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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용서하는 마음 (골 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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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서하는 마음 (골 3:13)

(본 설교문은 맥스 루케이도 목사님의 책 “예수님처럼”에 나오는 내용으로 한 설교입니다. 내용이 은혜스러워 이곳에 올립니다)

나의 첫 애완 동물은 어릴 적 크리스마스 이브 선물로 받은 것입니다. 아버지 손안에 쏙 들어갈 만큼 작고 여덟 살 내 마음을 훔칠 만큼 귀엽던 그 갈색과 흰색이 섞인  중국산 퍼그의 사진이 지금도 어딘가에 있다. 우리는 이 개에게 리즈라는 이름을 붙여주었습니다.

나는 하루종일  리즈을 안고 다녔다. 퍼덕이는 귀가 신기만 했고 납작한 코가 볼수록 예뼜다. 자도 같이 잤습니다. 개 냄새가 나면? 그 냄새가 귀여웠다. 낑낑대고 킁킁 거리면? 그 소리가 귀여웠습니다.  내 베게에 볼일을 보면 ? 그것까지 귀엽다고 할 수야 없겠지만 나는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엄마 아빠는 리즈를 돌보는 책임이 나에게 있음을 처음부터 분명히 했고 나는 기꺼이 응했습니다. 나는 리즈의 작은 밥그릇을 씻고 개음식  깡통도 땄습니다. 물을 다 핥아 먹으면 즉각 다시 부어 놓았습니다. 머리도 빗어 주었고 꼬리도 쉴 새없이 흔들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며칠 못가 내 기분이 약간 달라졌습니다. 리즈는 여전히 내 개였고 나는 여전히 리즈의 친구였으나 이제 그 짖는 소리가 지겨웠습니다. 거기다. 리즈는 갈수록 배만 고픈것 같았습니다. 식구들한테 말 듣는 일이 잦아졌다. “ 리즈 좀 잘 봐 네 개잖아”

네 개- 나는 그 말이 듣기 싫었습니다. “같이 놀때만 네 개‘라든지 ” 네가 원할 때 만 네 개“ 라든지 ”말 잘 들을 때만 네 개’라면 싫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부모님이 사용한 말은 그런 것들이 아니었습니다. 엄마 아빠 말은 ‘리즈는 네 개야“ 였습니다. 그걸로 끝이었습니다.
병들때나 건강할때나 부유할때나  가난할때나 진자리나 마른자리나

그때 퍼뜩 든 생각이 있었습니다. 나는 리즈한테 꼼짝없이 매였구나  리즈와의 연애는 끝났고 신혼여행도 끝났습니다. 리즈와 나는 서로 묶여 있었습니다. 이제 리즈는 선택의 대상에서 의무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애완동물에서 귀찮은 일로 변했습니다. 놀이 상대에서 간호상대로 바뀌었습니다

당신도 생각나는 바가 있을 것입니다. 헌신에 뒤따르는 밀실 공포증을 당신도 알고 있을 것입니다. 다만 “ 리즈는 네 개잖아” 대신 듣는 말이 달라 질 뿐입니다. “ 그 사람은 네 남편이야 ” 네 아내야“ 네 자식 부모 직원 상사 룸메이트야” 그 밖에도 생존에 충성이 필요한 관계라면 다 마찬가지입니다.

그 영속성이 사람을 겁에 질리게 할 수 있습니다 적어도 나는 그랬습니다. 몇 가지 심각한 질문이 내 답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납작한 코에 털북숭이에 배까지 고픈 이 똑같은 얼굴을 나는 아침마다. 참아낼 수 있을까? (아내들은 이 기분을 알리라) 나만 보면 짖어대는 저 소리를 죽는 날까지 듣고 살 것인가?(고개를 끄덕이는 아이들) 리즈한테 과연 제가 본 일을 제 힘으로 청소할 날이 올까? (부모들의 “아멘” 소리가 들린다.)

