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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고난을 즐거워하라! (벧전 4:12~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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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드로전서 4장 12절~14절
제  목 : 고난을 즐거워하라!

1. 반갑지 않은 손님

계절의 여왕이라는 5월이 되었습니다. 이 5월에 여러분들에게 좋은 일들이 많이 생기시기 바랍니다. 자, 그렇다면 여러분에게 어떤 일이 생기면 여러분들이 즐거워질까요? 뜻하지 않은 돈이 생긴다면…? 최근에 친 아이들의 중간고사 성적이 기대한 것보다 좋다면…? 직장에서 승진한다면…? 시골에 묵혀두었던 땅 값이 오른다면…? 몸이 좋지 않아 큰 걱정을 하면서 병원에 갔더니 별 일이 아니라고 한다면…? 이러한 일들은 다 좋은 경우들이지요. 그리고 상상만 해도 즐거운 일들입니다.

그런데 만약 여러분이 정말 거절하고 싶고 여러분을 피해가기를 바랐던 일, 예를 들면, 고난이나 여러 가지 힘든 일이 온다면 여러분은 어쩔 것 같습니까? 그야말로 반갑지 않은 손님인 고난이나 시련이 여러분을 찾아오면, 그때도 여러분은 즐거워할 수 있을까요? 거기다가 그러한 고난에 대해 성경이 “기뻐하라”, “즐거워하라”고 한다면 여러분은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2. 베드로전서 당시 성도들의 고난과 그 이후

오늘 본문은 고난 가운데 있는 성도들을 향한 말씀입니다. 베드로전서가 기록될 당시, 성도들은 엄청난 박해를 받고 있었습니다. 주후 64년 10월, 로마 황제 네로 치하에서 무서운 박해가 시작되었습니다. 이 박해는 로마에서 가장 극심했습니다. 어느 정도였는가 하면, 네로는 그리스도인들을 산 채로 불을 태워 자기 정원을 밝히거나 장식을 했습니다. 이 일이 있기 전, 그해 7월, 네로는 로마에 불을 지른 뒤 그것을 즐기면서 시를 읊었다고 합니다. 정신병적인 그의 일면을 볼 수 있는 모습이지요. 그런데 그 로마 대 화제 이후, 몇 개월이 지나자, 로마 시민들의 여론이 네로에게 불리하게 형성되어가고 있었습니다. 사람들의 입에서 ‘이 화재의 주범이 황제일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기 시작했던 것이죠. 그러자 네로는 자신에게 불리한 여론을 다른 데로 돌리기 위해 당시 로마인들이 부정적으로 대하고 있었던 기독교인들에게 그 탓을 돌렸습니다. 그래서 네로는 ‘로마 시내를 불지른 것은 기독교인들 짓’이라고 하면서 기독교인들을 박해하기 시작했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불 시험"은 이러한 사건과 연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로마에서 시작된 이 박해는 제국 전역으로 퍼져나가면서 점차 박해의 정도는 심해지고 있었습니다.

지금 베드로의 편지를 받고 있는 교회들은 주로 소아시아의 북부 지방에 흩어져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지방에 살고 있던 그리스인들 역시 신앙 때문에 멸시와 핍박을 받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핍박은 앞으로 불어닥칠 박해에 비하면 그야말로 서곡에 지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지금까지는 비교적 소규모의 지엽적인 핍박이 있었으나, 앞으로 조직적이면서 큰 규모의 환란이 예고되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베드로는 이 서신을 써서 성도에게 오는 고난의 의미에 대해 말하면서 성도들을 위로하고, 또 곧 닥칠 큰 시련에 대해 마음의 준비를 하도록 권했습니다.

따라서 오늘 본문은 신앙 때문에 흩어져 소아시아 북부 지방에서 살고 있었고, 거기서도 여전히 박해를 받고 있던 성도들에게 위로와 소망의 메시지를 전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베드로의 편지, 즉 베드로를 통한 우리 주님의 말씀은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일까요?

