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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부활을 통해 누리게 된 복 (벧전 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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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몸으로 우리의 예배를 통해 영광을 받으시기 위해 오늘 이 시간 이 자리에 임재하시고 함께 계심을 믿음으로 '아멘!'으로 시인 하고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따라합시다. " 예수그리스도께서 사망의 권세를 깨트리고 부활하셨습니다. 제가 확실히 성경 말씀과 역사적 사실을 믿습니다. 제가 부활의 증인이 되겠습니다." 아멘!

그런데 이상한 것은 역사적 사건이라면 부활하신 날짜가 일정해야 하는데 왜, 해마다 부활절 날짜가 바뀌는 것입니까? 궁금하실 것입니다. 부활절 기간은 매년 3월 22일부터 4월 25일 사이에 지켜졌습니다. 그래서 춘분다음 첫 만월 후 첫째 주일에 지켜졌습니다. 이렇게 지켜지는 이유에 대한 역사적 유례가 있습니다.

사실 초대교회 때 3세기 동안에는 해마다 부활절을 지켜야 할 일자에 대하여 계속 날카로운 의견의 차이가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보면 <동방교회에서는 유대인들이 유월절 날을 계산하는 방법에 따라 부활절을 음력으로 결정>하였습니다. 그러나 <서방교회에서는 부활절이 언제나 주일 부활일에 지켜져야 하며, 십자가 처형은 언제나 금요일에 기념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이것은 서방교회(로마교구를 중심으로 한 서쪽에 위치한 교회들) 크리스천들에게는 주중의 날이 중요하였고, 동방교회(알렉산드리아, 예루살렘, 안디옥, 콘스탄틴 교구를 포함한 로마 동쪽에 위치한 교회들) 크리스천에게는 달(月)이 중요하였습니다.

이런 의견의 대립은 마침내 니케아 총회(325년)에서 해결되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달과 주중의 날, 둘 다 인정하여 부활절은 춘분이 지난 첫 만월 후 첫째주일이 되도록 하였던 것입니다. 그러다 보니 해마다 3월~4월 사이에 부활절이 왔다 갔다 하는 것입니다. 자, 여기서 중요한 것은 날자가 아닌 예수님이 부활하셨다는 역사적인 사실이 중요할 뿐입니다.

한 독실한 교인이 사우디아라비아에 진출해 있는 어떤 건설회사와 용역계약을 맺고 출장 근무를 갔더랍니다. 거기서 일하면서 같은 직장에 있는 '모슬렘교도'를 사귀게 되었습니다. 어느 날 이 모슬렘교도는 자기가 믿는 회교에 대해 자랑을 늘어놓았습니다. “우리는 매일같이 하루에 다섯 번씩 기도하며, 엄한 규율대로 살아야 하고, 메카를 순례해야 한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우리 회교의 큰 자랑거리는 메카에 있는 모하멧의 무덤이야. 너희 기독교의 교주인 예수의 무덤은 비어 있지만 우리 교주의 무덤은 아주 웅장하게, 그리고 아름답게 꾸며져 있다. 모하멧의 아름다운 분묘, 이것이 우리 회교의 유일한 자랑거리야." 이 말을 듣고 있던 교인이 얼른 대답했습니다. “그렇다. 그것이 바로 기독교와 회교의 차이점이다. 모하멧이나 다른 종교의 교주는 모두 죽어 무덤에 묻혀 썩어 버렸지만 예수님은 죽은 지 사흘 만에 무덤을 깨뜨리고 부활하셨다.”라고 당당하게 복음을 증거 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남겨진 빈 무덤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제가 저 이스라엘에 고고학 발굴 작업을 갔을 때도 예수님의 빈 무덤을 보았는데, 저는 무덤이 비어있는 것을 보고 얼마나 감격했는지 모릅니다. 만약에 예수님이 다른 종교 교주들 모양 무덤 속에서 썩고 있었더라면 어찌되었을까? 그 순간 아찔하였습니다. 그저 인생이 죽음으로 끝나 버린다면 얼마나 허무한 일입니까? 그야말로 별 볼일 없을 뻔했는데, 주님께서는 자신이 약속하신 대로 무덤에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무덤 밖으로 나오셨습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입니다. 이것은 기독교만이 가지고 있는 유일성이 된 것입니다.

