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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어린이주일] 천국의 주인공 (마 10: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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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신문의 컬럼니스트인 <알비게일>의 `부모의 기도문`을 소개합니다.
`오, 하나님! 저를 훌륭한 부모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나의 자녀를 이해할 수 있게 하여 주시고
그들이 말하는 것을 진지하게 들어줄 수 있는 부모가 되게 하여 주시고,   
그들의 질문에 대하여 부드럽게 대답할 수 있는
      인자한 부모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
오늘 본문말씀에
당시 유대인 사회에서 수에도 포함시키지 아니한 어린아이를
    어른들의 영적 스승으로 내세우신 예수님의 이 말씀은
    사람들에게 큰 충격이었을 것입니다.
특히 어린 아이들을 꾸짖는 제자들을 되레 책망하시고
    안고 안수하여 축복하시는 예수님의 행동을 통해
어린이 주일을 맞이한 우리 교회에
주일학교 어린이들을 보는 시각이 달라지는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먼저 오늘 본문말씀의 배경을 살펴보면
1. 본문말씀의 배경을 말해 보세요.
시간적으로는 예수님께서 갈릴리 사역을 마치시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도중에
바리세인들이 예수님을 시험하기 위하여 질문을 합니다.
2절에 [ 사람이 아내를 버리는 것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
      즉 이혼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는 것입니다.
바리세인들은 모세의 율법을 삶의 기준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바리세인들에게
[ 모세가 어떻게 너희에게 명하였느냐? ] 고 물으니
[ 이혼 증서를 써 주어 내어버리기를 허락하였나이다 ] 라고 합니다.
바리새인들의 의도는 그러면 그렇게 하라고 할 줄 알았는데
예수님께서는 5절 이하에서
그건 사람들이 완악하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거지
  하나님이 짝 지어준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야
만약 아내를 내어 버리고 장가들거나
    남편을 내어 버리고 시집을 가면 그것은 간음을 행한 것이야 합니다.
이 말씀의 배경의 본래 의미는 바리새인의 시험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답변 속에서 결혼의 신성함, 즉 가정의 윈리를 말하고 있습니다.
가정의 원리의 핵심이 무엇인가?
부모를 떠나 둘이 한 몸이 되는 것인데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사람이 나누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런 후에 어린아이를 통하여 우리에게 교훈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다음 말씀이 무엇입니까?
부자 청년의 영생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가지 걸림돌이 무엇인가 하면 재물, 즉 돈입니다.
그럼 앞 뒤 말씀을 종합해서 보면
사건의 발단은 각각 다르지만
이 세 가지는 가정의 행복에 있어서 필수적인 조건 세 가지임을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짝 지어주신 가정, 자녀문제, 그리고 경제문제
그런데 당시 사람들은
    가정의 행복의 조건에 대해 다 잘못 인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짝 지어주신 가정 그 누구도 나눌 수 없다는 말은
      이혼해서는 안 된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자녀 문제
    어른들의 부산물이요 걸림돌이 아니라
    축복의 대상이요 상급이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또 물질 문제 - 영생을 얻는데 걸림돌이 아니라
          영생의 상급이 되어야 함을 말합니다.

오늘 가정의 행복의 조건 두 번째 - 자녀 문제
  우리는 어떤 자녀관을 가지고 있는지 점검하는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사람들이 어린 아이들을 예수님 앞으로 데리고 온 목적이 무엇입니까?
2. 사람들이 어린 아이들을 예수님께 데리고 온 목적이 무엇입니까?(13절)
13절 [ 사람들이 예수의 만져주심을 바라고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꾸짖거늘 ]
그러니 부모가 되어 자기 자식은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예수님 앞에 데리고 와 안수 축복기도를 받기를 원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제자들이 꾸짖었다고 합니다.
왜 제자들은 어린 아이들을 데리고 오는 부모들을 꾸짖었을까요?
여러 가지 이유를 생각할 수 있는데 가장 합당한 것은
    어린아이들을 인격적인 존재로 여기지 않은 것입니다.
당시 사람들은 여자와 어린아이를 인격적인 존재로 여기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사람을 셀 때에도
    여자와 어린아이들을 제외하고 성인 남자들 중심으로 세었습니다.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1920년대 우리나라가 일본의 식민지로 있을 때 만해도
      어린이라는 말조차도 존재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어린아이들을 ‘어린 것’ ‘애새끼’라는 말로 불렀습니다.
그런데 당시에 일본 유학생이었던 소파 방정환 선생님이
이를 안타깝게 여기고 존대 말 쓰기 운동을 벌렸습니다.
그래서 그때 처음으로 ‘어린이’라는 말을 사용했는데
그 어린이라는 말은 어린 것의 존대말 ‘어리신 이’ 라는 말입니다.
그때부터 어린이를 하나의 인격적인 존재로 인정하기 시작했습니다.
지금도 중요한 순간에는 ‘애들은 가라’ 그러지 않습니까?
제자들 역시 어린 아이들을 하나의 인격적인 존재로 보지 않았고,
예수님의 사역을 방해하는 귀찮은 존재로만 여겼던 것 같습니다.

