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어린이주일] 아이가 자라며 (눅 1:80, 눅 2:40)

  • 잡초 잡초
  • 1271
  • 0

첨부 1


주제: 아이가 자라며

1:80 - 아이가 자라며 심령이 강하여지며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들에 있으니라.
2:40 - 아이가 자라며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족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 위에 있더라.

지금 우리는 서로 비슷한 두 개의 말씀을 읽어보았습니다.

두 개의 본문을 언뜻 읽어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비슷한 부분이 상당히 많다는 것을 느끼게 될 것입니다. 무엇보다 풍기는 뉘앙스나 이미지가 비슷합니다. 물론 내용에 있어서도 한 아이에 대한 성장과정을 보여준다는 면에서 비슷하다고 하겠습니다. 처음 시작도 똑같이 “아이가 자라며”로 시작합니다.

두 구절은 각각 세례요한과 예수님의 성장과정을 보여주는 말씀입니다.

이 두 구절은 누가복음 처음부분에서 예수님과 세례요한을 비교하는 패턴을 한 눈에 볼 수 있게 해주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과 세례요한은 인류의 구원사역이라는 하나의 목표아래 비슷한 삶의 과정을 겪은 것으로 보여집니다.

두 구절의 말씀은 절의 길이에 있어서도 거의 비슷합니다. 누가복음 1장80절 말씀의 글자수를 세어보니까 모두 34글자이고, 또 2장40절 말씀의 글자수를 세어보니까 모두 31글자로 되어 있습니다. 글자수도 불과 3글자차이입니다.

우연인지 필연인지, 두 본문을 각각 장과 절을 곱해보십시오.

1장80절, 2장40절, 각각 장과절을 곱하면 얼마가 됩니까? 80이라는 똑같은 숫자가 나옵니다.

분명 오늘 말씀은 서로 다른 두 아이에 대하여 기록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하나는 세례요한이요, 다른 하나는 예수라는 아이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너무나 공통된 부분이 많습니다. 그 둘은 불과 6개월 상간에 태어난 또래입니다. 혹 어려서 한 때 친구로 지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무엇보다 그 두 아이들은 구약성경에 오리라고 약속된 아이들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첫 번째 아이는 어떤 아이입니까? 그는 이사야의 말씀에 “광야의 외치는 자의 소리”로 표현되는 아이였습니다. 그는 메시야의 길을 예비하는 사람이요, 그 첩경을 평탄케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메시야 오시기 바로 이전에 와서, 메시야가 가실 길을 준비하는 임무가 그에게 있었습니다.

두 번째 아이는 어떤 아이입니까? 그는 바로 메시야였습니다. 모든 성경이 집중해서 말하고 있는 바로 그 약속의 아이였습니다. 모든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며,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는 그 분입니다. 우리의 허물을 인하여 우리의 죄악을 인하여 징계를 받고 채찍에 맞을 그 분입니다. 모든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 양어깨에 짊어지고 비참한 죽음을 당해야할 그 분입니다.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이 간절히 기다리는 그 분이었습니다.

무엇보다 오늘 두 구절의 말씀에 나오는 두 아이들은 서로 필연적인 운명의 끈으로 연결된 것처럼 보입니다. 하나는 메시야를 예비하는 자로서, 또 하나는 바로 그 메시야로서 이 땅에 보냄을 받았다는 말입니다.

사실 그 아이들은 태어날 때부터 이 땅에 온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모든 그들의 인생은 그 목적을 위해 진행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그 진행과정을 한 눈에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 진행과정을 한 번 생각해 보십시오. 오늘 본문말씀은 그 진행과정을 무엇보다 간단명료하게 정의하고 있습니다. 사실 더 이상 말이 필요없습니다.

세례요한과 예수님의 감춰진 대부분의 삶이 이 짧은 구절안에 함축되어 나타나고 있다는 말입니다. 세례요한이 요단강에서 세례를 주는 사역을 시작하기까지, 또 예수님께서 그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시고 공생애를 시작하시기까지, 그 감춰진 약 30여년의 시간이 이 두 구절안에 숨겨져 있다는 것입니다.

