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구대일의 차이 (눅 17:11-19)

  • 잡초 잡초
  • 266
  • 0

첨부 1


본문은 나환자 열 사람이 예수님을 만나 고침받았다는 기사입니다.
나병을 일명 한센병이라고도 하는데, 이유는 노르웨이의 의학자였던 한센이 1879년 나병의 병원균을 발견했기 때문에 그 사람의 이름을 따 한센병이라고 부르게 된 것입니다.
아직도 상당수에 이르는 우리네 이웃들이 한센병으로 고통받는 것은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누가복음 17:11-19에 나오는 열 사람의 나환자를 편의상 9대1이라고 분류합니다.그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첫째, 아홉은 유대인이었고 하나는 사마리아인이었습니다.
둘째, 아홉은 고침받은 후 제 갈 곳으로 갔고 하나는 예수님께로 왔습니다.
셋째, 아홉은 침묵했고 하나는 큰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렸습니다.
넷째, 아홉은 감사하지 않았고 하나는 주님께 사례했습니다.
다섯째, 아홉은 믿음에 대한 칭찬이 없고 하나는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다는 칭찬과 인정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이상의 구분을 통하여 9대1의차이가 얼마나 큰가를 발견하며 은혜를 상고 하겠습니다.

1. 아홉 사람의 책임과 잘못

1. 선택받은 유대인
그들이 어떤 경로를 통해 한센병 환자가 되었는가에 대해서는 설명이 없습니다만, 어쨌든 그들은 유대인이었습니다.
유대인은 택함받은 사람입니다. 택함받았다는 것은 책임을 전제합니다.
유대인은 그 어느 민족보다도 택함을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을 섬겨야 하며 감사를 드려야 하며 율법을 지켜야 합니다. 다시 말하면 이방인보다는 모든 면에서 나은 면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본문의 아홉 사람은 이방인에 비해 나은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우리는 유대인은 아닙니다만 선택받은 하나님의 자녀들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이 시간 교회 밖을 오가는 저 사람들보다는 모든 면에서 나은 것이 있어야 합니다. 교통 질서를 지키는 것도 교인 아닌 사람보다는 나아야 하고, 근검 절약하는 것도 예수 빋지 않는 사람들보다는 나아야 하는 것입니다. 선택과 책임은 권리와 의무의 관계와 같은 것입니다.

2. 감사하지 않았다.
왜 그들은 감사하지 않았는가에 대해 주경가 콕스는 “자기들이 병 고침받은 사실을 축복과 기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당연한 것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라고 했습니다.
다시 말하면 때가 되었기 때문에, 이미 치료되기로 작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우연히 치료되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서운 배신이며 불신앙입니다.
주경가 바클레이는 “4복음서 가운데 이 사건만큼 인간의 배은 망덕을 신랄하게 묘사한 곳은 없다. 열 사람의 나환자는 필사적으로 간구했다. 그리고 고침받았다. 그러나 아홉 사람은 전혀 감사드리지 않고 떠나가 버렸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일단 자기가 원하는 바를 획득하고 나면 결코 되돌아오지 않는다”라고 했습니다. 오죽했으면 주님께서 그 아홉은 어디있느냐고 찾으셨겠습니까?
아홉 사람이 고침받은 병이 어떤 병입니까? 어떤 병인데 배은 망덕하단 말입니까? 레위기 13:45-46을 보면 일단 나병에 결렸을 때 취하는 행동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환자는 옷을 찢고, 머리털을 풀고, 손으로 윗입술을 가리고 부정하다고 외쳐야 하며, 다른 사람에게 접근하지 못합니다. 그리고 마을에서 떠나 격리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나환자가 서 있는 곳에서 건강한 사람들 쪽으로 바람이 불면 50미터는 떨어져 있어야 했습니다. 그만큼 철저하게 부정한 병으로 규정했고 접근을 막았습니다.
그 병을 말씀 한마디로 고침받았는데 그들 아홉은 말 한마디 없이 돌아가 버린 것입니다. 그것은 무서은 배은 망덕입니다.

우리는 세 가지 은혜를 배은해서는 안 됩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내가 누구였습니까? 나는 어떤 사람이었습니까? 한센병보다 더 무서운 죄에 빠진 존재였습니다. 질병과 죽음과 위기에 빠져 파멸할 존재였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은혜로 구원받고 오늘의 내가 되었습니다. 그 은혜를 배신하면 안 됩니다.
둘째는, 부모님의 은혜입니다.
부모님의 은혜를 저버리는 자식을 갖는 것보다는 독사에게 물리는 편이 낫다는 리어왕의 독백은 물론 극단적 표현입니다. 그러나 자기가 젖을 먹이고 품에 안아 키우던 자식이 배신을 한다면 그것은 정말 가슴 아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자녀들에게 말합니다. 부모에게 효도하십시오. 순종하십시오. 배신하지 마십시오. 가을 하늘을 날아가는 기러기 새끼도 제어미보다 앞서 날아가지는 않는다고 합니다. 사람이라면 기러기 새끼보다는 나은데가 있어야 할 것 아닙니까?
셋째는, 이웃이나 벗들을 배신하지 않아야 합니다.
우리나라의 왕정야사를 보면 물고 물리는 배신과 망덕으로 점철되어 있습니다.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적이 되고, 오늘의 친구가 저녁에는 원수로 둔갑하는 모습이 펼쳐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정상 모리잡배들의 형태이지 정상적 인격의 소유자라면 그럴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 믿는 사람들은 그래서는 안 됩니다. 은혜를 힘입었으면 그 은혜를 갚아야 합니다. 갚지 못하더라도 잊지는 말아야 하고, 배신을 해서는 안됩니다.