제자들이 가만히 보면 종종 이런 꾸지람을 합니다.
마15:21절 - 가나안 여인에게도
막10:46절 - 소경 거지 바디매오에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건 무엇을 말하는가 하면
가난하고 병들고 그리고 어린아이들은
      교회에 별 유익이 없기 때문에 반갑잖다는 말입니다.
이것은 오늘 교회 안에도 그대로 일어나고 있는 현상입니다.
자기 자식은 잘 되고 주님의 축복 받기를 원하면서도
    남의 자식들에 대해서는 별 관심이 없습니다.
그래서 주일학교가 어떻게 운영되든,
    되레 주일학교를 위해 투자하라고 하면 부담스럽고 귀찮게 여깁니다.
많은 사람들이 어린이는 나라의 보배라고 합니다.
    그리고 어린이는 내일의 주인이라고 합니다.
        어린이만큼 미래와 장래를 가진 사람도 없다고 합니다.
그러나 당장 눈 앞에 이익과 현실적인 실리 때문에
    어린아이들에 대해서는 귀찮게 여기는 것이
      오늘 우리가 사는 사회의 모습입니다.

이런 현상은 교회 안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어쩌면 이것이 한국교회 현 주소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허리가 잘록한 병목 현상이 나타나고 있습니다.
결국 병목현상은 한국교회 정체로 나타난 것입니다.
초대 한국의 선교사들은 남달리 어린아이들에 대해 관심을 갖고
    교회는 너희들이 세우고 먼저 학교를 세운 것은 참 잘한 일인 것입니다.
내 자녀뿐만 아니라 어린아이들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교회가 되시기 바랍니다.

이런 제자들의 행동에 대해 예수님은 무어라고 말씀하십니까?
3. 왜?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하나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 니라고 했을까요?(14절)
14절에 [ 예수께서 보시고 분히 여겨 이르시되
      어린아이들의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행동에 단순히 꾸짖으신 정도가 아니라 분히 여기셨습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이 화를 내신 적이 몇 번 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청결을 하실 때 예수님은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인데 너희가 강도의 굴혈을 만들었다”며         
분노하셨습니다.
또 예수님이 안식일에 손 마른 자를 고치셨을 때
  바리새인들이 그것을 보고 어떻게 안식일에 병을 고치느냐며 송사하였을 때   
주님은 그들의 마음의 완악함을 보고 노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 제자들이 아이들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금하였을 때     
분노하셨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제자들에 대하여 탄식하시고 꾸짖으신 적은 있지만
      이렇게 분노하시기는 처음입니다.
이것을 보면 아이들을 대하시는 주님의 마음이 어떤 것인가를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이 자신에게 축복기도를 받기 위해서
      데리고 온 어린 아이들을 괄시하고 쫒아 낼 때에
      너무나 마음이 아팠습니다. 그래서 분을 내셨습니다.
예수님은 자기를 십자가에 못 박고 얼굴을 때리고 침을 뱉은 자들에게도       
화를 내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 아이들이 자기에게 오는 것을 금하셨을 때 분을 내었습니다.
이것을 보면 어린아이들을 대하시는
    예수님의 관심이 어느 정도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래서 [ 어린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 고 하십니다.

