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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가면을 벗은 얼굴로! (고후 3:12~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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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인격은 곧 가면?

몇 년 전 상영이 되어서 인기를 끌었던 [반칙왕]이라는 영화가 있었습니다. 아주 웃기면서도 강한 메시지를 전하는 영화였지요. 주인공은 어눌하고 소심한 은행원 ‘임대호’라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소심하고 무능력하여 하루가 멀다 하고 상사에게 얻어터지는 평범한 샐러리맨입니다.

그가 어느 날 찾아간 체육관에서 자신이 왕년에 좋아했던 '반칙왕' 울트라 타이거마스크의 사진을 보고 흥분하여 얼떨결에 레슬링을 배우겠다고 선언해버립니다. 그리고 매일 밤 퇴근 후, 고된 훈련을 받으면서 그는 달라지기 시작합니다. 사실 그는 가슴 속에 뜨거운 불덩이를 품고 있었던 사람이었기 때문에 레슬링을 배우면서 아주 강하고 난폭한 '반칙왕'으로 거듭납니다. 의자 공격, 할퀴기, 눈 찌르기, '쓰리빠'로 가격하기, 콧구멍 찌르기, 귀 찢기, 급소 공격하기, 등등의 장기를 배웁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가 가면을 써야만 반칙왕이 된다는 것입니다. 가면을 쓰지 아니하면 동네 불량배 앞에서조차도 힘 한 번 제대로 쓰지 못하는 소심하고 무능력한 그대로였습니다. 그러다가 가면 만 쓰면 달라졌지요. 그래서 그 영화 가운데는 “가면을 쓰면 없던 용기가 생기는 건 너무 당연하다. 그 가면이 벗겨졌을 때의 수치란 말로하기 어려울 거다. 직장에서의 스트레스, 짝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그리움, 그것들을 다 숨길 수 있는 커다란 가면 하나를 만들자”라는 대사가 나옵니다.

이 영화는 상황에 따라 각양각색의 가면을 그때그때 바꾸어가면서 사용하는 현대인들의 모습을 아주 잘 보여주었습니다. 이 사람한텐 이 가면, 저 사람한텐 저 가면, 가정에서 쓰는 가면, 직장에서 쓰는 가면, 그리고 교회 올 때 쓰는 가면이 다 다르다는 말이죠. 누군가 ‘살아온 세월의 결만큼 얼굴 위에 가면의 숫자도 더해 왔다’고 했는데요. 일리가 있는 말입니다. 어쩌면 예배를 드리는 이 순간에도 가면을 쓰고 앉아 있을 수 있습니다.

아무튼 가면을 써야만 힘을 쓰는 사람들! 이것은 영화의 주인공의 모습만이 아니라 오늘 많은 사람들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정말 재미있는 것은 “가면”이라는 말이 한 사람의 “인격(personality)”을 뜻하는 말과 같은 어원인 ‘페르소나’라는 말에서 나왔다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누구나 일상생활 속에서 저마다 가면을 쓰고 살아가며, 가면을 쓴 채로 서로를 대한다는 것과 일맥상통합니다. 우리가 인격이라고 부르는 것은 그가 가면을 쓰고 행하는 것과 같다는 말입니다.

여러분은 몇 개의 가면을 가지고 있습니까? 지금 여러분은 어떤 표정의 가면을 쓰고 있습니까? 혹시 지금 여러분은 가정이나 직장에서 쓰던 가면이 아닌 또 다른 가면을 쓰고 예배당에 앉아 계시지는 않습니까?


