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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네가 나를 사랑한다면 (요 21:15-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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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토스, 파토스, 그리고 로고스>
연설이나 대화에는 세 가지 요소가 있습니다.
에토스(ethos)와 파토스(pathos)와 로고스(logos)입니다.

에토스는 말하는 사람의 성품, 인격을 의미합니다.
존경받는 사람, 신뢰할만한 사람은 무슨 말을 해도 그냥 믿어지고 설득이 됩니다.
그러나 청산유수처럼 아무리 말을 잘해도 그 성품과 인격이 존경하거나
신뢰할 만하지 못할 경우, 그 말은 울리는 꽹과리나 빈 깡통소리처럼 되고 맙니다.
반면에 어눌해서 썩 말을 잘 하지 못해도 성품과 인격이 반듯하고
존경스러우면 우리 마음은 절로 감동을 받고 설득이 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말을 할 때 단지 음성이 밖으로 튀어나오는 것이
아니고 우리의 성품과 인격이 상대방에게 전달되는 것입니다. 
확실히 에토스, 화자의 성품과 인격은 연설이나 대화에 있어서 중요합니다.

그 다음에 파토스, 감정이입(感情移入)이 또한 중요합니다.
화자가 던지는 말들이 청자의 가슴에 파고 들어가 휘저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단지 머릿속에만 이론적으로 뱅뱅 도는 말이 아니라 상대방이 내뿜는 격정이
내 마음에 고스란히 전달되는 것을 파토스라고 말합니다.

독일의 히틀러가 그토록 이성적이고 예술적인 독일 사람들을
단박에 사로잡을 수 있었던 것도 뛰어난 파토스 때문이라고 합니다.
히틀러의 연설을 한 번이라도 들어본 사람들은 저절로 그 격정 속에
빨려 들어가 히틀러의 추종자가 되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지요.
좋은 연설과 대화를 위해서 파토스도 아주 중요합니다.

셋째로, 로고스, 논리성이 중요합니다.
파토스는 있는데 로고스가 없다, 속 빈 강정처럼 되고 맙니다.
열정이 넘쳐 나서 그 말을 듣는 청중들이 정신을 잃을 정도로 열광은 되었는데
막상 연설이 끝난 다음에는 머리 속에 남는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형식은 화려한데 내용이 부실하다는 것이지요.
실제로 사람들 가운데에는 참 재미있고 열정적으로 말은 잘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 내용에 있어서는 건질 것이 별로 없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과 베드로의 대화>
오늘 우리가 나누는 모든 대화가 에토스와 파토스와
로고스를 두루 갖춘 좋은 대화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이런 관점에서 오늘 본문 말씀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요한 21장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과 나눈 대화를 소개합니다.
그 중에서도 오늘 봉독한 말씀은 예수님이 베드로와 나눈 대화입니다.
이 대화야말로 에토스와 파토스와 로고스가 고스란히 녹아 있는 대화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 앞에 나타나셔서 떡과 생선을 함께 잡수셨습니다.
아침 식사를 나눈 것이지요.
아침 식사가 끝난 다음에 예수님께서 유독 베드로에게 세 차례의 질문을 던지십니다.

꼭 세 번의 질문을 던지신 이유는 베드로가 예수님을
부인하되 꼭 세 번 부인한 까닭이 아닌가 싶습니다.
다시 말해 지난 날 베드로가 예수님을 세 번씩이나 부인한 적이 있는 까닭에 이에
비례해서 베드로가 예수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꼭 세 번의 질문을 던지셨다는 것이지요.
더욱이 삼이라는 숫자는 완전수인 까닭에 베드로의 세 차례의 부인이
변명의 여지가 없는 완전한 부인이듯이, 예수님의 세 번 질문에 대한
베드로의 세 번 대답 역시 완전한 확인이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자, 그렇다면 예수님의 세 차례 질문은 어떤 내용이며
이 세 질문에 대하여 베드로는 어떻게 대답하였을까요?