때로 우리는 세례요한과 예수님의 짧은 사역기간에 온 정신을 빼앗기다보니, 정말 그들의 대부분이었던 사역이전의 삶을 간과할 수 있습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 우리는 그들이 성장하여 하나님께서 맡기신 사역을 감당할만큼 자라기까지 어떤 과정을 겪었는지, 그들의 사역이전의 삶을 잠시나마 돌아보고자 합니다.

먼저 오늘 말씀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무엇보다 그 아이들의 인생은 순적한 삶이었다는 사실입니다. 순적하다고 하니까 고생 한번하지 않고, 아주 편하게 살았다는 말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순적하다는 것은 그들의 정해진 목적을 향해,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않고 직행하는 것을 말합니다. 가야할 길로 치우침이 없이 가는 것을 말합니다. 만일 가시밭길을 만난다할지라도 그대로 진행하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그 아이들은 자신들의 사명을 위하여, 어릴적부터 순적하게 그 길을 걸어왔다는 것입니다.

방탕하게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불받아서 180도 바뀌어 새로운 삶을 산 것이 아닙니다. 전혀 인류의 구원사역과 관계가 없는 것처럼 보였는데, 어느날 갑자기 두각을 나타낸 것이 아닙니다. 이미 그들은 어릴 적부터 이를 위하여 준비되었다는 사실입니다. 그들은 태어날 때부터 이미 자신들의 정해진 운명의 길을 가는 아이들이었습니다.

그렇다면 본문은 그 아이들의 삶의 과정에 대하여 어떻게 설명하고 있습니까?

첫째로, 그 아이들은 육적으로 성장하는 아이들이었습니다.

오늘 말씀은 이렇게 말합니다. “아이가 자라며”
그 아이들은 태어나자마자 금방 어른이 된 것이 아닙니다. 처음 태어났을 때 그들은 갓난 아기였습니다. 또한 남들과 똑같은 자람이라는 성장과정을 거쳤습니다.

그 아이들은 태어나자마자, 자신들의 사명을 감당할만한 힘을 가지고 태어나지 않았습니다. 태어나자마자 뛰어다니고, 히브리어에 헬라어까지 줄줄줄 말하고, 세상 사람들을 말로서 굴복시킬만한 지혜를 갖고 있던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야말로, 다른 아이들과 똑같은 모습, 능력, 힘을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보통 다른 아이들과 전혀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똑같이 똥도 싸고 오줌도 싸고, 배고프거나 아프면 울고 보채는 그런 아이였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감기도 안걸리셨겠습니까?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인데 어떻게 감기에 걸릴 수 있어? 라고 생각하면, 성육신하신 예수님을 크게 오해하는 것입니다.

어떤 성화를 보면, 말구유에 누워계신 아기 예수님의 머리가 번쩍번쩍 빛이 나지 않습니까? 뿐만아니라, 많은 성화를 보면, 예수님의 얼굴에서 환한 빛이 나는 모습이 그려진 것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후광이라고 하나요?

그러나, 예수님이 변화되고 얼굴에서 빛이 났던 것은 변화산에서 변화되셨던 그 때밖에 없었습니다. 그 외에 다른 때에는 우리와 똑같은 인간이셨다는 말입니다.
성화에 그려진 그 빛은 예수님을 좀 더 거룩하게 보이게 하기 위해서일 뿐입니다.
만일 그런 빛이 있었다면,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예수님을 대적했겠습니까?

“그거야, 그 사람들은 영적인 눈이 어두워서 그 빛을 보지 못한 것이 아닙니까?”라고 말하는 분이 계십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은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셨습니다.

잠시 옆 사람을 보시겠습니까? 고개를 끄덕끄덕 해보십시오. 그렇습니다. 주님은 바로 저 모습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누가복음이 주님에 대하여 표현하는 핵심주제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것은 “인자로서 오신 메시야”입니다. 인자가 무엇입니까? 사람의 아들입니다. 주님은 무슨 신적인 독특한 모양으로 오시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무슨 천사처럼 날개나 머리 위에 링을 달고 오신 것이 아닙니다.