2. 모세의 수건(手巾), 유대인들의 가면(假面)

오늘 본문은 구약과 율법의 기능이 이제 끝났으며, ‘새로운 시대, 성령의 시대, 복음의 시대’가 시작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시대를 알지 못하고, 계속 과거에만 매달리는 유대인들을 향한 말씀입니다. 구약이나 율법은 온전한 것이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단지 그림자로서 진정한 실체, 진정한 실물이 나타나면 사라질 것들입니다. 진정한 실체가 나타날 때까지만 한시적으로 존재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구약과 율법의 진정한 실체인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상, 그것들은 더 이상 필요가 없는 것이 되었지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옛것을 고집하는 사람들을 향해서 오늘 본문은 그 어리석음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오늘 본문을 출애굽기 34장 29절부터 35절 말씀을 인용했습니다. 모세가 시내 산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율법을 받아 가지고 내려 왔을 때, 그 “얼굴 꺼풀에서 광채”가 났습니다. 하나님과 40일 밤낮을 함께 지내면서 주님의 영광, 주님의 거룩함, 주님의 빛이 그에게 옮겨진 것입니다. 처음에는 자신의 얼굴에서 빛이 나는 것을 몰랐던 모세는 그것을 알게 되었을 때, 사람들 앞에 설 때는 수건으로 얼굴을 가렸습니다. 오늘 본문은 모세의 이러한 행동을 두 가지로 해석합니다.

1) 첫 번째는 자신의 얼굴을 수건으로 가렸던 모세의 행동에 대한 설명입니다.

자신의 얼굴에서 하나님의 영광과 그 찬란함이 나타났을 때, 모세가 자신의 얼굴을 가린 이유는 자기 얼굴에 나타난 영광이 곧 없어질 줄 알았기 때문이었습니다. 모세의 얼굴에 나타난 영광은 물론 아무에게나 생기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렇다고 그것이 모세를 신으로 떠받들게 만드는 것이 될 수 없으며, 그리고 그 영광도 잠시 생겼다가 사라질 것이지 영원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런데도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것만 주목하면서 그것을 특별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일시적이고 없어질 것에 현혹되어서 정작 바라보아야 할 하나님을 보지 못하거나, 인간에게 잠시 생겼다가 없어질 것에다가 영원하고 절대적인 가치를 두려고 했기 때문에 그것이 잘못되었음을 가르치려고 그는 수건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렸던 것입니다.

또한 이것은 모세 자신의 사역이나 역할, 그리고 모세가 받아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전파한 율법조차도 특별한 것, 영원한 것, 절대적인 것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가르치려는 목적을 가진 행동이었습니다. 모세의 얼굴에 나타난 영광의 빛이 일시적인 것이듯이, 유대인들이 가장 위대한 사람으로 여기는 모세의 역할도 일시적이며, 모세로 말미암아 주어진 율법도 일시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세와, 그의 사역과 "모세의 법“이라고 불리는 율법은 모두 수건을 덮어야 할 것들입니다. 아무리 모세가 특별한 주님의 종이고, 그가 받은 말씀과 율법이 특별하고, 그리고 그 내용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것이라고 해도, 그것은 메시아이신 예수님을 가리키는 것일 뿐입니다. 모세가 수건으로 자기 얼굴을 가린 이유가 바로 이것이었습니다.

2) 두 번째는 바울은 이 일을 통하여 현재 유대인들의 문제를 지적했습니다.

모세가 수건으로 자신의 얼굴을 가린 이유는, 유대인들 때문이라는 것이죠. 14절에 “저희 마음이 완고하여 지금까지라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오히려 벗어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고 합니다. 유대인들은 마치 수건을 뒤집어 쓴 것처럼, 마음의 눈, 믿음의 눈이 가려져 있었습니다. 여기서 "완고하여"라는 말은 둔해져서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깨닫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구약을 읽을 때”, 그 본래의 의미를 깨닫지 못했습니다. 본문 15절은 “오늘까지 모세의 글을 읽을 때에 수건이 오히려 그 마음을 덮었도다”라고 합니다. 유대인들의 얼굴에 수건이 덮여져 있어서, 그들 앞에 일어나는 일이나, 사물이나, 어떤 형편을 제대로 분간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께 대해서 수건을 덮어쓴 채로 신앙했으며, 사람들에 대해서도 그렇게 행동하고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들은 율법이라고 하고, 전통이라고 하는 수건으로 하나님을 바라보았습니다. 그 수건을 뒤집어쓴 채 세상을 바라보았습니다. 그 수건을 덮어쓴 채로 인생을 바라보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자신들이 덮어쓰고 있는 수건 때문에 제대로 보고 제대로 알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제대로 보는 것처럼, 자신이 보는 것이 정확한 것처럼 착각하고 있었습니다.

