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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사랑은 성내지 아니하며 (고전 1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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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성내지 아니하며 (고전 13:4-7)

(4) 사랑은 오래 참고 사랑은 온유하며 투기하는 자가 되지 아니하며 사랑은 자랑하지 아니하며 교만하지 아니하며 (5) 무례히 행치 아니하며 자기의 유익을 구치 아니하며 성내지 아니하며 악한 것을 생각지 아니하며 (6) 불의를 기뻐하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고 (7) 모든 것을 참으며 모든 것을 믿으며 모든 것을 바라며 모든 것을 견디느니라

존 헌터라는 18세기의 세계적인 생리학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분노, 질투, 독선의 감정을 품으면 심장의 혈관이 압박을 받아 심장병이 생긴다는 학설을 주장했습니다. 존 헌터는 학회를 열어 이 논문을 발표했습니다. 그런데 어느 학자가 그의 설명을 듣고 그 자리에서 맹렬한 공격을 가했습니다. 존 헌터는 너무 화가 나 반격을 가하려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다 그만 쓰러져 숨을 거두고 말았습니다. 사인은 이러했습니다. 극심한 분노가 심장의 혈관을 압박해 일으킨 심장마비였습니다. 존 헌터는 죽음으로 자신의 학설을 증명한 셈이었습니다.

분노는 상대방에게 상처를 줄 뿐만 아니라 자신 또한 죽입니다. 마음을 다스리는 자가 진정한 용사입니다. 잠언 말씀은 이렇게 전합니다. “노하기를 더디하는 자는 용사보다 낫고 자기의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자보다 나으니라”(잠16:23). 아무리 용맹한 장수일지라도 자기 마음을 다스리기는 어렵습니다. 노하기를 더디하고 자기 마음을 다스리는 자는 성을 빼앗는 장수보다 더 위대합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의 8번째 사랑의 정의는 ‘사랑은 성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분노는 자기와 상대방을 죽이기 때문에 하지 않는 것이 당연합니다. 우리는 화를 참지 못하고 성을 내고는 꼭 후회합니다. 우리가 자주 회개하는 것들 중 하나가 아마 참지 못하고 분노한 것에 대한 회개일 것입니다.

분노는 자연스런 감정

성내지 않기 위해서는 분노를 잘 다스리는 법을 알아야 합니다. 저는 성내지 말라는 말보다는 오히려 성을 ‘잘’ 내라고 권면하고 싶습니다. 분노라는 것은 무조건 억제한다고 해서 가라앉는 것이 아닙니다. 분노는 인간의 자연스러운 감정중 하나입니다. 우리는 흔히 감정이라 말할 때 희노애락(喜怒哀樂) 이라 말을 합니다. 기쁨과 노여움과 슬픔과 즐거움을 말합니다. 기쁨, 슬픔, 즐거움이 표현되어야 하듯이 분노 또한 표현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분노는 다른 세 가지 감정과는 달리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가져다 줄 가능성이 많으므로 조심해서, 달리 표현하면 ‘잘’ 표출되어야 합니다.

분노가 솟구치는데 억지로 누르려 하면 언젠가 갑자기 폭발하게 되어 있고 이 때는 더 걷잡을 수 없게 됩니다. 우리 나라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병중에 ‘화병’이 있습니다. 정식 영어 명칭도 있고, 미국 정신의학회에 보고까지 된 정신병입니다. 영어로 ‘Hwa byung’ 으로 쓰는데 그 정의가 이렇습니다. “화병은 분노의 억압에서 기인하는 한국인에게 나타나는 특이한 현상”

아마 화병은 한국의 유교문화가 만든 질병일 것입니다. 남성 위주의 가부장적 문화에서 여자는 굴종과 인내를 강요당했습니다. 시집살이도 힘든데 ‘벙어리 3년, 귀머거리 3년’이라 하여 분노를 억제하고 꾹 참고 지내도록 강요당했습니다. 남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남자들도 사내 대장부가 울어서는 안 된다 하여 자기 감정을 표출하는 것을 극도로 자제해야 했습니다. 아이들은 가정이나 학교에서 부모나 선생님의 권위에 무조건 순종해야 한다고 배웠습니다. 요즘은 거의 유명무실해졌지만 옛날에는 스승의 그림자도 밟아서는 안 된다고 하였습니다. 인간관계에서도 절제의 미덕이 강조되어 감정표출을 자제할지 모르는 사람은 가벼운 사람 취급을 받았습니다.

