다는 증거입니다.

오늘 본문에는 “한 사람”이라는 단어가 유난히 많이 나옵니다.
영어성경에는 ‘one man' 한문 성경에는 ’一人‘이라고 되어 있는 말입니다.
몇 번 나옵니까?
그것까지는 대답 못하셔도 됩니다.
성경 읽을 때 그것까지 셀 수는 없지요. 중요하지도 않습니다.
아홉 번 나옵니다. 여기에는 ‘한 분’이라는 말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 아홉 번 가운데 여섯 번은 아담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세 번은 예수님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어떤 것이 아담을 가리키는 것이고 어떤 것이 예수님을 가리키는 것인지 같이 찾아봅니다.

12절,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이 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그렇습니다. 아담입니다.

15절 중간, “곧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많은 사람이 죽었은즉”
이 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역시 아담입니다.

15절 뒷부분, “또한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넘쳤느니라”
이 한 사람은 누구인지는 답이 그 안에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이지요.

16절 중간, “심판은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정죄에 이르렀으나”
이 한 사람은 누구입니까?
아담입니다.

17절 앞부분, “한 사람의 범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그 한 사람을 통하여 왕 노릇 하였은즉”
“한 사람”이 두 번 나오는데 두 번 다 누구를 말합니까?
아담입니다.

17절 뒷부분, “한 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생명 안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여기에는 15절과 같이 문제와 정답이 함께 있습니다.
여기 나오는 한 분은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마지막으로 19절입니다.
앞부분,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이 한 사람은 아담입니다.

뒷부분,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이 한 사람은 예수님입니다.

“한 사람”은 아니지만 18절도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18절 앞부분,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여기 한 범죄는 무엇을 말합니까?
그렇습니다. 아담이 선악과를 따먹은 일입니다.

18절 뒷부분,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여기 “한 의로운 행위”는 무엇을 말합니까?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신 일입니다.

지금까지 살펴 본 일을 통해서 오늘 본문이 무엇을 말하려는지 알 수 있게 됩니다.
오늘 본문은 ‘한 사람 아담의 범죄 때문에 모든 사람이 죄인이 되었다. 그 한 사람 때문에 모든 사람이 사망에 이르게 되었다. 한 사람 예수님 때문에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다.’ 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 사람 때문에 모든 사람이 죽게 되었다. 한 사람 때문에 많은 사람이 살게 되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의 교훈을 통해 ‘한 사람’이 얼마나 중요한지 새삼스럽게 깨닫게 됩니다.

‘목사님, 그것은 아담이나 예수님 같이 특별한 사람에게나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까? 우리 같이 평범한 사람들은 한 사람이 무어 그리 중요하겠습니까?’ 하실 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닙니다. 한 사람은 어느 경우이든지 중요합니다.

지금 보세요, 조 아무개라는 젊은이 한 사람 때문에 미국이 아픔을 겪고 세계가 놀랐습니다. 우리나라는 특히 큰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특히 재미동포들, 유학생들, 힘들고 불안한 가운데 있습니다.

그 일이 일어났을 때 저는 중국 연길에 있었습니다.
그곳에는 케이블 TV를 통해 우리나라 텔레비전 방송들을 실시간으로 볼 수 있습니다.
저녁 뉴스 시간에 미국에서 그런 사건이 일어났다는 보도가 있었습니다.
그 때는 범인이 중국계라고 했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그런 일이 일어났구나. 내가 지금 중국에 와 있는데 중국 사람이 그런 일을 했네.’ 그 정도로 생각했습니다.
그 날 저의 관심은 ‘인천이 아시안게임 유치에 성공했나?’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날 저녁 뉴스 시간에는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는 소식만 반복해서 나오더군요.
그대로 잤습니다.