3. 고난을 이상하게 여기지 말라!

먼저 베드로는 지금 고난 가운데 있으며 앞으로 더 큰 시련을 겪게 될 성도들을 “사랑하는 자들아”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자녀를 위하여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릴 수 있는 어버이의 마음으로, 양들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목숨까지도 기꺼이 희생할 수 있는 목자의 마음으로 이 편지를 적고 있음을 표현한 것입니다.

이러한 심정으로, 현재 고난 가운데 있으며, 곧 더 엄청난 시련을 만날 성도들을 향해서 말하는 첫 번째 말씀은 12절에 있는 대로 “시련을 이상히 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12절에는 “이상한 일”이라는 말과 “이상히”라는 말이 반복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은 그 의미가 아주 의미심장합니다. 이 말은 “낯선 사람”이라는 단어에서 온 말인데요. 고대 사회에서, 그리고 당시 베드로전서를 받던 북부 아시아처럼 벽지이고 사람들이 서로 떨어져 살던 시대에 낯선 사람이 등장하는 것은 일단 적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을 피하거나, 경계하거나, 심지어 싸우기까지 했습니다.

이러한 “낯선 사람”에 대한 공포증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인 것 같습니다. 얼마 전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라는 영화가 있었는데요. 그 영화의 주인공 역을 맡았던 ‘앤 헤서웨이’는 낯선 사람에 대한 공포증에 시달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녀의 증상은 낯선 사람이 자신의 물건을 만지는 것을 아주 싫어했고, 호텔에 가면 고객들의 가방을 날라주는 벨보이들이 있지 않습니까? 그녀는 그들이 자신의 가방을 열어 속옷을 뒤졌다고 생각하고 흥분을 할 정도라고 합니다. 그리고 <위기의 주부들>이라는 드라마의 ‘테리 해처’도 다른 사람으로부터 세균이 옮겨 질까봐 두려워 사람들 곁으로, 특히 땀에 젖은 다른 사람들 곁에는 가지 않는다고 합니다. 일찌기 철학자 사르트르는 “낯선 사람은 지옥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만큼 낯설고 피하고 싶다는 뜻이겠지요. 이렇게 생전 처음 만나는 낯선 사람을 피하고 싶어하는 것은 어느 정도 이해가 갑니다. 그러니 낯선 사람보다 더 낯설고 상대하기 힘든 고난이나 시련을 피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합니다. ‘대인공포증’은 그나마 이해가 간다지만, ‘고난과 시련 공포증’은 지극히 당연하다는 말이죠.

그런데 오늘 본문은 이와는 정반대의 말씀을 하고 있습니다. 오늘 본문은 바로 그 “낯선 사람, 혹 적”이라는 단어를 그대로 사용하면서, ‘낯선 사람처럼, 적처럼 여기지 말라’고 합니다. 즉 고난이나 시련이나 어떤 힘들고 어려운 상황을 만났을 때, 성도는 그것을 자신을 해하려는 적이나 파괴자로 보지 말라는 것입니다. 도리어 절친한 이웃이나 친구나 가족으로 여기라고 오늘 본문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왜 시련을 낯설고, 싫고, 또 적처럼 여기지 말아야 합니까? 그 이유는 이 시련이 성도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 시험”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시련”이라는 말은 ‘과학적이고 의학적인 실험’이라는 뜻입니다. 그리고 “불 시험”이라는 말은 어떤 물건의 불순물을 제거하여 깨끗하게 하는 작업을 의미합니다. 즉 성도에게 오는 시험은 성도를 괴롭히고, 그가 가진 것을 잃게 하거나 망하게 하고, 실패하게 만들려고, 불행하게 하려고 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도의 신앙과 인격과 삶과 그 가정과 하는 일을 더욱 순수하고, 그리고 건강하게 만들려고 오는 것이기 때문에 이상하게 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궁극적으로 성도에게 더 큰 유익과 복을 주려고 오는 것이니 친구나 가족처럼 반겨 맞으라는 것입니다.