이 수건인 율법은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까지는 제법 쓸 만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께서 오셨으므로 더 이상 수건은 필요 없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그 수건을 벗지 않고서, 그것이 절대적인 것인 양 고집하고 있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주님의 영광을 제대로 보지 못하고, 메시야가 주시는 복을 누리지 못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사람들을 향해서는 수건을 썼지만, 하나님께로 향할 때는 수건을 벗었습니다. 지금 유대인들 역시 수건을 벗고서 하나님 앞에 서야 만이 모든 것을 제대로 볼 수 있을 것이며, 주님이 하시는 일도 제대로 알 수 있을 것입니다.

운전을 하다보면 햇볕 때문에 눈이 부셔서 썬 글라스를 낄 때가 있습니다. 어떤 분들은 밤에도 썬 글라스를 끼고 다니더군요. 제게도 제 시력에 맞춘 썬 글라스가 하나 있습니다. 그런데 저는 이것을 끼고 운전하는 것에 익숙하지가 않습니다. 썬 글라스를 끼고 운전하면, 꼭 어두운 밤에 운전하는 것 같고, 밝은 날인데도 꼭 흐린 날씨나 비오기 전의 우중충한 날씨에 운전하는 것 같아서 싫습니다. 썬 글라스가 좋은 제품이 아니라서 그렇다는 얘기도 있습니다만! 어쨌든, 어느 누구도 썬 글라스를 끼고 보는 세상이나, 썬 글라스를 끼고 보는 세상의 색깔을 진짜라고 여기지는 않습니다. 마찬가지로 율법이라는 안경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은 진짜가 아닙니다. 진짜는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눈으로, 복음으로 바라보는 세계가 진짜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진짜가 왔음에도 진짜를 거부하고, 자꾸 가짜만 고집하면서, 도리어 진짜를 무시하고 없애려들었으니, 진짜가 무엇인지 아는 입장에서 얼마나 답답했겠습니까?


3. 우리의 가면(假面)

설교를 시작하면서 “오늘 우리 모두는 저 마다 가면을 쓰고 살아가고 있다“고 말씀드렸습니다.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것이 편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가면 쓴 모습으로는 주님을 제대로 만날 수도 없으며, 성도들과 진정한 사랑의 관계를 맺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한 여성이 주님을 믿어 천국을 약속받았습니다. 그런데 이 여성이 천국을 가지 못하고 지옥을 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 여성이 하나님께 따졌습니다. ”아니 하나님, 제게 천국을 약속하셨잖아요. 근데 왜 저를 지옥에 가게 버려두셨습니까?“ 그러자 하나님은 ”나도 네가 그 사람인 줄 몰랐다. 성형수술로 얼굴이 너무 달라졌잖니?“ 라고 했다는 우스갯소리가 있습니다.

고린도 교회의 유대주의자들은 단순히 자기 얼굴에만 수건을 덮어쓰고 살아가는 것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덮어쓴 수건은 다른 사람들에게도 해를 끼쳤습니다. 성도들에게 혼란을 주었고, 교회의 분열을 일으켰습니다. 그래서 16절은 “그러나 언제든지 주께로 돌아가면 그 수건이 벗어지리라”고 합니다. 주님 앞에서는, 교회 공동체 앞에서는 가면이 필요치 않다는 말입니다. 도리어 그것은 해만 될 뿐입니다. 그러므로 수건, 오늘 우리로 치면 가면을 쓰고 살아가는 것은 성도들로서는 버려야할 것입니다.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그리고 교회와 지체들을 위해서 말이죠.

그러므로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모세가 여호와께로 향할 때 수건을 벗었듯이, 이제 그리스도 안에 있는 성도들은 살아오면서 자의반 타의반으로 쓰게 된 갖가지 가면을 벗어야만 합니다.

