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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종려주일] 십자가를 내가 지고 (막 15:2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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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은 힘이 듭니다. 고난은 눈물이 납니다. 고난은 어렵습니다. 그러나 고난 가운데 임하시는 하나님의 섭리가 있음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지금 순간의 고난은 참기가 어렵지만 지나보면 그 순간의 고난이 있었기 때문에 합력하여 선을 이루게 되는 것입니다. 지금 수난의 수치는 참기가 어렵지만 지나보면 하나님의 섭리가 있었음을 고백하게 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기까지 당하신 고난과 수치를 생각해 보십시오, 그러한 고난과 수치를 당하신 이유는 아버지 되시는 성부 하나님의 섭리와 뜻을 이루기 위함입니다. 당시 예수님의 고난은 아픔과 수치스러움이 같이 동반된 것이었습니다. 조롱하듯 그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당신이 만왕의 왕이시라고요, 당신이 우리의 구세주시라고요,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라고요”, “만왕의 왕이라면 면류관을 씌어 드리지요, 금 면류관은 사치스러운 것 같고, 가시 면류관을 씌어 드리지요”

가시면류관을 예수님께 씌어 드린 것은 예수님께는 가장 수치스러운 일이셨을 것입니다. 당시 밀짚이나 목피로 만든 면류관을 씌어도 되었을 것입니다. 아니 부드러운 천으로 만들어도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가시 면류관을 예수님의 머리에 씌었던 것입니다. 금 면류관 이상의 면류관을 쓰셔야 될 분이 가시면류관을 쓴 채 조롱을 받으시면서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더욱 수치스러움을 조장했습니다. 왕은 그 신하들로부터 “왕이여 평안할 지어다”라고 문안을 받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다. 로마인들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으면서 그것까지도 흉내를 내었던 것입니다. 그들은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 지어다” 만왕의 왕이 되시는 예수님께서 그러한 조롱까지 받으시면서 고통을 참으신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것은 고난 속에 숨겨진 하나님의 섭리를 감당하시기 위해서입니다.

오늘부터 일주일간은 예수님께서 고난당하셨던 그 날을 기억하면서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을 묵상하는 특별한 절기입니다. 기독교의 최대의 절기 부활절 한 주를 앞둔 고난주간입니다. 이 고난주간을 통해 고난이 우리에게 주는 의미와 예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를 지신 은혜를 생각하면서 그 사랑의 감격에 벅찬 마음으로 고난 속에서 와지는 축복을 경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찬송가 144장은 ‘나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 죽음’을 당하신 주님의 은혜를 깨달을 수 있는 찬송입니다. 이 찬송을 같이 부르시면서 보혈의 은혜를 깊이 깨달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사는 동안 전혀 원치 않았던 ‘십자가’를 지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예상치 못한 십자가를 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를 기꺼이 진다면 축복의 길이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조건 평안과 물질의 복만을 바라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우리가 사는 동안 십자가를 피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 십자가를 통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있습니다. 고난 주간을 보내면서 고난의 깊은 뜻을 이해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1. 고난 속에 숨겨진 하나님의 깊은 섭리를 알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위해 끌려가시던 도중 구레네 사람 시몬이 시골로 가다가 군병들에게 끌려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대신 지게 되었습니다.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순례자의 행렬에 끼어 예루살렘으로 온 시몬에게 있어 이 사건은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아주 우연한 일이었습니다. 우리의 삶속에서도 때때로 아주 예기치 않은 일들을 종종 접하게 됩니다. 특별히 예상치 못한 고난이 임할 때 그것을 우연이라 생각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섭리로 볼 수 있는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구레네 시몬이 진 십자가는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는 강제적으로 로마 군병들이 억지로 같이 가게한 십자가였습니다. 원래 죄수는 십자가를 지고 형장까지 가는 것이 상례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고문에 의해 시달린 나머지 그 십자가를 대신 지고 갈 사람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동기가 어찌되었건 비록 강제적인 억지에 의한 요구라도 그 요구를 들어주는 것이 기독교인의 자세라 할 수 있습니다. ‘또 누구든지 너로 억지로 오리를 가게 하거든 그 사람과 십리를 동행하고...’ (마5:41) 바로 이 말씀이 성도의 의무입니다.

성도들이 예수님 때문에 겪는 고난은 예수님의 사역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위한 고난은 잠간 동안이며, 장차 받을 대제사장이나 왕들에게 씌여지는 면류관이 주어질 것입니다. 구레네 시몬이 억지로 십자가를 대신 졌지만 예수님의 사역에 동참하는 격이 되었습니다.

2. 힘들 때 세상적인 방법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것입니다.