어린 아이를 천시하는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아주 정신이 버쩍 들게 하는 말을 하십니다.
[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
  여기서 이런 자는 바로 어린 아이를 말합니다.
즉 천국의 주인공은 바로 어린아이라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아이와 연관시켜 말씀하셨을까요? 
그것은 어린이의 천성적인 의존성과 겸손함입니다.
어린 아이의 특징은 전적으로 부모를 의지합니다.
  전적으로 부모를 신뢰합니다.
여기에 사용된 어린아이라는 말을
    <파이디온>이라는 단어를 사용하였습니다.
    ‘파이디온(παιδιον, paidion)은 대략 7세까지의 어린이들을 말합니다.
그런데 똑 같은 기사의 누가복음에서 누가는
    브레포스(βρεφος, brephos)라는 단어를 사용합니다.
    브레포스는 신생아, 즉 1∼2세의 갓난아기를 말합니다.
누가가 <파이디온>이란 말을 사용하지 않고 <갓난아기>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바로 이런 자의 것이라는 것을 더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어린 아이들을 보세요.
적어도 부모가 내 부모인지 의심하는 어린아이는 없습니다.
어린아이는 무슨 일만 생겨도 가장 먼저 부모를 찾습니다.
아무리 좋은 장난감을 주어도 엄마가 없으면 칭얼대며 울어댑니다.
어린아이는 전적으로 부모를 의지합니다.
아무리 모든 것을 다 가졌어도
    어린아이는 부모가 없으면 행복하지 않습니다. 불안합니다.
특히 갓난아기는 연약하기에 한 순간도 엄마를 떨어져서는 살 수 없습니다.
엄마 없이는 걸을 수도 없습니다. 먹을 수도 없습니다.
        대소변의 문제도 해결할 수 없습니다.
    갓난아기는 전적으로 부모를 의존할 수밖에 없습니다.
  갓난아기에게는 내놓을만한 어떤 자랑도 업적도 공로도 없습니다.
있다면 그 존재의 이유만으로 부모에게 기쁨을 선물하는 것 밖에 없습니다.
  선행과 공로와 업적을 통해서 부모를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존재의 이유만으로 부모를 기쁘게 해 드리는 자가 바로 갓난아이입니다.
특히 어린아이는 겸손합니다.
겸손하다는 말은 전적으로 부모를 신뢰하고 의지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의지하는 자가 천국의 주인공인 줄 믿습니다.
눅10:21절에 보면
[ 이때에 예수께서 성령으로 기뻐하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
‘지혜롭고 슬기로운 사람들’은
자기의 지혜와 능력 때문에 하나님을 믿지 않는 세상 사람들을 가리키고,
‘어린아이들’은
하나님을 신뢰하고 그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여 나아갔던 제자들을 가리킵니다.
어린아이 같은 순전함과 겸손함으로 천국의 주인공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어린아이들에 대한 잘못된 인식을 하고 있는 제자들에게
    또 한 가지 중요한 교훈을 하십니다.
4. 하나님 나라를 어린아이와 같이 받든다는 말이 무슨 뜻일까요?(15절)
15절 [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
하나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든다는 것은
      아이들은 굉장히 단순합니다.
어린 아이같이 단순한 신앙이 되어야만 천국을 받들 수 있습니다.
    천국을 받든다는 말은 하나님을 섬기고 교회를 섬긴다는 말입니다.
사실 힘은 단순함에 있습니다.
  단순하게 믿는 사람들이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합니다.
어린 아기가 단순하듯이 진정한 믿음은 단순합니다. 
엄마 아빠 앞에서 재롱을 떨 때의 모습을 보십시오. 얼마나 단순합니까?
그런데 조금 나이가 들어가면 다른 사람을 의식하기 시작합니다.
    나중에는 돈을 준다고 해도 재롱을 피우지 않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는 어린아이와 같은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부모의 품안에 있는 어린 아이가 염려하는 것을 본 적이 있습니까? 
부모의 품안에 안겨 있는 어린아이는 결코 염려하지 않습니다.
왜 그럴까요? 부모를 믿고 신뢰하기 때문입니다.

방정환의 수필 <어린이 예찬> 가운데 나오는 내용입니다.
마른 잔디에 새 풀이 나고, 나뭇가지에 새 움이 돋는다고,
    제일 먼저 기뻐 날뛰는 이도 어린이다.
봄이 왔다고 종달새와 함께 노래하는 이도 어린이고,
꽃이 피었다고 나비와 함께 춤을 추는 이도 어린이다.

별을 보고 좋아하고, 달을 보고 노래하는 이도 어린이요,
눈 온다고 기뻐 날뛰는 이도 어린이다.
산을 좋아하고 바다를 사랑하고, 큰 자연의 모든 것을 골고루 좋아하고,
진정으로 친애하는 이가 어린이요,
태양과 함께 춤추며 사는 이가 어린이다.