그래서 철학자요. 신학자인 칼 바르트(K.Barth)는 말하기를 “부활절과 성탄절의 설교는 짧으면 짧을수록 좋다. 왜냐하면 이는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는 역사적 사실이기 때문이다.”라고 했습니다.

성경은 신약과 구약, 두 부분으로 나눕니다. 신약은 구약보다 양은 적습니다. 그런데 성경의 중심은 신약입니다. 기독교의 중심 진리가 신약에 있습니다. 이 신약성경이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중심 진리는,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므로 이 신약성경 자체가 예수님의 부활을 증명해 주는 것입니다. 성경은 <부활에 대해서 신약성경에는 204회>씩이나 언급되어 있습니다. 또한 이 땅에 살고 있는 60억의 인구가운데 약 3분지 1 이상이 부활을 믿고 있으며, 60억 인구의 대부분이 예수님이 부활하신 주일(일요일)을 공휴일로 지키고 있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부활이 사실이라는 것을 웅변적으로 입증해 주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므로 예수님의 역사적인 부활에 대해서 굳이 증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다만 예수님의 부활이 우리 인류에게 어떤 결과를 가져 왔느냐가 중요할 따름입니다.

오늘 본문은 2천 년 전의 역사적인 부활이 오늘 우리에게 가져다 준 놀라운 축복에 대해서 강조하고 있습니다(본문 이해: Meaning & Significance). 예수님의 부활로 인하여 우리가 근본적으로 누리게 되는 축복에 대해 두 가지만 소개하려고 합니다.


1. 부활의 은총을 주셨습니다.

부활의 첫 열매 되시는 그리스도 때문에 죄사함을 얻은 성도는 반드시 생명의 부활에 참여하는 복을 받게 됩니다. 그래서 요한복음 5:29절에 "선한 일을 행한 자는 생명의 부활로 악한 일을 행한 자는 심판의 부활로 나오리라."고 하셨는데


부활로 거듭남의 은총을 얻게 해 주셨습니다. 본문 3절을 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라고 하였습니다. 무슨 얘기입니까? ‘예수님의 부활이 없었더라면 우리의 중생이나 거듭남은 불가능했다.’는 사실을 증언해 주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부활하심으로 우리에게 거듭남과 구원의 축복을 가져다 준 것입니다. 즉, 거듭남의 근거를 제공해 주었습니다. 부활에는 시제를 중심으로

세 가지의 부활이 있습니다.

1) 과거의 부활이 있습니다. 이것은 2천 년 전에 예수님이 죽은 자 가운데서 삼일 만에 부활하신 역사적인 사건을 말합니다. 역사적 증인들은 그래서 순교함으로 오늘의 기독교가 존재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마태복음 27:53절에 "예수의 부활 후에 저희가 무덤에서 나와서 거룩한 성에 들어가 많은 사람에게 보이니라."고 하였습니다.

2) 미래의 부활을 약속합니다.

성경은 분명히 부활하신 주님께서 승천하신 모습 그대로 재림하시는 순간 데살로니가전서 4:16절에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로 친히 하늘로 좇아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고린도전서 15:53절에 "이 썩을 것이 불가불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라고 말했습니다.

즉, 예수님과 같이 성도들도 죽은 자는 그 육체가 흙이나 티클로 사라져 버린 것처럼 생각하기 쉽지만 '변화된 몸으로 부활하여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되는 날이 온다.'고 약속합니다. 디모데후서 2:18절에 " 진리에 관하여는 저희가 그릇되었도다. 부활이 이미 지나갔다 하므로 어떤 사람들의 믿음을 무너뜨리느니라."고 경고합니다. 이것은 종말론적인 부활 시에 나타나는 사건입니다.

사도행전 24:15절에 "저희의 기다리는바 하나님께 향한 소망을 나도 가졌으니 곧 의인과 악인의 부활이 있으리라 함이라."고 약속합니다.