현재 싱가포르의 “신앙공동체 침례교회” 담임목사이신 로렌스 콩(Lawrence Khong) 목사는 23만 명의 싱가포르 인구 가운데 1만 5천여 명을 교인으로 섬기고 있는 분입니다. 그런 이 분이 1985년, 자신이 섬기던 교회에서 쫓겨났었습니다. 그가 교회에서 쫓겨났을 때, 교회는 이리저리 분열되었으며, 교인들은 낙심한 가운데 이리 저리로 흩어져버렸습니다. 그리고 그는 자기를 따르는 몇 몇 교인들과 다시 교회를 시작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너무나 지쳐있었고 또 낙심한 가운데 있었으며, 사모님마저 아기를 유산했습니다. 그러자 그에게 예전 주님을 믿기 전의 나쁜 버릇이 다시 도졌습니다. 예수님을 믿기 전에 그는 하루에 담배 3갑을 피울 정도로 골초였었는데요. 너무나 힘들다는 이유로 그는 아무도 몰래 다시 담배를 피우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속으로는 “하루에 겨우 한 개비뿐인데 뭘!”하면서 스스로 변명하고 합리화시켰습니다.

1년이 지난 어느 날 콩 목사는 자신의 여섯 살 된 딸에게 예배를 가르치고 있었습니다. 딸에게 “손을 들고 하나님을 찬양하자!”라고 했는데, 갑자기 딸이 목사님에게 “아빠, 하나 물어볼게요” 라고 질문을 했습니다. 콩 목사가 “어떤 질문이냐?"라고 했더니, 딸은 ”아빠, 왜 목사님이 화장실에서 담배를 펴요?“라고 했습니다. 순간 너무나 당황한 콩 목사는 ”담배 안 피워!“라고 우겼습니다. 그러나 딸은 ”아빠가 화장실에서 나오면 화장실 안에 연기가 자욱하단 말이예요“라고 했습니다. 끝까지 딸아이의 말을 무시한 채 그는 아이에게 예배를 가르치려 했습니다.

그 순간 그에게 떠오른 말이 있었습니다. ”네 딸이 모르는 것 같으냐? 내가 모를 것 같으냐?“ ”네 딸에게 가면을 쓰고 그것을 고집한다면 너는 결코 나의 영광을 보지 못할 것이다.“ 자신이 지금 하나님과 사람 앞에 가면을 쓰고 있는데, 그 가면 때문에 자신의 예배는 진정한 예배가 되지 못하고, 그는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지 못할 것이고, 그리고 성도들을 예배의 영광으로 인도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자신이 가면을 쓰고 있는 이상, 하나님으로부터 오는 모든 복으로부터 제외가 되리라는 말씀이었고, 성도들을 주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도록 가리고 서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콩 목사는 어린 딸에게 자신의 죄를 고백했습니다. “딸아, 아빠를 용서해 다오.” 그랬더니 갑자기 딸아이가 목사님의 머리에 손을 얹고 “아빠, 아빠를 용서합니다. 하나님, 아빠가 다시는 담배를 안 피우게 해 주세요“라고 기도했습니다. 그날 이후로 콩 목사는 담배를 끊었습니다.

이 경험을 한 콩 목사는 ‘중국 사람들이 자존심이 강한 민족이라서 체면을 중시하고, 얼굴의 가면을 아주 두텁게 붙이고 살아가는데, 이 체면, 이 가면만 벗으면 더 놀라운 주님의 축복의 세계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그 이후로 자신은 ‘하나님과 사람 앞에서 투명하게 살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사소한 일로 부부싸움만 해도, 부목사님을 찾아가서 기도를 부탁한다고 합니다. 그는 하나님 앞과 사람 앞에서 가면을 쓰지 않으려고, 맑고 투명하게 살려고 엄청난 노력을 기울인다고 했습니다.

세상에는 겉과 속이 다른 위선적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있습니다. 목숨을 내놓는 척하면서 내놓지는 않고, 희생하는 척하면서 희생하지 않는 이들입니다.