그들에게는 모든 것이 기쁨이요, 모든 것이 사랑이요,
  또 모든 것이 친한 동무다.
자비와 평등과 박애와 환희와 행복과 이 세상 모든 아름다운 것만
    한없이 많이 가지고 사는 이가 어린이다.
어린이의 살림, 그것 그대로가 하늘의 뜻이다.
          우리에게 주는 하늘의 계시다.
어린이의 살림에 친근할 수 있는 사람,
어린이 살림을 자주 들여다볼 수 있는 사람은 그 만큼 행복을 얻을 것이다.
어린 아이들을 통해 은혜 받는 어른 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가까이 오는 어린 아이들을 꾸짖는 제자들을 책망하신 예수님은
    어린 아이들을 어떻게 대했는가? 를 살펴보면
5. 예수님의 어린아이에 대한 자세가 우리에게 교훈하는 바가 무엇이겠습니까?(16절)
16절 [ 그 어린 아이를 안고 저희 위에 안수하시고 축복하시니라 ]
제자들은 아이들을 꾸짖었지마는
      예수님은 그 반대로 안고 안수하시고 축복했다고 했습니다.
나는 어떤 부모고 교사입니까?
맨날 잔소리 하고 남들과 비교하여 책망만 하는 부모인가
    안고 기도하고 머리에 손 얹고 축복하는 부모입니까?
     
1) 먼저 자녀를 안는 교사가 되고 부모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물론 어릴 때는 다 앉아 주지만
      조금만 크면 앉는다는 것이 쑥스러워집니다.
왜냐하면 내가 그렇게 안겨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앉아주는 부모가 되시기 바랍니다.

아버지와 손잡고 가는 길이란 글이 있습니다. 
어떤 군인에게 아들이 있었는데 ,아들의 행동이 망나니 같았습니다.
하루는 아버지가 아들에게 말합니다.
“내가 그 동안 너의 행동을 참고 보아왔지만 이제 더 이상은 안되겠다.
  내가 너를 산에 데려가 크게 혼을 내야겠다”
아버지는 아들의 손을 잡고 산 속 깊은 곳으로 들어갑니다.
그런데 산길이 하도 험하니까 아들이 말합니다.
“아버지. 좀 쉬었다 가요.” “이 놈아 쉬기는 뭘 쉬어.”
아들은 계속 쉬어가자고 사정합니다. 그래서 잠시 쉬는데 아들이 말합니다.
“아빠하고 등산하니까 참 좋네요.”
“이 녀석아. 조금 더 가면 크게 혼날건데 좋긴 뭐가 좋아.”
“아빠랑 등산하는 것이 처음이에요.
혼나러 가는 길이지만 이렇게 좋을 수 없네요.”
곰곰 생각해보니 아들과 등산 한번 간 적이 없었습니다.
그는 그만 마음이 풀려서 그 자리에서 눈물을 흘리고 아들과 산을 내려왔습니다.
아버지와 손잡고 가는 길은 항상 감사하고 행복합니다.

2) 자녀에게 안수하는 부모가 되시기 바랍니다.
  자녀를 위해 기도하고 특히 안수기도 하는 부모가 되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 번 마음에 꼭 세기고 실천하는 부모들 되시기 바랍니다.
앉고 기도하고 머리에 손 얹고 기도하고 품에 잘 때 품고 기도하고
    축복하는 부모들 되시기 바랍니다.
참조사항 - 어린 아이가 아플 때
        주의 종에게 기도 받도록 하라 - 신앙을 배우게 된다.
             
3) 자녀에게 축복하는 부모가 되시기 바랍니다.
절대 자녀에게 부정적이고 불신앙적인 말을 삼가시기 바랍니다.
여론 조사에서 자녀들이 가장 싫어하는 말 8 가지
1. 나가버려!  2. 다시 한번 그런 짓하면 그냥 안둔다.
3. 너의 형은 안그러는데 너는 왜 그래
4. 답답해 죽겠다.  5. 엄마는 화내고 싶어서 화내는 줄 아니!
6. 너는 정말 어쩔 수 없다. 
7. 너는 도대체 누굴 닮아 그렇게 머리가 나쁘니!
8. 너는 몰라도 돼!
우리의 자녀들에게 신앙의 부모로서 이제 부정의 말에서
긍정의 말 축복의 말을 할 수 있는 믿음의 부모들 되시기 바랍니다.