이러다 보니 우리는 자기감정 표현을 잘 못하는 민족이 되었습니다. 감정은 도도히 흐르는 강물과도 같습니다. 이 강물이 잘 흘러가도록 해야지 무조건 막으면 어느 곳에선가는 반드시 터지게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나라 사람들 대화하는 것을 보면 불안불안 합니다. 말을 주고 받는 것이 아니라 칼을 주고받는 것 같습니다. 억눌렸던 물이 갑자기 터지니까 그렇고 자기 느낌을 표출하는 훈련을 받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특히 가정에서 분노의 표출이 많습니다. 옛날에는 아빠의 폭력이 문제가 되었습니다. 아빠도 스트레스가 쌓이고 분노가 쌓이는데 이것을 풀 길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가정이란 곳은 자기를 위장해도 되지 않은 곳이니 그곳에 자기 분노를 한꺼번에 다 쏟아 놓습니다. 이것이 바로 가정 폭력입니다. 아빠의 폭력에 어떻게 저항할 수 없었던 엄마의 분노가 이번에는 자녀들에게 쏟아집니다. 자녀들은 그 폭력을 후에 태어날 자녀가 자기 배우자에게 쏟는 악순환이 되풀이 됩니다.

이렇게 내 안에 분노가 쌓여 있는데 이것을 무조건 성내지 마라, 참아라 하면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저는 성을 ‘잘’ 내자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분노는 인간의 자연스런 감정입니다. 분노는 자기 보호 장치입니다. 자기가 공격당할 때 자기를 방어하려는 작용입니다. ‘짜증’도 긍정적으로 보면 그렇습니다. 안으로 받은 상처를 밖으로 표출하는 것이지요. 썩은 것을 마음에 오래 담고 있으면 우리 영혼마저도 썩게 됩니다.

예수님의 분노

우리 예수님은 온유하시고 사랑이 많으신 분이시지만 항상 이렇게 부드러운 분만은 아니셨습니다. 예수님의 성내는 모습은 예루살렘 성전을 정화하실 때 잘 드러났습니다. 만민의 기도하는 집이 되어야 할 주님의 성전이 장사치의 소굴이 된 것을 보시고 분노하셨습니다.  주님은 노끈으로 채찍을 만드셨습니다. 그 채찍으로 양이나 소를 다 성전에서 내어 쫓으셨으며, 돈 바꾸는 사람들의 돈을 쏟으시며 상을 엎으셨습니다.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엎으시고 그들을 쫓아내셨습니다. 성경은 “주의 전을 사모하는 열심이”(요2:17) 예수님을 삼켰다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개인의 사사로운 감정이 아니라 의로운 분노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예수님이 이렇게 화를 내셨다는 사실이 은혜가 됩니다. 온유하신 그분의 마음 속에도 분노의 감정이 일어나고 있으며 이를 표출하셨다는 사실입니다. 제가 보기엔 좀 과격할 정도로 그 분노를 표출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쏟아 부으신 저주의 선언들 또한 온유하신 주님의 말씀이라 하기에는 놀라울 정도입니다. 마태복음에서 주님은 22장에서 무려 일곱 번에 걸쳐 “화 일을 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아”하고 책망하셨습니다. 심지어 “회칠한 무덤”, “뱀들아 독사의 새끼들아”하고 분노를 표출하였습니다. 양들을 삼키는 삯군 목자와 같은 바리새인들을 예수님은 견딜 수 없었던 것입니다.

이런 예수님의 모습을 볼 때 무조건 화를 참고 성을 내지 않는 것만이 능사는 아닙니다. 우리는 화를 내되 올바로 화를 내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주님은 자신의 문제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의 일과 사랑 때문에 분노하시고 계십니다. 분노할 줄 모른 것은 사랑할 줄 모른다는 것과 같습니다.

