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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벳세다 광야의 삼종(三種)인간 (요 6: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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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이 가시는 곳에는 언제나 많은 인파가 따랐습니다. 오병이어(五餠二魚)의 이적을 행하신 벳새다 광야에도 많은 사람이 모여왔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거기 모인 군중들에게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배불리 먹게 하여 주셨습니다. 그 사람들 중에 어떤 유형의 사람이 가장 예수님의 사역에 합당한 인물인지 생각하며 은혜를 받고자 합니다.

1. 열심 있는 사람입니다.

거기 모인 무리들 중 아무래도 예수님의 제자 그룹이 가장 열심 있고 적극적인 행동을 보인 사람들입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측근이었고 현장에 모인사람들에게 예수님의 뜻을 전하기도 하고 또 한편 그들의 요구를 예수님께 아뢰기도 하였습니다.

1) 예수님을 따르는 자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을 처음 부르실 때 “나를 따라 오너라”고 하였습니다(마 4:19). 또 어떤 제자는 길에서 예수님을 만났을 때 “어디로 가시든지 나는 따르리이다”하고 예수님을 좇았습니다(눅 9:57). 그냥 몸으로만 따르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삶과 행동이 예수님께 얽매인 자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사도”라 부르셨고 그들이 수행하여야 될 사명을 부여하셨습니다(마 10:1-15). 이들은 몸과 마음을 다 예수님께 밀착시키고 그분의 일거수일투족에 따라 행동을 같이 하는 사람들입니다(마 16:24). 오늘날 세상 사람들 중 그리스도인의 삶이 이런 것입니다.

2) 적극적으로 참여하였습니다.

벳새다 광야에서 오병이어의 이적을 베푸실 때 제자들은 그들의 역할을 하였습니다. 마가복음 6:35-36에 “때가 저물어 가매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여짜오되 이 곳은 빈들이요 날도 저물어가니 무리를 보내어 두루 촌과 마을로 가서 무엇을 사 먹게 하옵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무리들을 측은히 여기시는 것처럼 제자들도 모인 사람들에게 관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떡을 나누어 주시기 전에 무리들을 백 명씩 또는 오십 명씩 떼를 지어 앉게 하고 질서 있게 배분하도록 노력하였습니다(막 6:39-40).

3) 능력의 한계가 있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이적의 현장에 있었지만 그들 스스로 이적이나 능력을 행할 수는 없었습니다. 예수님께서 빌립을 불러놓고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고 하셨습니다. 물론 빌립이 어떻게 대답하는지 들어보기 위해서 물은 질문입니다. 이때 빌립은 “각 사람으로 조금씩 받게 할지라도 이백 데나리온의 떡이 부족하리이다”고 대답하였습니다(5-7절).
다른 제자들도 거의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누가복음 9:12-13에 보면 제자들은 날이 저물기 전에 무리를 마을로 내려 보내자고 하였습니다. 그곳은 빈들이기 때문에 갑자기 먹을 것을 구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돕고 싶은 마음은 있어도 저희들의 힘으로는 해결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실토한 말입니다.

2.  구경만 하는 사람입니다.

“굿이나 보고 떡이나 먹는다”는 말처럼 그 앞에서 어떤 일이 벌어지든지 상관하지 않고 구경만 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좋든지 싫든지 아무런 책임감 없이 따라다니는 방관자들인 것입니다.

1) 목적이 다릅니다.

예수님을 따라 나왔다고 다 제자의 길을 가는 사람은 아닙니다. 여기 벳새다 광야에 모인 수많은 사람들은 같은 시대를 살면서 삶의 목적이나 의미를 갖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세례 요한이 광야에 나타났을 때부터 그 앞에 나와서 설교를 듣고 세례도 받고 하였으나 그가 증거 하는 메시야에 대한 비전이 없었습니다. 다만 그들이 기다리는 메시야는 당장 로마의 정권을 뒤엎고 자주와 독립을 가져다줄 정치적인 메시야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이때도 예수님의 소문을 듣고 거기 나와서 이적을 보거나 병을 고치거나 어떤 기적과 요행을 바라고 모여온 사람들이었습니다.

2) 분위기에 따라서 움직입니다.

