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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좋은 밭 되어지기 (마 13:1-9, 18-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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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은 주님께서 배위에서 가르치신 말씀 가운데 씨 뿌리는 비유입니다. 농부가 씨를 뿌리는데 더러는 길가에 떨어졌고, 더러는 돌밭에 떨어졌고, 더러는 가시밭에 떨어졌고, 더러는 좋은 밭에 떨어졌습니다. 다른 밭은 열매를 맺지 못했고 좋은 밭에서만 열매를 100배, 60배, 30배로 맺었습니다.

오늘 설교는 네 가지 밭에 관하여 살펴볼 것인데 그 전에 먼저 몇 가지 언급하고 넘어가겠습니다.
먼저 좀 생각할 것은 하나님의 일은 안 되는 것 같아도 결국은 잘 된다는 것입니다. 약한 것 같아도 결국은 강하다는 것이 증명됩니다. 열매가 없는 것 같아도 결국은 풍성합니다. 로마의 핍박 속에서 고통만 당하던 기독교가 결국은 300년 만에 로마를 복음화 시켰습니다. 중국 기독교 역시 문화혁명 당시 약 400만 명의 신자였는데 사회주의 체제 속에서 극심한 핍박이 있었음에도 지금은 1억 5천만 명으로 공산당원의 수보다 두 배나 많은 중국 국민의 10%가 복음화 되는 놀라운 열매를 맺었습니다.

본문에 보게 되면 4 가지의 밭이 나옵니다. 그 가운데 세 밭에서는 열매가 없습니다. 세 밭에서 열매가 없으니 실패한 것 같습니다. 그런데 한 밭에서 열매가 열리는데 100배, 60배, 30배로 풍성합니다.
본문 내용 가운데 우리 정서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 내용이 있습니다. 그 중 하나가 씨를 뿌린다는 것입니다. 씨를 심는 것이 아니라 뿌립니다. 지난주에 오부자 권사님이 교회 뒤 텃밭에서 농사를 짓는 것 보니까 씨를 뿌리지 않고 심더군요. 그리고 또 씨를 뿌리는데 좋은 밭에만 뿌리지 왜 길가에도, 돌밭에도, 가시밭에도 뿌리는지 이해가 안 될 것입니다. 한 톨의 씨가 아까운데 왜 조심해서 정확하게 뿌리지 않고 엉뚱한 곳에 뿌리냐고 말씀하실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당시에 팔레스타인의 경작법은 지금 우리들의 경작법과는 달랐습니다. 우리나라에서는 농부들이 씨를 뿌리기에 앞서서 먼저 밭을 갈아놓습니다. 그리고 그 위에다 씨를 뿌리게 됩니다. 그러나 이 당시는 아직 경작방법이 원시적입니다. 그래서 맨 밭에 먼저 씨를 뿌려놓고 그 다음에 적당하게 흙으로 덮어서 경작하는 것이 이 당시에 통용되던 경작방법입니다. 이렇게 씨를 뿌리다 보면 자연히 여기저기 씨들이 흩어지기 마련입니다. 그래서 씨가 좋은 밭에만 떨어지는 것이 아니고 돌밭에도 가시밭에도 길가에도 떨어지는 것입니다.

필리핀 산악 지대에서는 지금도 볍씨를 뿌립니다. 그러면 씨가 바람을 타고 이리저리 날아가서 평지에서도 언덕에서도 심지어 낭떠러지에서도 싹이 나고 자라고 열매를 맺는다고 합니다.

19절에 보면 ‘아무나 천국말씀을 듣고’라고 했습니다. 천국말씀은 아무나 구별이 없습니다. 세상적인 지식이 많고 적음도 상관이 없습니다. 나이가 많고 적음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세상에서 얼마만큼 높은 자리에 앉아있었느냐도 적용되지 않습니다. 교회에 오래 다녔느냐 다닌지 얼마 되지 않았느냐도 관계가 없습니다. 목회자냐 평신도냐 하는 것도 중요하지 않습니다. 아무나 천국말씀을 듣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열매를 맺으려면 먼저 들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3-9절까지는 씨 뿌리는 비유를 말씀하고 있으며, 18-23에서는 씨 뿌리는 비유를 해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해석 가운데 말씀을 듣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네 밭을 설명하면서 19절에 듣고, 20절에도 듣고, 22절에도 들으나, 23절에도 듣고 라는 말을 계속해서 하고 있습니다. 아무리 좋은 말씀도 듣지 않으면 소용이 없습니다. 아무리 능력이 있는 말씀도 듣지 않으면 능력을 발휘할 수 없는 것입니다.