고린도전서 13장을 쓰고 있는 사도 바울도 만만치 않게 성을 잘 내는 사람입니다. 사도행전 15장 39절에 보면 2차 선교여행을 앞두고 바울과 바나바가 마가 문제 때문에 심하게 다투었다고 말씀하는데 이 ‘심하게 다투다’는 단어가 오늘 ‘성내다’와 같은 단어인 ‘파록쉬노’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1차 선교 여행 도중 힘들어서 그랬던지 아니면, 자기 생각과 맞지 않아선지 모르지만 마가가 돌아서고 말았습니다. 이 마가가 회개하고 다시 2차 선교에 합류하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이런 사람을 데리고 갈 수 없다고 하고 바나바는 그래도 다시 한 번 기회를 주어야 한다고 싸웠습니다. 그 싸움이 얼마나 심했는지 성경은 “심하게다투었다”고 말씀하며 결국 2차 선교는 바울과 바나바가 따로따로 갑니다. 우리는 원래 부족한 사람들이라 감정을 잘 다스리지 못하지만 성령을 받은 대사도들 또한 이렇게 성내고 싸웠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오히려 위안이 됩니다.

고린도서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바울은 자신이 개척한 교회 일부가 자신의 사도권을 인정하지 않고 분열의 길을 갈 때 그들을 향하여 다음과 같이 분노를 표출하였습니다. “내가 이미 말하였거니와 지금 떠나 있으나 두 번째 대면하였을 때와 같이 전에 죄 지은 자들과 그 남은 모든 사람에게 미리 말하노니 내가 다시 가면 용서하지 아니하리라”(고후13:2) 무조건 참는 것이 좋은 것은 아닙니다. 잘못된 것이 있을 땐 분노를 표출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구약 성경을 읽다보면 우리 하나님도 다혈질 같습니다. ‘하나님의 진노’, ‘하나님께서 분을 발하시다’ 라고 할 때 쓰는 단어는 ‘아프’인데 이 ‘아프’는 ‘코 또는 콧김’을 의미합니다. 화가 나서 코를 벌렁거리며 콧김을 내 뿜고 있는 모습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자기 뜻에 따라 살지 않으면 화가 나서 이스라엘을 한 대 때립니다. 그리고는 곧 후회하시고 다시 그 상처를 싸매어 줍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역사는 죄 → 심판 → 구원이 계속해서 반복되는 역사입니다.

첫째, 분노는 해지기 전에 풀라

그렇다고 해서 분노는 오랫동안 품고 있으면 안 됩니다. 사도 바울은 에베소서 4장 26절에서 이렇게 말씀합니다.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고 마귀로 틈을 타지 못하게 하라” 분을 낼 수 있지만 그것이 죄가 되도록 해서는 안 되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고 있어서는 안 된다는 말씀입니다. 분노를 품는다는 말이 재미 있습니다. 분노를 오랫동안 품고 있으면 죄를 낳습니다. 내 마음 속에 화나는 일이 있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화를 표출할 수도 있습니다. 여기까지는 죄가 아닙니다. 그러나 그 화를 묵상하고 있으면 안 됩니다. 빨리 털어버려야 합니다. 허락된 시간은 해가 떠 있는 동안만 가능합니다. 화해의 전화를 하던지 어떻게든 정리해야 합니다.

중세 수도원에서 저녁 기도는 서로의 용서를 구하는 시간으로 매우 중요한 기도일과였습니다. 오늘 하루 중 자기가 다른 형제에게 했어야 했는데 못했던 일이나, 하지 말았어야 했는데 했던 잘못에 대해 형제에게 용서를 구합니다. 그러면 그 형제는 그 고백한 형제에게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용서를 선언합니다. 낮에 생긴 불화는 저녁 때에는 마무리되어야 한다는 것이 성경이 우리에게 요구하시는 규칙입니다. 해지기 전까지 털어내지 않으면 이 분노는 우리 마음 가운데서 뿌리를 내리기 시작합니다. 우리가 분노를 잘 다스리지 못 하는 사람들이 된 까닭은 그 날의 분노를 그날에 풀지 않고 방치해 두었기 때문입니다.