그 다음날 일어나서 아침 다섯 시에 텔레비전을 켰습니다.
그 때 한국 시간은 여섯 시니까 뉴스가 나올 시간입니다.
아시안 게임 개최 장소로 어디가 결정 되었나 궁금해서였습니다.
그런데 뜻밖에 버지니아 공과 대학 총격사건의 범인이 한국 사람이라는 보도가 톱뉴스로 나왔습니다.
나도 모르게 ‘어-’ 하며 펄쩍 뛰어 일어났습니다. 온 몸이 굳어지는 것 같았습니다.
이 가운데도 그렇게 놀란 분들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렇죠?
그 순간에 떠오른 생각은 ‘그동안 우리나라에서 반미 시위가 심했는데, 여중생 장갑차 사망 사고가 일어났을 때 특별히 그랬는데, 이제 무엇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 날 거리에 나가면 괜히 기가 죽고 사람들의 눈치가 보였습니다.
중국 사람들이 저를 보고 ‘너희 나라 사람 때문에 우리가 한동안 큰 오해를 받았었어!’ 하는 것 같았습니다.
해외에 살고 있거나 해외여행 중인 분들, 지금도 그럴 것입니다.
한 사람의 영향이 그렇게 큰 것입니다.

나 한 사람은 나 하나에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은 그가 속한 기관들을 대표합니다.
우리 집을 대표합니다.
내가 다니는 학교를 대표합니다.
내 직장을 대표합니다.
나가서는 나라를 대표합니다.

예전에는 여권을 발급 받을 때 외무부(외교통상부)해외여행 안내 수첩을 하나씩 나눠주었습니다.
해외에서 위급한 일을 만났을 때 도움을 처할 수 있는 공관 주소, 세관 통관할 때 알아야할 일들, 이런 것들이 적혀 있었습니다.
그 수첩 제일 첫 면에 인쇄된 말이 ‘당신은 대한민국을 대표하고 있습니다.’ 이었습니다.

성도들은 알이야 합니다.
성도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우리 교회를 대표합니다.
성도 한 분이 잘하면 우리 교회가 칭찬을 받고, 한 분이 잘못하면 교회의 명예가 깎입니다.

교회 차에는 교회의 이름이 크게 쓰여 있습니다.
우리 교회 차들은 전체가 녹색으로 칠해져 있어도 교회 이름을 보지 않아도 ‘아, 목양교회 차로구나!’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처음에는 좀 촌스럽게 보인다고 하던 분들도 이제는 찾기 쉽고 알아보기 쉬워서 좋다고들 말합니다.
교회 차를 운전하는 분들은 이 차가 잘못하면 교회 전체가 좋지 않은 소리를 듣기 때문에 특별히 조심하게 된다고 합니다.

여러 해 전에 교회의 낡은 봉고 한 대를 다른 사람에게 팔았는데 실수로 교회의 이름을 지우지 않았습니다.
그 봉고를 사간 분이 교통질서, 특히 주차질서를 잘 지키는 분이 아닌 것 같았습니다.
그리고 주차 문제 같은 것으로 남과 시비가 붙으면 아주 거칠게 대응했던 것 같습니다.
그 때문에 좋지 않은 전화를 여러 번 받았습니다.
그 차 우리 교회 차 아니라고, 팔았는데 모르고 이름을 지우지 않았다고 해명하기에 바빴습니다.
차 한 대가 이렇게 교회를 대표합니다.

성도 한 사람은 그가 나가는 교회를 대표할 뿐만 아니라 기독교 전체를 대표합니다.
버지니아 공대 사건에 대해 발표되는 것을 보니까 조 아무개라는 젊은이가 한 때는 교회에도 출입했었습니다.
그 때 알게 된 것인지 그가 남긴 글이나 말에 성경이 여러 군데 인용되어 있습니다.
이 젊은이 한 사람 때문에 교회도 적지 않은 부담을 받고 있습니다.