듣는다는 차원에서 생각한다면 네 종류의 밭을 가진 사람들은 이미 교회에 나오는 사람일수도 있습니다. 우리 가운데 네 종류의 밭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기왕에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리는데 말씀을 잘 듣고 깨닫고 열매 맺는 좋은 밭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그럼 네 종류의 밭, 네 종류의 마음을 살펴봅시다.

1. 길가와 같은 마음이 있습니다(4, 19절).

길가는 사람들이 밟고 다녀서 굳어진 땅입니다. 사람의 마음으로 말하자면 굳어진 마음을 의미합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가장 주의해야 할 것 중에 하나가 마음이 굳어지는 것입니다. 완고하고 메마른 마음입니다. 슬퍼도 울지 않고,. 기뻐도 웃지 않고, 은혜를 입어도 고마운 마음이 없습니다. 잘못을 저지르고도 죄책감이 없습니다.

요즘 이런 형태의 사람들이 많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젊은이들은 결혼할 때 조심하세요. 메마른 마음을 가진 사람과 함께 사는 것은 아주 불행한 일입니다. 결혼하신 분들은 마음이 식어지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산의 바위도 한 때는 뜨거운 용암이었습니다. 열기가 식어서 단단한 돌이 된 겁니다. 용광로에 있던 쇳물도 식어지면 단단한 강철이 됩니다. 신앙생활을 할 때도 마음이 식어지고 굳어지는 것을 주의해야 합니다. 신앙의 열정이 식어졌다면 기도해야 합니다. 마음이 뜨거워지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교회에 대해서, 목사에 대해서 마음이 굳어지신 분이 계시다면 미안하고 죄송합니다. 목사의 실수라면 용서하시고 굳어진 마음을 푸십시오. 목사를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서 부드러운 마음을 가지십시오.

말씀에 대해서 그리고 교회에 대해서 또 하나님께 대해서 마음이 식어지고 굳어지면 신앙의 큰 위기를 만난 것입니다. 스가랴 선지자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들이 듣기를 싫어하여 등을 돌리며 듣지 아니하려고 귀를 막으며 굳은 어깨로 향하며 그 마음을 금강석 같게 하여 율법과 만군의 여호와가 그의 영으로 옛 선지자들을 통하여 전한 말을 듣지 아니하므로 큰 진노가 만군의 여호와께로부터 나왔도다.”(슥7:11-12)

그 당시 사람들이 마음이 굳어지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를 싫어했습니다. 하나님이 선지자를 보내도 주의 종들의 설교를 듣기 싫어서 등을 돌렸습니다. 현존하는 물질 중에 가장 단단한 것이 금강석, 즉 다이아몬드입니다. 그 당시의 사람들의 마음이 굳어졌는데 돌보다도, 철보다도 더 단단한 금강석 같이 단단하게 굳어졌습니다. 그 결과 큰 진노가 만군의 여호와께로부터 나왔다고 말합니다.

19절에 보니까 길가와 같은 마음은 말씀을 듣기는 듣는데 마음이 굳어져서 깨닫지 못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사실 말씀에 대한 깨달음은 인간의 머리로 되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도우심을 받아야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마음이 굳어졌기 때문에 그 마음에 하나님의 진동 즉 성령의 감동이 느껴지질 않는 것입니다. 
그리고 깨닫지 못하면 결국은 악한 자가 말씀을 빼앗아갑니다. 결국 들은 말씀이 그 사람에게 하나도 유익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설교를 백번 천번 들어도 마음이 굳은 사람은 깨달음이 없고 들어도 전혀 유익이 안 되는 것입니다.

2. 흙이 얕은 돌밭과 같은 마음이 있습니다(5-6, 20-21절).

흙이 얕은 밭에 떨어진 씨앗은 곧 싹이 나오지만 뿌리가 없어서 해가 돋은 후에 곧 타서 말라버립니다.
팔레스틴 지역에는 돌이 많습니다. 흙이 있기는 하지만 돌멩이들이 많아서 깊이 갈아엎을 수가 없습니다. 얕은 토양에 씨를 뿌리면 싹이 나지만 뿌리가 돌에 걸려서 깊이 자라지 못합니다.

