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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다비다야 일어나라! (행 9:36~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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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늘 이야기의 무대라고 할 수 있는 욥바는 예루살렘에서 서북쪽으로 약 60Km 쯤 떨어진 곳에 있는 항구 도시입니다. 지리적으로 중동과 유럽의 바닷길을 이어 주는 위치에 있기 때문에 욥바는 그 당시 국제 무역의 한 축을 담당했던 아주 중요한 항구 도시입니다. 그 욥바가 새롭게 발전한 것이 바로 오늘 이스라엘의 최대 도시 텔 아비브인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욥바는 도시의 모습이 매우 아름다웠다고 합니다. 지금도 욥바에 가면 아름다운 유적들을 많이 발견할 수 있다고 합니다. 또 역사적으로도 매우 유서가 깊은 곳입니다. 그 옛날 솔로몬 왕이 예루살렘 성전을 건축하기 위해서 레바논에서 귀한 목재들을 가져 올 때 그 목재들을 부렸던 항구가 바로 욥바였고 또 선지자 요나가 니느웨로 가라고 지시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거역하고 다시스로 도망가기 위해서 배를 탔던 곳도 바로 욥바였습니다.

  욥바에는 사람들이 많았고 돈도 많았습니다. 먹을 것, 입을 것, 그 밖의 모든 물자들이 차고 넘쳤습니다. 매우 풍요로운 도시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 풍요로움 때문에 욥바로 몰려들었습니다. 사람들은 화려한 미래를 꿈꾸면서 매우 분주하게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겉으로 볼 때 전혀 부족한 것이 없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활력이 넘치는 것처럼 보였고 모든 것이 아름답게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 이면에는 어두운 그늘도 있었습니다. 모든 것이 풍족할수록 그늘진 곳에 사는 사람들의 삶은 상대적으로 더 고달프게 마련입니다. 의지할 곳이 전혀 없는 고아들과 과부들, 그리고 나그네들의 삶은 참으로 비참했을 것입니다.

  대도시의 화려함과 풍족함에 길들여진 사람들이 볼 때 가난한 사람들은 전혀 다른 세계의 존재들 같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부자들은 가난한 사람들을 만나는 것이 불편합니다. 도움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은 부자들의 입장에서 볼 때 될 수 있으면 피하고 싶은 존재들입니다. 이 세상은 약육 강식과 적자 생존의 법칙이 적용되는 생존 경쟁의 마당이라고 사람들은 말합니다. 제법 그럴 듯한 주장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된 인간의 바람직한 삶의 모습은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그것은 다만 육체의 욕구에 따라서 육체만을 위해서 사는 동물들의 삶의 모습입니다. 그러나 안타까운 것은 예나 지금이나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짐승처럼, 아니 짐승보다 못한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그렇게 살지 않습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부자나 가난한 자 모두 다 한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때문에 모두 다 형제들이며 자매들인 것입니다.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할까요? 바로 우리 주님이 그렇게 명령하셨기 때문에 가능합니다. 주님은 명령하셨을 뿐 아니라 친히 본을 보이셨습니다. 때문에 그 주님을 믿고 따르는 주님의 제자들은 세상 사람들과 전혀 다른 삶을 살아갈 수 있는 것입니다.

  아무도 찾아가려고 하지 않고 눈길조차 주려고 하지 않는 도시의 그늘진 곳을 일부러 찾아가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바로 초대 교회 성도들이었습니다. 주님의 제자들이었다는 말입니다. 주님의 제자들은 자기들이 가진 것을 아낌없이 서로 나누었습니다. 또 그들은 구제에 힘썼습니다. 그들 가운데 오늘 이야기의 주인공이라고 할 수 있는 여제자 다비다가 있었습니다. 오늘 봉독한 말씀을 보면 그녀의 평소 삶의 모습을 “선행과 구제하는 일이 심히 많더니”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 특히 많은 과부들이 그녀의 삶에 감화되었던 것 같습니다. 그 결과 다른 제자들과는 달리 그녀는 믿는 사람들뿐 아니라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도 존경을 받았던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던 다비다가 그만 갑자기 쓰러졌습니다. 어떤 병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그렇게 갑자기 죽어서 그들 곁을 떠날 것이라고는 미처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에 사람들의 충격은 더욱 컸던 것 같습니다. 그녀의 도움을 받았던 많은 과부들이 하나 둘 그녀가 누워 있는 다락방 아래로 모여들었습니다. 성경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거기 모인 과부들은 아마도 이렇게 울부짖었을 것 같습니다. “주님! 왜 신실한 주님의 여종을 이렇게 갑자기 데려가십니까? 차라리 아무 짝에도 쓸모 없는 저나 데려가시지...” “주님! 다비다를 살려 주세요! 제발 살려 주세요!”

  그렇습니다! 왜 하필이면 다비다입니까? 그토록 선행과 구제하는 일을 심히 많이 한 다비다를 왜 갑자기 데려가시는 것입니까? 충분히 오래 산 것 같지 않습니다. 그만 죽어도 괜찮은 나이가 아닌 것 같다는 말입니다. 거기 모인 과부들이 한결같이 안타깝게 울고 있는 것을 봐도 잘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악한 사람들은 죽으라고 저주를 해도 잘 죽지 않는데 왜 착한 사람들은 고난을 당하고 또 어이없는 죽음을 죽어야 하느냐는 말입니다.