성도는 한 사람, 한 사람이 예수님을 대표합니다.
성도 한 사람이 잘못하면 예수님의 영광이 가려집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전서 12장에서 저 유명한 지체론을 말하고 있습니다.
한 지체가 고통을 받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고통을 받고 한 지체가 영광을 얻으면 모든 지체가 함께 즐거워한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고전 12:27)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지체인 내가 고통을 받으면 몸인 그리스도가 고통을 받습니다.
우리 삶의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데 있는데, 이 땅에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하도록 해야 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인데 그 반대가 됩니다.

그리스도의 지체인 나에게 영광스러운 일이 있으면 그리스도께 영광이 됩니다.
우리 삶의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데 있는데, 이 땅에 하나님의 영광이 충만하도록 해야 하는 것이 우리의 사명인데 그것을 잘 이루는 것이 됩니다.

여러분, 나 한 사람이 그렇게 중요합니다.
우리 집에, 가문에, 내가 속한 직장에, 학교에, 나라에, 교회에 유익을 주는 한 사람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는데 힘쓰는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예수님은 전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아셔야합니다.
예수님은 죄인이 나 한 사람이었더라도 이 땅에 오셔서 십자가를 지셨을 것입니다.
나 한 사람은 이렇게 중요합니다.

세상에는 아담 형 한 사람과 예수 형 한 사람, 이렇게 두 종류의 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 한 사람 때문에 전체가 좋지 않은 일을 겪게 되면 그 한 사람은 아담 형 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 아담 형 한 사람의 대표적인 존재가 있습니다.
이 사람도 이름 첫 자가 ‘아’입니다.
누구입니까?
그렇습니다. 아간입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에 들어갈 때 첫 성, 여리고는 쉽게 정복했습니다.
두 번째 성이 아이입니다. 아이 성은 적고 주민들이 숫자도 적었습니다.
그런데 아이 성 전투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패배를 했습니다.
삼십육 명이 전사했고 백성들의 사기가 뚝 떨어졌습니다.
왜 이렇게 되었습니까?
아간이 범죄 했기 때문입니다.

아간은 전리품 가운데 아름다운 외투 한 벌, 은 이백 세겔, 오십 세겔 되는 금덩이를 훔쳐 장막 가운데 땅 속에 감추었습니다.
이 아간을 아골 골짜기에 끌고 가서 돌로 쳐 죽인 다음에 아이 성을 점령할 수 있었습니다.
아간을 죽일 때 아간만 죽였습니까?
아닙니다. 여호수아서 7장 24절과 25절을 보면 아간의 아들들, 그의 딸들, 그의 소들, 그의 나귀들, 모두 아골 골짜기로 끌고 가서 죽였습니다.
아이 성, 아간, 아골 골짜기, 여호수아서 7장은 이렇게 ‘아’자 돌림으로 되어 있습니다.
아간 한 사람 때문에 이스라엘 전부가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의 자녀 모두가 몰살을 당했습니다.
심지어는 그의 장막, 그에게 속한 모든 것도 돌에 맞고 불살라졌습니다.

그 한 사람 때문에 전체가 좋은 일을 겪게 되면, 특히 많은 사람들이 살게 되면 그 한 사람은 예수 형 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경에 예수 형 한 사람의 대표적인 존재가 있습니다.
이 사람의 이름도 첫 자가 ‘아’입니다.
누구이겠습니까?
그렇습니다. 아브라함입니다.

우리는 히브리라는 말을 많이 씁니다.
히브리 사람이라는 말을 제일 먼저 들은 사람이 아브라함입니다.
히브리라는 이름은 아브라함 때부터 사용되었습니다.