돌밭 같은 마음은 토양이 얕은 밭입니다. 즉, 깊이가 없는 마음, 가벼운 마음, 변덕스런 마음을 의미합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 말씀을 들을 때는 “아멘! 할렐루야!” 합니다. 그러나 인내심이 부족합니다. 무슨 힘든 일에 부딪치면 말씀을 버리고 세상으로 돌아갑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받으면 문제가 없이 늘 만사형통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어도 여전히 문제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인생입니다. 신앙의 뿌리가 깊은 사람들은 문제가 와도 고통스러워 흔들리기는 하지만 타서 말라 죽지는 않습니다. 신앙의 뿌리가 깊지 못한 사람들은 문제를 만나면 신앙이 흔들리는 정도가 아니라 타서 말라죽어버립니다.

3. 가시 떨기와 같은 마음이 있습니다(7, 22절).

시골에는 탱자나무로 집이나 밭에 울타리를 하는 경우가 더러 있었습니다. 탱자나무 울타리에는 가시덤불 때문에 다른 식물이 자라지 못합니다. 팔레스틴 지역에는 건기에 가시덤불이 자랍니다. 사막 기후에는 일반 식물이 자라지 못하지만 가시나무는 잘 자랍니다. 그래서 우기에 밭을 정돈하지 않고 씨앗을 뿌리면 가시덤불에 씨앗이 자라다가 막혀버립니다.

가시밭은 혼란스런 마음을 가리킵니다. 마음이 정돈되어 있지 못하고 항상 복잡합니다.
그럼 가시는 무엇을 말합니까?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22절에서는 말씀의 기운을 가로막는 두 가지 가시를 말합니다.
그 첫째가 세상의 염려, 걱정입니다. 자식 걱정, 집 걱정, 직장 걱정, 사업 걱정, 건강 걱정, 내 걱정할 것이 없으면 남의 걱정, 친척 걱정, 친구, 이웃 걱정, 나라 걱정, 인류의 장래 걱정, 지구 환경 문제 걱정 말로다 할 수 없는 걱정거리를 가지고 살아갑니다.

성경 원문에 ‘염려’라고 하는 말이 ‘메림네오’입니다. 이 말은 ‘물어뜯는다.’, ‘찢는다.’, ‘쪼갠다.’라는 말에다가 ‘마음’이라는 말이 합쳐져서 된 단어입니다. 원어적인 의미를 살펴보면 염려란 내 인격을 파괴하고, 내 행복한 마음을 찢어놓는 것입니다. 영어의 염려는 날카로운 이빨로 갈기갈기 찢어놓는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고 하더군요. 그러니 염려하면 자기를 죽이는 것입니다. 영적인 침체와 더불어 건강까지도 파괴합니다. 그래서 잠 15:13에서는 마음의 근심은 심령을 상하게 한다고 말하고, 잠17:22에서는 심령의 근심은 뼈로 마르게 한다고 가르쳐줍니다.

우리가 예배를 철저히 드리지 않고는 신앙생활을 잘 할 수 있는 어떤 길도 없습니다. 예배 때마다 나와서 하나님을 만나야 합니다. 말씀을 듣고 새 힘을 얻어야 합니다. 영광스러운 찬양을 통하여 우리 삶의 존재가 바뀌어 지는 행복을 얻어야만 우리가 이 세상을 승리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왜 예배에 집중하지 못하고 예배를 잘 드리지 못하는 것입니까? 이 세상 일거리들 때문에, 염려거리들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앙을 실패로 만들어가는 벌레 두 마리가 있습니다. 우리 인생의 행복을 갉아 먹는 벌레 두 마리가 있습니다. 하나는 지나간 과거에 대한 후회요. 다른 하나는 아직 다가오지 않은 미래에 대한 염려입니다.
신앙생활에서 말씀의 기운을 막는 두 번째 가시는 재물의 유혹입니다. 재물의 유혹이 우리의 마음을 혼란스럽게 만들고 말씀이 결실하지 못하게 하는 것입니다. 요즘 사람들은 돈이라면 세상 하직하려고 하다가도 다시 눈을 뜬답니다. 성경은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고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사실 물질 자체는 좋은 것도 아니고 나쁜 것도 아닙니다. 중성입니다. 그러나 분명 재물의 유혹은 가시떨기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재물의 유혹에 영적으로 질식당하고 있습니다. 재물은 사람을 단번에 질식시키지는 않습니다. 재물에 의한 질식은 아주 서서히 일어납니다. 오늘 비유의 가시떨기처럼 서서히 성장합니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그것들은 신령한 싹들을 찌들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가 재물을 어떻게 관리하느냐 하는 것을 보면 믿음의 수준을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물성이 영성입니다. 보물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습니다. 돈 관리를 어떻게 하는가 보면 영성의 차원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신앙생활의 비유, 천국생활의 비유를 성경에 37가지를 남겨 주시고 계시는데 그 가운데 어떤 비유보다도 많은 17가지가 물질에 관한 비유입니다.