누군가에게 꼼짝없이 매였다고 느껴질 때 우리에게 드는 의문들입니다. 이 증상을 일컫는 단어가 있습니다. 한 단어 의학 사전에 따르면 이 증상은 매임병(stukititis)이라고 하는 아주 흔한 질병이다. (stuck이란 꼼짝없이 갇혔다는 뜻이요 ititis 란 거창한 병명처럼 보이고 싶을때 아무 단어에나 붙이는 말이다.
의학용어집에는 이 증상을 이렇게 풀이하고 있다.
매임병은 숨쉬고 있는 사람들에게만 발병하는 것으로 특히  출생과 죽음 사이에 찾아온다. 매임병의 증세는 짜증이 늘고 화를 잘 내며 속에 쌓이는 것이 많아진다. 매임병 환자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증상은 누구, 무슨 왜 따위가 들어가는 질문을 반복하는 것이다. 이 사람이 누구지? 내가 그때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왜 어머니 말을 듣지 않았을까?

이 저명한 용어집은 매임병의 처방을 세 가지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첫째 도망가는 것입니다.  둘째 싸우는 것입니다 셋째  용서하는 것입니다.
첫 번째 방법 도망가는 길을  택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현 관계에서 벗어나 딴 데  가서 다시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관계에서도 똑같은 증상이 재발하여 놀라는 경우가 많습니다. 두 번째 방법 싸우는 이들도 있습니다, 가정은 전쟁터가 되고 사무실은 복싱 링이 되고 긴장은 생활 방식이 됩니다. 그러나 또 하나의 처방 용서를 찾는 이들도 더러 있습니다. 내  용어집에는 용서의 방식은 나와 있지 않지만 성경이 말해주고 있습니다.

예수님도 누군가에게 꼼작없이 매이는 기분을 아셨습니다. 3년간  그분은 똑같은 무리와 함께 다니셨습니다. 식탁에서도 모닥불 곁에서도 하루 온종일 대체로 여남은 명 넘는 얼굴을 맞대고 사셨다. 이들은 똑같은 배를 타고 똑같은  길을 걸어 똑같은 집을 찾아갔다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들을 어떻게 그렇게 끝까지 헌신적인 태도롤 대하신 것일까? 그분은  눈에 보이는 꼴불견만 참으신 것이 아니라 그들의 보이지 않는 결점까지 견디셔야 했습니다. 그분은 그들의 말하지 않는 생각까지 들으실 수 있었습니다. 내면의 의심도 아셨습니다. 그뿐 아니라 앞으로  품을 의심까지도 아셨습니다. 당신이 사랑하는 이들의 과거의 모든 실수와 앞으로 저지를 모든 실수를 미리 안다면 어떻게 될까? 그들이 당신에 대해 품을 모든 생각, 모든 짜증, 모든 혐오 모든 배반을 미리 안다면?

예수님은 힘드셨을까? 베드로가 어느날 자신을 저주할 것을 알면서도 그를 사랑하기가?  도마가 어느 날 자신의 부활을 의심할 것을 알면서도 그를 믿어주기가? 제자들은 딴 사람들로 새로 뽑고 싶은 충동을 예수님은 어떻게 억제하셨을까? 요한은 원수에게 불을 내리려 했다. 베드로는 원수의 귀를 잘랐다. 예수님이 죽으시기 바로 며칠 전에도 제자들은 누가 제일 잘났냐며 싸우고 있었습니다. 좀처럼 호감이 가지 않는 사람들을 그분은 어떻게 사랑하실 수 있었을까?
꼼짝없이 매인 관계보다 더 절망스러운 상황도 없을 것입니다. 강아지의 매이는 것은 그래도 낫습니다. 부부관계로 매이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매임병 같은 엉뚱한 용어에 웃음이 나올지 몰라도, 많은 사람들에게 이것은 웃을 일이 아닙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처럼 된다는 것의 의미를 알려면 우선 용서하는 마음부터 살펴보는 것이 좋을 듯 싶습니다. 예수님은 어떻게 제자들을 사랑하실 수 있을까? 요한복음 13장에서 해답을 찾을 수 있습니다.