진정한 축복은 말이 아니라 모습 속에서 축복의 유산을 물려주는 것입니다.
미국의 <불랙 우드>라는 고명하신 신학자가 계시는데
[ 좋은 부모란 자식에게 유산을 잘 물려줄 줄 아는 부모다 ] 라고 합니다.
그러면서 하는 말이
[ 재산은 자녀들에게 복이 될지 화가 될지 지내봐야 알지만
      돈 없는 사람도 자녀에게 물려줄 귀한 유산이 있다 ]
그 귀한 유산은 3가지인데
1) 좋은 기억의 부모의 모습을 물려져야 한다.
러시아의 문호 토스토엡스키는
[ 좋은 기억, 특히 어렸을 때 가정생활에 있어서 좋은 기억처럼
        장래에 감화를 주는 것은 없다 ] 고 했습니다.
반대로 나쁜 기억 쓴 기억들은 장래에 자녀들의 성격을 삐뚤게 만드는
요인이 된다는 것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 내 마음 속에 울고 있는 내가 있어요 >라는 내적치유에 관한 책 있지요.
그기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53세된 여집사님 이야기인데 항상 가정생활에서 남편에게나 자식에게
      불평과 화를 내며 살아왔습니다. 
그 화가 얼마나 심했던지
  딸이 말을 듣지 아니하면 부엌칼을 갖다 들이대면서 죽인다고 했다 합니다.
그런데 어느 날 상담자와 만나 이야기 하는 가운데
그런 행동을 누구한테서 배웠느냐? 고 묻는데 자신도 모르게
[ 엄마요 우리 엄마요 ] 하며서 통곡이 터져 나왔습니다.
어릴 때 자기가 말을 듣지 아니하면 엄마가 칼을 들이되고
    [ 너 죽고 나 죽자 ] 는 말을 하곤 했는데
    자기가 그렇게 싫어했던 행동을 아이들에게 그대로 하고 있더랍니다.
그런 자신을 발견하고는 주님 앞에 엎드려
  그날 이후로 마음에서 칼을 버리기로 결단을 내리고 보니
  그렇게 마음에 평안이 넘치더라는 것입니다.
극단적인 이야기 같이 들릴지 모르지마는
좋지 못한 기억들은 자녀의 평생을 빗나가게 한다는 것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마음에 칼을 버리고 화평을 품으시기 바랍니다.
2) 좋은 신앙의 습관을 물려져야 한다.
자녀 교육의 전문가 미국의 <뮬러 목사>는
부모의 신앙생활이 자녀에게 미치는 영향을 조사하여 통계를 내었는데
어릴 때 교회에 다녀 성인이 되기까지
    부모가 신앙생활을 경건하게 하는 가정의 자녀들은 72%
    어머니만 신앙생활 하는 자정의 자녀들은 15%
    부모가 교회에 출석하지 않는 가정의 자녀들은 6% 가
어른이 되어서도 교회를 떠나지 않더라는 것입니다.
그만큼 부모의 신앙의 영향력이 크다는 말인데
<뮬러> 목사는 결론적으로
자녀에게 주는 신앙의 영향력은 주일학교 교사나 목사보다
      대부분의 영향력이 부모의 신앙의 영향력이라고 합니다.
특히 부모의 신앙의 영향력은 말이 아니라 신앙의 습관이라고 합니다.

3) 고귀한 생의 목표를 물려져야 한다 고 합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 백성으로서
  우리가 누릴 복이 있고 우리가 감당해야할 사명이 있습니다.
부모가 교회에서 사명에 헌신되어져 살아가는 모습
    우리의 자녀들은 가슴에 간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자녀들에게 큰 힘이 됩니다.
고상한 생의 목표를 물려줄 수 있는 신앙의 부모가 되시기 바랍니다.
나는 지금 자녀들에게 무엇을 남겨두고 갈 계획입니까?
제산 못 불려줘도 좋은 신앙의 습관과
    생의 고상한 목표를 물려줄 수 있는 부모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나의 생의 고상한 목표가 무엇입니까?
    교회 기둥되고 남을 위해 유익된 삶을 사는 것
따담풍 부모가 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 따담풍 이야기 아시죠.
좋은 신앙의 부모 밑에 좋은 신앙의 자녀 나옴을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김성덕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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