스펄젼 목사님은 말하기를 “네가 회개했다고 하나 너희 전대 돈주머니가 회개하기 전까지 나는 너의 회개를 믿을 수 없다. 네가 하나님을 향하여 마음의 문을 열었다고 하나 네 돈 주머니를 열리기까지 열려진 네 마음을 믿지 않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리스 신화에 이런 얘기가 나옵니다. 큰 상금과 명예가 걸려있는 경마대회가 있었습니다. 한 여자 기수가 신나게 앞장서 달리는데 앞에 금화 하나가 떨어지고 있었습니까? 그 유혹은 너무나도 컸습니다. 말에서 내려서 금돈을 주워 챙겼지요. 한참을 달렸습니다. 속력이 막 나려고 하는데 또 금돈이 하나 땡그렁 떨어지며 반짝 빛이 났습니다. 다시 내려서 그 금돈을 주워 챙겼습니다. 그녀는 마땅히 일등을 하여 명예와 상급을 차지하려고 했는데 금화를 챙기느라고 명예도 상급도 다 잃어버리고 말았다고 합니다.

영적인 경주도 마찬가지입니다. 가끔 신앙인들이 황금을 줍기 위해 멈추기 때문에 상급을 잃어버리고 마귀의 미끼에 걸려들고 마는 것입니다.
때로는 자기를 잘라야 합니다. 친구를 잘라야 합니다. 단호하게 결단해야 됩니다. 염려를 자르고 욕심을 뽑아야 합니다. 유혹의 가시, 재물의 가시를 잘라버려야 합니다. 그래야 잡초인생 가시인생이 알곡인생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잘라버려야 열매 맺는 신앙생활을 할 수가 없습니다. 단호하게 잘라버리지 않으면 가시밭 인생길에서 벗어날 길이 없습니다.

경상도 어느 시골 교회에 믿음 좋은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신앙 연조가 오래 깊어갈수록 직분이 무거워졌고 마침내 장로님이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끊지 못하고 있는 게 하나 있었습니다. 담배가 끊어지지 않는 겁니다. 담배 한대 핀다고 지옥 가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도 이것 때문에 장로로써 구실을 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담배가 끊어 지지 않는 겁니다. 목사님 몰래, 교인들 몰래, 자식 몰래, 아내 몰래, 담배를 피는데 주로 시골 화장실에 앉아서 핍니다. 그 부인이 더운 여름날 구더기가 하도 많으니까 거기다가 석유를 한번씩 뿌려줍니다. 그런데 그날따라 석유가 없어서 휘발유를 한통 뿌렸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모르고 이 장로님이 몰래 담배를 피우고 담배꽁초를 밑으로 딱 떨어뜨린 순간 불길이 확 솟았습니다. 온몸에 화상을 입었습니다. 병원에 입원 했는데 해괴망측한 자세를 하고 아무도 알아듣지 못하는 말을 중얼중얼 내뱉습니다. “하나님 잘못 했습니더, 용서해 주이소. 확 끊어버릴 겁니다.” 아무도 알아듣지 못하지만 “아이구 아파라 확 끊어버릴 겁니다. 아이구 아파라~ 한번만 용서해 주이소” 그러더랍니다. 끊을게 담배뿐이겠습니까? 잘못된 것 끊지 못하면 한걸음도 전진하지 못합니다. 염려와 재물의 유혹도 끊어버리기를 축원합니다.

4. 좋은 땅과 같은 마음이 있습니다(8, 23절).