창세기 14장에는 아브라함의 조카 롯이 적에게 포로가 된 일이 기록되어 있는데 14장 3절을 보면 “도망한 자가 와서 히브리 사람 아브람에게 알리니”라고 되어 있습니다.
성경에 히브리라는 말이 처음 등장하는 곳이 여기입니다.
그런데 히브리라는 이름은 그렇게 좋은 뜻이 아닙니다.
히브리라는 말은 ‘건너오다’는 뜻입니다.
아브라함이 메소포타미아에서 유브라데 강을 건너 가나안 땅에 들어왔기 때문에 이런 이름을 갖게 되었습니다.
‘원주민이 아닌 사람’ 이런 뜻으로 이렇게 부른 것이죠.
알기 쉽게 말해서 ‘굴러들어온 돌’ 이라는 이야기입니다.
여기에서 시작해서 히브리는 ‘방랑하는 사람들’이라는 뜻도 갖게 되었습니다.

어떤 재치 있는 소설가가 가난하고 고생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소설로 쓰면서 제목을 ‘하비루(下卑淚)의 노래’라고 했습니다.
‘下’는 아래, ‘卑’는 낮은 사람, 천한 사람, ‘淚’는 눈물이라는 뜻입니다.
그 소설가는 ‘히브리’라는 말의 뜻을 살려 이렇게 한자로 비슷한 음으로 만들어 보았다고 그 소설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사울 때 사람들이 나라를 세우고 나라 이름을 정할 때 그들의 제일 오래된 이름이 히브리이니까, ‘히브리 왕국’ 이렇게 할만도 한데 그렇게 하지 않고 유대, 이스라엘, 이렇게 했습니다. 혹시 히브리란 말의 뜻이 그렇기 때문에 그 이름을 피한 것이 아닌가, 혼자서 그런 생각을 해 본 일이 있습니다.

그런 히브리 민족이 예수 형 한 사람 아브라함 때문에 어떻게 되었습니까?
믿음의 민족이 되었습니다.
택함 받은 백성이 되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복 받는 백성이 되었습니다.
히브리라는 말의 의미가 달라졌습니다.

여러분 한 사람이 아브라함과 같은 예수 형 한 사람이 되어 여러분 한 사람을 통해 여러분이 속한 기관들이 복을 받고, 그 이름이 명예로운 이름이 되기 바랍니다.
이 나라가 그렇게 되고 무엇보다 이 교회가 그렇게 되기 바랍니다.

아담 형 한 사람과 예수 형 한 사람의 이야기를 하나씩만 더하겠습니다.
아담 형 한 사람으로 빼놓을 수 없는 사람, 함입니다.
함은 노아의 둘째 아들입니다. 노아에게는 셈, 함, 야벳 세 아들이 있었지요.
노아가 포도주를 마시고 취해서 장막 안에서 벌거벗었습니다.
함은 아버지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형제에게 알렸습니다.
틀림없이 호들갑을 떨었을 것입니다.

아, 형님, 그리고 아우, 들어가 보라고 아버지가 아주 볼만한 모습을 하고 있다고 했을 것입니다.
세상에는 남의 실수, 남의 단점, 남의 허물을 말할 때 이렇게 유난히 신이 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맏아들 셈과 막내아들 야벳은 어떻게 했습니까?
옷을 가져다가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 쳐 들어가서 아버지의 하체를 덮었습니다.
얼굴을 돌이키고 아버지의 하체를 보지 않았습니다.
세상에는 이렇게 남의 실수, 남의 단점, 남의 허물을 보지 않고 가리기 위해 힘쓰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여러분, 그런 사람들이 되기 위해 힘쓰시기 바랍니다.

노아가 잠이 깨어 어떻게 했습니까?
셈과 야벳은 축복하고 함은 저주했습니다.
그의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한다고 했습니다(창 9:25-26).
인종적으로 꼭 일치하지 않지만 아프리카 흑인들의 슬픈 운명이 여기에서 시작되었다고 말합니다.
함 한 사람 때문에 그렇게 되었습니다.