주님은 우리와 똑같은 사람이요, 누가가 말하는 것처럼 인자로 이 땅에 오셨다는 말입니다.
처음 태어난 두 아이의 모습을 보면, 혹 뛰어나게 잘생겼을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평범한 아이들이었습니다. 성령의 도움없이 아무도 그 아이들을 보며 “이 아이는 선지자가 될 거야! 이 아이는 메시야가 될 거야!” 이렇게 고백할 수 없었다는 말입니다. 다른 아이들처럼 심히 연약하고 젓을 먹는 아이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오늘 말씀은 그들이 자란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원래상태로 있지 않고 발전한다는 것을 말합니다. 자란다는 것은 어린아이가 갖는 특권입니다. 이것은 엄청난 잠재성이요 무한한 가능성입니다. 사실 어린아이들이 무서운 것은 앞으로 어떻게 성장할지 모르기 때문일 것입니다.

기대이하로 정말 지지리도 못하게 성장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기대이상으로 상상도 못할 정도로 한 인물이 될 수도 있다는 사실입니다.

특별히 오늘 말씀의 자란다는 것은 육적인 성장을 의미합니다. 더 구체적으로 키와 골격이 커지고 힘이 세어지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은 자람으로 인해 점점 많은 일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 동안 할 수 없던 일을 자람으로 인해 할 수 있게 된다는 말입니다.

제 아들 준호를 아시죠? 키가 크고 몸집이 커지면서 하나하나 새로운 일들을 배워가고 있습니다. 예전엔 몸을 들어주지 않으면 손에 닿지 않았는데, 어느새 이젠 손을 뻗어서 혼자서 전등스위치를 켜고 끄고를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한번은 자다가 너무 더워서 보일러스위치를 봤더니, 전원을 켜고 스위치를 끝까지 올려놓았지 뭡니까? 그렇다고 손이 잘 안닿는다고 안전한 것이냐? 그렇지도 않습니다.

이젠 손이 안닿는 것은 의자를 갖다놓고 올라가서 끄집어 내리니까요.

저희집 냉장고 문이 아이들이 열기에는 좀 힘든 편입니다. 아이가 매달려도 잘 안열리는 문이었는데, 그런데, 얼마전부터 그 냉장고문을 열게 되었습니다. 냉장고안에 있는 아이스크림에 눈이 어두워졌기 때문입니다.

한 편으로는 그 눈부신 발전에 기쁘면서도 또 한 편으로는 이제 냉장고도 남아나지 않겠구나! 생각하면 골치도 아픕니다.

마찬가지로, 아이는 성장하는 것이 정상입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키와 몸집이 자라고 점점 더 많은 새로운 것을 배우는 것이 정상입니다. 대부분 성인은 25살정도만 되면 성장이 멈춰버린다고 합니다. 이것은 물론 키를 말하는 것입니다. 위로 자라는 것 말입니다.

그러나, 옆으로 자라는 것은 죽을까지도 자라는 것 같습니다. 몸매관리를 못하면 옆으로는 대책없이 자라기도 하지 않습니까?

그렇게 본다면, 사람은 25살에 성장이 멈추는 것이 아니라, 평생 자란다고 할 수 있지 않겠습니까? 사실 머리카락이나 손톱은 죽어서도 자란다고 합니다.

그러나, 기본적으로 “자람”은 어린아이들의 특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제 나이가 꺽인 사람들은 그 육신이 점점 쇠퇴해 가는 것이 순리입니다.

아이가 자라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아이가 자라는 것을 보고, 누가 뭐라고 비판하고 책망하겠습니까?
만일 아이가 자라지 않고 항상 그 상태라면, 그것이 문제입니다. 그것은 모두에게 엄청난 근심거리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큰 병이기 때문입니다.
아이가 자라는 것은 순리입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자연의 법칙입니다.