좋은 땅과 같은 이 마음을 갖은 사람은 100배, 60배, 30배의 열매를 맺는 사람입니다. 23절에 보니 이런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닫는 사람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말씀을 깨달을 수 있습니까? 말씀을 깨닫는 비결이 무엇입니까? 해답은 성령의 도우심을 받는 사람입니다.

3-23절을 보면 주님께서 사람들에게 씨 뿌리는 비유를 말씀하셨지만 제자들은 말씀의 뜻을 깨닫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이사야의 예언대로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는 영적인 원리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제자들은 주님에게 비유에 대한 해석을 부탁하고, 주님께서는 제자들에게 그 비유를 풀어서 설명해 주셨습니다. 제자들도 주님께서 가르쳐주시지 않았다면 말씀의 뜻을 이해할 수 없었을 것입니다.

지금 이 시대는 성령의 시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 승천하셨습니다. 이제는 성령께서 주님이 하셨던 보혜사의 역할을 하시는 분입니다. 성령님은 우리 곁에서 우리를 도와주시는 분입니다. 영적인 부분, 정신적인 부분, 그리고 육체적인 부분과 생활의 부분, 또 말씀을 듣고 깨닫게 하는 부분까지도 도와주시는 분입니다.

성령께서 도와주시지 않으면 말씀을 깨달을 수 없습니다. 미군 부대가 있는 경상도의 어느 마을에 있었던 일이랍니다. 새벽기도를 마친 할머니가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답니다. 그 옆에 미군들이 있었는데 자주 보는 얼굴이니 “Hello.”하고 서로 인사를 했답니다. 기다리던 버스가 오니 할머니가 기뻐서 “왔대이.” 하며 버스를 타려고 했답니다. 그런데 미군은 할머니가 “What day(오늘이 무슨 요일인가)?”라고 묻는 줄 알고 “Monday(월요일).”라고 대답했답니다. 할머니는 “무언데?”라고 묻는 줄 알고 “버스대이.” 라고 대답했답니다. 미군은 할머니가 “Birthday(생일)."라고 하는 줄 알고 ”Happy birthday(생일 축하합니다).”라고 했답니다. 미군과 할머니의 이 대화는 대화가 아닙니다. 마찬가지로 성령을 받지 않은 사람은 설교를 들어도 설교가 귀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그러니 ‘저게 무슨 소리야? 말도 안 되는 말을 하네. 참 웃기는 목사구먼.’하게 되는 것입니다.

성령님은 말씀을 듣고 깨닫는 일만 도와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롬 8:26절 ‘성령도 우리 연약함을 도우시나니’라고 말합니다. 사람은 연약합니다. 또 사람은 미래를 모릅니다. 사업을 하면서도 사업이 성공할지, 어떻게 될지를 모릅니다. 결혼을 하면서도 결혼하는 배우자가 자기 인생에 복이 될지 저주가 될지를 모릅니다. 직장에 취직을 하지만 그 직장이 삼 개월 후에 문을 닫을지, 삼년 후에 문을 닫을지, 계속 잘 되어 나갈지를 모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령님께서는 모든 것을 아십니다. 전지전능하십니다.

백화점 왕 워너 메이커가 고백했습니다. “나는 일생 많은 일에, 많은 물건에 투자했는데 실패한 투자가 한 번도 없었다.” 왜입니까? 그가 한 번도 실패하지 않은 이유는 그의 지혜로 하지 않고 성령님께 의지해서 투자했기 때문입니다.
쉬운 예를 들어봅시다. 요즘 제주도에서는 오가피 농사를 지은 사람들이 큰 파동을 격고 있습니다. 오가피가 값이 나갔기 때문에 도에서 장려를 했습니다. 농부들도 오가피 농사지으면 떼돈을 벌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금값이었던 오가피 값이 오가피 농사를 짓는 사람이 많아져서 똥값이 된 것입니다. 우리는 모릅니다. 그러나 그래서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으며 농사도 사업도 해야 하는 것입니다. 장사할 때도 어떤 일에 투자할 때도 사람을 정할 때도 늘 하나님께 의지하고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아야 합니다. 그래야 실패가 없을 줄로 믿습니다.