병정들은 주님을 끌고 골고다라고 하는 곳으로 가서 주님께 몰약을 탄 포도주를 주었습니다. 23절에 보면, ‘몰약을 탄 포도주를 주었으나 예수께서 받지 아니하시니라’고 하였습니다. 옛적부터 전해 온 관습에 따르면 예루살렘에 거주하는 부녀들이 십자가형을 받는 죄수들에게 고통을 덜어 주기 위해 마취 성분이 섞인 음료를 제공하였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의 고통을 당하실 때 얼마나 큰 고통을 당하셨겠습니까? 그러한 고통을 조금 잊으려면 당연히 로마병정들이 권했던 몰약을 탄 포도주를 받아 마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고통을 면하시고자 몰약을 탄 포도주를 받아 마시지 않았습니다. 무엇 때문에 받아 마시지 않았겠습니까? 지금만의 고통을 해결하고자 한다면 받아 마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이 고통의 문제만을 해결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지금의 고통이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가를 주님께서는 잘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로마 병정들의 모습은 어떠했습니까?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고 예수님의 옷을 서로 갖겠다고 제비를 뽑는 모습 속에서 무엇을 느낍니까? 정당한 댓가로 주어지지 않는 것이라면 당당히 사양할 줄 알아야 하며, 또한 분수에 넘치는 것을 탐하는 마음도 자제할 줄 알아야 합니다. 받지 말아야 할 상황에서도 받으려는 로마 병정들의 모습 속에서 우리는 인간의 나약한 모습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오히려 받으려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은 고통당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알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3. 고난을 이상하게 여기지 말고 즐거워합시다.

벧전4:12에서 베드로 사도는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을 이상한 일 당하는 것 같이 이상히 여기지 말고"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불같은 시험이 닥치고 불같은 고난이 닥쳐오더라도 그것을 이상한 일 당한 것 같이 이상하게 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런 시험과 그런 고난은 우리의 믿음을 정금 같은 믿음으로 단련시켜 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좋은 금, 곧 순도 높은 정금은 결코 저절로 만들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금이 포함되어 있는 광석을 용광로 속에 넣고 뜨거운 불로 단련할 때 점점 더 순도 높은 금이 만들어질 수 있습니다. 불로 연단을 많이 받은 금일수록 순금으로 인정받고 높은 가격을 받게 됩니다. 우리의 믿음도 그냥 저절로 좋은 믿음이 되거나 순수한 신앙이 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시련과 고난의 단련하는 불을 통해서만 좋은 믿음의 사람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다윗도 처음부터 선한 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도 본래는 자기 고집대로 살고 세상 적으로 살고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않고 그릇 행하던 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런 다윗도 많은 고난과 시련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깨닫고 나서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고 따르는 믿음의 사람으로 변화되었던 것입니다. 욥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사람들이 이해할 수 없을 만큼 수많은 시련과 참혹한 고난을 겪으면서 좋은 믿음으로 단련되었고, 결국 정금과 같은 믿음의 사람이 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 안에서 당하는 고난과 시련만큼 우리를 참 그리스도인으로 만들어 주는 것은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고난과 시련은 우리를 참 그리스도인이 되게 해 주는 선생인 것입니다. 누구든지 고난과 시련을 당할 때 그것을 이상하게 여기지 말고 믿음으로 그 시련을 잘 통과하면 훌륭한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고난을 굳이 자초할 필요는 없겠지만, 어쩔 수 없이 닥쳐오는 우리가 짊어져야 할 고난의 십자가라면 그것을 믿음으로 잘 견디어내고 슬기롭게 극복해야 할 것입니다.

벧전4:13에서는 "오직 너희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는 것으로 즐거워하라. 이는 그의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너희로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믿음의 시련은 인내를 갖게 합니다.

경북 안동이나 영주, 예천 지방에서 생산되는 한우 맛이 다른 지방의 쇠고기보다 훨씬 더 맛이 있다고 정평이 나 있습니다. 그것은 그 지방이 다른 비방에 비해 낮과 밤의 기온차가 크기 때문입니다. 즉 기온차라는 시련이 있고, 그 시련을 견딘 소들의 육질이 더 좋은 맛을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강원도 철원에 물살이 빠른 한 계곡 근처에서 식당을 운영하는 주인이 한 말이 기억납니다. "물살이 빠른 계곡에 사는 고기일수록 탕을 끓이면 맛이 있습니다. 고기질이 쫀득쫀득합니다." 물살이라는 시련이 잡고기의 육질을 단단하게 만들기 때문입니다.

수년 전, 비닐하우스에서 재배한 배추가 판로가 막혀 농민이 어려움을 겪는다는 이야기를 듣고 그것을 가지고 겨울 김장을 담갔는데 익기도 전에 물러서 먹지 못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온상에서 시련을 겪지 않고 연약하게 자란 배추가 물렀던 것입니다. 해남 지역에서 한 겨울에 재배한 '월동배추'가 당도가 높고 맛도 아주 좋다고 합니다. 그것은 겨울이라는 혹독한 시련기를 이겨낸 까닭입니다. 황태와 오징어를 말릴 때도 기온이 일정한 바닷가에서 말린 것보다는 일교차가 큰 산골에서 말린 것이 더욱 맛있다고 합니다.

시련이 올 때 보통 사람이라면 염려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나 자연의 이치를 살펴보면서 인생의 시련이 아름다운 삶을 창조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러한 비밀을 아는 자는 시련 앞에서 염려하지 않을 것입니다. (약1:3)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너희가 앎이라”

우리에게도 어려움과 시련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 어려움은 또 다른 의미가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그 힘겨움의 의미가 무엇인지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당하는 고난은 사명입니다.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롬 8:7) 고난 주간을 통해 어려움과 시련 속에 사명이 있음을 깨닫는 여러분들이 될 수 있기를 간절히 축복합니다. (고신복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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