둘째, 하나님 앞에서 풀라

자기의 섭섭한 마음이나 화난 감정을 표현하는 것도 좋지만 그 게 덕이 되지 않을 때도 있습니다. 내 분노 때문에 상대방이 상처받을 우려가 있을 때입니다. 이때는 그 분노를 하나님 앞에 푸는 것이 좋습니다. 시편 기자들이 그렇습니다. 그들은 속 안에 있는 분노를 감추지 않고 그대로 풀어냅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 한편으로 당황스럽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속이 시원하기조차 합니다. 대표적으로 시편 58편입니다. 6절 이하에 원수에 대한 저주가 나옵니다. 시인은 자기 원수를 향하여 이렇게 저주합니다. “그들의 이빨을 부러뜨려 주시고 사자와 같은 그들의 턱 뼈를 부수어주십시오(6). 저희로 급히 흐르던 물이 사라지고 증발하는 것처럼 허무한 인생이 되게 해주십시오. 또한, 잔뜩 힘을 주었지만 부러져 버린 화살처럼 쓸모없는 인생이 되게 해주십시오(7). 뜨거운 태양과 위협 아래 잔뜩 움추린 달팽이 같게 해주십시오. 달을 채우지 못한 미숙아가 죽어서 나와 햇빛을 보지 못하는 것 같이 되게 해주십시오(8). 가시나무와 같이 쓸모없게 해주시고 그들이 불가마라도 더웁게 하려는 시도조차 강한 바람에 꺼지고 휩쓸려 가는 수치스러운 인생이 되게 해주십시오(9). 그래서 의인이 악인들이 이렇게 망하는 것을 보며 기뻐하게 해주시고 악인의 피로 그 발을 씻게 해주십시오(10).”

좀 섬뜩합니다. 하나님 앞에 자기를 괴롭게 하는 원수들에 대해서 속에 있는 분노를 다 쏟아 놓고 있습니다. 저는 기도의 중요한 기능 중 하나가 바로 이 스트레스 해소라 생각합니다. 마음에 분노를 담아 두면 안 됩니다. 토해 내세요. 토해 내되 후히 주고 꾸짖지 않으시는 하나님 앞에 토해 내세요. 그러고 나면 속이 시원합니다. 저는 우리 한국 기독교가 바로 이런 역할을 해주었다고 생각합니다. 남편들의 무정함과 폭력, 생활고의 어려움으로 답답했던 여성들이 교회로 몰려들었습니다. 밤새도록 손뼉치고 찬송하고, 또 새벽마다 눈물 뿌려 기도하면서 그들은 속 안에 쌓인 분노를 거두어 내었습니다. 한국 기독교에 여자들이 이렇게 많은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요즘 우리가 받는 스트레스도 만만찮은 데 여러분은 그 분노들을 어떻게 처리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과의 씨름에서 승리한 사람은 사람에게 성을 내지 않게 됩니다. 로마서 12장 19, 20절입니다.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네 원수가 주리거든 먹이고 목마르거든 마시우라 그리함으로 네가 숯불을 그 머리에 쌓아 놓으리라” 우리가 사람을 향하여 성내지 않은 것은 온전히 하나님을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다만 기도하며 하나님께 맡겨 드릴 뿐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갚으십니다. 남을 미워하고 분노를 품는 일은 괴로운 일입니다. 놀라운 것은 우리가 미워하는 그 사람에게 우리가 매이게 된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원수 갚는 것을 내게 맡기라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셋째, 분노를 줄이는 대화법

틱낫한이란 수도자가 있습니다. 이분이 『화』란 책을 썼는데 이곳에서 화의 원인중 하나로 우리가 먹는 음식에서 찾고 있습니다. 우리가 먹는 음식들은 모두 화난 음식을 먹습니다. 닭고기가 대표적입니다. 사람들은 닭을 자연 상태에서 기르는 것이 아니라 빨리 살찌게 하기 위해서 좁은 닭장에서 기릅니다. 닭은 마음대로 걸을 수도 없고, 뛸 수도 없고, 흙속에서 먹이를 발견할 수도 없습니다. 그 닭이 느끼는 화와 좌절을 여러분 짐작하시겠습니까? 또 알을 많이 낳게 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낮과 밤을 조절해줍니다. 이 때문에 닭들은 화가 나기 마련이고 부리로 서로를 쪼는 폭력성향이 늘어납니다. 그러면 농부는 또 그 부리를 잘라 버립니다. 이런 분노가 그 몸 구석구석에 들어가 있는 닭을 먹고, 계란을 먹으니 인간 몸속에 그 화가 들어오는 것입니다. 틱낫한 스님은 “우리는 행복한 닭이 나은 행복한 계란을 먹어야 한다.”고 말을 합니다. 그래야 인간의 분노가 줄어든다고 주장합니다.

