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그인

  • 목록
  • 아래로
  • 위로
  • 쓰기
  • 검색

설교 [어린이주일] 모세의 어머니 (출 2:1-10)

  • 잡초 잡초
  • 898
  • 0

첨부 1


오늘, 어린이 주일을 지키면서 모세의 어머니에 관한 말씀으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지난 주 ‘조승희 사건’을 보면서 부모의 신앙교육의 중요성을 새삼 느끼게 했습니다.

구약을 대표하는 인물을 뽑으라고 하면 모세일 것입니다. 그리고 모세의 배후엔 그의 어머니, 즉 모세의 부모의 신앙이 있었습니다. 히브리서 11장을 믿음장이라고 합니다. 거기에 믿음의 영웅들의 명단(list)이 나오는데  모세의 부모가 포함되어 있다는 사실입니다.

모세가 태어나던 시대는 이스라엘 사람들이 애굽에서 종살이를 하던 때입니다. 애굽의 바로 왕은 이스라엘 사람들의 인구가 많아지자 두려워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들을 낳으면 무조건 죽이도록 산파에게 명하였습니다. 바로 그런 상황에서 모세가 태어났습니다.

본문 1-2절입니다. “레위 족속 중 한 사람이 가서 레위 여자에게 장가들었더니 그 여자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아 그 준수함을 보고 그를 석 달을 숨겼더니.”  모세의 부모에 관한 말씀입니다. 본문에 이름이 없지만 출애굽기엔 이름이 나옵니다. 아버지는 아므람이고, 어머니는 요게벳입니다. 둘 다 모두 레위 사람이라고 했습니다. 요즘으로 말하자면, 모두 목사 가정이었다는 것입니다. 결혼에 있어서 같은 신앙인이라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그 아들의 모습이 ‘준수함을 보고’라고 했습니다. 히브리서에서는 “아름다움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모세의 부모가 자기 자식이기 때문에 예쁘게 보였다거나 사랑스러웠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우리말에 “고슴도치도 제 새끼가 함함하다면 좋아한다”란 말이 있습니다. 즉, 누구나 자기 자식은 다 귀여워 한다는 뜻입니다. 그러나 사도행전에 나오는 스데반의 설교에는 “그 때에 모세가 났는데 하나님 보시기에 아름다운지라(행 7:20)”고 했습니다. 부모의 눈에는 누구나 자기 자식은 예쁘게 보입니다. 문제는 하나님 보시기에 어떠하냐는 것입니다. 우리 동네에 사는 부모들은 교육열이 강해서 혹시라도 주일에 교회를 빠지면서까지 학원에 보내서 좋은 학교에 진학하기만 하면 자식이 예쁘게 보일 수 있습니다. 그런데 그 자식이 하나님의 눈에도 예쁘게 보일까요?  어느 부모는 좋은 대학에 진학시킨 후부터 교회에 열심히 나가게 한다고 합니다만 이미 늦는 경우가 허다합니다. 신앙은 부모 마음대로 되는 영역이 아닙니다.

3-4절입니다. “더 숨길 수 없이 되매 그를 위하여 갈 상자를 가져다가 역청과 나무 진을 칠하고 아이를 거기 담아 하숫가 갈대 사이에 두고 그 누이가 어떻게 되는 것을 알려고 멀리 섰더니.”  모세의 부모는 그 아이를 석 달을 숨겼다고 했습니다. 들키면 집안 전체가 죽임을 당하는 상황이었습니다. 우리나라로 말할 것 같으면,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과 같은 것으로 감시했을 것입니다. 오가작통법은 성종 때 한명회의 발의에 따라 <경국대전>에 올랐는데, 현종 때에는 천주교도들을 적발하는데 크게 이용하였습니다. 당시 많은 천주교인들이 적발되어 순교를 당했습니다. 숨긴 어린 모세가 발각되면 모두 죽임을 당하는 상황인데도 숨긴 것입니다. 우선, 아들을 살리고 싶은 부모의 본능도 있었겠지만, 모세의 부모는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창세기 15장 13-14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정녕히 알라 네 자손이 이방에서 객이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은 사백 년 동안 네 자손을 괴롭게 하리니 그 섬기는 나라를 내가 징치할찌며 그 후에 네 자손이 큰 재물을 이끌고 나오리라.”  모세의 부모는 하나님의 약속의 해를 헤아려보고 모세가 태어난 때가 이스라엘 백성이 종살이를 한지 400년이 다 된 때인 것을 확인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석 달을 숨기다가 더 숨길 수가 없었습니다. 울음소리도 더 켜졌을 것입니다. 그래서 갈대상자를 만들어 그 속에 아기를 넣고 나일강에 띄웠습니다. 그리고 열 두 살쯤 되는 누나 미리암에게 망을 보게 했습니다. 모세의 부모는 바로보다 더 높은 전지전능한 하나님께 맡기기로 했던 것입니다.