어느 권사님의 가정에 복면강도가 들어왔습니다. 잠자고 있던 권사님이 일어나 보니 복면한 사람이 가슴에 칼을 겨누며 말하기를 "조용히 하시오!" 라고 했습니다. 권사님은 태연한 자세로 강도의 손을 잡고 "하나님, 이 사람을 불쌍히 여기시고 앞으로는 이런 짓을 하지 않게 해주세요" 하고 기도했습니다. 기도를 마친 권사님은 강도에게 말하기를 "나는 ㅇㅇ 교회 권사인데 무슨 일로 오셨나요?" 라고 묻자 강도는 권사님의 행동에 당황하면서 말하기를 "나는 며칠 전에 교도소에서 출감해 나왔는데 갈 곳은 없고 직장도 없는지라 손수레를 하나 구해서 장사하면서 살아가야겠구나 생각하다가 이렇게 권사님의 집에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라고 했습니다. 강도의 말을 들은 권사님은 손수레 값을 주면서 말하기를 "다시는 이런 짓 하지 말고 부디 성공하여 잘 살아보라" 고 했습니다. 강도는 권사님의 말에 감동되어 복면을 벗고 엎드려 절하며 말하기를 이 은혜는 평생 잊지 않겠다고 했습니다. 강도가 밖으로 나가자 권사님도 따라 나왔습니다. 날씨도 차가운데 들어가시라 했지만 괜찮다며 사거리까지 나온 권사님은 부디 성공하라며 손을 흔들어주며 헤어졌습니다. 그러나 권사님은 즉시 그 옆에 있던 파출소에 들어가 신고하여 그 강도를 잡게 했습니다. 권사님의 얼굴을 본 강도는 어이없어서 입술을 깨물며 떨었습니다.“조금 전만 하더라도 천사 같은 모습으로 기도해주며 성공하라 했었는데…….”이 사실을 알게 된 경찰들도 그 분을 욕했다고 합니다. 그 권사님은 돈은 찾았지만 믿음과 사랑은 잃고 말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성도는 주님의 영광과 은혜와 복이 가려지지 않고 자신에게 임할 수 있도록 자신을 가리고 있는 모든 것을 제거해야 합니다. 적어도 주님 앞에 설 때만이라도 모든 가면을 벗어던져야 합니다. 하나님께 정직해야 하고, 하나님 앞에 진실해야 합니다. 강한 척하지 마십시오. 경건한 척하지 마십시오. 죄짓지 않는 사람인 것처럼 하지 마십시오. 자신의 약한 면에 대해서 솔직하십시오. 하나님과 성도들 앞에서 부끄러운 것이 하나님의 영광을 보지 못하고, 하나님의 영광에서 멀어지는 것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더 나은 것임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18).

4. 가면(假面)을 벗으십시오!

우리는 너무나 가면에 익숙해 있어서 이제는 가면을 도저히 벗을 수 없다고 생각할 정도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공동체 앞에서, 이제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그러한 가면을 모두 벗는 것입니다. 가면을 쓰고 살아가면 하나님의 영광을 볼 수 없으며,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율법과 전통이라고 하는 가면을 쓰고서, 그 가면으로 하나님과 인간과 세상사를 보았던 유대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신 메시아를 보지 못했습니다. 복음의 진수를 맛보지 못했습니다. 주님 안에서 주어지는 축복을 누리지 못했습니다. 우리가 그들과 같이 되어서야 되겠습니까?

이제 가면을 벗읍시다. 가면을 벗은 얼굴, 맨 얼굴로 주님을 만나시고, 성도들을 대하십시오. 그리하면 18절에 있는 대로 수건을 벗은 자에게 주어지는 주님의 영광이 여러분에게 충만할 것입니다. 또한 그리 할 때에 여러분들은 세상이나 사람, 그리고 주님이 주시는 복을 제대로 누릴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모든 허식과 가식과 위선을 벗어버리고 하나님과 사람 앞에 정직하게 서서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와 복을 누리시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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