세례요한과 예수님! 두 아이들은 세상에 보내진 사명을 감당할 만한 어른으로 성장하기까지, 분명 육적인 성장을 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특히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임으로 그 모든 과정을 뛰어넘었다고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혹 영적인 성장을 하도 강조하다보니, 육적인 성장을 소홀히 여기는 경우가 있는 것 같습니다. 예수님의 신성을 너무 강조하여, 연약한 인간으로 오신 주님을 인정하려 들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분명 아기로 태어나신 예수님은 남들과 똑같이 육적인 성장의 과정을 거쳐 어른 예수님이 되셨습니다. 육적인 성장도 무엇보다 중요한 것입니다. 육신이 자라지 않고서는 영적인 성장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건강한 육체에 고귀한 정신이 깃든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주기도문에 보면,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옵시고”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물질적인 필요를 통하여 육적인 성장을 이루는 것도 중요하다는 말을 의미합니다. 아무도 파충류처럼 죽을 때까지 계속 커져가는 성장을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육적으로 계속해서 강건하게 사는 것은 무엇보다 필요한 것입니다. 이를 위해 인간의 수고와 노력도 반드시 필요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물론 모든 건강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것임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두 번째로, 그 아이들은 영적으로 성장하는 아이들이었습니다.

오늘 본문말씀은 이렇게 말합니다. “심령이 강하여지며”라고 말입니다.
이것은 정신적이며 영적인 성장을 의미합니다.
두 아이들은 육적인 성장과 더불어 정신적, 영적인 성장도 함께 이루어졌습니다.

본문을 보면 어린 시절 그 아이들은 매우 건강하고 영육간에 균형 있게 성장하였음을 보게 됩니다. 어느 한쪽만 성장하는 것은 정상적인 성장이라고 말할 수 없습니다.

사실 사람은 육적인 자람과 마찬가지로 정신적, 영적으로도 성장해야 합니다.
만일 육적으로는 자라고 있는데, 영적으로 자라지 않는다면, 그것은 영적인 바보가 될 것입니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육신의 성장과 함께 심령이 강하여지는 것이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보면,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육신과 심령의 균형있는 성장을 이루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마치 요즘 초등학교 5,6학년 중학교1,2학년 아이들이 육신적으로는 어른이 다 된 것처럼, 보이면서도 사실 여전히 아이짓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

마치 그런 불균형을 말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것은 단지 쉬운 예를 든 것이지, 실제로 육신과 심령의 불균형은 심각한 경우가 많습니다. 심하면 정신장애나 관계장애가 오는 경우도 많기 때문입니다.

정신적, 영적인 성장은 양적인 성장이 아니라, 질적인 성장이기에 오늘 말씀은 강하여진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정신적 영적인 성장은 약하냐, 강하냐로 그 크기가 정해지는 것입니다.

사실 성인들은 이제 육적으로 자라는 것은 끝입니다. “10센티만 더 자라면 좋을텐데...” 아무리 뼈에 사무쳐도 더 이상 무슨 방법이 없습니다. 어른이라는 그 이면에는 한편으로 성장이 멈췄다는 비애가 담겨있는 것이 아닙니까?

그러나, 이제 육적인 성장은 멈췄다할지라도 정신적 영적인 성장은 계속되어야 합니다. 하나님 나라에 가는 그 날까지 영적으로 날마다 믿음의 진보를 이루어야 할 것입니다.
그렇기에 육적인 성장보다 영적인 성장은 좀더 중요하다고 볼 수 있습니다.
육적인 성장만으로는 구원에 이를 수 없지만, 영적인 성장만으로는 구원에 이를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린아이들을 보고 자주 이런 말들을 하시죠? “참 좋을때다”

목구멍에 풀칠하느라 세상의 근심걱정할 것 없고, 아이들은 마냥 뛰어노는 것이 일이잖습니까? 그런데, 요즘 아이들을 보면, 정반대로 된 것 같아서 안타까울 뿐입니다. 학교에 들어가기도 전에 유치원에 다녀.. 여기 저기 안다니는 학원 없어.. 조기교육열풍에 시달리는 아이들을 보면 안쓰럽기도 합니다.

요즘에는 동네 아이들이 산으로 들로 서로 어울려 다니는 것을 볼 수가 없습니다.
어려서부터 자연과 벗하여 살아가지 못하고, 삭막한 공부지옥에 빠져, 얼마나 심령이 강하여질지 걱정이 앞설 뿐입니다.

제가 어렸을 때만 해도, 동네 아이들과 함께 산으로 들로 냇가로 온 천하를 누비고 다니던 때가 있었는데 말입니다. 특히 여름에는 학교 갔다오면, 가방 던져놓고 바로 냇가로 뛰어갔다는 거 아닙니까? 여름방학때는 아예 아침부터 어구를 준비해서 물고기 잡으러 갔으니 말입니다. 오죽했으면 어부라는 별명이 붙었겠습니까?