요한계시록 20:6절에 "이 첫째 부활에 참예하는 자들은 복이 있고 거룩하도다 둘째 사망이 그들을 다스리는 권세가 없고 도리어 그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제사장이 되어 천년 동안 그리스도로 더불어 왕노릇 하리라."고 하신 말씀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3) 마지막으로 현재의 부활이 있습니다.

로마서 6:5절에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 로마서 만일 우리가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었으면 또한 그의 부활을 본받아 연합한 자가 되리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현재 부활의 신앙으로 살아가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의 부활의 능력은 현재에도 나타나며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성도의 삶속에 동행하시고, 도우시며 활동하고 계십니다.

이 세상은 에스겔이 본 환상 가운데 본 해골 골짜기와 같습니다. 육신은 살았으나 그 영이 죽은 상태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의 죄와 허물로 그 영은 다 죽어 있는 상태에 있습니다. 그런고로 죄의 문제를 해결해서 영이 다시 태어나야 하고, 거듭나야 합니다. 즉,??중생해야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부활이 바로 우리의 거듭남의 근거를 제공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심으로 거듭남을 보증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대속의 보혈의 공로를 의지하여 회개하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면 죄 사함의 은총과 거듭남의 은총과 하나님 자녀됨의 복과 영원한 영생의 나라 천국을 기업으로 얻게 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성도여러분! 십자가와 부활은 이해되어 믿음을 가지게 되는 것이 아니라 믿어져야 이해가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은 도저히 머리로는 이해되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래서 먼저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에 대한 믿음을 달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이것은 머리 문제가 아닌 철저하게 가슴의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을 주셔야 하고, 우리는 성경과 역사적 사실을 가슴을 열고 그대로 받아들이는 길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습니다. 먼저 믿음을 선물로 받게 위해서는 우리는 자신이 죄인임을 인정하고 죄를 회개하되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총, 회개하는 자에게 죄 사함의 복을 주신다는 사실을 믿어야 합니다.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어야 합니다. 내가 믿음을 가지므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영생 얻었음을 믿어야 합니다. 오늘도 우리가 거듭나는 것도, 구원받는 것도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음으로 말미암은 하나님의 선물 은사입니다. 동시에 예수님의 역사적인 부활이 우리에게 부활에 참여하는 은총을 주시는데 이것은??놀라운 축복입니다.


2. 산 소망의 축복을 주셨습니다.

본문 3절에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사"라고 하였습니다.

베드로전서 1:21절에도 "너희는 저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시고 영광을 주신 하나님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는 자니 너희 믿음과 소망이 하나님께 있게 하셨느니라."고 말씀합니다.

한국 6.25 전쟁 당시 1951년 압록강 강변까지 진격했던 유엔군에 속하는 미 해병대의 군인들이 중공군의 개입으로 부득이 후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후퇴하는 과정에서 많은 군인들이 희생되었고 또한 포위당하는 절대위기를 당하게 되었습니다. 이 비참한 모습을 본 한 종군기자가 물었습니다. "What can I do for you?,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그럴 때 미 해병은 간단하게 대답했습니다. "Give me tomorrow, 내일을 주십시오." 그 이후로 아주 유명한 말이 되어버렸습니다. '필요한 것은 돈과 명예가 아닙니다. 내일입니다. 내일! 즉 미래의 문제요. 소망의 문제입니다. 전도서 9:4절에 " 모든 산 자 중에 참예한 자가 소망이 있음은 산 개가 죽은 사자보다 나음이니라."고 하였습니다.

성도 여러분! 인간은 그가 아는 만큼 사는 게 아닙니다. 가진 만큼 사는 것도 아닙니다. 그가 바라는 만큼 사는 것입니다. 얼마나 아느냐, 얼마나 가졌느냐에 행복이 달려있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는 그가 얼마나 소망을 가지고 있느냐? 어떤 소망을 지니고 사느냐? 에 따라서 행복은 좌우되는 것입니다.' 행복 뿐만 아니라 여기에 바로 인간과 짐승의 근본적인 차이가 있습니다.