2. 한 사람의 신앙과 장점

1. 사마리아 인
사마리아인은 유대인들로부터 심한 질타와 모멸을 받는 이방인입니다. 보나 마나 열 사람이 한데 어울려 다니기는 했지만 그들 중에서도 이 한 사람은 멸시를 받았을 것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멸시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런 것을 개의치 않았습니다. 멸시를 개의치 않고 자기 신앙을 지키고, 자기 자리를 지키고, 자기 할 일을 변함없이 해 내는 사람은 위대한 사람입니다. 그런 면에서 사마리아 사람은 훌륭한 사람입니다.
2.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
나병에 걸리면 성대가 약해진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제 그는 고침을 받았기 때문에 큰소리로 “하나님 감사합니다, 영광을 받으소서”라고 찬송할 수가 있었습니다.
동일한 은혜를 받았지만 입을 열어 감사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입을 열지 않는 사람이 있습니다. 주님은 입을 여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시편 81:10을 보면 “네 입을 넓게 열라 내가 채우리라”라고 하셨습니다.
성악을 제대로 전공하고 노래하는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의 차이는 여러 가지입니다. 우선 발성법이 다르고 다듬어져 나오는 음색이 다릅니다. 그리고 입을 벌리는 모양새가 다릅니다.
의사 표시의 경우도 그렇습니다. 입술은 다문채 중얼거리면 듣는 사람이 알아들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을 향하여 분명하게 입을 열고 내 신앙과 사랑과 감사를 고백해야 합니다.

3. 돌아옴
본문 15절을 보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돌아와”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여기서 이 사람의 행동의 연속성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는 한번으로 영광돌리는 일을 끝낸 것이 아니라, 영광을 돌리며 돌아왔습니다. 아홉은 돌아갔지만, 그는 계속 영광을 돌리며 주님에게로 돌아왔습니다. 돌아가는 것은 배신이고, 돌아오는 것은 보답 행위입니다.
그런데 사람은 은혜의 현장으로 돌아오지 않는 사람이 많습니다.
주님의 품을 떠나려는 사람도 있고, 교회의 품을 말한마디 없이 떠나려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 한 사람 나환자는 주님께로 돌아왔습니다. 누가복음 15장에 나오는 아버지를 떠났던 둘째 아들의 행복은 아버지께로 돌아 오면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주님을 떠나지 맙시다. 주님께로 돌아옵시다.

4. 발아래 엎드림
그가 그런 행동을 취한 것은 예수님의 높으신 인격과 사랑과 능력을 깨달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리고 자신이 받은 축복을 헤아렸기 때문이었습니다.
성경을 보면 주님의 발 아래 엎드렸던 사람들은 모두가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축복과 은혜를 받았던 모든 사람들은 한결 같이 주님 발 아래 엎드렸습니다.
엎드린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겸손과 경배를 의미합니다.
교회에 나오기는 하지만 엎드릴 줄 모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주님을 만나기는 하지만 허리를 굽힐 줄 모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을 만나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사람처럼 발 아래 엎드리는 것입니다. 이유는 나는 발 아래 엎드려야 할 부족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주님은 높고 위대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5. 사례함
열왕기하 5장을 보면 당시 아람 왕의 나아만 장군이 엘리사를 찾아와 나병을 고친 기사가 있습니다. 그 역시 정성을 다해 사례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사례는 마음과 뜻과 정성과 물질을 포함한 감사행위를 의미합니다.
그 당시 나환자는 자기 소유가 없습니다. 동네 밖으로 밀려난 사람이기 때문에 가진 것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한 사람의 사례는 물질은 아니었을 것입니다. 주님이 그에게서 받으신 것은 물질이 아니라 그의 정성과 마음이었습니다.
잠언 23:26을 보면 “내 아들아 네 마음을 내게 주며 네 눈으로 내 길을 즐거워할지어다”라고 했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입니다.
마음이 움직여야 감사도 할 수 있고 기도도 할 수 있고 봉사도 할 수 있습니다.
한 사람 나환자의 돌아온 사례에 대한 주님의 반응이 중요합니다.
17절을 주목하십시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18절도 중요합니다. “이 이방인 외에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러 돌아온 자가 없느냐.”
19절도 중요합니다.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본문에 드러난 9대1의 이야기는 우리들의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그 교훈 역시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교훈입니다. 아홉일 수도 있고 하나일 수도 있습니다. 나는 아홉입니까? 하나입니까?
은혜를 감사하는 사람이 됩시다. 주님을 떠나는 사람이 되지 맙시다. 주님께로 돌아오는 사람이 됩시다. 이 생명 다하는 날까지 주님을 배신하지 말고 사시기를 주님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