예수 형 한 사람으로 빼놓을 수 없는 사람, 바울입니다.
사도행전 16장에는 바울이 아세아 대륙과 유럽 대륙의 갈림길에서 성령의 인도에 따라 유럽 쪽을 택하는 일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역사가들은 이 일을 아세아 대륙과 유럽 대륙의 운명을 갈라놓은 사건이라고 말합니다.
그 때 복음이 들어간 유럽 대륙과 복음이 들어가려다가 만 아세아 대륙이 모습이 이때부터 달라지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달라졌는지는 여러분 잘 아실 것입니다.

중국 연변지역은 두만강을 사이에 두고 북한과 접경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 두만강이 그렇게 넓지 않습니다.
그동안 중류 지역, 하류 지역, 이번에 상류지역, 다 가 보았는데 어떤 곳은 이 앞에 있는 동막천보다도 좁습니다.
어떻게 해서 ‘두만강 푸른 물에 노 젓는 뱃사공아’ 하는 노래가 생겼는지 모르겠습니다.
중류부터는 북한의 광산에서 나오는 폐수 때문에 푸르지도 않습니다.
대단히 심하게 오염되어 있습니다.
이번에 두만강 변에 서서 북한쪽을 바라보는데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이 아주 가파른 산의 꼭대기까지 밭으로 빽빽하게 개간되어 있는 광경입니다.
제가 빌린 차의 현지 동포 운전기사가 ‘저렇게 산에 짓는 농사는 그 거둬들인 것을 개인이 가질 수 있기 때문에 북한 주민들이 경사 45도가 넘는 산의 꼭대기까지 농사를 짓고 있습니다.’ 라고 말하더군요.
그것을 보면서 북한에도 복음이 들어가서 그 운명이 바뀌기를 바라는 마음이 정말 간절해졌습니다.
그 운전기사가 현지 사정에 아주 밝은 분입니다.
차를 빌릴 때 선생님 인상이 참 좋다고, 고향은 어디시냐고, 중국에 와서 이런 차도 갖게 되고 참 성공하셨다고 했더니 북한이 환하게 잘 보이는 곳, 북한과 정말 가까운 곳으로 안내해 주더군요.
그 분이 혼잣말처럼 ‘개방만 하면 되는데 개방을 안 하고 고집을 부리고 있으니…’하더군요.
북한은 다른 개방도 서둘러야 하지만 무엇보다도 복음에 대한 개방을 서둘러야합니다.

우리는 모두 예수 형 한 사람의 반열에 서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 형 한 사람은 다시 적극적 예수 형 한 사람과 소극적 예수 형 한 사람으로 나누어집니다.

교회에서 식사를 할 때 교인들이 자기 집에서 음식을 한 가지씩 가지고 오는 경우가 있습니다.
속회에서도 그런 경우가 많지요.

어느 교회는 그렇게 해서 차린 상이 유난히 맛이 없는 경우가 있습니다.
교인들이 ‘나 한 사람 쯤 적당히 해도 상관없을 거야!’ 하면서 집에서 제일 인기 없는 음식을 가져 왔기 때문입니다.
이런 교회는 예수 형 한 사람이기는 한데 소극적 예수 형 한 사람들이 많은 교회입니다.

반대로 유난히 맛이 있는 경우가 있습니다.
‘나 한 사람부터 잘 해야지!’ 하면서 정성스럽게 음식을 마련해서 가지고 왔기 때문입니다.
이런 교회는 적극적 예수 형 한 사람들이 많은 교회입니다.
이런 교회가 부흥합니다.