① 問 아가페, 答 필리아
15절을 보면, 첫째로, 예수님께서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고 물으셨습니다.
희랍어 원어 성경을 보면 "이 사람들보다" 라는 말은
"이 것들보다", 즉 사람이 아닌 사물로도 해석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첫 번째 질문에서 비교급을 사용하셔서
두 가지 의미로 질문을 던진다고 볼 수 있습니다.
"시몬아,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다른 제자들이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보다 예수님을 더 사랑하느냐고 물으시는 것이지요.
그 다음에 "시몬아, 네가 이 물건들보다, 즉 고기 잡는 배나 장비들,
직접 잡은 물고기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라고 물으십니다.
세상의 물질이나 직업이나 명예, 그 어떤 것들보다 주님을 더 사랑하느냐고 물으십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이 또 하나 있습니다.
우리말로는 사랑이라는 말이 하나밖에 없지만 희랍어는
다양한 사랑을 뜻하는 다양한 말이 있습니다.
가령 같은 사랑이라도 성애(性愛), 즉 남녀간의 성적인 사랑이 있습니다.
이 사랑을 '에로스'라고 말합니다.
그 다음에 친구간에 서로 주고받는 사랑, 즉 우정이 있는데 이것을 '필리아'라고 합니다.
에로스보다는 더 차원이 높은 숭고한 우정을 필리아 사랑이라고 하지요.

그런가 하면 에로스나 필리아 사랑을 훨씬 뛰어넘는
사랑이 있는데 그 사랑을 아가페 사랑이라고 합니다.
아마 예수님께서 마 5-7장에서 가르쳐주신 산상수훈의
사랑이 바로 이 아가페 사랑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오른 뺨을 치면 왼편 뺨마저 돌려대고, 속옷을 달라 하면 겉옷까지도 내어주며,
오리를 가자 하거든 십리까지 함께 가주는 사랑,
그 이타적이고 희생적이고 무조건적인 사랑이 아가페 사랑이지요.

자, 그런데,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첫 번째 질문을
던지셨을 때 이 아가페 사랑으로 물으셨습니다.   
"베드로야,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네가 가진 배, 그물, 직업, 돈, 명예, 이런 것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그런데 바로 그 사랑이 아가페 사랑입니다.
주님을 사랑하되 아무 이기심 없이, 이타적으로,
희생적이고 무조건적으로 주님을 사랑할 수 있느냐는 것이지요.
베드로의 목숨까지도 바쳐 주님을 사랑할 수 있느냐고 묻습니다.

이 첫 번째 질문에 대해서 베드로가 뭐라고 대답합니까?
15절 후반부를 보세요.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베드로는 아주 완곡하고 겸손한 어법으로 대답합니다.
자기가 주님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주님께서 다 아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때 베드로가 쓴 사랑의 단어는 아가페가 아닌 필리아입니다.
지난 날 자기가 주님을 그토록 사랑한다고
호언장담했지만 여지없이 실패했던 경험이 생각났기 때문이지요.
자기가 아무리 목숨 바쳐 예수님을 죽기까지 사랑한다고
큰소리를 쳤어도 결정적인 순간이 찾아왔을 때 예수님보다는
자기의 일신의 안전에 더 집착했던, 부끄러운 모습이 기억났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님, 제가 감히 아가페 사랑은 못하더라도 필리아 사랑,
친구간의 우정과도 같이 주님을 사랑하는 것을 주님은 다 아시지요."

이러한 베드로의 대답을 들으신 주님은 "내 어린 양을 먹이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래, 베드로야. 네가 나를 사랑한다면 나를 믿는
저 사람들을 나 대신 돌봐다오."하고 부탁하십니다.
이제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심으로 예수님을 따르는 양떼들을 더 이상
돌볼 수 없는데 베드로에게 그 목양의 사명을 부탁하시는 것이지요.

② 問 아가페, 答 필리아
이제 두 번째 질문을 보겠습니다.
16절을 보세요.
"또 두 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양을 치라 하시고."

흥미로운 것은 이 두 번째 질문에서 "이 사람들보다"
혹은 "이 물건들보다" 라는 비교급은 사라집니다.
예수님께서 베드로의 진심을 이해하신 듯이 보입니다.
베드로가 아무리 입으로 예수님을 사랑한다고 할지라도
허풍쟁이처럼 될 가능성이 있음을 이해하셨다는 것이지요.
그리하여 네가 이 사람들보다 이 물건들보다
더 나를 최고로 사랑할 수 있느냐고는 묻지 않으십니다.
그런데도 주님께서 던지신 이 두 번째 질문에서도 아가페 사랑은 여전히 나타납니다.
"베드로야, 네가 나를 사랑하되 무조건적으로 사랑할 수 있느냐?"