앤드류 머레이의 <나를 허물고 주님을 세우는 삶>이라는 책에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나옵니다. 남아프리카에서 오지로 장거리 여행을 떠난 남편을 둔 아내가 있었습니다. 남편은 우체국도 없는 곳에 가서 몇 달을 머물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아내는 크고 잔인한 아프리카 원주민 한 사람이 자기 집을 향해 오고 있는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는 얼굴이 사납게 생겼고 손에는 창과 방패도 들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의 손에는 뭔가를 싼 신문지도 있었습니다. 그녀는 깜짝 놀라서 집안으로 달려가 문을 걸어 잠궜습니다. 그러나 원주민은 그녀의 집으로 와서 문을 쾅쾅 두드리면서 열어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는 자신의 남편이 보낸 사람으로서 남편의 소식을 전달하기 위하여 한 달을 걸어서 온 사람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들고 있었던 신문지 속에는 남편의 편지가 들어 있었습니다. 그녀는 남편의 편지를 받고서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그리고 다시 몇 주가 지났습니다. 그녀는 이제 그 흉하게 생긴 심부름꾼을 손꼽아 기다리게 되었습니다! 그는 사랑하는 남편으로부터 오는 심부름꾼이기 때문이었지요.

여러분은 고난과 시련이, 비록 사납고 험악한 인상을 가졌고 손에는 창을 들었을지라도, 예수님이 여러분에게 보낸 심부름꾼이라는 것을 믿으시겠습니까?

영국에서 신앙의 자유가 제한되었던 때의 일입니다. 나라의 허락을 받지 않고 설교했다는 이유로 감옥에 갇힌 한 젊은이가 있었습니다. 무려 12년 동안 감옥 생활을 하던 중 사랑하는 아내가 죽었습니다. 구걸하다시피 하면서 비참하게 살던 아내가 죽자, 그의 세 자녀는 고아가 되고 말았습니다. 이런 비참한 상황 속에서 그는 하나님께 다음과 같은 기도를 드렸습니다."하나님, 너무 너무 고통스럽습니다. 아직도 제게 주님을 위해서 할 일이 남았습니까? 만약 제가 해야 할 일이 남아있고, 그 일을 볼 수만 있다면 저는 절망하지 않겠습니다."이때 주님은 그의 마음속에 다음과 같은 감동을 주셨습니다."글을 써라. 나는 너에게 글 쓰는 탤런트를 주었단다."그리고 주님 앞에 엎드려 기도하던 그에게 하나의 환상이 보였습니다. 천국을 향해 걸어가는 한 사람의 환상이었습니다. 그는 천국을 향해 가는 그 사람의 이야기를 글로 쓰서 책으로 만들었습니다. 그 책이 바로 [천로역정]입니다. 그리고 감옥에 갇혔던 그 사람은 존 번연이었습니다. 그는 고난 때문에 자신의 글쓰는 재주를 발견했고, 그리고 고난으로 인하여 전 세계 기독교인들에게 성경 다음으로 많이 읽힌 [천로역정]을 지을 수 있었습니다.

성도 여러분, 고난과 시련을 이상히 여기기보다는 반겨맞으라는 말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고난을 이상히 여기지 말라”는 이 말씀은 여러분이 순종해야할 주님의 말씀입니다. 지금의 고난에 감사하십시오. 그리고 장차 여러분에게 지금보다 더한 고난이 닥친다고 해도 그것을 절친한 친구처럼 맞이하는 여러분이 되시기 바랍니다.

4. 고난을 즐거워하라!

두 번째로 오늘 본문 13절은 현재 고난 가운데 있으며, 곧 더 엄청난 시련을 맞을 성도들을 향하여 “즐거워하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13절에는 “즐거워하라”와 관련된 세 가지 단어가 나옵니다. “즐거워하라”, “즐거워하고”, “기뻐하게 하려 함이라.”