예수께서 무릎을 꿇으시는 모든 장면들 가운데 제자들 앞에 꿇어앉아 그 발을 씻기시는 모습보다 더 숭고한 것은 없습니다. 유월절 만찬 바로 전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셨다.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신 그분은 그 사랑의 마지막 한방울 까지 다 쏟아부어 주셨습니다.

마귀가 벌써 시몬의 아들 갸룟 유다의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니 저녁 먹는 중  예수는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자기 손에 맡기신 것과  또 자기가. 하나님께로부터 오셨다가 하나님께로 돌아가실 것을 아시고 저녁 잡수시던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 제자들의 발을 씻기시고  그 두르신 수건으로 씻기기를 시작하여.(1-5절)

긴 하루였습니다. 예루살렘은 유월절  손님들로 북적댑니다. 그 중 다수가 잠깐 비친 나귀 탄 랍비의 모습에 환호성을 친다. 봄볕은 따사롭고 거리는 물기 하나 없습니다. 제자들은 고향을 떠나 먼 길을 왔습니다. 시원한 물 한 바가지면 숨을 좀 돌리련만..... 제자들은 하나하나 들어와  식탁에 둘러 앉습니다. 벽에는 수건이 걸려 있고 바닥에는 대야와  바가지가 놓여있습니다. 제자들 중 아무나 나설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아무도 나서지 않습니다.

  얼마 후 예수님이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으신다. 종의 수건을 가져다 허리에 두르고 대야를 들고  가 한 제자 앞에  무릎을 꿇으신다. 샌들 끈을 풀고 발을 살짝 들여 대야에 담은 뒤 물을 붓고 씻기 시작하신다. 때묻은 발을 하나씩 하나씩, 예수님은 한 사람 한 사람 차례대로 씻겨나가신다.

  예수님 당시 발을 씻기는 것은  그냥 종이 아니라 종 중에서도 가장 낮은 종이 하는 일이었다. 모든 집단에는 서열이 있었고 집안의 종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수건과 대야를 들고 꿇어 앉는 일은 서열이 제일 낮은 종의 몫이었다.
이 경우는  수건과 대야를 드신 분이 우주의 왕이다. 별들을 빚으신 그 손이 지금 때를 씻어내고 있다.  산들을  만드신 손가락이 지금 발가락을 문지르고 있다. 어느 날 온 열방이 그 앞에 무릎 꿇을 그분이 지금 제자들 앞에 무릎 꿇고 있다. 죽음을 몇 시간 앞두고 그분의 관심은 단 한가지이다.
자기가 제자들을 얼마나 사랑하시는지 그들이 알기 원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그들의 때만을 씻기신 것이 아니라  그들의 의심을 벗겨내고 있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자신의 손이 어떻게 될지 알고 계셨다. 24시간이 못되어 그 손은  십자가에 못박혀 생명을 잃을 것이다. 예수님이 제자들의 주목을 요구하실 만한 시점이 있었다면 지금이야말로 바로 그때일 것이다. 그러나 그룹은 그러시지 않았다.

예수님은 지금 자신이 씻기고 있는 이 발들의 미래를 분명 알고 계셨습니다. 이 스물 네개의 발은 이튿날 주님을 따라가 주님 편에 서는데 사용되지 않을 것입니다. 로마의 번쩍이는  검 앞에 숨을 곳을 찾아 줄행랑칠 발들입니다. 그중 한 사람의 발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그분을 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유다의 발은 거기까지도  미치지 못할 것입니다. 그 날 밤 그 자리에서 예수님을 버릴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에서 “예수께서 유다의 말만 빼고 모든 제자의 발을 씻기셨다“고 번역된 성경을 찾아보았습니까? 아마  찾을 수 없었것입니다. 자신을 배반할  자의 발을 들어 대야에 담아  말없이 씻기신 예수님, 얼마나 진한 사랑의 순간인가! 몇 시간 후 유다의 발- 자기가 배반할 분이 사랑으로 씻어주신-은 가야바의 법정에 서 있을 것이다.