베드로의 대답은 첫 번째 대답과 별반 차이가 없습니다.
"주님, 그렇습니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이심전심이라고, 비록 자기 맘 깊은 곳에 있는 주님 사랑을 입으로 다 표현은
못해도 베드로가 얼마나 주님을 사랑하는지 주님은 다 아신다는 고백이지요.
옛날의 베드로는 입으로는 큰 소리 쳤지만 행동으로는 주님을 배신했습니다.
그런데 지금 부활하신 주님과 대화를 나누는 순간만큼은 다릅니다.
예수님이 아가페 사랑으로 물으셨지만 필리아 사랑으로
대답하면서 아주 겸손하고 신중한 자세를 취합니다.

베드로의 에토스가 달라진 것입니다!
전에는 로고스보다는 파토스가 더 지배적이었는데 이제 거꾸로가 되었습니다!
큰 소리부터 먼저 치는 격정, 파토스가 아닌 차분하고 침착한 로고스가 지배합니다!

이러한 베드로를 향하여 주님은 이제 "내 양을 치라"하고 명하십니다.
예수님 대신 목자가 되어서 주님의 양떼를 사랑으로 돌보라는 말씀이지요.

③ 問 필리아, 答 필리아
이제 세 번째 질문이 아주 중요합니다.
다같이 17절 말씀을 읽겠습니다.
"세 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 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양을 먹이라."

첫 번째 질문과 두 번째 질문에서 예수님은 아가페 사랑을 쓰셨고 베드로는
필리아 사랑으로 대답했는데, 이 세 번째 질문에서 주님은 필리아 사랑으로 질문하십니다.
두 번씩이나 베드로가 "자기는 감히 아가페 사랑과 같이
무조건적인 사랑을 하기에는 역부족이고 주님과 맺은 우정,
의리는 반드시 지키겠습니다" 하는 겸손을 인정하셨습니다.

신학자 라인홀드 니이버는 산상수훈에 나타난 아가페 사랑은
'impossible possibility', '불가능한 가능성'이라고 말한 적이 있습니다.
그 절대적이고 무조건적인 사랑을 유한하고 죄 많은 인간이
실천하기에 가능하기는 하지만 불가능한 가능성이라고 갈파했지요.
가능성보다는 불가능성에 더 큰 무게를 둔 표현이지요!

예수님도 이것을 아셨습니다.
베드로도 인간인 이상 아가페 사랑을 하기에는 한계가 있다고 보셨기에
"그래, 그렇다면 네가 나와의 우정과 의리를 지키는 필리아 사랑은
할 수 있겠지?"하고 세 번째 질문에서는 아가페를 필리아로 바꾸십니다.
완전한 사랑에서 불완전한 사랑으로 줄이셨습니다.
하늘의 사랑에서 땅의 사랑으로 내려오셨습니다.
주님의 사랑에서 베드로의 사랑으로 낮추셨습니다.

이러한 주님의 질문에 관해 베드로는 역시 대동소이한 대답을 합니다.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자기가 주님을 사랑하는 것을 주님이 이미 다 아신다는 것이지요.
이미 첫 번째와 두 번째 질문에서도 대답했던 내용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대답 앞에 놓여 있는 설명이 중요합니다.
베드로가 근심했다는 것이지요!

그토록 주님을 위해 목숨까지 바쳐 따르겠다고 큰 소리를 쳤던 자신이 자기
목숨 하나 건지기 위하여 닭이 울기 전에 세 번씩이나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했습니다.
그 연약하고 변덕스럽기 짝이 없고 겁쟁이였던 과거의 모습이 떠올라 세 번씩이나
거푸 주님을 사랑하느냐고 질문을 던지시는 예수님 앞에 영 자신이 없어졌습니다. 
겁이 났으며 불안해졌습니다.

"저는 도저히 아가페 사랑은 하지 못하겠지만
주님과 맺은 우정, 친구간의 사랑만큼은 지키겠습니다."
베드로의 성품과 인격, 에토스가 바뀌어졌습니다!
무모한 파토스만 지배했던 지난날과는 달리 로고스가 담긴 말을 합니다!

이런 베드로에 대해서 이제 주님은 또 한 차례 "내 양을 먹이라"고 부탁하십니다.
주님 없이 이 세상에 남게 될 모든 주님의 제자들을
잘 돌보는 목자의 사명을 감당해달라는 부탁이지요.

자, 이와 같이 주님과 베드로 사이에 세 차례의 대화가 끝난
바로 뒤에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과 그 해석이 또한 중요합니다. 

먼저 18절을 보세요.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내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앞으로 베드로의 삶에 중대한 변화가 일어나리라는 예언의 말씀입니다.
젊어서는 자유가 있었지만 늙어서는 자유를 잃고 구속된다는 것입니다.