천국과 지옥과 같은 삶을 사는 것은 전적으로 소망의 문제입니다. 단테의「신곡」에 보면, “이곳에서는 일체 소망을 버려라.”는 말로 지옥을 표현합니다. 소망이 없는 삶이야말로 바로 지옥입니다. 오늘 여기서 얼마든지 천국과 지옥의 삶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데살로니가전서 4:13절에 "형제들아 자는 자들에 관하여는 너희가 알지 못함을 우리가 원치 아니하노니 이는 소망 없는 다른이와 같이 슬퍼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고 분명히 선언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것은 생존의 문제이기도 합니다. 그야말로 “To Be or not To Be”의 문제입니다. 인간은 결코 빵이 아닌 소망을 먹고사는 존재입니다. 마태복음 4:4절에 “사람이 떡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니 ”라고 예수님께서는 분명히 강조하고 있습니다. 신명기 8:3절에 "너를 낮추시며 너로 주리게 하시며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열조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너로 알게하려 하심이니라."고 하신 말씀을 따라 사셨습니다.

런던의 랍비인 '휴고 그린'씨는 제 2차 대전 당시 독일의 집단 수용소에서 겪었던 뼈아픈 고난의 체험담을 전후 독일의 [데르 모르겐] 잡지에 이렇게 기고했습니다.

“그 날은 1944년 몹시 추운 겨울이었습니다. 사실 집단 수용소에 달력 같은 것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나와 함께 감금되어 있었던 저의 아버지께서 저와 몇 친구 분들을 데리고 수용소 건물 한 구석으로 모이게 하셨습니다. 아버지는 그 날이 유대인의 명절인 ‘하누카의 저녁’이라고 하셨습니다. 아버지는 우습게 생긴 진흙 주발을 내어놓으시더니 수용소에서는 좀처럼 구하기 힘든 버터기름을 녹여서 심지를 적셔 촛불을 대신했습니다. 아버지가 송축 기원을 말씀하시기 전, 저는 아버지께 그 귀한 버터기름을 먹지 않고 낭비하는데 대하여 항의를 했습니다. 아버지는 저를 가만히 보시더니 다음과 같이 조용히 말씀하셨습니다. ‘네가 알고 내가 알듯이 사람은 밥을 먹지 않고도 3주간을 살수가 있어, 우리는 한때 물을 먹지 않고 3일 동안 살아 있었다. 그러나 너와 내가 알다시피 사람은 소망이 없이는 하루도 살수가 없어!’라고 말입니다.” 결국 집단 수용소에서 많은 사람들이 죽어 나갔습니다. 그러나 끝까지 생존한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이 누구였는지 아십니까? 절망 중에서도 소망의 밧줄을 끝까지 붙잡고 있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정신심리학자 가운데 '빅터 프랭클'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자신의 저서에서 “나치 수용소에서 말할 수 없이 잔인한 고문과 무서운 형벌과 비인간적인 학대 속에서 나를 생존하게 만든 것은 소망이었다.”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소망은 우리 인간에게 생존의 이유, 생존의 능력을 제공합니다. 그렇습니다. 인간은 그 어떤 절망적인 환경 가운데서도 소망을 찾아 몸부림치는 존재입니다. 사람들의 가슴속에 소망이 있으면 어떠한 역경과 고난도 헤쳐 나갈 수 있습니다. 문제는 소망이 있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인류에게 영원한 소망을 가져다 준 사건이었습니다. 그가 부활의 첫 열매가 되어 주시므로 우리 소망의 보증이 되어 주셨습니다. 우리는 그 다음 열매들이 된 것입니다. 그 부활의 소망을 간직하며 오늘을 살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죽을 때에도 남들과는 달리 평안하게 눈을 감을 수 있는 있습니다. 비결이 있다면 어디에 있는지 아십니까? 왜? 성경은 그리스도인들의 죽음에 대해 죽음이라고 하지 않고 ‘잠’이라고 했는지 아시겠습니까? 우리는 보통 사람이 죽으면 묘비에다 무엇이라고 씁니까? 불신자들 같은 경우에는 “고 아무개 지 묘”라고 하지 않습니까? 성도들 같은 경우에는 비석에다 십자가 하나 더 그리고 “고 아무개 성도 지 묘”라고 새깁니다. 아주 딱딱하면서도 재미없게 묘비명을 새깁니다. 그러나 외국 사람들은 죽어가면서도 유머를 남기는가 하면, 묘비명도 아주 유머스럽게 새기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느 목사님은 이런 묘비명에는 “참 말 많던 내 아내, 드디어 입을 다물다.” 아마 생전 바가지 꽤나 글었던 모양이지요? 또 어떤 묘비명에는 “사랑하는 내 아내 여기에 잠들다. 제발 내 아내를 깨우지 말아다오.” 아마도 악처였던 모양이지요? 그 중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비문은??“부지런한 내 딸, 여기에 잠들다. 부활의 때에도 제일 먼저 일어나리.” 이 얼마나 멋있는 비문입니까?