  세상을 살다 보면 우리로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어려운 일들을 겪게 됩니다. 신실한 사람들에게도 어려운 일들이 닥칠 수 있습니다. 아니 어찌 보면 신실한 믿음의 사람들이 더 많은 고난을 겪는 것 같습니다. 그럴 때 세상 사람들은 우리를 조롱합니다. “보라, 너희 하나님이 어디 있느냐? 과연 하나님이 정말 있다면 어떻게 그런 일이 생길 수 있느냐?” 고난을 겪는 것도 힘든데 그와 같은 조롱은 우리를 더욱 견디기 어렵게 만들지 않습니까?

  그러나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합니다. 그 어떤 고난이 닥칠지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를 분명히 볼 수 있어야 합니다. 다비다의 갑작스러운 죽음 때문에 눈물로 얼룩진 눈이 아니라 믿음의 눈을 똑바로 뜨고 고난 그 너머를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당하는 모든 고난에는 반드시 하나님의 깊은 뜻이 담겨져 있기 때문에 하는 말입니다.

  하여간 다비다의 갑작스러운 죽음 때문에 모두가 슬퍼하고 있을 때 누군가가 말했습니다. 이웃 마을에 베드로가 와 있고 거기서 팔 년 된 중풍병자 애니아를 고쳐 주었다는 소식을 들었다는 것입니다. 그 말을 듣고 사람들은 걸음이 빠른 두 사람을 뽑아서 룻다로 보냈습니다. 베드로라면 죽은 다비다를 살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가지고 지체하지 말고 욥바로 와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그들의 선택은 참으로 탁월했습니다. 용한 의사를 찾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아니면 모든 것을 체념하고 장의사를 부를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하나님의 사람을 찾아 도움을 청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찾았던 것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아직까지 제자들이 죽은 사람을 살렸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사도들로 말미암아 많은 표적과 기사가 나타난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사람을 찾았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문제를 하나님 앞에 가져갔던 것입니다.

  쉬지 않고 달려간 두 사람과 함께 욥바로 오면서 베드로의 마음도 몹시 아펐을 것입니다. 다비다가 어떠 인물인지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마 베드로의 눈에서도 눈물이 흘렀을 것 같습니다. 그는 걸음을 재촉하면서 한편으로 기도했을 것입니다. “주님! 이제 어쩌면 좋습니까? 이대로 다비다를 데려가시겠습니까?” 그 때 성령께서 베드로의 마음에 감동을 주셨습니다. 그 감동은 바로 며칠 전 룻다에서 중풍병자를 일으킬 때 주셨던 그 감동이었습니다. 그 감동은 또한 성전 미문의 앉은뱅이를 일으킬 때 주셨던 바로 그 감동이었습니다. 마치 주님의 음성이 그의 귀에 들리는 것 같았습니다. “내가 다비다를 다시 살리겠다. 반드시 다시 살려 주겠다!”

  드디어 베드로가 다비다가 누워 있는 다락방에 도착했습니다. 그를 보는 순간 과부들은 자기들을 위해서 다비다가 지어 준 속옷과 겉옷을 내보이며 더욱 큰 소리로 울기 시작했습니다. 베드로는 그들을 다 내보냈습니다. 그리고 다시금 무릎을 꿇고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다비다의 시체를 향해서 외쳤습니다. “다비다야 일어나라!” 그러자 놀랍게도 죽었던 다비다가 눈을 뜨고 베드로를 바라보고 일어나 앉았습니다. 마치 잠에서 방금 깨어난 것처럼... 베드로가 다시 살아난 다비다의 손을 잡아 일으키고 방문을 열자 더 이상 탄식이나 애곡하는 소리가 들리지 않게 되었습니다. 기쁨의 환호 소리와 감사 찬양하는 소리만 온 집을 가득 채웠습니다.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고 또 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아프게 했던 다비다의 죽음의 소식이 다시 살아난 소식으로 바뀌자 그 소식은 참으로 빠르게 전파되었습니다. 이제 부활은 더 이상 남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온 욥바 사람들이 다 알게 되었습니다. 특히 이 기적이 욥바에서 일어났다는 것은 부활이 온 세상 만민에게 미치는 기쁜 소식이라는 것을 확증하는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과연 더 많은 사람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믿게 되었을 뿐 아니라 다비다를 다시 살리신 그 주님의 능력과 그 이름을 믿게 되지 않았습니까? “온 욥바 사람이 알고 많은 사람이 주를 믿더라.”(행 9:42)

  다비다의 갑작스러운 죽음 때문에 잠시 감춰지는 것 같았던 하나님의 구원 계획이 그녀가 다시 살아남으로 말미암아 오히려 밝히 드러나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녀의 죽음과 삶은 더 큰 구원을 베푸시려는 하나님의 세밀한 계획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소식을 듣고 돌아올 수많은 영혼을 살리시기 위해서 다비다를 갑작스러운 죽음에 처하게 하셨고 또한 그녀를 다시 살리셨습니다. 다비다가 살아 있을 때는 주로 가난한 사람들이 그녀를 통해서 믿음을 갖게 되었지만 이제 온 욥바의 영혼들이 영생을 얻는 더 큰 구원을 이루게 되지 않았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오늘도 우리의 삶 전부를 통해서 큰 구원의 역사를 이루시기 원하십니다. 삶과 죽음과 다시 살아나는 기적을 통해서 욥바의 영혼 구원을 위한 도구로 귀하게 쓰임 받았던 다비다처럼 오늘 여러분의 삶 전부가 이 땅 위에 정의와 평화, 그리고 사랑이 넘치는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는 일에 귀하게 쓰임 받는 놀라운 기적의 삶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강석공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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