이 분이 화를 다스리기 위해서 대표적으로 두 가지를 조심하라고 하는데 하나는 먹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말입니다. 먹는 것을 주의해서 먹고 먹을 것을 소량으로 정성스럽게 꼭꼭 씹어 먹으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될 수 있으면 말을 삼가라고 말씀합니다.

저는 우리 분노를 다스리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 바로 이 말이라 생각합니다. 성을 잘 다스리는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혀를 잘 다스려야 합니다. 저는 우리들이 참 말을 잘 못한다고 생각합니다. 자기 감정을 표현하면서도 상대방에게 불쾌하게 하지 않는 대화를 하면 좋은데 그렇지 못합니다. 여러분 대화할 때 크게 두 가지만 조심하면 우리는 평화로운 대화를 할 수 있습니다.

첫째 될 수 있으면 판단하는 말을 하지 않고 사실 그대로만 말하려고 노력하십시오. 우리 말들은 판단의 말들이 너무 많습니다. 약속을 어기는 상대방에 대해서 “그러면 그렇지 또 늦었군”하면 상대방이 화가 납니다. 이 ‘또’ 라는 단어 때문에 상대방은 자기 인격을 모독하고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이번 주에 8 시까지 귀가하기로 했는데 2번 늦었군요”하는 식으로 대화하는 것이 좋습니다. 이러면 상대방은 수긍할 수 있습니다. ‘당신은 이기적이야’, ‘당신은 게을러’, ‘당신 집안은 항상 그 모양이야’ 등의 표현도 좋지 않습니다. 이기적이라고 판단하는 이유가 만약 오늘 아이를 돌보는 일을 전혀 돕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당신 오늘 하루 종일 아이들 돌보는데 저를 도와주지 않는군요?” 하고 말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꾹꾹 참다 갑자기 “당신은 이기적이야!”하고 화를 내니까 상대방은 자기 인격을 모독한 것 같아 감정 싸움이 일어납니다. 사실만 구체적으로 말하며 대화하면 서로 고칠 것은 고칠 수 있는 타협점이 생기는데 이런 ‘이기적’이라는 감정적 판단이 들어가면 대화가 힘들어 집니다.

사람을 규정짓는 말도 대화중 해서는 안 됩니다. 예컨대 “전라도 사람은 이래, 경상도 사람은 저래”, 또는 “당신은 좌파야, 당신은 수구야”하는 말들이 그렇습니다. 이것이 편견을 형성하고 이 말을 듣는 순간 상대방은 화를 내기 마련입니다. 이렇게 판단이 들어간 표현은 대화와 변화의 여지를 차단하고 맙니다. 구체적인 행동 하나하나에 대한 객관적 표현만 한다면 한국사회의 많은 갈등들을 해결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런 정책에 대해서 당신은 이런 태도를 취했다”고 표현해야 그 행동을 수정하거나 타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사용자 편이야”하고 나면 다음부터는 감정싸움으로 갑니다.

두 번째는 자기 느낌을 표현하십시오. 부모나 자식, 부부간에 갈등이 쌓이는 이유 중 하나는 우리가 자신의 감정을 잘 전달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말을 안 듣는 자녀에게 “넌 왜 항상 그 모양이니?”하면 대화가 이루어지지 않고 감정싸움만 일어납니다. 이럴 땐 “오늘 엄마가 이렇게 해달라고 부탁했는데 하지 않았다. 그래서 엄마는 매우 화가 나” 하고 말하는 것이 좋습니다. “날 무시하는 것 같아”라는 말보다는 “당신이 이럴 때 나는 화가 나”, “당신이 우리 집안에 대해서 이렇게 말할 때 나는 당신이 우리 집안을 무시하고 있는 것 같아 섭섭해”하고 분명한 자기 느낌을 표출하는 것입니다. 상대방의 행동에 대한 비난보다는 그 행동에 대한 자기 느낌을 표현하면 상대방도 그 사람의 기분을 알게 되어 조심하게 됩니다.