예수께서 자기를 따르는 일들에게 주시는 선물을 보십시요! 그분은 잠시 후 이 사람들이 할 일을 알고 있다. 평생에 가장 비열한 짓을 행할 것을 알고 있다. 아침이면 이들은 수치심과 자괴감에 얼굴을 묻고 고개를 들지 못할 것입니다. 그때 발이 눈에 들어올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때 그들이 기억하고 깨닫기 원하셨습니다. 예수님이 무릎꿇고 그 발을 씻어주셨던 것을 그 발이 아직 깨끗하다는 것을.

“ 나의 하는 것을 네가 이제는 알지 못하나 이후에는 알리라” (요 13:7)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그분은 제자들이  죄를 짓기도 전에 용서하셨습니다. 구하기 전에 자비를 베푸셨습니다.
여러분에게 어떤 사람을 용서해주라고 하면 여러분은 어떻게 말씀하시겠습니까? “아, 나는 절대 못해 ” 당신은 이의를 표한다. “ 상처가 너무 깊어 그 사람을 보기만 해도 몸서리가 쳐져”

여러분은 문제는 바로 이것인지도 모릅니다. 여러분은 딴 사람을 보고 있거나 적어도 딴 사람을 너무 많이 보고 있습니다. 예수님 처럼 된다는 것의 비밀은 예수를 “바라보는”데 있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여러분의 시선을 여러분에게 상처입힌 사람에게서 떼어 여러분을 구원하신 분에게 두십시요 .
  요한의 약속을 보십시오
“ 저가 빛가운데 계신 것 같이 우리도 빛 가운데 행하면 우리가 서로 사귐이 있고 그 아들 예수의 피가 우리를 모든 죄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요일 1:7)

지리와 연대만 빼고는 우리의 사연도 제자들의 사연과 똑같습니다. 우리는 예루살렘에 없었고 그날 밤 살아있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에게 해 주신 일을 예수님은 우리에게도 해주셨습니다. 그분은 우리를 깨끗게 하셨습니다. 우리 마음의 죄를 씻어주셨습니다.  그뿐 아니라 그분은 지금도 우리를 씻어주고 계십니다.  요한은 우리의 모든 죄가 예수의 피로 씻겨지고 있다“고 말합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언제나 씻겨짐을 받고 있습니다. 씻겨짐은 미래의 약속이 아니라 현재의 실상입니다. 성도의 영혼에 흙먼지가  묻습니다.. 씻겨집니다. 하나님의 자녀의 마음에 오물이 떨어진다.  씻겨집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제자들의 발을 씻고 계신다.  예수님은 지금도 성도들을 씻어주신다. 예수님은 지금도 그 백성을 깨끗게 하십니다.

예수님은 끊임없이 우리 삶의 가장 어두운 행위들을 들여다 보십니다. 그러나 놀라 뒷걸음치는 것이 아니라 자비의 손을 내밀며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 너만 좋다면 내가 씻어주마” 그리고는 그 은혜의 대아에서 자비를 한 웅큼 떠올려 우리 죄를 씻으신다“

그러나 그분의 일은 그게 다가 아닙니다.  그분이 우리 안에 살아계시기에 당신과 나도  똑같이 할 수 있습니다. 그분이 우리를 용서하셨기에 우리도 다른 사람들을 용서할 수 있습니다. 그분이 용서하는 마음을 지니셨기에 우리도 용서하는 마음을  지닐 수 있습니다.  우리도 그분의 마음을 품을 수 있습니다.