이래뵈도 물고기 잡는데는 탁월했습니다. 물고기마다 특성이 달라서 잡는 방법도 가지각색이었는데, 대부분의 방법을 꿰뚫고 있었잖습니까? 그물이 있으면 훨씬 좋지만, 맨손으로도 잘 잡았으니까요.

혹 피라미라는 물고기를 아십니까? 피라미를 맨손으로 잡아 보셨습니까?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아마도 우리나라에 있는 민물고기 중에서 제일 빠르고 바쁜 물고기가 아닌가 싶습니다. 거의 쉬지 않고 움직이는 습성이 있고, 돌틈에는 잘 숨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한 마리만 15분가량을 계속 쫓아가 보십시오. 쫓아가는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니지만, 그러나 기술적으로 잘 쫓다보면, 도망다니다가 저도 지쳐서 돌틈에 숨게 됩니다. 그때가 피라미를 맨손으로 잡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어부였던 예수님의 제자들을 생각해 보면, 저도 어렸을때 똑같은 과정을 겪었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전에는 어부였던 저의 삶이 이제는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사역자가 되지 않았습니까?

사실 준호가 쉬지 않고 뛰어다니는 것을 보면, 어떤 때는 예전에 내 모습을 보는 것 같아 깜짝깜짝 놀란다니까요.
무엇보다 아이들을 키우시는 부모님들은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아이들의 심령을 강하게 키우기 위하여 지대한 관심을 기울이시기 바랍니다.
예수님과 세례요한이 자라면서 그 심령이 강하여진 것처럼, 아이들의 정신적 영적인 성장을 위하여 무엇보다 최선을 다하셔야 할 것입니다.


세 번째로, 그 아이들은 하나님의 계획을 깨닫기 위한 구체적인 성장의 과정을 겪었습니다.

오늘 말씀에 보면, “이스라엘에게 나타나는 날까지 빈 들에 있으니라”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것은 특별히 세례요한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세례요한은 그의 대부분의 인생을 “빈들”이라는 곳에 살았다는 말입니다.
그렇다면 먼저 빈들이 무엇입니까? 빈 들은 일반적으로 유대 광야를 가리킵니다. 인적이 드문 곳이요, 풍요롭게 살기 보다는 가난하게 살 수밖에 없는 척박한 곳입니다. 그러나, 이런 빈들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영적인 훈련이 이루어지는 곳이요, 그를 향한 하나님의 구체적인 계획을 깨닫는 곳입니다.

사도바울이 그의 사역을 시작하기전, 아라비아에서 3년간 하나님과 독대하는 시간을 가졌던 것처럼, 세례요한은 유대광야에서 선지자로서 활동할 그 날을 준비하는 과정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이 시간은 사역을 위한 그의 구체적인 성장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만일 그가 빈들에서 구체적인 성장을 경험하지 못했다면, 자신에게 주어진 사역을 깨닫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마치 이 빈들은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게는 골방과 같은 개념입니다. 나와 하나님과 일대일로 독대할 수 있는 영적인 공간, 그 골방안에서 하나님을 체험하는 사람만이 하나님의 부르심의 구체적인 계획을 깨닫게 된다는 것입니다.

뛰어난 영성을 지닌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자신만의 골방훈련을 통하여 주님으로부터 사역할 능력을 얻은 사람들임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빈들에 계셨다는 말이 없으니까, 하나님과 독대할 골방훈련을 하지 못했다는 말이 아니냐? 이렇게 말하는 분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말씀은 말하지 않습니까? “지혜가 충족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 위에 있더라”
이 말씀이 곧 빈 들과 일맥상통하는 말입니다.
빈들 곧 골방을 통하여, 우리가 얻는 것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가르치심, 곧 지혜요, 죄인임에도 사랑으로 불러주신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가 아닙니까?

곧 세례요한이 빈들에 있었다는 말이나, 예수님께서 지혜가 충족하며 하나님의 은혜가 그 위에 있었다는 말이나 똑같은 의미로 받아들일 수 있는 것입니다.
결국, 세례요한이 “빈들”에 있었다는 것은 예수님에게도 해당되는 것입니다.