제가 자주 드리는 말씀이지만, 성경을 원어로 공부하다보면 정말 놀라운 것들이 많습니다. 첫 번째 나오는 “즐거워하라”는 말은 문법적으로 ‘현재 능동태 명령형’인데요. 이것은 단순히 “즐거워해!”라고 명령하는 말만은 아닙니다. 이 말은 고대 사회에서 “안녕하십니까?”와 같은 인사말이었습니다. 재미있지 않습니까? 성도가 자신에게 다가 오는 고난을 향해 “안녕하세요? 어서 오세요!”라고 인사하듯 반겨 맞으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뒤에 한 번 더 반복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기뻐하게 하려함이라”는 말은 더더욱 재미있습니다. 이 말은 ‘영화롭게 하다’와 ‘날뛰다’라는 말이 합쳐진 것입니다. 그러니까 고난과 시련을 맞은 성도가 그 고난을 ‘아주 존중해 주고’, ‘너무나 기쁘고 좋아서 날뛰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이것이 이해가 되십니까? 고난과 시련을 향해 반갑게 인사하라는 말이나, 그것을 존중하고 그 앞에서 좋아라며 기뻐 날 뛸 수 있겠습니까?

이에 대해서 오늘 본문 13절은 이렇게 말하고 있습니다. 성도가 고난과 시련을 기뻐 날 뛸 정도로 즐거워해야 하는 이유는 그것으로 성도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말은 “참예하다”입니다. “참예하다”라는 말은 여러분이 잘 아시는 ‘코이노니아’라는 단어입니다. 코이노니아는 제가 일전에 신약성경의 축도문인 고린도후서 13장 13절 말씀을 설교하면서 한 번 설명을 해 드렸는데, 기억이 나시는지요? 사실 이 “코이노니아”에 대한 정확한 우리말이 없습니다. 이 말은 혈연관계는 아니지만, 혈연으로 맺어져서 서로 떨어질 수 없으며, 한 공동의 운명체로 살아야 하는 사람들의 사이, 혹 그런 관계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유치하지만 가장 비슷한 설명은 ‘조직폭력단체’ 사람들이 서로 피를 나누어 마셔 형제가 된 후에 만약 헤어지려면 피를 보든지 죽든지 해야 한다고 여기는 것과 같습니다. 따라서 이러한 “참여하다”, 혹 “코이노니아”라는 말의 의미대로 한다면, 성도가 그리스도의 고난에 참예한다는 말은 성도가 당하는 고난과 시련을 통해서 비로소 그리스도와 진정으로 한 운명체, 참 한 몸이 된다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고난과 시련이 주는 최고의 복은 그것으로 주님과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고난을 통해 비로소 주님을 더 깊이 알 수 있으며, 주님을 더 깊이 만날 수 있습니다. “주님, 주님의 고난이 이런 것이었습니까? 이렇게 힘드셨습니까?” 주님도 고난과 시련을 당하는 성도를 향해 “네가 이제야 나와 나의 고난을 이해하겠니?”하시면서 더 가까이 하실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렇다면, 저는 고난을 즐거워하고 기뻐하겠습니다. 제게 오는 고난을 존중하고, 그 고난으로 인하여 기뻐 춤추겠습니다. 그로 인해 주님과 제가 더욱 하나가 된다는데요, 어찌 그리 않을 수 있습니까!