5-6절입니다. “바로의 딸이 목욕하러 하수로 내려오고 시녀들은 하숫가에 거닐 때에 그가 갈대 사이의 상자를 보고 시녀를 보내어 가져다가 열고 그 아이를 보니 아이가 우는지라 그가 불쌍히 여겨 가로되 이는 히브리 사람의 아이로다.”  마침 나일강에 목욕하러 나온 바로의 딸이 모세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왕궁에 목욕할 곳이 없어서 공주가 대낮에 목욕하러 강가에 나왔을까? 얼마전까지만 해도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이것은 과장이요, 신화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고고학이 발달되면서 이것이 신화가 아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고대 이집트에는 크게 보아 두 개의 신이 있었습니다.  하나는 태양신인데, ‘바로’는 바로 ‘태양의 아들’이라는 의미입니다. 다른 하나는 나일강이었습니다. 이 나일강은 그 당시 생산의 신으로 숭배되어, 자녀를 못 낳는 여자들은 강에서 목욕하면 아이를 얻는다고 생각했습니다. 아마 이 공주에게도 자녀가 없었던 것 같습니다. 공주는 우는 아이를 보고 연민의 정을 느꼈던 것 같습니다. 성서학자들은 작은 아이의 울음이 공주의 마음에 모성애의 본능을 일깨웠다고 말합니다. 이것도 바로 기적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배후에서 역사하신 것입니다. 이런 것을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라고 하고, 하나님의 은혜라고 합니다.

지난 금요일 저녁 간증집회에 많은 분들이 은혜를 받았습니다. 많은 분들이 울었습니다. 백기현 교수는 50년의 세월을 꼽추로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 굽은 등이 펴졌습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하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잘 보이려고 특별히 노력한 것도 없답니다. 안수기도를 받은 것도 아니고, 특별 금식기도를 한 것도 아니랍니다. 순종의 삶을 살겠다고 회개하고 결단한 것도 아니랍니다. 그저 부흥회에 참석했다가 은혜를 받은 것입니다. 우상숭배를 하는 가정에서 어둡게 자랐다고 합니다. 집안에 꼽추가 넷씩이나 되었다고 합니다. 그 가운데 자살한 사람도 있었답니다.  그런데 그에게 성령이 임한 것입니다. 하나님은 50년간 굽었던 등을 펴주셨습니다. 한 달 전에는 혜성교회에서 간증을 했는데, 한정석 감독님이 공주제일교회 부목사로 있을 때 백기현 교수는 주일학교 학생이었다고 합니다. 백 교수의 과거의 모습을 잘 아는 한 감독님은 간증 시간에 계속 울었다고 합니다. 우리가 사는 것은 모두 하나님의 은혜로 사는 것입니다. 

7-9절입니다. “그 누이가 바로의 딸에게 이르되 내가 가서 히브리 여자 중에서 유모를 불러다가 당신을 위하여 이 아이를 젖 먹이게 하리이까 바로의 딸이 그에게 이르되 가라 그 소녀가 가서 아이의 어미를 불러 오니 바로의 딸이 그에게 이르되 이 아이를 데려다가 나를 위하여 젖을 먹이라 그 삯을 주리라 여인이 아이를 데려다가 젖을 먹이더니.”  공주가 갈대 상자의 아이를 건져낼 때 누이 미리암이 쫓아 나갑니다. 끝까지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봅니다. 하나님은 최선을 다하는 자에게 함께 하십니다. 그리고 미리암은 공주에게 유모를 소개해주겠다고 나섭니다. 그때 공주가 비밀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거절할 수 있습니다. 공주가 충청도 말로 표현해서 “됐네요!”할 수도 있습니다.  충청도 말로 “뎄슈”는 “Yes"가 아니라 ”No"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공주의 대답은 “뎄슈”가 아니라 “Yes"였습니다. 이것도 하나님의 은혜요, 기적입니다. 누가 모세의 유모가 되었습니까? 모세의 어머니였습니다. 그리고 자기 아들 모세에게 젖을 주고 삯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인류역사상 처음으로 자기 아들에게 젖을 주고 월급을 받은 여자가 모세의 어머니였다는 유머가 나온 것입니다. 하나님은 역사의 주인이시며 통치자이십니다.