비록 실제로 예수님께서 빈들에서 사시지는 않았지만, 그 분의 메시야로서의 준비과정이 곧 빈들에 사는 것과 마찬가지였다는 것입니다.

준비과정동안 주님은 성장하셨습니다. 아이가 어른이 되듯이, 성장하셨습니다.
메시야로서 그 분의 사역을 할 수 있는 능력이 이 과정동안 자라왔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모든 하나님의 일을 맡은 사역자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빈들의 과정을 겪어야 합니다. 특히 이 빈들의 과정이 없이, 사역자가 되는 것은 실패할 가능성이 높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기에, 모든 사역자들은 스스로를 발전시킬 수 있는 빈들을 찾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좀더 하나님 앞에서 훈련된 사역자가 되기 위해 모든 노력을 경주해야 할 것입니다.

무엇보다 허송세월을 보내지 말고, 날마다 하나님 앞에서 성장하고 갖춰져가는 삶을 사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어린이주일입니다. 그런데, 개인적으로 참 안타까운 부분이 있습니다. 그것은 어릴 적 어린이날, 어린이주일만 되면, 감격하던 그 때의 느낌이 지금은 전혀 없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나와 전혀 상관없는 절기라는 그 소외감을 혹 아십니까?

이제는 훌쩍 나이가 들어 어느새 애아빠가 되어버린 나 자신을 보면, 세월이 유수처럼 흐른다는 말을 실감하는 것 같습니다. 나이가 들수록 시간이 더 빨리 지나간다고 하죠? 세월은 오르막길이 아니라, 내리막길인가 봅니다. 가면 갈수록 점점 가속도가 붙기 때문입니다. 죽음이라는 목적지를 향해 쉴새없이 내리달리고 있다는 말입니다. 아무리 피곤하고 지쳐도 중간에 휴게실 한번 들르는 적이 없습니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라는 전도서의 말씀처럼, 죽음을 향해 내리막길을 달리고 있는 우리 인생을 생각해보면, 허무한 마음마저 들 때가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다시 어린이날의 주인공이 돼 보고 싶어도, 지나간 세월은 아무도 돌이킬 수 없습니다. 세월은 후진 기어가 없는 자동차가 아닙니까? 우리는 후진할 수 없는 자동차를 타고 지금도 계속 달리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짧고 헛된 인생가운데에도 한 가지 유일한 희망이 있습니다. 그것은 인생을 어떻게 살아갔느냐에 따라 죽음이라는 목적지 뒤에 있을 영원한 안식처에 대한 희망입니다. 전도서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일의 결국을 다 들었으니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명령을 지킬찌어다 이것이 사람의 본분이니라”

그 희망을 오직 하나님께 두라는 말입니다. 그 희망을 현실이 되도록 이루실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밖에 없다는 말입니다.

사실 인생의 모든 과정은 세울 수도, 돌이킬 수도 없습니다. 헛되고 마치 바람을 잡으려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그 헛되다고 생각하는 우리 인생이, 영원한 하나님의 나라를 소유하느냐, 그렇지 않느냐를 판가름하는 중요한 과정이라는 점을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 것도 아닌 인생이지만, 그 인생을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하나님께서 모든 행위와 모든 은밀한 일을 선악간에 심판하실 그 때에, 어떤 사람은 영원한 안식에, 어떤 사람은 영원한 멸망에 들어간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 사실을 기억한다면 우리 인생은 이미 정해진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일에, 하나님의 말씀을 청종하는 일에 우리 모든 인생을 걸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 어른들은 더이상 육적인 성장을 기대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육적인 성장이 멈췄다고 해서 모든 성장이 멈춘 것은 아닙니다. 이제 우리는 영적인 성장을 위해 날마다 달음질해야 할 것입니다. 무엇보다 하나님께서 우리 개인 하나하나에게 이루실 그 계획을 깨닫는 구체적인 성장을 경험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사용하실만한 도구가 되십시오.
이제 그 도구를 더욱 예리하고, 날카롭게 다듬어야 할 때입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