사람이 아무리 신분이 귀하고 학문이 높다 하더라도 그 마음에 하나님을 모시지 못한 사람은 허망한자요 상실된 마음의 소유자입니다(롬 1:28). 이런 경우 여간 심지가 굳고 확실한 자기 철학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상황에 따라서 이리 저리 요동치는 삶을 살게 됩니다. 곧 군중심리에 따라 삶의 목적과 방향이 흔들리게 되는 것입니다. 벳새다 광야에 모인 사람들의 경우를 보면 예수님께서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축사하여 다 배불리 먹게 하고 열 두 광주리가 남는 것을 보고 감동이 되어 당장 예수님을 임금으로 모시자고 하였습니다(15절). 그러다가 막상 예수님께서 생명의 양식에 대하여 말씀 했을 때 하나 둘씩 다 물러가고 말았습니다(66절).

3) 희생을 거부하는 것입니다.

마가복음 6:38에 “이르시되 너희에게 떡 몇 개나 있는지 가서 보라 하시니 알아보고 이르되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가 있더이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의 분부를 받은 제자들이 군중들 속에서 겨우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찾아내었습니다. 거기 모인 그 많은 사람 중에 가지고 있는 도시락이 그것 뿐만은 아닐 것입니다.
아무리 어려워도 자기 나름대로 먹을 것은 챙겨왔을 것이지만 막상 예수님의 말씀이 주어졌을 때 거기 순종하여 선뜻 대답하고 나서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자기 가진 것은 조금도 희생하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하나같이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이적을 보고 병도 고치고 자기의 소원 성취에 대한 욕망이 있으나 자기가 해야 될 의무나 책임은 외면하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3. 희생하는 사람입니다.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제공한 사람입니다. 예수님의 분부를 받은 제자들이 어찌할 수 없다고 손을 들어 버렸고, 많은 군중들이 외면하고 있을 때 자기가 가진 것을 내어놓은 사람입니다.

1) 이름 없는 어린 아이입니다.

본문말씀 8-9에 “제자 중 하나 곧 시몬 베드로의 형제 안드레가 예수께 여짜오되 여기 한 아이가 있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지고 있나이다”고 하였습니다. 아이가 떡을 가진 것을 알고 그것을 받아낸 제자의 이름은 있어도 그것을 제공한 아이의 이름은 없습니다. 이 아이는 불평 한마디 하지 않고 자기의 양식을 예수님께 드린 것입니다.
복음서의 기자들은 하나같이 이 사건을 기록하면서 정작 떡과 고기를 제공한 아이의 이름은 밝히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처럼 말없이 헌신하는 사람으로 말미암아 아름답게 이루어져 갑니다. 예수님의 머리에 기름을 붓고 눈물로 발을 적시던 여인처럼 그 아름다운 헌신과 미담은 오래도록 기념되지만 그의 이름은 나타나지 않았습니다(눅 7:37).

2) 제게 있는 것 전부를 바쳤습니다.

여기 한 아이에게 있는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는 그날 집에서 나올 때 어머니가 챙겨준 도시락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 당시 사람들의 생활상과 가난한 서민들의 형편을 나타내는 현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때도 부자들은 좋은 음식을 먹고 호화로운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눅 16:19). 그렇지만 가난한 사람들은 하루 세 번의 끼니를 이어가기가 어려운 형편이었습니다. 지금 이 시간 제자들을 통해서 떡과 고기를 예수님께 드리는 이 아이의 경우 제게 있는 것 전부를 말없이 내어 놓았습니다. 자기의 존재를 나타내지 않으면서 또 어떤 조건이나 이유를 달지 아니하고 제게 있는 전부를 주님의 사역에 이바지하는 이 어린이가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표본인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이런 자의 헌신을 기뻐 받으시고 거기에 축복하십니다(눅 21:3-4).

3) 생산적인 헌신을 하였습니다.

성경은 예수님께서 의도하시는 천국 운동을 씨를 뿌리고 가꾸는 농사에 비교하였습니다. 보리떡과 물고기를 제공하는 어린 아이야말로 예수님과 함께 씨를 뿌리는 일을 한 것입니다. 지극히 작은 것으로 심었지만 그 결과는 엄청난 열매로 돌아왔습니다. 겨우 자기 한사람의 배를 채우고 끝날 것이지만 그것이 예수님의 축사에 힘입어 수만 명의 배를 부르게 하고 열 두 광주리나 남을 만큼 기하급수적인 축복으로 나타났습니다. 갈라디아서 6:8에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고 하였습니다.
오늘도 주님께서는 자기의 교회를 통하여 오병이어의 기적 같은 축복을 생산하십니다. 참으로 천국 시민의 표본이 되는 어린아이 같은 사람을 통하여 하나님의 나라가 놀라운 생산력을 과시하게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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