그 해석이 19절에 나옵니다.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
베드로가 장차 십자가에 달려 순교 당한다는 암시입니다.
순종함으로 죽는 것이 하나님께 영광 돌리는 일이 된다는 것이지요!
비록 아가페 사랑은 못할망정  필리아 사랑으로 베드로가
예수님께 대한 우정과 의리를 끝까지 지키게 되리라는 말씀입니다.

이제 중요한 것은 베드로의 달라진 모습입니다.
예전에는 주님이 필리아 사랑으로 주님을 사랑하느냐라고 물으셨더라도
자기는 아가페 사랑으로 주님을 사랑할 것이라고 큰소리를 쳤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은 아닙니다.
주님이 처음 두 번은 아가페 사랑으로 물으셨고, 마지막 세 번째는
필리아 사랑으로 물으셨지만 세 번 다 필리아 사랑으로 응답했습니다.
겸손해졌습니다.
차분해졌습니다.
그의 에토스가 바뀌었을 뿐 아니라 파토스만 지배했던 삶이 로고스도 함께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는 감히 아가페 사랑은 못하더라도 필리아 사랑은 지키겠다는 베드로가
주님 위해 십자가에 거꾸로 못 박혀 순교 당하는 자리까지 나아갔습니다.
사랑은 말과 혀에 있지 않고 우리의 구체적인 삶에 있습니다.
과거에 베드로는 입으로는 큰 소리를 쳤지만 실천이 따르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베드로의 성품과 인격이 변화되니 비록 소리는
미약했지만 그 삶은 더욱 더 진지하고 엄숙해졌습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러한 변화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입으로는 큰소리를 치고 수없이 약속과 다짐과 맹세를 하지만 실제 삶에 있어서
달라진 것은 하나도 없다면 그것은 예수님의 부활 전(前)베드로의 모습일 것입니다.
비록 말은 어눌하고 썩 자신이 없어 보이더라도 우리의 삶이
진지하고 엄숙하다면 그것은 후(後)베드로의 모습일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이 주님을 사랑한다면, 말이나 고백만 가지고서는 부족합니다.
성품과 인격과 삶이 달라져야 합니다.

<모 그룹 회장님의 삐뚤어진 자식 사랑>
요즈음 모 그룹 재벌 회장의 삐뚤어진 자식 사랑이 사회적 이슈가 되고 있습니다.
둘째 아들이 술집 종업원과 시비가 붙어 눈두덩이가 찢어지는 상처를 입었습니다.
평소에도 자식 사랑이 끔찍했던 이 회장님은 두 차례씩이나
경호원들과 폭력배들을 동원하여 복수극을 벌였다는 것입니다.

어디에서 어디까지가 진실인지 수사가 더 진행되어야지만 알 수 있겠지만
이 회장님은 보복 폭행을 직접 지휘하면서 폭력까지 행사했다고 합니다.
가죽 장갑을 낀 채 "내 아들 눈을 다치게 했으니 너도 눈을
맞아봐라" 하면서 폭행자로 지목된 종업원을 마구 때렸다고 합니다.
그것도 부족해서 실제 폭행자를 찾아 술집에 와서
두 시간 이상 넘게 종업원들에게 또 집단 폭행을 했다고 합니다.
더 놀라운 것은 자기가 지켜보는 눈앞에서 아들로 하여금
그 폭행자를 분이 풀릴 때까지 때리라고 사주를 했다고도 합니다. 
참 엽기적인 폭력 사고가 아닐 수 없습니다.

자식 사랑하는 마음을 모르는 바는 아니지만 꼭 이렇게 할 필요가 있었을까 탄식이 나옵니다.
그 회장님이 자식을 진실로 사랑했더라면 남보다도
자기 아들에게 더 엄하게 책망을 했어야만 할 것입니다.
그러나 돈과 권력이 있다고 해서 안하무인격이 되어서 더욱 더
비열한 모습으로 복수극을 벌인 것은 대기업 총수가 할 일이 아니었습니다.

오늘 여러분은 주님을 사랑합니까?
여러분의 가족들과 이웃들을 사랑합니까?

진정한 사랑은 말이나 혀에만 있는 것이 아니고
먼저 우리의 성품과 인격부터 변화되어야만 합니다. 
우리의 에토스와 파토스, 로고스가 달라져야 합니다.
깊은 강은 소리 없이 흐릅니다.
얕은 개울물이 "졸졸졸" 더 시끄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요한 일서 3: 18절 말씀을 마음에 새겨두어야 할 것입니다.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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