10절입니다. 그 아이가 자라매 바로의 딸에게로 데려가니 그의 아들이 되니라 그가 그 이름을 모세라 하여 가로되 이는 내가 그를 물에서 건져 내었음이라 하였더라.“ 모세의 어머니요게벳이 몇 살까지 키웠을까? 성서학자들에 의하면 3-6세 사이였을 것이라고들 합니다. 당시에도 젖 떼는 나이는 세 살이었고, 공교육이 시작되는 나이는 여섯 살이었다고 합니다. 사도행전 7장 23절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나이 사십이 되매 그 형제 이스라엘 자손을 돌아볼 생각이 나더니.“ 모세의 어머니 요게벳이 너는 이스라엘 사람이라는 것을 가르쳤고, 그것을 기억하는 것을 보면 3-6살까지 기른 것 같습니다. 그런데 만일 여러분이 요게벳의 처지였다면 과연 어떻게 했겠습니까?  ”너는 애굽의 왕자다!“ 이렇게 교육을 시킬 수도 있습니다. 아들의 행복을 위하여 출생의 비밀을 영원히 숨길 수도 있습니다. 아이의 행복 , 아이의 출세만을 위한 교육 때문에 이 사회가 함께 병들어가고 있습니다. 30여 년 전 제가 미국에 갓을 때 어느 음악박사가 이런 말을 했습니다. 자기는 가끔 이태리에 여행을 가는데 한국인이라고 하면 좀 무시당하는 것 같고, 일본인이라고 하면 알아주는 것 같아서 자기는 꼭 일본인이라고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절보고 만약 이태리로 여행을 가면 한국인이라고 하지 말고 일본인이라고 하라는 것이었습니다. 참으로 한심한 분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쥬이쉬 마더(Jewish Mother)'란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유대인의 어머니란 뜻입니다. 유대인은 어머니가 유대인이면 유대인입니다. 그만큼 유대인들은 민족의식이 강하다는 것입니다. 그 ’쥬이쉬 마더‘의 대명사가 모세의 어머니 요게벳입니다.  모세의 어머니는 모세에게 젖을 주면서 어떠한 표정을 지었을까요? 아마 모세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어머니의 얼굴을 보면서 자랐을 것입니다. 왜? 죽을 수밖에 없었던 아들이 살았고,  공주의 아들이 되었고, 그리고 자기가 젖을 주고 기르니 늘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한 모습이었을 것입니다. 교육학자들에 의하면 사람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시기는 여섯 살까지라고 합니다.

여러분의 자녀들에게 비친 여러분의 모습은 어떤 것입니까? 어느 아들이 어른이 되어 아버지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썼습니다. 제가 요약해서 옮깁니다. “제가 어려서 느낀 아버지의 존경스런 모습은 이런 것이었습니다. 집안 살림을 위하여 두 직장에 다니시던 일, 고장난  것들을 감쪽같이 고쳐 놓으시던 손재주, 가족 휴가를 위하여 꼼꼼하게 계획하던 아버지의 인간미등입니다. 그리고 제가 싫어했던 아버지의 모습은 이웃과 다투고 난 후에는 절대로 풀지 않고 지내시던 성격, 어머니를 식모에게 대하듯 명령하시던 매너, 돈에 대하여 너무 짠 구두쇠이셨다는 점들은 참으로 싫었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저는 아버지의 좋은 점은 하나도 닮지 않고 아버지의 나쁜 점만 닮았다는 것입니다. 저는 제 자신이 싫어졌습니다. 아버지, 저를 도와주세요.” 대충 이런 내용입니다. 우리로 하여금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편지입니다.

모세는 어머니의 모습과 교훈을 가지고 살았습니다. 히브리서 11장 24-25절입니다.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그는 자기민족의 아픔에 동참하기 위하여 왕자의 자리를 놓았다는 것입니다. 그 자리는 돈도 보장되는 자리입니다. 그런데 그 자리를 포기했습니다. 어머니의 교훈 때문입니다. 신앙은 어려서가 더 중요합니다. 우리 교회가 많은 돈을 교육관 건축에 투자하여 증축공사를 마쳤습니다. 주일학교의 교육이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특히 영어 주일학교는 어려서가 중요합니다. 신앙과 외국어는 어려서부터입니다.

자녀들을 하나님께 맡기십시오. 모세의 부모는 모세를 바로의 공주에게 맡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에 맡겼기 때문에 영적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내가 끝까지 붙들고 있다고 반드시 좋은 것은 아닙니다. 모든 것의 지휘자는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모세의 부모나 누이, 바로의 공주도 하나님의 손에 사용된 하나의 도구에 불과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은 이 땅에서 돈 투기를 해서는 안 됩니다. 땅 투기를 해서도 안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믿는 것은 결국 투기입니다. 자기 생명과 남은 생애 전체를 하나님께 맡겨서 투기하는 것입니다. 공부를 잘하고 못하고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공부를 잘한 애들은 나중에 선생이 되고, 변호사와 판검사 되고, 의사가 되서 좋고, 공부를 못한 애들은 나중에 사장이 되고, 회장이 되고, 재벌이 되서 좋더라는 것입니다. 우리는 최선을 다하고 최종적인 결정은 전능하신 하나님께 맡길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글도 찾아보세요!

공유

facebooktwitterpinterestbandkakao story
퍼머링크

댓글 0

권한이 없습니다. 로그인

신고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신고 하시겠습니까?

삭제

"님의 댓글"

이 댓글을 삭제하시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