이런 교회는 봉사하는데 성도들이 ‘나 한사람쯤 빠져도 상관없을 거야!’ 하지 않고 ‘나부터 앞장서야지!’ 합니다.
이런 교회는 전도하는데 성도들이 ‘나 한사람쯤 빠져도 상관없을 거야!’ 하지 않고 ‘나부터 앞장서야지!’합니다.
우리교회가 그런 교회가 되기 바랍니다.
우리목양교회가 ‘적극적 예수 형 한 사람의 공동체’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요즘 바나바권사회에서 동막천 청소를 열심히 합니다.
‘우리 교회에 권사가 수백 명인데 나 한 사람쯤 빠져도 표시도 안 날거야!’ 하지 말고 ‘그것 참 좋은 일인데 나부터 앞장서야지!’ 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모두 적극적 예수 형 한 사람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을 중심으로 여러 가지 좋은 일이 일어나기 바랍니다.
특히 생명 구원의 역사가 왕성하게 일어나기 바랍니다.

30여 년 전에 월남에 군대를 보낼 때 장병들을 훈련시키는데 신병 한 사람이 너무 긴장해서 수류탄을 중대원 한 복판에 떨어뜨렸습니다.
이제 그것이 터지고 백수십 명 중대원들이 죽고 다칠 판인데 중대장이 몸을 날려 그 수류탄을 몸으로 덮었습니다.
그 중대장 한 사람 때문에 중대원들은 몇 사람 경상자만 내고 다 살았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강재구 소령의 이야기입니다.
한 사람으로 인하여 많은 육신의 생명이 사는 것 중요합니다.
나 한 사람으로 인하여 많은 영혼이 사는 것, 그것 못지않게 중요한 일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준비하고 있는 119 새 생명 큰 잔치의 의미입니다.

저는 오늘 본문을 자세하게 읽다가 미묘한 차이를 하나 발견했습니다.
“모든”과 “많은”의 차이입니다.
오늘 본문의 아담 이야기는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죽는다.’고 시작됩니다.

12절을 다시 보세요.
그러므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나니 이와 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그런데 예수님의 이야기에는 ‘모든 사람이 의로워지고 생명을 얻는다.’고 되어 있지 않습니다.
대신 ‘많은 사람이 의로워지고 생명을 얻는다.’고 되어 있습니다.

15절, “또한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넘쳤느니라”

18절,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19절,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왜 이런 차이가 있는 것일까요?
아담의 범죄 때문에 모든 사람이 죽게 되었습니다.
여기에 예외는 없습니다.
민족, 국적, 인종, 지위 고하, 시대 구별 없이 모두 죽게 되어 있습니다.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습니다.
그것 때문에 모든 사람이 자동적으로 살지 않습니다.
그 사실을 믿는 사람만 삽니다.
이 때문에 바울은 “모든”이라는 말 대신에 “많은”이라는 말을 사용한 것 같습니다.

우리는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은 많은 사람에게 넘쳤느니라”가 아니라,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은 수지의 모든 사람에게 넘쳤느니라”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은 분당의 많은 사람에게 넘쳤느니라”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로 말미암은 선물은 한국의 모든 사람에게 넘쳤느니라”
이렇게 되도록 힘써야합니다.
그럴 책임이 예수 형 한 사람으로 부름 받은 여러분과 저에게 있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 모두 중요합니다.
그런데 아담 형 한 사람과 예수 형 한 사람이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 형 한 사람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예수 형 한 사람들의 반열에 서서 그 공동체의 일원이 되었습니다.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그러면 여러분, 어떤 한 사람이 되시렵니까?
이 일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모르고 저 뒤, 꽁무니에 서 있는 한 사람이 되시렵니까?
마지못해 따라가는 한 사람이 되시렵니까?

모두 씩씩하게 팔을 걷어 부치고 앞장 서는 적극적 예수 형 한 사람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생명의 역사를 일으키는 한 사람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아무개, 그 한 사람 때문에 우리 집에 구원의 역사가 크게 일어났습니다!’
‘아무개, 그 한 사람 때문에 우리가 복 받았습니다!’
‘아무개, 그 한 사람 때문에 우리의 이름이 명예롭게 되었습니다!’

무엇보다도 예수님으로부터 ‘너 한 사람으로 인해 내가 크게 기뻐히노라’ 이런 말씀을 듣는 여러분이 되고 제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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