어느 교회에 아주 귀한 한 아가씨가 있었습니다. 그 아가씨가 멋있는 청년과 사귀게 되었습니다. 그 청년이 아가씨에게 사랑을 고백하고 결혼하자고 했습니다. 그런데 얼마 후, 그렇게 사랑한다던 청년이 아가씨를 버리고 다른 곳으로 가버렸습니다. “하나님, 제가 얼마나 사랑하는 사람인지 아시잖아요. 그런데 그 사람이 어디로 갔나요? 그 사람이 왜 저를 버리고 갔나요?” 아가씨는 가슴이 아파서 견디기가 힘들었습니다. 그 교회 담임 목사님이 아가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실패도 실수도 하지 않으시는 분이야. 그 남자 청년은 좋은 배필이 아니라서 가버리도록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거야. 하나님께서 반드시 더 좋은 배필을 보내 주실 테니 기다려 봐.” “목사님, 그런 말씀하지 마세요. 제게는 그 사람뿐이에요.” “아니야, 더 좋은 사람이 반드시 나타날 거야.” “아니에요. 제게는 그 사람뿐이에요.”하며 아가씨가 울기만 했습니다. 그런데 삼 개월쯤 지나니 그 때는 곧 죽을 것만 같던 아가씨가 아무 일이 없었던 것처럼 명랑해졌습니다. 그러다 사 개월 째에 마음 좋고 실력 있는 한 총각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서로 눈에 불이 번쩍번쩍하고 가슴이 찌릿찌릿하게 통해서 결혼을 했습니다. “하나님, 이제야 제가 알았습니다. 이 귀한 신랑을 주시려고 그 사람을 보내셨군요.” 후에 알고 보니 그때 그 사람은 이 여자를 울리고 저 여자를 울리고 다니는 바람둥이 사기꾼이었습니다. 그 사람과 결혼했더라면 어떻게 될 뻔했습니까? 아무것도 모르는 우리는 이 남자가 내 남자인 줄 알지만, 모든 것을 다 아시는 하나님께서는 아니라는 것을 아시니 보내버리시는 것입니다.

한 분이 자기 집 마당에 나뭇가지를 꺾어서 쌓아 놓았는데 거기에 예쁜 새가 집을 짓고 있었습니다. 며칠 후면 그 나뭇가지는 태워 버릴 것인데, 새가 거기에 집을 짓고 있으니 주인이 안타까운 마음에 새 집을 부수어 버렸습니다. “이 새야. 여기에 집을 지으면 안 돼. 이것은 며칠 못 가서 없어질 나뭇가지야.” 그런데 그 다음 날 새가 또 거기에 집을 짓고 있었습니다. “여기에 집을 지으면 안 된대도.” 주인은 새가 지어놓은 집을 또 부수었습니다. 그때 새가 ‘저 인정머리 없는 사람 같으니라고.’하며 주인을 얼마나 미워했겠습니까? 그 다음 날에는 새가 할 수 없었던지 부엌 앞에 있는 큰 나무 위에 올라가서 집을 지었습니다. 그 제서야 주인도 “이제 됐다. 거기에 집을 짓고 잘 살아라.”라고 했답니다. 새는 주인을 원망했겠지만, 주인은 안전한 곳에 지으라고 새를 위해 집을 몇 번이나 부순 것입니다. 여러분, 여러분이 하시는 일이 안 되고 문이 닫힙니까? 그것이 여러분에게 좋지 않은 것이라 하나님께서 문을 닫으시고 안 되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것이 사람이든 직장이든 사업이든 하나님께서 막으시는 것은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더 좋은 사람을 만나게 하시고 더 좋은 직장에 들어가게 하시고 더 좋은 사업을 이루게 하실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금광에서 원석을 캐내고 원석에서 금을 얻어내는데 원석에는 금이 많을 까요 아니면 돌이 많을 까요? 당연히 돌이 더 많지요. 제가 설교를 하는데 제 설교에 돌이 많을 까요 아니면 금이 많을까요? 설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람의 말에 담아내는 것입니다. 그래서 목사의 설교에는 돌도 있고 금도 있습니다. 그런데 똑같은 설교를 듣고 금을 얻어내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어떤 사람은 돌만 캐내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좋은 밭이 되어 금을 캐내는 성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부드러운 마음 가지세요. 마음이 굳어졌다면 마음을 뒤집어엎어서 부드러운 마음이 되게 하십시오. 그리고 말씀을 잘 듣고 성령의 도우심 속에서 말씀이 깨달아지고 풍성한 열매를 맺는 여러분들이 되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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