  “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는 것이 옳으니라.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 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니”(요 13:14-15)

예수님은  두 가지 이유로 우리의 발을 씻어주십니다. 첫째는 우리에게  자비를 베푸시려는 것이고  둘째는 우리에게 메시지를 주시려는 것입니다. 그 메시지는 단순합니다. 예수께서 무조건적인 은혜를 베푸셨으니 우리도 무조건적인  은혜를 베풀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잘못보다 그리스도의 자비가 선행된 것 처럼 우리의 자비는 다른 사람의 잘못보다 선행돼야 합니다. 그리스도 주변에 있던 사람치고 그분의 사랑을 의심한 사람은 없습니다. 우리 주변 사람들도 우리의 사랑에  의심이 없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품는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예수님이 꿇어 앉으신 것 처럼 우리도 꿇어앉아 꼼작없이 매인 사람들의 더러운 부분을 만져주고 사랑없는 그들을 사랑으로 씻어주는 것입니다. 바울을 이렇게 썼습니다.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엡 4;13)

“하지만  나는 잘못이 없어 속인 건 내가 아니야  거짓말한 건 내가 아니야 잘못한쪽은 내가 아니란 말이야” 당신은  말할 것입니다. 과연 당신 잘못이 아닐 수 있다. 그러나 예수님도 잘못이 없었습니다. 그 방에 있던 모든  이들 중 다른 사람으로부터  발씻김을 받을 자겨이 있는 분은 예수님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분이 발을 씻으셨습니다. 마땅히 섬김 받아야 할 분이 오히려 다른 이들을 섬기셨습니다. 예수님의  모본의 진수는  화해의  가교를 잇는 짐이 약자의 몫이 아니라  강자의 몫이라는 것이다.

잘못 없는 사람이 손내미는 자입니다다 그러면 어떻게 될까? 옳은 쪽에서 먼저 나서 잘못된 쪽의 발을 씻기면 십중팔구 양쪽 다 무릎을 꿇을 수 밖에 없다. 우리는 다 자기가 옳다고 생각하지 않은가? 그러므로 피차 발을 씻기게 되는 것입니다. 반드시 알아야 한다. 관계가 성공하는 죄있는 쪽이 벌을 받아서가 아니라 죄 없는 쪽에서 베푸는 긍휼 때문이다.

최근 친구들과 식사를 함께 한 일이 있습니다. 한 부부가 자기들이 겪고 있던 폭풍의 사연을 털어놓았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아내는 10년도 더 된 남편의 외도 행각을 알게 되었습니다. 남편은 아내에게  말하지 않는 것이 좋을 줄로 잘못 생각하여 비밀로 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밝혀졌다. 말할 것도 없이 아내는 깊은 상처를 받았습니다. 상담자의 조언을 받아 이들은 만사를 제쳐두고 며칠 단 둘이 여행을 떠났습니다. 결정을 내려야 했습니다. 도망갈 것인가? 싸울 것인가? 용서할 것인가? 그래서  이들은 기도했습니다. 얘기했습니다. 걸었습니다 생각했습니다.. 이거야말로 아내가 분명히 옳은 경우였습니다. 아내는  남편을 떠날 수도 있었습니다. 그보다 덜한 이유로도 많은 여자들이 그렇게 해왔습니다.

아니면 그냥  부부로 남아 남편의 삶을 생지옥으로 만들 수도 있었습니다. 그렇게 하는 여자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 아내는 다른 반응을 택했습니다. 여행 열흘째 되던 날, 남편은 자신의 베개위에 놓여 있는 카드 한 장을 보았다 카드에는 이런 문구가 인쇄돼 있었다. “당신 없이 무엇을 하기보다는 당신과 함께 아무것도 하지 않으리” 그리고 그 문구 밑에 아내의 이런 말이 적혀 있었다.
"당신을 용서해요 당신을 사랑해요 계속 함께 걸어요"

카드는 대야였고 펜은  물을 담는 바가지였다. 거기서 순결한 자비가 흘러나왔다 그 자비로 아내는 남편의 발을 씻었다. 어떤 등은 이렇게 대야의  물로만  풀 수 있다. 여러분의 삶 속에 당신이 자비를  목말라 하는 관계가 있습니까? 여러분의 식탁에  둘러 앉은 이들 중에 여러분의 은혜의 확신이 필요한 사람이 있습니까?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의 사랑이 조금도 의심가지 않게 해주셨습니다. 여러분도 그렇게 하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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