우리는 자기 느낌에 솔직하지 못합니다. 화가 났을 때는 화난 표정을 하고 화났다고 상대방에게 알려 주는 것이 좋습니다. 슬플 때는 참지 않고 눈물을 흘리며, 또 상대방의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 좋습니다. 우리는 자기 느낌, 자기 요구를 제대로 표현하지 못해서 이것이 감정이 쌓이고 갑자기 한꺼번에 풀려고 하니 분노가 되고 성내는 것이 되고 맙니다.

넷째, 그리스도의 눈으로

우리가 성내지 않기 위해서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무엇보다 우리의 의지를 동원해 분노를 다스리고 참고 조심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사람의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니라”는 야고보서 1장 19, 20절을 묵상하는 것도 좋은 방법입니다. 그러나 이런 훈련과 절제에 앞서 우리는 먼저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이 필요합니다. 율법이나 의지훈련은 오래가지 못합니다. 우리 연약한 의지로는 내 자신을 컨트롤하기가 어렵습니다.

그리스도를 바라본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눈으로 나 자신과 상대방을 바라본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내고 있는 그 사람을 위해 우리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고귀한 피를 흘리셨습니다. 그런 형제에 대해서 분을 품는 것은 하나님을 멸시하고 하나님께 화를 내는 것과 같습니다.

그리스도의 눈으로 바라본다는 것은 우리의 관점의 변화를 말합니다. 모든 재산을 허랑방탕하게 써버린 탕자가 집에 돌아왔을 때 그 탕자를 맞는 두 개의 눈이 있습니다. 하나는 아버지의 눈입니다. 아버지의 눈에는 돌아온 아들이 불쌍해 보이고 살아 돌아온 것만 해도 감사할 지경입니다. 그래서 제일 좋은 옷과 신발을 신기고, 가락지를 손에 끼우고 살진 암송아지를 잡고 잔치를 벌입니다.

그런데 이를 언짢게 바라보는 또 하나의 눈이 있습니다. 바로 그 탕자의 형의 눈입니다. 누가복음 15장 28절에서는 이렇게 전합니다. “저가 노하여 들어가기를 즐겨 아니하거늘” 형이 분노하고 있습니다. 형이 분노한 이유는 동생을 아버지의 눈으로 바라보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동생은 경쟁자일 뿐입니다. 자기 이해 관계의 눈으로 보았을 때 동생은 집안의 물질을 허비한 자요, 도덕의 눈으로 바라보았을 때 동생은 인간 말종에 불과했습니다. 또 아버지가 자기에게는 이런 융숭한 대접을 한 번도 해준 적이 없는데 망나니 동생에게 분에 넘치는 대우를 해주는 것 같아 화가 나는 것입니다.

이런 형을 향해 아버지는 이렇게 말씀합니다.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았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눅15:31-32) 이것이 아버지의 눈입니다. 아버지는 ‘탕자가 잃어버린 것’이 아니라 ‘탕자 자체’에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람이 소중한 것이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기뻐하실 때 기뻐하고 하나님이 슬퍼하실 때 슬퍼하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러할 때만이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합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우리의 눈을 바꿉니다. 전에는 내 경쟁자요, 적대자였습니다. 그러나 십자가에 빛에서 더 이상 그들은 우리의 적이 아니라 내가 사랑해야할 사람이 됩니다. 십자가 위에서 인간들을 내려 보던 예수님의 시선으로 나를 화나게 하는 사람들을 바라보게 됩니다. 그들의 무지 앞에 성내는 분노보다는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함이니이다.”(눅23:24)하는 연민의 마음입니다. 우리 모두가 십자가가 필요한 연약한 사람들입니다. 그 십자가를 통하여 새롭게 탄생한 소중한 한 생명체임을 알 때 우리는 그들에게 성내는 것이 그리 단순한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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