어느 여자 분이 너무나 많은 괴로움을 겪은 후, ‘하나님이 참으로 나를 사랑하시는가, 혹시 나를 잊어버리신 것은 아닐까’ 하는 의문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포도원 옆을 지나가게 되었는데요. 포도밭은 늦 여름의 햇볕을 받아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포도나무마다 많은 잎이 있었지만, 열매는 하나도 없었습니다. 그때 하늘의 포도원 농부가 그녀에게 속삭이며 말했습니다.
“너는 너 자신이 당하고 있는 여러 가지 괴로움과 문제로 고통 받고 있느냐? 기억하여라! 내 딸아, 포도원 주인이 경작을 멈추고, 가지치기와 손질을 그만두는 것은 그가 포도원을 포기했기 때문이란다. 그가 포도나무로부터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을 때 그렇게 한단다. 너는 내가 너와 네 인생에 대한 가지치기를 그만두기를 원하느냐? 너는 내가 너의 인생에서 잎사귀 외에는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기를 원하느냐? 만일 그렇다면, 나는 경작을 그만두고, 가지치기를 그만두겠다.” 이 말을 들은 그녀는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뜨거운 눈물을 닦으면서 위를 올려다보았습니다. 그녀는 이해할 수 있었습니다.
“내 인생의 포도원 농부이신 하나님, 알겠습니다. 이젠 알겠습니다. 나를 써레질하시고 경작해 주세요! 제게 필요 없는 가지, 열매 맺지 못하는 가지를 잘라주세요. 주님이 제 인생에 허락한 시련들로 인해 더욱 풍성한 열매 맺는 그리스도인이 되기 원합니다. 오, 주여! 이러한 슬픔과 고통을 통하여 나의 삶에서 더 많은 열매를 거둘 수 있게 된다면 부디 나의 삶을 경작하여 주옵소서!”

이 이야기는 <위대한 항해사는 거친 바다에서 만들어집니다> 라는 책을 지은 캐트린 쿨만 여사의 말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제 여러분은 고난과 시련이 주님을 더 깊이 알고, 그 주님과 하나가 되는 가장 빠르고 효과적인 방법이라는 것을 아셨습니까? 그렇다면 그 고난을 존중하고 기뻐하시기 바랍니다.

5. 고난은 항상 우리에게로 온다!

영국의 어느 왕이 도자기 공장을 방문했습니다. 그가 가는 길목에 2개의 꽃병이 놓여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중 하나는 너무나도 아름다운 빛과 윤기를 내고 있었고, 생동감이 넘쳤으며, 예술품으로서 그 자태가 출중해 보였습니다. 그런데 또 다른 도자기는 우선 외모가 볼품이 없을 뿐 아니라 빛깔조차도 흐릿하고 가치가 없어보였습니다. 그래서 왕은 안내자에게 물었습니다.
“이 도자기는 이렇게 윤기가 나는데 저 도자기는 왜 저렇게 볼품이 없는가?” 그 물음에 안내자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이 윤기 나는 도자기는 불에 구워졌기 때문에 윤기가 나고 저 도자기는 아직 불에 들어가지 않았기 때문에 윤기가 나질 않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은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를 시련하려고 오는 불시험을 이상히 여기지 말라”고 합니다. 여기서 “오는” 이라는 말은 ‘늘, 그리고 항상 온다’는 뜻입니다. 고난과 시련에는 졸업이 없습니다. 성도의 삶에는 고난과 시련이 늘 있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고난과 시련에 또 한 가지 중요한 원칙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고난이나 시련이 성도를 더 아름답고 윤기나게 만드는 불시험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뜻으로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두 가지 법칙을 말했습니다.

첫째는 “고난을 이상히 여기지 말라”는 것입니다. 고난과 시련을 낯선 것으로 여겨 피하지 말고 도리어 친구나 가족처럼 여길 때에 여러분을 고난을 통한 주님의 축복을 맛볼 수 있을 것입니다.

둘째로 “고난을 즐거워하라”는 것입니다. 고난과 시련이 올 때 성도는 그것을 존중하고 기뻐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고난과 함께 주님이 여러분을 찾으시며, 그 고난으로 여러분이 주님을 만나며 주님과 하나가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고난을 낯선 사람이나 나그네로 보지 마시고, 친근히 여겨 환영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고난을 기뻐함으로 고난을 통한 주님의 놀라운 축복을 경험하는 여러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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