불란서 파리에 있는 어느 수도원에 가면 그 들어가는 입구에 큰 무덤이 있습니다. '그 비문은 불어로 이렇게 써져 있다.'고 합니다. “아프레 쓸라(Apres cela), Apres cela, Apres cela” “그 다음은, 그 다음은, 그 다음은.” 아주 중요한 상징적 의미가 있는 비문이 아닙니까?

성도여러분은 여러분의 묘비에 어떤 말이 새겨지기를 원하십니까? “아무개 박사”, “아무개 회장”입니까? 사실 죽어서까지 그것 가지고 천국에 가지 못합니다. 구원받은 성도는 세상에 이름 없는 무명한 자라도 천국에서는 세상에 큰 자보다 더욱 위대한 사람이 됩니다.??저는 묘비명도 필요 없는 사람이지만 굳이 하나 새겨보라고 한다면, “구원 받은 하나님의 자녀 여기에 잠들다. 이제 곧 깨어나리라.”고 새겼으면 하고 소원합니다.

바로 이런 부활의 믿음, 이런 궁극적인 소망이 남아 있기에 죽음 앞에서도 담대할 수 있고, 평안할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부활은 '최종적인 소망의 내용'이요. 궁극적인 소망입니다. 이 부활 소망, 부활 신앙만 붙잡고 있으면 이 땅에 사는 동안니나 죽음 앞에서도 전혀 문제 될 것이 없습니다.

잘 살아도 한 세상, 못 살아도 한 세상입니다. 이제 중요한 영원한 삶이 나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직 본론은 시작되지 않았습니다. 영원한 기업이 나를 위해 하늘에 예비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산 소망이 될 수 있음은 결코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땅에 있는 희망의 내용들은 시간과 함께 낡아지고 썩어지고 더러워집니다. 그러나 하늘에 있는 소망은 그렇지 않습니다. 바울이 고후 4장에서 고백한대로 “날로 새롭도다.”입니다. 오늘도 우리가 새로운 피조물로 살아가는 비결이 여기에 있습니다. 바라기는 이 부활 소망, 부활 신앙을 가지시고 나를 대신하여 죽어주신 그리슫고와 연합하여 주를 기쁘시게 하는 부활의 신앙, 과 오늘을 담대하게 부활의 증인, 하나님나라를 위한 헌신의 삶으로 승리하실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시며, 부활과 참 소망이 되시는 하나님!

오늘 저희들을 위하여 주님께서 부활하신 엄청난 사건을 축하하는 부활주일에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한 저희들에게도 부활의 선물을 주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들이 될 뻔했는데, 약속대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부활에 참여하는 복을 주시고, 죄 사함과 영생을 주시고, 하나님의 나라를 기업으로 얻을 수 있도록 하시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들로 살게 하심을 감사드립니다. 주님 부활하심으로 우리에게 영원한 소망과 오늘의 삶의 의미를 더해 주심을 다시 한 번 감사를 드립니다. 오늘도 부활에 대한 믿음과 소망 가지고 현재의 부활에 참여하여 그리스도와 연합한 믿음으로 현실의 모든 문제와 어려움들을 넉넉히 이기는 삶이 되게 하옵소서.

부활하시고 부활을 약속하신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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